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그러니까 내가 꿈 속에 갇혀있는 거고, 당신은 날 구하러 온 거라고? 아하핫, 그건 좀 로맨틱한 얘기네. 만약 진짜였으면 반해버릴 정도로 말이야."


알키오네에게 진실을 얘기해줬지만, 내 말을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뭐,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지. 이해해. 델타랑 싸우고 우리도 피해가 크긴 했으니까. 하지만 우리 자매들 중 아무도 희생되지 않고 잘 끝났다는 말씀!"


'이건...'


'아마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기억이겠지.'


마음 속으로 말을 걸자 삿갓이 대답했다.


'어떡하지? 무작정 내 말이 옳다고 해봐야 씨알도 안먹힐 것 같은데.'


'지금 알키오네가 가진 기억은 결국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니, 분명 어딘가 어긋난 점이 있을걸세.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하네.'


"저기,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해?"


알키오네가 부르자 나는 다시 그녀의 눈에 초점을 맞췄다.


"아, 미안. 나는 분명히... 몰타가 함락된 줄 알고있었거든."


"흐흣, 우리 플레이아데스가 지키고 있는데 그럴리가 없잖아! 도와주러 먼 길 온 거라면 미안하게 됐는걸. 대신 모처럼이니 몰타 관광이라도 하고 갈래? 내가 가이드해줄 수 있는데."


"지금은 사양할게. 그보단 델타와 싸워서 어떻게 이긴건지 꼭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델타와 싸웠던 이야기? 뭐, 그 정도는... 들려줄 수 있지."


알키오네가 얘기한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레모네이드 델타가 함대를 이끌고 몰타를 침공했으나, 알키오네 일행의 방어선을 뚫을 수는 없었었다. 결국 델타는 한 수 접고 굴욕적인 평화 협상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델타는 포기하지 않고 거기서도 함정을 팠다. 알키오네를 포함한 세 명의 플레이아데스들을 자신의 기함으로 초대한 뒤 그 틈에 섬을 공격한 것이었다.


허나 델타의 마리오네트 병사들이 아무리 많아봐야 그 셋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용맹무쌍한 알키오네의 활약 앞에 델타와 그녀의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이어서 델타의 함선들도 모두 격침시킨 뒤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했던 것이었다.


"..."


'...'


'후반부는 확실히 뻥이군. 몰타가 멸망한 건 똑똑히 본데다가, 델타는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내 생각도 같네. 이야기가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으로 돌아가는군. 전후가 제대로 이어지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지.

게다가 이야기 속의 알키오네는 다분히 전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혼자서 함선 수십 척을 침몰시켰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지. 이건 전형적인 심리적 방어기제일세.'


'알기 쉽게 좀 설명해봐.'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때, 그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심리학적 테크닉일세. 이런건 현실 부정, 혹은 현실 도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


'그럼 알키오네의 경우엔 자매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억지로 기억을 바꾼 거라는 거군...'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 만으로는 안되네. 알키오네가 그 진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하네.'


난감하다.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긴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증거는 있어?"


"뭐?"


"너희가 이겼고, 네 자매들이 살았다는 증거 말이야."


"증거? 당연히 있지! 메로페도 마이아 언니도 이렇게 무사히 살아있잖아?"


그 순간 알키오네의 옆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두 개의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드림 워커가 맛이 가서 텍스쳐 불러오는 데 실패하기라도 한건가.


"...그러니까 네 말은, '저게' 니 자매들이라고?"


"뭐야 그 반응은? 바라는대로 증거를 보여줬잖아."


"아니, 보이지가 않는데."


"뭐어? 무슨 헛소리야! 봐봐! 여기 있잖아! 마이아 언니랑! 메로페가!"


알키오네는 손을 뒤로 뻗어 검은 실루엣을 가리켰다. 알키오네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건가? 나는 눈을 찌푸렸다.

검은 실루엣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나타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알키오네의 뒤에. 알키오네가 볼 수 없는 위치에.


"그럼 네 눈에는 네 자매들이 제대로 보인다는 거지?"


"당연하지!"


"한 번 봐봐 그럼."


"정말이지, 무슨 말을 하고싶은거야? 그게 뭐가 어렵다고..."


뒤로 고개를 돌리려던 알키오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어, 어라... 내가 왜 이러지...? 몸이... 뜻대로 안움직여..."


"왜그래? 네 '자매'가 네 뒤에 있잖아?"


