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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천장에 달린 조명 끝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녀의 머리 위에 얹어진 순백의 티아라, 먼지 하나 허락하지 않을 칠흑 빛 드레스, 외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치마자락 아래로 뻗어져 나오는 다리가 눈부시다. 내 팔짱을 끼고 어깻죽지에 닿을 듯한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천천히 보폭을 맞춘다.

오늘은 지팡이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것 또한 그녀의 요구였다. 그녀는 아무래도 나의 팔을 붙잡고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듯 했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영광이지만 이전의 선례를 통해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내게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로지 침묵만이 내게 허락되었음을 다시금 상기한다.

오늘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 군요, 황녀님.

어머, 그런가요?

예,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고 계십니다.

굳이 뒷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기묘하게도 내가 수습기사로 황궁에 입궁했던 시기부터 그녀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단 한발짝도 나간 적 없는 온실 속의 꽃인 그녀가 변두리 시골 마음에서 올라온 나를 아는 것이 미심쩍기는 하지만 앞으로 모셔야 하는 고귀하신 황녀님께 의심을 품는 것은 수행기사로서 옳지 못한 일이다. 황궁에 들어온 나는 가장 먼저 침묵하는 법을 배웠고, 욕설과 비난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

헤레타 제국의 빛나는 한 송이 꽃, 고귀하신 황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목소리를 증폭시켜주는 마도구를 통해 그녀의 등장을 알린다. 호화롭게 꾸며진 연회장에서 수군거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와 곁에 있는 내게 시선이 쏟아진다.

저 분이…”

옆에 있는 기사는 분명…”

…”

욕을 얻어먹는 것은 익숙하다. 애초에 황녀에게 호위기사라고 존재하는 이가 다리 하나 없는 병신이라면 누구나 불평을 내 뱉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나는 지금 서 있는 내 위치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한다.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기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황제폐하께 서류를 올리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분명 접수되었던 사직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고생했다며 퇴직금을 내려주라 명하셨던 황제께서는 다음날 잔뜩 굳은 표정으로 결정을 번복하시니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내 옆에 붙어 있는 그녀마저 밥을 안 먹는다는 고집이나 아프다는 핑계로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우연과 우연, 사건과 사건이 겹쳐 오도가도 못하게 된 나는 결국 황녀의 고집이라는 명목으로 이름 뿐인 호위기사를 맡고 있다.

의족이 불편한가요?

생각에 잠겨 멈칫거리고 있었던가 그녀가 내 팔을 살짝 잡아 당기며 그늘진 표정으로 낮게 속삭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내 귀를 가져간다. 황녀님은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대화를 위해서는 항상 어느 정도의 스킨십이 필요했다. 평소라면 무례한 행위라고 제지하려 하던 시녀장도 곁에서 황녀를 수행하는 시녀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의아스럽지만 지금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케이란 경, 최근에 의족 점검을 받지 않았지요?

예, 황녀님. 송구스럽지만 일정이 바빠 차마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분명, 의족 점검은 결코 빼놓지 말라고 명하지 않았던가요?

목소리가 점차 낮아지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빛을 잃어간다. 평소 온화하고 상냥한 성정으로 평가가 높은 황녀님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굳센 성질도 지니고 계신다.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댄다. 이것으로 화가 난 그녀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추태를 보이진 않을 것이다.

부디 용서를, 존귀하신 황녀님. 이 연회가 끝나면 필시 주치의를 불러 점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니 이렇게 좋은 날 노여움을 푸시어 모처럼의 나들이를 즐겨 주시옵소서.

“…경이 그렇게 이야기 한다면, 이번은 특별히 넘어가 드리지요. 허나 반드시 황실 마도의원을 불러 점검받으셔야 합니다. 제가 직접 확인할 터이니 허투루 굴지 마세요.

예, 황녀님.

그럼 좋아요.

손을 놓고 허리를 펴니 다시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대어 온다. 부축하는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부축 받는 모습에 가깝지만 나도 그녀도, 뒤따르는 시녀들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잠시간의 침묵이 끝나고 다시 연회장이 점차 소란스러움으로 뒤덮인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가장 높은 곳, 가장 화려한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는 황제의 앞으로 걸어간다.

왔느냐, 아리지나. 오늘도 역시 아름답구나.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아바마마.

케이란 경도, 짐의 못난 딸의 고집에 맞춰주느라 고생이 많네.

황제의 측은한 눈빛을 애써 모른 척 하며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그녀가 놓쳐버린 팔을 바라보며 아쉬운 침음성을 흘리지만 역시 듣지 못한 척 한다.

