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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귀향>



  황녀의 사저.


  딱! 따악!


  목각인형을 때리는 목검의 경쾌한 소리가 마당을 울린다.


  셰인의 일상이다. 황궁의 기사들에게 교습받고 검술서를 탐독하며 검사들의 검로를 따라 목각인형을 상대로 끊임없이 훈련하는 것.


  3시간째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셰인의 얼굴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었다.


"힘들지 않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황녀가 물었다.


  황녀는 셰인이 훈련을 할 때면 보통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지켜보기만 한다.


  가끔 정교한 인형을 사들여 집에서 관찰한다는 변태 귀족들이 있다던데, 황녀의 시선은 무릇 그런 귀족들이 자신의 인형을 관찰하는 듯하면서도 흥미 가득한 기운이 넘치는 것이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고 있었다.


  헌데 이번에는 침묵을 깨고 셰인에게 물어온 것이다.


"힘들지 않습니다. 황녀님을 지키기 위해서니까요."


"소름돋아. 그런 말 하지 마라."


"하지만 정말인 걸요."


  질색하는 황녀에게 셰인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단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녀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르구나."


"예."


"대답 한 번 심심하구나. 할 말은 없느냐?"


"바람이 선선해서 수련하기에 좋군요."


"…역시 넌 재미없는 놈이다. 내가 주워온 놈이지만."


  황녀는 이례적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가끔은 저 하늘이 부러우면서 그립구나."


"어째서입니까."


"우리나라 국교인 세레느 교단의 교리를 아느냐."


  처억. 황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사실 우린 모두 별의 자식이라고 하더구나."


"별의 자식이오?"


"그래. 저 하늘에 박혀 가끔씩 우리를 비추는 자그마한 별들이 우리들의 부모라더구나."


"그럴 수도 있겠지요."


  셰인은 목각인형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그리 대답했다.


"제겐 황녀님만이 중요합니다."


"허. 정말 질리는 대답이구나. 주인으로서 마음에 들긴 한다만."


"분에 넘치는 칭찬 감사드립니다."


  황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내가 주웠지만 정말 이상한 녀석이야."


"황녀님께서 그러셨잖습니까. 황녀님께 알맞게 비틀려달라고."


"…그랬지."


  후우우, 하고 황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외로웠다. 지금도 가끔 그렇지만 너를 만나기 전의 나는 실로 수많은 목숨의 위협을 비롯해 살얼음 같은 삶을 살았지."


"…….."


"누구도 믿을 수가 없더구나. 내가 아기일 때부터 나를 돌보아주던 시종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죽이려고 들었고, 신뢰하던 기사는 한밤 중 나의 침대에 칼을 꽂았다. 물론 그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칼에 꽂힌 건 다행히 내 배가 아닌 솜털로 가득찬 베개였지만."


  황녀는 이제 걸터앉아 있던 평상에 완연히 누워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숨겼다. 대륙에서 제일 가는 나라의 황가는 내게 복마전과 같았다. 난 나를 드러내기 무서웠다. 내 어머니께선 나를 낳다 돌아가셨고, 어미 없는 서녀에게 힘을 써줄 믿음직한 외척도 없었다. 나는 나 홀로 서 있어야만 했지."


"…실로 힘든 시간이셨겠습니다."


"후훗, 네가 웬일이더냐, 그런 인간적인 반응을 해주다니."


  쿡쿡 웃으며 황녀가 말했다.


"믿을 만한 건 물건이었다. 사람은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올 수 있지만 내가 수집한 내 물건들은 그렇지 않았지. 나도 안다. 내가 물건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걸. 어렴풋해서 정확하게 생각나진 않지만, 아마 어머니께서 내게 남겨주신 이 로켓부터 '내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던 것 같구나."


  찰칵.


  황녀의 로켓이 열렸다.


  그 안에는 아기와 아기를 안고 있는 귀부인의 초상화가 작게 오려져 들어 있었다.


"어머니. 내가 보지도 못한 나를 낳으신 나의 어머니. 이제 그 분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고 여기에 잔상만이 남아 가끔 이렇게 눈으로 훑고 손으로 훑으며, 한 번도 뵙지 못한 그 분의 얼굴을 머릿속으로만 상상해볼 뿐."