고개를 돌려서, 네 자매들을 바라봐. 내 말에 알키오네는 목에 힘을 줬으나, 몸의 떨림만 더 심해졌다.


"시, 싫어... 보고싶지 않아...!"


"네 자매들을 싫어하는 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다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그럼 왜 마주보지 않는거야?"


"모, 몰라! 모른다고! 그냥 무섭단 말이야!"


알키오네가 머리를 부여잡고 세차게 고개를 젓자, 뒤의 검은 실루엣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알키오네는 진실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진실이란 바로 마리오네트가 된 자매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는 거다.


알키오네는 제 자매들의 얼굴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무서운거야? 네 자매들이? 마리오네트가 되서?"


"아니야...!"


"기억해내, 알키오네. 그들은 어떻게 죽었지? 누가 그들을 죽였지?"


"아니야!!"


알키오네가 소리지르자 하늘에 쩌적 금이 갔다.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꿈이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 더는 말하지 마!"


"힘들겠지만 떠올려야만 해, 알키오네. 네 가족들이니까-"


"닥쳐!!"


표정이 험악해진 알키오네가 내 멱살을 잡았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나는 알키오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의 푸른 눈동자가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네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는거야? 니가 우리에 대해 뭘 알고있어서 그러는 거냐고! 니가 뭔데!! 니가 무슨 심리 치료사라도 돼!?"


"그래... 나는 심리 치료사도 뭣도 아니지..."


울컥 짜증이 난 나는 두 손으로 내 멱살을 잡고있는 팔을 역으로 움켜잡았다. 알키오네가 움찔했다.


"그러는 넌? 너는 뭔데!? 네가 그 강인한 가디언 시리즈의 일원이라고!? 넌 그냥 지어낸 망상에 사로잡힌 환자일 뿐이잖아!!"


"아니야!!!"


알키오네는 나를 떨쳐내듯이 내던졌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유리처럼 금이 간 하늘을 쳐다봤다. 균열이 더 커져있었다.


멱살 잡혔을 때도 그랬지만, 전혀 안아프다. 꿈 속이라 그런지 통각이 없는 것 같다. 전에 여기 처음 들어왔을때 삿갓이랑 같이 적대 AGS를 피해 전력질주 했을때도 전혀 숨이 차지 않았었지, 그러고보니.


'이보게, 너무 성급하게 접근한 것 같네! 알키오네의 스트레스 레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네!'


'...제길.'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알키오네는 뒤돌아서서 자리를 뜨나 싶더니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아니야... 나는, 난 그러려고 했던게..!"


"...기억났어?"


자리에서 일어나 알키오네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손에 잡히는대로 모래를 뿌렸다.


"가, 가까이 오지마!"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셀 바이오로이드가 한다는 게 벌벌 떨면서 모래나 뿌리는 거라니,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오지마! 오지말라고! 날 내버려둬!"


나는 가만히 서서 바지에 모래먼지를 맞아줬다. 알키오네는 지친건지 손을 멈추고서 입을 열었다.


"마이아 언니, 엘렉트라, 아스타로페, 타이게테, 켈라이노... 그리고 메로페... 전부 내가 죽였어... 내 손으로... 이제와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딨는데?"


"...알키오네..."


"마음 한 구석에선 이게 꿈이란 걸 알고있었어... 내가 만들어낸 가짜 세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왜 꿈에서 깨야 하는건데? 밖에는, 밖에는 고통스러운 일 밖에 없잖아!"


"..."


"제발, 차라리 계속 꿈 속에 머무르게 해줘. 적어도 여기엔 자매들이 남아있잖아... 꿈에서 깨어나면,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단 말이야..."


참담한 심정이었다. 과연 이 아이를 설득할 수 있는 정답이 있기는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알키오네의 등을 쳐다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왜 온 거야?"


알키오네가 물었다.


"당신, 몰타엔 왜 온 거야? 나를 데려가려고 온 거야? 내 몸을 수거해가려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몰타에 오게 된 건 우연이었어. 너를 찾게 된 것도 우연이었지. 난 여기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몰타가 그냥 무인도인 줄 알았어."


"..."


"몰타에서 살았다던 엠피시아가 거지꼴로 나타났으니, 분명 먹을 거 하나 없는 버려진 섬일 줄 알았지. 여기 삼안 연구소 같은 게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엠피시아...?"


