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호라이즌 대회] 안드로이드는 기계새의 꿈을 꾸는가

안녕하세요. 관리자님. 직접 목소리를 듣는 건 오랜만이네요.

 

말에 가시가 돋친 거 같다고요? 그럴 리가요. 관리자님께는 감사하고 있답니다. 저희가 이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는 건 관리자님 덕분이니까요.

 

후훗. 이수연 부전대장한테 안부나 전해 주세요. 네. 당연하죠.

 

그나저나, 안부나 물어보려고 몇십 년 만에 연락하신 건 아닐 거 같은데요. 슬슬 진짜 용건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아. 호라이즌 때문이셨구나. 이름은 어떻게 알았냐구요? 저희라고 해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 건 아니랍니다.

 

어떤 대원은 유튜브로 방송도 송출하던걸요?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그런지, 동물 귀 달린 정도는 별다른 이야깃거리도 아니에요. 어차피 CG라고 믿기도 하고.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네. 제가 맞아요. 추락해 망가진 줄 알았던 함선이 갑자기 제멋대로 작동하는데, 처음엔 보안장치를 잘못 건드린 줄 알고 깜짝 놀랐답니다. 그런데 무기고의 잠금이 해제되더니 포탈을 열고 어디론가 전송되는데, 좌표를 추적해 보니 익숙한 얼굴이 있더라고요.

 

...밉진 않았냐고요?

 

글쎄요. 아무 감정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래서 그 로봇이 죽을 만큼 미웠냐면은. 그건 아니었나 봐요. 그날 싸웠던 사도는 결국 죽은 거나 다름없고, 지금 그 소체를 쓰고 있는 건 생판 남일 뿐인 누군가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싫은 기분은 아니네요. 화살 한 발 정도야 그리 힘든 게 아니기도 하고.

 

으으음. 궁금한 건 다 해결되셨나요? 그렇군요. 네, 네. 그럼 통신은 슬슬 끊을게요. 저도 마냥 여유롭기만 한 건 아니라서요. 해야 할 일도 있고. 그렇죠.

 

그럼 안녕히. 다음에 만날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부디 평안하시기를 바랄게요.

 

관리자님.

 

 

 

***

 

 

 

창밖에서 햇살이 부서져 들어왔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누구 할 것 없이 몸이 나른해지는 온도. 로봇인 호라이즌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파에 기댄 채 보이는 바깥은 언제나와 같았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사채업자 시절 받아온 소파가 비명을 지르면, 호라이즌은 등을 쿠션에 깊게 파묻었다.

 

“레이첼. 주문한 윤활유는 아직 멀었습니까?”

“지금 가져가고 있거든?”

 

레이첼이 내놓은 것은 찻잔에 담긴 윤활유였다. 고급스러운 금색 문양이 수놓인 찻잔의 내부에서 탁한 빛깔의 윤활유가 부자연스럽게 요동쳤다. 레이첼이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토할 거 같아...”

“안됐군요. 이 맛있는 걸 즐기지 못한다니.”

“애초에 이게 맞아? 그걸 왜 차 마시듯이 음미하는 건데?”

“휴먼들에겐 티파티라는 문화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떠올랐을 뿐입니다.”

“니가 정말 아프긴 아픈가 보다.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알면 됐습니다. 아, 그리고 다과도 좀 내오십쇼.”

“... 다과? 무슨 다과?”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휴먼의 센스를 믿어보겠습니다.”

 

레이첼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결국 사무실 한 켠의 비품실로 향했다. 그 모습이 퍽 유쾌해서, 호라이즌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지지리도 말을 듣지 않는 레이첼이 오늘따라 순종적인 건 호라이즌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격렬한 전투의 막바지. 한 덩어리가 된 채 추락하던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었으나, 누가 쏘았는지 알 수 없는 화살을 맞고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입었던 데미지가 어디 가는 건 아니어서, 지상에 내려왔을 때의 호라이즌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 하기 어려웠다.

 

공방에 찾아갔을 때 햄스워스는 난감한 기색으로 이리 말했었다.

 

-여긴 공방이다. 고물상이 아니라.

 

임시로 처치해두긴 했지만, 회로 손상이 워낙 많아서 당분간은 활동을 자제해야 할 거란다. 자칫 잘못했다간 전선 쇼트가 발생할 거라고. 전신 불구 환자처럼 계속 누워만 있고 싶으면 움직여도 된다면서.

 

“옜다. 이거나 드셔.”