"……."


"보이느냐?"


  황녀가 몸을 일으켜 상의를 들었다.


"황녀님, 옥체를 함부로 드러내시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셰인은 상의를 들춘 황녀의 속살을 보고 그만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오래 전에 너를 씻겨 주던 때도 있었는데. 기억에 이젠 희미하더냐?"


  그곳엔 무수한 흉터가 있었다.


  찔린 흉터, 베인 흉터, 지진 흉터.


  도무지 황가의 귀녀로서 자란 여자가 지니고 있을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몇 년 전쯤에 너를 씻기기 전에 있던 흉터도 있고, 너를 씻기고 난 뒤에 생긴 흉터도 있다. 네가 지금처럼 나를 지켜줄 만큼 강하지 못하던 시절의 난 여전히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니까."


"…송구합니다."


"네가 왜 송구하더냐. 난 능력 부족을 책망치 않는다.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을 때 책망할 뿐."


  황녀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나는 나를 숨겼다. 가면을 썼지. '황가의 미치광이'. 적당한 별명을 골랐고, 그걸 실현시키기 위해 연기를 했다. 내 물건을 건드린 시녀 한 명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방법으로 죽여버렸다. 그래야만 감히 시녀들이 날 죽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시종들이 날 범할 생각을 하지 못하며, 아랫것들이 내게 칼을 들이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가면이 얼굴에 붙어 떨어지질 않더구나."


  황녀는 계속 웃고 있었으나 어딘가 허무했다.


"진짜 미쳐버리고 만 거지. 너를 만나기 전의 내가 그랬다. 불과 12살짜리 소녀가 말이다. 형용할 수 없이 뒤틀려버리고 말았다."


"……."


  이제 황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내게 원하신 건 이게 아니었을 텐데…."


  셰인도 검을 놓았다.


  셰인은 조심스레 베로니카의 옆으로 다가간 뒤,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베로니카 황녀님의 어머니께서도 하늘에서 황녀님을 지켜보실 테니까요."


"…거짓말."


  파악!


  울먹거리며 황녀가 셰인을 때렸다.


"거짓말! 거짓말! 어머니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면, 어째서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고만 계신 거란 말이더냐! 어째서!"


  퍼억! 팍!


"나도, 나도 사실은 그 시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내겐 그 시녀를 죽일 권리도 있었고 명분도 있었지. 하지만 죽이고 싶지 않았어. 죽기 위해 끌려가는 순결한 시녀의 얼굴…. 죽고 싶지 않아 하는 그녀의 눈망울을 마주치고 나는 의연한 척 했다. 그리고 그녀가 찢겨 죽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어!"


"……."


"크, 크후후. 찢겨나간 시녀의 얼굴에서 나를 쏘아보는 그 눈동자가 나를 파고들더구나. 나는 그 시녀를 찢어죽인 이후로 더 이상 시녀나 시종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진 않았다. 내 선택이 틀리진 않았다는 거지."


  주르륵.


"…흐윽, 하지만, 하지만 그 시녀는 무슨 잘못이 있었던 거지? 그저 하잘것 없는 물건 따위에 손 한 번 갖다 대었던 것뿐, 그저 그뿐이었는데…."


  죄책감을 머금고 물방울이 베로니카의 뺨을 가로질렀다.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어머니, 얼굴도 뵙지 못한 나의 어머니, 죄송합니다…."


  횡설수설하면서도 베로니카의 눈에선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먼지 쌓인 평상의 위를 물방울 자국이 적셨다.


  셰인은 그런 그녀를 있는 힘껏 품 안에 안아 들고선, 베로니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기만 했다.


  베로니카는 엉엉 울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설움을 지금의 눈물에 모두 담아 흘려보낼 것처럼 펑펑.


  셰인은 꼭 안아주는 것으로 그 울음에 답했다.


  십수 분 간 울음소리가 황녀의 사저를 울렸다.


"…못난 꼴을 보였구나. 이만 놓아다오."


  흐끕거리며 눈물을 억지로 주워 삼키고.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친 베로니카가 셰인의 품을 밀었다.


