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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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했던 전장에 흩뿌려진 검게 굳은 피가 두려워, 눈길조차 줄 수 없었다.

그 유약한 존재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망집처럼 남아있다.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5)

― 두려움

 












이곳에선 얼마든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충분히 각오했다고 생각했었다.



실패한다. 늦었다. 바퀴벌레.



나를 겨냥하는 부정적인 말과 호칭들을 듣고 이제야 깨달았다.

그건 유약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부린 객기와 오만이었다는 것을.




“하하하하하하!! 늦었다고! 멍청한 원본!”




떨어져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이 오른팔 속의 도플갱어도 ‘나’란 말인가?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생각을 끝나기도 전에 눈앞의 풍경은 격통과 함께 서서히 바뀐다.


쨍―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공간 변화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실패한 데모고르곤을 만난 그때처럼, 또 눈앞이 유리창이 있는 것처럼 금이 간다.

그 깨어져 버린 공간을 사이에 두고 실패한 데모고르곤은 모습을 감췄다.


정확히는 그 균열이 그 가능성과 나를 갈라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가능성들은 서로를 간섭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나,

나는 빠르게 변화하는 거울 미로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역시 그 균열은 멍청하게 고통에 절여진 채 주저앉아있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퍽! 하는 굉음과 함께, 또 거울이 깨진다.























크아아 아아 아! 바 퀴 벌 레! 죽여버리겠어!”




목이 꺾인 채 나를 향해서 살의를 드러내는 괴물이 보인다.

저 질긴 목숨이 다시 이 거울의 방에 끼어든다.


데모고르곤 실패한가능성 은 분명 말했지. 저것 또한 라고.

하지만 그 말엔 좀 더 다른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도플갱어’⋯ 라고.




“아하하하하!! 잘라내지마⋯ 바퀴벌레!”

바 퀴 벌 레!! 죽여주마아아아아―――――!!”




두 도플갱어의 외침이 내 오른팔과 눈앞에서 귀를 찢는 것처럼 들려온다.

위험하고 불리한 전세 속에서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대로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다⋯!”




쩍. 쩌저적거리는 꺼림칙한 소리가 오른쪽 귀에 맴돈다.

내 팔을 스스로 뜯어내는 감각은,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살을 찢어내는 고통이 이대로 실패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버텼다.




“으아아아악――――――!!!!”




피한방울 떨어지지 않아도, 몸에 그 어떤 것도 흐르지 않아도.

마치 내가 인간인 것처럼,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은, 그런 버티기 힘든 고통을 비명으로 바꾸어 토해냈다.




“허억⋯! 하아⋯ 하아⋯⋯.”


“허어, 아까워라.”




간신히 뜯어낸 오른팔은 이제 온전히 도플갱어의 자아로만 움직였다.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나의 오른팔이었던 것은 탄식을 내뱉었으나,

곧 실실 웃으며 괴물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키키킥, 멍청하긴! 너는 어차피―”

“―가 될 텐데? 키키킥!”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둘에서 하나로 합쳐져 가고, 꺾인 목을 덜어낸 괴물은 그 덩어리를 머리로 받아들인다.

기다렸다는 듯, 목 아래만 남은 몸뚱이를 덩어리가 게걸스럽게 잡아먹는다.




“잘 봐라, 바퀴벌레.” “잘 봐, 원본.”




괴물은 순식간에 검은 덩어리를 뒤집어쓴 고치가 되고, 두 목소리가 동시에 메아리쳤다.




“누가 진짜 류드밀라 일까―――――――?!”




검은 형체로 다시 태어나 포효한다. 누가 ‘진짜’인가를 외치며.




“저것 또한 정말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실패한 가능성⋯⋯.”




이미 외압으로 사라져버린 그 실패한 가능성을 향해 물어봤자, 들려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눈앞에는 오직,

홀로 외롭게 싸워왔던 그 이면 세계의 전장. 그리고⋯




, 이제 누가 진짜 류드밀라인지 싸워볼래?”




예전과 같은 전장 위에,

그때보다 더 위험한 개체로 거듭난 도플갱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재생이⋯ 안되는군⋯”



그림자가 된 이후로는 몸이 아무리 날아가도 시간이 지나면 수복할 수 있었다.

모든 그림자가 전부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는 그랬다.




“윽⋯!”




남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매만지자 짧은 통증과 함께 팔 단면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도플갱어의 가능성괴물이 날렸던 침식 쐐기, 그 원형이 붉게 물든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솔개⋯⋯.”




검고 붉은 모습의 솔개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한번이 아닌, 두 번, 세 번, 여러 번.


 

 

“뭐, 그래도 덕분이라곤 말해두지. 원본.”

 

 


그 눈송이는 점점 더 많아져, 거센 눈보라가 쳤다.