"어어, 엠피트리테하고 살라시아, 둘이 합쳐서 엠피시아. 듣자하니 예전에 몰타에서 지낸 적이 있다던데, 자세히는..."


'자네, 뭘 한건가? 알키오네의 스트레스가 지수가 떨어지기 시작했네!'


'응? 뭐라고?'


'계속해! 뭐든 계속 말하게나!'


어... 뭐지 이 반응은? 여기 와보니 엠피시아가 몰타에서 살았다던 얘기랑 달라서 델타가 멸망시킨 후에 와서 눌러앉은건가 했는데.


...설마?


나는 설마하는 마음에, 머메이드에 관해 아는 내용을 있는대로 떠들었다.


"어, 음... 걔들한테 과거 이야기를 캐물은 적은 없기는 해... 일단 뭐부터 먹여야 할 것 같았어서. 시아는 원체 활발할 애였으니 처음 봤을 때부터 방긋방긋 했고, 엠피는 밥값을 어떻게 지불할지 전전긍긍하다가 공짜라고 하니까 놀랐고. 그 때 반응이 참 재밌었는데."


"..."


"잘 먹이고 잘 재우니까 금새 쌩쌩해져서는, 호라이즌이랑 같이 감마의 함대를 상대로 맹활약했지. 되게 잘 싸우더라. 그러고보니 또, 감마가 미친 짓 벌이는 거 보고 델타를 떠올리며 겁에 질려했었지. 아마 걔들도 전에 델타한테 데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네."


"..."


"그리고 멜리테랑 갈라테아는... 내가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생존은 확인됐으니 지금쯤 엠피시아랑 합류했을걸. 멜리테는 초코공주에서 초코여왕으로 승격해서 초코랜드 짓겠다고 선포하고, 갈라테아는 뭐... 꿈에 그리던 남친이라도 찾고 꽁냥거리고 있겠지. 옘병."


"...흑... 으흑..."


느닷없이 알키오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뭔데, 왜그러는 건데 또. 얼마나 예민해졌길래 욕 한마디 꺼냈다고 그러는건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랬구나...! 살아있었구나...! 흐어어엉..."


모래 위로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엠피... 시아... 멜리테... 갈라테아... 다들 걱정했는데... 무사히 빠져나갔던 거구나...! 다행이야... 다행이야...!"


그것은 슬픔이 아닌, 명백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머메이드와... 아는 사이였구나."


"응... 몰타를 지키기 위해 같이 델타에 맞서싸운, 친구들이야..."


나는 말없이 알키오네의 옆에 앉아 그녀가 감정을 추스리도록 기다려줬다. 등 두드려주니까 또 끅끅대기 시작하는 바람에 괜히 뻘쭘해졌거든.


이번엔 그녀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내가 다시 말을 건넨건 알키오네가 코를 쿨쩍이며 울음이 그칠 즈음이었다.


"꿈에서 깰 준비 됐어?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현실로 돌아가야지."


"...그렇지만, 나, 내 손으로... 가족을, 자매들을 죽였는데. 그런 내가... 밖으로 나가도 될까? 나같은 죄인이...?"


알키오네를 꿈 속에 붙잡아두고 있던 건 단순히 델타가 남긴 트라우마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님이 뭐라고 말할 지는 알고 있어. 나를 구하기 위해 꿈 속으로 들어올 정도로 좋은 사람이니까, 나 자신을 용서해도 된다고, 여기서 나가도 된다고 말하겠지... 나도 바보는 아니야. 자매들이 안식을 찾았다는 건 알고있어."


아니 잠깐만요

내가 할 말을 가로채버리면


"하지만... 난 차마 그걸 인정할 수가 없어.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내가 인정하고 밖으로 나가버리면, 그러면... 플레이아데스는 영영 사라지는 거잖아. 자매들이 이 세상에 남긴 흔적마저 사라지는 거잖아."


...어떡하지.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걸까. 사령관이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몰타에서 알키오네랑 만나는건 단순한 랜덤 인카운터가 아닌 어떠한 이벤트 스토리일 것이다. 사령관새끼였으면 말빨로 어떻게든 했을 것 같은데, 그 정답이 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내가 모르는 스토리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이벤트 스토리는...


...아.


블프.


내가 마지막으로 한 게 안개나라여서 정말 다행이다.


"알키오네."


"으, 응?"


"네가 어째서 그 슬픔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해?"


"뭐...?"


그제서야 알키오네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인간은 어째서 바이오로이드에게 저들과 똑같이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어어... 글쎄, 그건..."