분에 넘치는 영광에 걸맞지 않은 소신이 황녀님께 폐가 되지 않을까 심려스럽습니다.

짐이 결정했고, 황녀가 직접 선택했네. 그 사실에 어떠한 의문이 존재하겠는가?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 나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황제도, 나도 알고 있다. 시녀에게 이끌려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를 받는 황녀의 시선이 이따금씩 이곳으로 쏠리는 것을 우리 두 사람은 안다.

잠시, 짐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아바마마, 케이란 경을 어디로…”

아리지나, 하프겐 경을 곁에 둘 테니 이 아비가 네 호위기사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주지 않겠느냐?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황녀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소란을 피우지는 않는다. 황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고 시종의 부축을 받은 나는 두 어 걸음 앞선 그의 뒤를 따른다.

휘황찬란한 연회장의 문을 열고 나서면 황제의 위엄을 뜻하는 붉음과 황금으로 치장된 작은 방이 보인다. 오직 황제와 그의 최측근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담을 위한 방에 초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시종이 가져온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삐걱거리는 의족을 천천히 분리하는 내 모습을 황제는 반쯤 내리 깐 눈동자로 주시한다.

흉한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다. 제국의 평온을 위해 희생한 그 다리가 어찌 흉물스럽단 말인가? 짐은 신경쓰지 말고 어서 조치를 취하게. 아리지나에겐 비밀로 하지 않았는가?

예, 황녀님께서는 아무래도 저에 대한 것들은 민감하게 반응하시니까요.

“…그대로 듣게나. 그대의 사직서를 훼손 시킨 자를 찾아냈네. 황실의 문서에 손을 대는 것 만으로도 중죄임을 모르진 않을 터이니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배후에 아리지나가 있는 것 같네.

황제는 한 숨을 내쉬며 백발이 완연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다. 시종이 건네 준 의족 보관대에 분리한 의족을 건네 주고 비어버린 다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시녀들을 제외하면 황궁의 그 누구보다도 황녀와 가까이 있는 이가 나였으니 애초에 모르기도 힘든 일이었다.

월권 행위입니까?

월권 행위지. 하나뿐인 황녀라고는 하나 아직 정무에 손을 대어도 좋다는 허락을 하지 않았네. 황실의 문서들은 오직 짐이 허가한 이들만 볼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아리지나가 모를 리 없었을 테고.

목적은 저군요.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 지 몰라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는 연회장과는 달리 작은 방안은 무겁고 탁한 공기로 가득 찼다. 서성이던 황제는 아무렇게나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한 때 전장을 호령하며 지금의 위대한 제국의 기틀을 다진 이 치고는 꽤 초라한 모습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웃는 이가 없다.

폐하, 황녀님께서는 어찌 이 비루한 몸에 그토록 애정을 지니고 계신지…”

짐은 그다지 아비로서 좋은 이가 되지 못했네. 황비가 살아 있었다면…”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 몸이 허락하는 한 소신이 힘껏 황녀님을 보필해 보겠나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황제에게 은혜를 입은 그 날로부터, 그리고 황녀와 처음 만났던 황궁의 정원에서부터 아마도 내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체념이 빠르다는 건 이런 상황에서 꽤 도움이 되는 터라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영창을 한다.

다리가 다 나았다는 사실은,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인가?

예, 혹여나 황녀께서 아신다면 또 다시…”

뒷 말은 잇지 않았다.

황제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황녀에게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 표정이 결코 동정이 아님을 안다. 황제는 후회하고 있었다. 황비가 죽은 이후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딸에게 소홀했던 젊은 자신을, 우연히 들린 마을에서 발생한 마수로 인해 고아가 되어버린 소년을 구해 기사로 삼았던 것을.

그날, 황궁 정원에 소년을 홀로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폐하께는 늘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적어도 지금의 저는 죽을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요.

“…아리지나는 짐을 이어 이 제국의 고귀한 황제가 될 것이다.

예, 폐하. 제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제국을, 그리고 아리지나를 부디 잘 부탁하네. 케이란 경.

마법으로 감춰 두었던 다리에 힘을 줘 자리에서 일어나 지친 표정의 황제 앞에 걸어간다. 무릎을 꿇고 주먹 쥔 오른 손을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둔 채 나는 굳은 표정으로 덤덤히 맹세한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위대한 제국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슬슬, 아리지나가 그대를 찾을 터. 속히 물러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

예, 폐하.