  베로니카를 놓아주면서 셰인은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황녀님. 감정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이자 인간이기에 가지는 인간의 당연한 본능입니다."


"…훈계하지 말거라. 나도 알고 있다."


"아니오, 황녀님은 모르십니다."


"무어라?"


  셰인은 황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도 땀에 절은 상의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곳엔 황녀보다도 많은 흉터들이 셰인의 몸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감정이 죽은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정이 죽었던 시절의 저도 황녀님처럼 몸이 성한 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사정없이 몽둥이로 후려맞는가 하면 양아치들의 깨진 술병 조각이 몸을 후벼댈 때면 차가운 유리 조각을 몸 속에서 어떻게 감지하는지 저는 매일매일 경험할 수 있었지요."


"안다. 네 삶이 나 못지 않게, 아니, 나보다도 더 험난했을 수도 있는 삶을 살아왔단 걸."


"제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닙니다."


  셰인이 말했다.


"저 역시도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황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며.


"하지만 저는 제가 황녀님을 만나게 된 것에 제 어머니에게 감사합니다. 분명 어머니께서 황녀님을 만나게 될 제 인연을 이끌어 주셨다고 생각하니까요."


"…네 어미와 내 선택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너를 보고 변덕 치레로 줍고 싶었던 게 전부일 뿐이다."


"아니오. 그게 아닙니다."


  셰인은 장갑을 벗었다.


  그 밑에 숨겨진 것은 기하학적 문양과 여러 상징들이 조합된, 황녀와 셰인의 '주종의 계약'의 낙인이었다.


"저는 황녀님에 알맞게 비틀렸지요. 저의 영혼마저도. 그러나 황녀님 본인은 아니고, 그렇기에 알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가끔 퍼즐 조각의 튀어나온 부분을, 퍼즐 조각 본인은 알 수 없을 수도 있지요. 그것과 아귀가 들어맞는 오목히 들어간 퍼즐 조각이기에, 자신의 옆에 있는 퍼즐 조각이 튀어나온 걸 알려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셰인은 황녀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황녀님의 어머니께서도 베로니카 황녀님께 저와의 인연을 이어주려 하셨던 게 아닐까요."


"……."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희 둘의 어머니께서,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아무도 사랑을 주지 않던 우리들에게 직접 인연을 내려주신 거라고 말입니다."


"…스스로를 고평가하는 것 같구나."


"하지만 이런 제가 아니면 세상의 그 어떤 누구가 황녀님께 이런 말씀을 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셰인은 옆을 돌아보며 황녀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가 별의 자식들이라 하셨지요?"


"그래."


"그럼 저희들의 어머니들께선 귀향하신 걸로 하지요."


"귀향?"


"네, 귀향."


  셰인은 하늘을 손으로 휘저었다.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뭔가가 잡힐 것처럼 아스라이.


"저 하늘의 태양이 세상을 밝히는 동안에 우리들의 부모 되시는 별들께선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죠. 그건 저희가 태양이라는 등대를 보고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


"네. 저희들의 삶의 길. 낮에 태양이 세상을 비출 때면, 명확한 목표를 갖고 우리는 씩씩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셰인의 손이 동그란 모양을 짓더니,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밤이 되고 태양이 지면 우리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앞길도 캄캄해서, 길조차도 알 수 없이 맹인처럼 헤매기만 하는 거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밤 같은 순간도 많겠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앞길도 모르겠는 진퇴양난의 상황."


  파앙.


  둥그렇게 모인 셰인의 손이 활짝 펴졌다.


"그 때 우리들의 부모이신 별들이 우리를 비춰줍니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가 우리인 걸 잊지 않도록 태양보다 약하지만 우리의 눈에 닿을 정도로 빛을 뿜어 우리를 어루만져 주는 겁니다."


"어루만진다…."


"네. 마치 우리의 어머니들께서 우리에게 그러셨을 것처럼요."


  황녀가 말했다.


"나 같은 살인자에게도 어머니께서 빛을 비춰주실까?"


"모두에겐 모두의 별이 있겠지요. 황녀님의 어머니께선 언제까지나 황녀님의 편일 거고요."


"내게 죽은 그 시녀는…, 나를 용서해 줄까?"