"정답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그 감정은 너희를 괴롭게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닌, 소중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끝까지 다른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도록... 주어진 선물일 거라고."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어. 알키오네는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서 나가면 플레이아데스가 사라지는 거라고? 천만에. 아직 한 명이 남아있잖아. 플레이아데스 7자매의 삼녀, 알키오네. 네가 남아있어. 그리고 네가 플레이아데스를 기억하는 이상, 그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그러네. 아직... 내가 남아있었구나. 플레이아데스는 사라진 게 아니었어."


눈가를 비빈 알키오네는 하얀 이를 드러내보이며 싱긋 웃었다.


"고마워, 인간님. 그리고... 아깐 심한 짓 해서 미안해."


"아, 신경쓰지마. 하나도 안아프던데."


꿈이니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젠 나도 플레이아데스를 기억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고 말이지. 그러니... 앞으로 또 힘든 일이 있으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옆을 쳐다봐.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테니까.


"...!? 엣, 저기, 바, 방금 그거... 마치 고백..."


"자, 일어나. 여기서 나갈 시간이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바지를 툭툭 턴 뒤 알키오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째 알키오네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줘. 나 지금 너무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기다려줄까?"


"으, 응. 그래줄래? 미안... 잠깐만 있어봐..."


'그냥 자네가 그녀를 안아서 들어올리게나.'


'뭐?'


삿갓 너인마, 한동안 잠잠하더니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니, 될 리가 없잖아. 얘 몸무게가 분명...'


'어허. 여자의 몸무게는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예의일세.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라니까.'


"...알키, 잠깐 실례할게."


"뭐? 알키? 뭘 하려는, 어, 어어? 자자잠깐만, 위험해! 나 꽤 무거운데...! 꺄아악!?"


나는 두 손으로 알키오네의 등과 오금을 받치고 벌떡 일어섰다. 분명 촉감은 있는데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드, 들었어? 나를? 진짜로?"


알키오네는 놀라서 눈동자를 정신없이 굴렸다.

...사실 나도 놀라고있는 중이야.


'꿈이니까 말일세. 이 안에선 현실의 물리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네. 힘과 체력의 제한도 없지.'


'아, 그렇게 되는건가...'


마음속으로 대충 납득한 나는 다시 알키오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괜찮아?"


"어, 어... 그냥, 누가 날 들어올리는 건 처음이라서..."


"사실 나도 누굴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리는 게 처음이긴 해. ...내려줄까?"


"잠깐, 잠깐! 이대로 안아서 데리고 나가줄래? 그, 놀라서 허리에 힘이 빠져서 그래!"


"...그래?"


"응! 그런거야!"


"그럼 그렇다고 치지 뭐... 어차피 무겁지도 않고."


"읏..."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알키오네를 든 채로 제자리에서 한바퀴 빙 돌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서, 나가는 길이 어디야? 바다로 가면 되는거야, 아님 섬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거야? 또 연구소로 가야하나?"


[그 부분은 아틀라스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허공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틀라스? ...삿갓아, 어떻게 된 거야?"


"괜찮네. 이제 다 끝났으니 싸우지 않겠다고 하더군."


"어!? 잠깐, 뭐야? 누가 보고있었던 거야!? 내, 내려줘 주인님!"


"주인님?"


너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캐릭터였어? 생긴건 보스라고 부를 것 같이 생겼는데.

버둥대면서 내 품에서 빠져나간 알키오네는 헛기침을 하며 내 옆에 섰다.


[그 전에 앞서, 아틀라스는 설명을 요청합니다. 아틀라스의 결정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습니다. 아틀라스는 항상 옳은 판단을 내려왔습니다.

허나 아틀라스는 끝내 환자 알키오네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렇기에 아틀라스는 혼란스럽습니다. 아틀라스는 틀렸던 건가요? 아틀라스는 회로 부식으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건가요?]


"아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자신이 녹슬어 죽어가는데도, 알키오네가 사실상 가망이 없었음에도, 아틀라스는 끝까지 알키오네를 포기하지 않고 치료를 멈추지 않았다. 진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알키오네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전적으로 아틀라스의 공로다.


"주인님 말이 맞아. 덕분에 난 다시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게 됐는걸? 현실의 진짜 바다 말이야!"


[아틀라스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물론이지. 끝까지 나를 돌봐줘서 고마워, 아빠."