의자에 앉아 조심스럽게 영창을 속삭인다. 멀쩡히 있던 오른 다리가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곁에 있던 시종장이 보관하고 있던 의족을 건네온다. 깔끔하게 잘린 단면에 의족을 고정하고 신경을 연결하는 마법이 적용되도록 조정하는 것 까지 끝내니 비로소 다리 병신인 황녀의 호위기사가 탄생한다.

다시 한 번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시종의 부축을 받아 문을 열고 연회장으로 나선다. 칠흑 빛 드레스로 몸을 감싼 황녀가 아까 전 황제가 앉아 있던 의자에 무료한 표정으로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시종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홀로 비틀거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다. 낡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의족 탓인지 그녀는 금세 내가 돌아왔음을 알아차린 듯 환한 미소를 짓는다.

하프겐 경, 수고하셨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시니 시종의 안내를 받으시면 될 겁니다.

황녀님,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케이란 경, 부디 몸 조심하고 황녀님을 잘 부탁하네.

하프겐 경은 온화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숨을 고르며 손을 내미는 황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천진난만한 저 표정은 황녀의 앳된 모습과도 잘 어울렸지만 때때로 나는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 섞인 그림자를 읽어내곤 한다. 황녀는 많은 것을 쉽게 잊어버리고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지만 나는 마음 깊숙히 꾹 눌러 둔 질척한 것들을 다시 꺼내 살피는 것이 두렵다.

늦었어요. 제가 얼마나 지루했는지 경은 모르겠죠?

죄송합니다, 황녀님.

뭐, 아바마마께서 경을 불렀다면 필시 중한 일이겠지요. 저는 아직 정무를 허락받지 않은 부족한 몸, 그러니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홀로 내버려둔 시간 만큼 보충은 확실히 하셔야 한다는 것을 아시겠죠?

팔을 잡아당기는 손에 맞춰 그녀의 품에 내어준다. 황녀는 붉게 물든 입술을 달싹이며 이내 기분 좋은 흥얼거림을 흘린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귀족들이 가득한 테이블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녀가 건네 주는 음료와 음식들을 하나씩 천천히 맛본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녀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하는데 그리 중하지 않다. 만약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라도 그녀가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맛이 좋다고 해야 한다.

황궁의 요리장은 꽤 고된 직업이고, 그만큼 인원이 바뀌는 빈도가 잦은 편이다. 내가 아는 한 벌써 수십 명이 황궁 조리실을 떠났고 그 순간은 항상 황녀와 내가 함께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건네주는 음식을 내가 제대로 받아먹지 않거나 혹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날이면 눈 내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붉은 눈동자에 칠흑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붉은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고 들고 있던 포크를 거칠게 접시 위로 내 던지곤 했다. 시녀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요리장을 불러오라며 나를 식당 바깥으로 내보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고성과 신음소리가 문 밖으로 울려 퍼지는 날이면 항상 피 묻은 자루를 시녀들이 끌어내곤 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자루 끄트머리에 튀어나온 손의 형상을 눈에 담으며 나는 많은 것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나올 때면 떨리는 입술을 애써 진정시키며 눈웃음으로 맞이하고 팔짱을 끼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희미한 혈향을 눈치채지 못한 척 잡담에 어울려 주어야 했다.

검을 쥐지 못한 그날도, 다리를 잃어버리고 마법으로 재생한 것을 감추지 시작한 그날도 어김없이 그녀와 나는 함께 있었다.

시녀들이 교체되고 요리장이 교체되고 시종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한 그 때도 나는 그녀의 침대에 함께 나란히 누워 어리광을 들어주어야 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미래가 지워지지 않았다는 뜻이란다. 너는 내게 목숨을 빚졌으니 그 목숨을 제국과 백성들을 위해 쓰도록 하거라.

하지만, 폐하.

제 목숨을 구해주신 폐하께서는 결국 제 목에 황녀의 목줄을 걸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것이 은혜라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요?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아니면,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걸리적거리나요? 혹은, 이 연회장에서 열리는 파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황녀가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황녀님과 함께 있는 이 순간 모든 것이 바로 저의 기쁨입니다.

부디, 이 말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부디, 내 목소리로 그녀의 감춰진 그림자를 덧씌워 드러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늘 내 곁에 있어 줄거죠?

나는 품 속에 넣어 둔 사직서를 오늘 밤 찢어 버릴 것이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겠지.

그러면 나는 또 다시 그녀의 품에 잠겨 다리를 잃고 자유를 바칠 것이다.