이 거울의 방은 날씨마저도, 지독하게 그날과 빼다 닮았다.


 

 

“정말 고마워?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은 덕분에 가능성을 찾았으니까 말이야!”




웃기는 소리⋯⋯.


주저앉아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대로 주도권을 넘길 생각도 없었다.

오른팔이 재생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지만, 싸우지 못할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오로지 지금은 일단 이겨야만 한다는 집념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염동력으로 일으켰다.




“이 거울의 방 말이야. 가능성을 보는 줄 알고 신나서 죽을 것 같았지? 이 멍청아!”

가 가능성을 흡수했다고 해서 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끝까지 허세를 부리시겠다? 하긴, 이제 막 약해졌는데 알 리가 있겠어?!”

 



모든 상황을 추측으로 파악하는 내가 아는 게 없다지만, 아는 게 없는 건 도플갱어도 피차일반이겠지.


그저 서로가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려 발버둥 치고,

그 권력을 발판 삼아 찾아 나가는 공간.


아는 척하지만, 이제 저 도플갱어도 이제 막 알았을 뿐일 거다.

그래, 모든 류드밀라라는 존재는 그렇게 움직일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쿵.


지반으로 몸이 당겨진다. 아직 당겨지는 힘을 보아 전력을 꺼내진 않고 있다.

재빨리 반발력으로 밀고 떨어져 나간 그때였다.




“이건 네 무지함과 유약함의 대가라고나 할까?”

“큭⋯?! 아악⋯!”




단 한 번의 당기는 힘으로 한계점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했단 말인가?!

정교하고 세밀한 염동력으로 내 왼팔과 두 다리를 붙잡아 비튼다.




이런 거 할 수 없잖아?”




그와 동시에 도플갱어의 등 뒤로 솟아오르는 침식 쐐기들이 보였다.

평범한 침식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분명히 나에게 공격해왔던 그 괴물의 것과 같은 침식 쐐기였다.


내 신체가 재생되지 못하는 것이 저 침식 쐐기와 관계가 있다면,

그렇게 많은 쐐기를 맞았다간 결코 무사하지 못하겠지.

더 정교해졌지만, 근원은 나와 같다면 대처할 방법은 있었다.




“시⋯끄럽다⋯! 크으으윽⋯!”

“호오――――――?!”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반발력으로, 도플갱어를 밀쳐냈다.

일단 시야에서 사라져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내 좌표를 예측할 수 없도록 최대한 멀리, 더 멀리.


지반을 부숴 들어 올려 바리게이트처럼 벽을 쌓아 올린다.


이 거울의 방에 구현된 이면 세계의 잔재들을 들어 올려 견고하게 쌓고,

반파된 중장갑 병기들과 함선 외피를 닥치는 대로 바리게이트 너머를 향해 집어 던졌다.

벽을 쌓아 올렸으니 시야가 가려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어쩔 수 없는 견제 방법이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더⋯⋯.”




혹시라도 데모고르곤의 압도적인 출력으로 찍어누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염동력의 힘으로 벽을 단단히 고정한다.


이렇게까지 해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빨리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다시 이곳으로 날아와 이 벽을 부수는 데까지의 시간은⋯⋯.











 

 

“이게 다야? 멍청아?”


“⋯?! 이렇게 빨리―――――”




거대한 힘이 올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완전히 반대. 정교하고 세밀하게 이루어진 물리법칙. 그 염동력이 총알처럼 날아왔다.


항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 아주 빠르게 날아온 힘은 나의 복부를 강타했다.


내가 도플갱어를 밀었던 힘보다 더 멀리, 아주 더 멀리⋯

너무 멀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말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지면의 바위에 부딪히고, 부서졌는지 셀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나의 위로 눈보라가 끝없이 몰아친다.


하얗게 변하는 시야 속에서, 압도적인 힘 차이를 느껴버린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뚫리다 만 배가 그 압도적이고 섬세한 힘에 저항했다는 증거라는 것. 그것만 알 수 있었다.





“윽⋯⋯.”




젠장⋯⋯.

이건 완전 실격이었다.


그리고 후회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내 시야로 다시 나타난 도플갱어는 내 목을 그대로 잡아 들어 올렸다.




“케흑⋯!”

“키히히힉! 꼴이 말이 아닌걸? 아직도 모르는 것 같으니. 내가 친절히 원본에 대한 예우라도 해줄까?”

“웃기는⋯⋯ 소리⋯”




난 부정하고 있지만, 직감했다.




“흐음, 어차피 이제부턴 원본이 될 거니까. 이미 흡수했었던 힘을 뛰어넘은 거, 안 보이나?”




가능성 그 자체,

원본인 내가 아닌 도플갱어가 주도권을 잡고 데모고르곤이 된 것.


이미 이 거울의 방의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