[...그리스 신화의 플레이아데스와 아틀라스의 관계를 빗댄 비유법이군요. 아틀라스는 이해했습니다.]


"맞아, 정확해."


[환자 알키오네. 아틀라스의 서비스에 만족하셨습니까? 행복한 꿈을 꾸셨습니까?]


"응, 무척이나. 잃어버린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었는걸. 하지만 이젠 일어날 시간이야, 모든 꿈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까."


[환자의 상태가 호전된 것을 확인. 치료 프로세스를 종료합니다. 드림 워커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이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져갔다. 나와 알키오네도 하얀 풍경에 섞여 사라지기 전에, 아틀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알키오네.]


***


삐비비빕. 삐비비빕.


귓가에 들리는 규칙적인 알람시계 소리에 눈이 뜨였다.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그건 알람시계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삐비비빕. 삐비비빕."


"...왜 입으로 알람시계 소리를 내고있어?"


"주인님이 알람시계 역할 맡기셨잖아요. 삐비비빕."


"그랬군... 끄는 버튼은 뭐지 그럼? 이건가?"


나는 손가락으로 바닐라의 입술을 콕 눌렀다. 조용해졌길래 손가락을 떼니 또 삐비비빕 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었네. 어디지?"


"맞춰보시죠. 삐비비빕."


무심하게 계속 삡삡 거리는 바닐라의 얼굴을 보자니 나도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푸핫, 아흐하하학...!"


"얼씨구, 아주 신이 나셨군요. 이 바닐라 님의 알람시계 서비스가 꽤나 맘에 드셨나 봅니다? 삐비빕?"


바닐라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쿡쿡 찔렀다. 나중엔 입으로 내는 삡 삡 소리에 맞춰 콕 콕 찌르는 통에 나는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또 빵 터졌다.


"흐하하학...! 니가 무슨 탑돌이냐...!"


"거 일어나자마자 염장질이라니, 아주 인기만점이구만."


삿갓이 관절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제서야 바닐라가 멈춰준 덕에 나도 웃는걸 멈출 수 있었다.


"끄응, 본체를 하도 오랫동안 방치해뒀더니 삭신이 쑤시는군. 누구 윤활유 가진 사람 있는가?"


"네, 여기요!"


그렘린이 WD-40을 척 건네주었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로 나오다니 조금 당황스럽구만."


"애초에 우린 아틀라스하고 너를 정비하기 위해 온 거니까,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한 거거든?"


"뭐, 그건 그렇고... 나야 녹이 슬지 않는 금속으로 제작돼있다만, 아틀라스도 수리가 가능한건가? 내가 살펴봤을 땐 회로부식 상태가 매우 심각하던데, 어림잡아 10년 전에 작동을 멈췄어야 했을 정도로."


"하지만 아직까지 작동되고 있었지! 덕분에 아틀라스의 데이터를 전부 외장하드로 옮겨담을 수 있었거든? 기체를 새로 만들어서 이식하면 부활할 수 있거든?"


"오호라. 그런 방법이... 그렇다면 아틀라스 복원 작업에 나도 참여해도 되겠나? 이래뵈도 이 몸뚱아리를 직접 만들 정도의 공학적 지식은 있다네. 거기다 나도 삼안제니 삼안제 기계를 복원하는 데엔 도움이 될걸세."


"오오...! 어쩐지 한 번도 못본 모델이다 했더니, 직접 만든 거라고요? 흐힛, 나중에 그 얘기 자세히 좀..."


삿갓이 공순이들이랑 얘기 나누는 걸 구경하며 바닐라의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일어나자, 드림 워커의 불이 꺼지면서 덮개가 열렸다. 알키오네는 드림 워커의 테두리를 붙잡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으아... 몸에 전혀 힘이 안들어가네... 지금이 몇 시지?"


"오후 5시 52분입니다."


램파트가 대답해줬다.


"뭐야, 저녁인가... 앗."


나랑 눈이 마주친 알키오네는 한순간 눈이 커지더니, 이내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흐흣. 안녕, 주인님."


그리고 나는 꿈 속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제대로 다시한번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알키오네."



어찌저찌 모르는 이벤트도 해내고 범고래도 낚은 라붕이

참고로 라붕이는 드림워커에서 나오기 전에 알키, 삿갓, 아틀라스한테 자기가 어떻게 머메이드에 대해 그리 잘 알고있는지는 비밀이니 어디가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해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