"그건 모릅니다. 어쩌면 용서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그것은 이미 죽은 자의 권리이고, 세레느 교단의 교리에 따르면 저 멀리 있는 우리들의 모든 부모께 귀향한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지식일지도 모릅니다."


  셰인이 말했다.


"제가 그 어떤 위로되는 말을 해드려도 그건 기만이고 속죄가 아닙니다. 이미 죽어버린 시녀의 마음은 더 이상 위로할 길이 없겠죠. 그러니 평생 속죄하고 사는 겁니다."


"평생?"


"네. 다시 별들의 품으로 돌아가 시녀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직접 용서를 구할 수 있도록, 평생토록 연습을 해두는 것이라고 해둘까요."


"그렇게 하면 시녀가 나를 용서해줄까?"


"모릅니다. 가봐야 아는 거지요. 하지만 제가 황녀님을 만나게 되고 나서 알게 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해보지 않곤 모른다고요. 어쩌면 지독한 자기 위로일 수도 있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살아있는 자로서 용서를 비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을 텐데요."


"…나는 시녀 말고도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압니다. 절 폭행한 껄렁패들을 죽이려 황도의 뒷골목을 청소하셨다더군요."


"그들도 날 용서해줄까?"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들에게도 마음 속 깊이 사죄를 빈다면 모를까. 하하, 하지만 그 자식들 하는 짓을 생각해보면 그 놈들도 사람 여럿 죽이고 다닌 주제에 반성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으니, 마음 속으로 용서를 비는 것만으로도 아마 그 자식들보다는 훨씬 인격적으로 나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프흣."


  황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십니까, 황녀님?"


"…네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걸 처음 봐서."


"저는 황녀님의 물건입니다. 주인 되시는 분을 위로해드리는 것도 물건으로서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아느니라. 안다, 알아."


  황녀가 몸을 일으켰다.


  쭉 기지개를 켜며 황녀가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미리 그들에게 사과하는 연습을 해야겠구나."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속죄를 하시려면 여간 힘드신 게 아니시겠습니다."


"후훗, 그것도 그러려나."


  셰인도 몸을 일으켰다.


  하늘은 아주 파랬다.


"하늘은 참으로 부럽다. 세상 모든 것을 자신만의 색채로 물들여버릴 수 있으니…. 황궁이란 색채에 압도되어 질식할 것만 같은 내겐 참으로 부럽기만 하구나."


  셰인이 말했다.


"그럼 저와 황녀님은 서로 황궁이란 색채에서, 조금 이단아가 되어볼까요."


"이단아?"


"제가 겪어본 바론 황궁은 결코 가벼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황녀님의 말씀도 이해가 가더군요. 수만 명의 목숨을 짓밟고 세워진 제국의 가장 정점인 권력들이 다투는 곳. 그곳의 광기는 감히 개인이 저항하기론 엄두도 낼 수 없겠지요."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미소로, 싱긋 웃으면서.


"그러나 두 명이선 조금은 다르겠지요."


"조금?"


"예, 조금. 그 거대한 소용돌이에 저항하는 건 무리겠지만, 어쩌면 거대한 바다에 붉은색 흉터 한 줄은 남길 정도로 이단아가 되어보는 건 영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아서요. 그러니 우린 저 이성과 광기로 물든 황궁이란 바다에 감정이라는 우리만의 색채로, 다신 아물 수 없는 우리만의 흉터를 남겨보도록 하지요."


  셰인이 베로니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때까지 이 셰인은 얼마든지 황녀님의 검이자 방패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프흣. 프하하하하…."


  베로니카도 웃으며 셰인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어디 우리 한 번 황궁의 이단아가 되어보도록 하자꾸나. 저 멀리 별들과 우리의 어머니들께로 귀향하기 전까지."


"예. 이 셰인이 제 한 몸 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후후훗, 그래, 그래."


  어두운 밤일 때면 하늘을 보도록 하자.


  우리의 어머니들께서 빛을 비춰주고 계실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잠시만 가면을 벗고.


  이 얼굴로 세상의 공기를 만끽하며.


  가면을 벗은 두 눈으로, 너와 정연하게 눈을 마주쳐 볼게.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이런 인연을 제게 선물해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