사실은 알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배후의 지시를 받은 암살자가 황궁을 침입한 날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검을 쥐고 앞길을 막았던 내 다리를 손 쉽게 잘라내고 그 자는 황녀가 잠든 침대에 거침없이 칼을 꽃았다. 피가 튀고 비명이 사방에 울리던 그 날 밤, 황녀는 우연찮게 황궁 도서관에 있었고 우연찮게 훈련을 마친 내가 평소처럼 방 앞을 지키고 있었으며 우연찮게 시녀를 통해 내게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리는 것을 잊었을 뿐이며 우연찮게 암살자가 휘두른 검에 다리를 잃었을 뿐이다.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은 황녀가 아끼던 강아지 였으며 피가 튀는 방안에서 암살자는 순식간에 자살을 선택했고 황급히 달려온 황녀의 명으로 황실 주치의에게 옮겨진 나는 의족을 수술 받았다.

마법으로 다리를 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황녀가 몰랐을 리 없다.

내가 훈련을 끝내는 시간을 황녀가 알지 못할 리 없다.

홀로 남은 나를 무력화 시킨 실력의 암살자가 암살 대상을 확인사살 하지 않을리 없다.

피가 튄 방안을 보고도 황녀가 덤덤하게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을리

수 없이 많은 상황 증거들이 내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침묵했고 황녀 암살 미수는 그렇게 미궁으로 빠져든 황실의 예민한 치부가 되었다. 황녀는 나를 호위기사로 여전히 곁에 둘 것을 황제에게 간청했고 마법으로 다리를 재생했던 나의 오른 다리를 직접 잘라냈다.

황녀님부디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통 속에서 나는 황녀에게 간청했고

어머, 케이란 경. 당신의 고향은 황궁이잖아요? 나를 홀로 두고 떠나려 하다니 호위기사로서 불합격이네요.

황녀는 망설임 없이 내 손목의 힘줄을 가르고 내 다리를 뭉개 놓았다.

내가 선택했어요, 당신을.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고귀한 붉은 눈동자로 황녀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도 없는 방 안 침대에 나를 눕힌 채 황녀는 속삭이고 있다.

당신의 운명은, 과거도 미래도 그리고 죽음 마저도 모조리 나의 것.

당신의 소원대로 되었습니다. 황녀님. 행복하십니까?

잠든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나는 귓가에 상냥하게 그녀가 가장 바라는 말을 쏟아 낸다. 하나도 남김 없이 마음을 온통 도려내고 나의 자유와 나의 감정과 나의 진심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던 피할 수 없는 족쇄를.

내 목에는 당신이 만든 목줄이 걸려 있습니다.

황녀는 눈을 뜨지 않는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 만이 그녀가 숙면에 들어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나는 허락되지 않은 황녀의 가슴을 가볍게 손으로 쓰다듬는다. 붉은 입술이 살짝 벌려지고 달콤한 숨이 내 입술을 간지럽힌다. 반쯤 열린 단추를 잠그고 이불을 그녀의 턱 아래까지 끌어 올려준다.

커튼이 채 닫히지 못한 틈새로 창 밖의 하얀 달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것을 나는 올려다보고 있다. 당장 손을 뻗어 저 새하얀 목을 조르면 비로소 꺾인 날개를 펴고 그녀가 만든 감옥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해.

눈을 감은 황녀의 입술이 움직여 말을 자아낸다.

네,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순순히 그녀가 바라는 대답을 입에 올릴 뿐이다.




Violet(바이올렛) : 청색을 띄는 보라색 - 고귀함, 권력, 광기, 폭력

Violet(제비꽃) : 진실한 사랑, 성실, 나를 생각해주세요.


순애와 얀데레는 한 끝 차이.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영원히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자유로운 날개를 지닌 당신은 금방이라도 나를 잊어버리고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아.

그렇다면 가둬버리자.

하늘을 누비는 날개를 꺾고, 드넓은 평원을 내달리는 다리를 자르고서 당신을 내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자.

나의 고귀함으로 당신의 눈을 가리고, 나에게 쥐어진 누구도 넘보지 못할 권력으로 당신을 속박해버리자.

그렇게 당신을 가진다면, 그렇게 당신이 내게 웃어준다면.

오직 나만을 사랑하고, 나에게만 사랑을 보여주고 나만을 생각해주는 당신으로 만들어버리자.

사랑해, 당신의 죽음까지도 모조리 나의 것.

사랑해, 당신의 아주 작은 눈물 한 방울 조차 나로 인해 피어난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꽃을 피운 사람.

이것이 나의 사랑, 나의 행복, 나의 영원.

자, 오늘 밤도 곁에서 속삭여줘.

나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