 

한참 만에 돌아온 레이첼이 내민 건 볼트와 너트 따위가 수북하게 담긴 쟁반이었다. 뚱한 눈빛으로 보건대 대충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쓸어 담아온 모양. 개중에 그나마 깨끗한 볼트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가져간다.

 

으드득.

 

“맛없습니다.”

“으아! 그걸 대체 왜 먹어?!”

“먹으라고 가져다준 거 아니었습니까? 이런 걸 차와 함께 먹는다니, 휴먼들도 이가 제법 튼튼한 모양입니다.”

 

먹다 보니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연달아 몇 개를 더 입으로 가져가니, 레이첼이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젯밤 대기권 바깥에서 벌어진 미확인 물체들끼리의 전투에 대해 관리국은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관리국이나 북방합의체, 또는 미국에서 개발 중인 신무기의 위력 실험이 아니겠냐는 의견이 대부분인 가운데, 일각에서는 외계인이 끌고 온 UFO라는 다소 허무맹랑한 추측을 제기하기도...

 

뉴스에선 앵커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간밤의 사건을 설명하고 있었다. 듣고 있자니 적잖이 신경 쓰이는 말이어서, 호라이즌은 한 귀로 듣고 흘리기를 반복했다.

 

“저거 봐. 호라이즌. UFO라는데?”

“진공관 맙소사. 레이첼은 그 나이 먹고 아직도 그런 걸 믿습니까? 지적 능력이 의심되는군요.”

“상상은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러면, 너는 저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관리국에서 별말 없는 거 보면 모르겠습니까. 보나 마나 조작된 영상이겠죠.”

“그...런가?”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른 것만 같은 표정. 그 옆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몇 시간 전에 생각했듯이, 끝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전하지 못한 말로 후회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할 터다. 그러니 해주고픈 말이 있는데. 말해야 하는데.

 

“......”

 

어째서 이렇게 입을 열기가 힘든 건지.

 

“뭘 그렇게 봐?”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레이첼과 눈이 마주쳤다. 한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커피잔을 든 채였다.

 

“오늘따라 영 이상하네. 설마 예쁜 내 얼굴에 고장 났다던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의식과잉도 그만하면 병입니다.”

 

호라이즌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말하려는 건 이게 아니었는데.

 

“흥. 됐네요. 빈말이라도 맞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나.”

 

뾰로통하게 튀어나온 입이 그녀의 기분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갈수록 의도와 달라지는 상황에, 호라이즌은 차라리 침식체와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레이첼?”

“먼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호라이즌은 필사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오늘따라 예쁩니다’는 너무 면피용 발언 같고, ‘상처는 괜찮습니까?’ 이건 지금 상황에서 나올 말은 아니고, ‘사랑합니다. 레이첼’ 오글거려서 기각. ‘남자친구는 있습니까?’ 이딴 건 왜 떠오르는지.

 

컴퓨터의 연산 능력으로도 한참이 걸린 끝에, 그녀는 겨우 하고픈 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 밖에 꺼내는 건 또 다른 문제여서, 다시 한참 동안 우물거린 끝에.

 

오늘따라 얘가 왜 이러지- 하고 이쪽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황 머리의 소녀에게. 겨우 한 마디를 얘기할 수 있었다.

 

“...저와 함께해 줘서, 고맙습니다. 항상.”

“으응?”

 

잘못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종래엔 눈이 크게 뜨인다. 레이첼의 반응은 극적이어서 호라이즌은 뒤늦게 수치심으로 몸을 떨어야만 했다.

 

“우와. 호라이즌. 방금 뭐라고-”

“그냥 해본 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에이. 왜 이래~ 한 번만 더 해달라니까?”

 

고개를 돌려도 얼굴이 사라지질 않았다. 어딜 보아도 능글맞게 웃는 미소가 지워지질 않아서, 호라이즌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쿠당!

 

마음이 급한 까닭이었을까. 서둘러 움직인 탓에 다리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꼴사납게 넘어지고 나서, 호라이즌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당황했다. 전선에 쇼트가 발생할 수 있다던 햄스워스의 말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 야단났군요.”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저편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며 한 인영이 다가왔다. 양손에 그래피티용 스프레이를 들고 있는 그것은, 해맑게 웃으며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선택해. 호라이즌. 내 그래피티용 도화지가 될지, 아까 그 말 한 번 더 해줄지.”

“부정. 경고합니다. 레이첼은 지금 고용주에게 아주 부적절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손에 든 그거 내려놓으십시오.”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지. 오랜만에 샤레이드의 촉망받는 예술가 레이첼 도즈 님이 실력 발휘 좀 해볼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만두십시오. 레이첼. 잠깐.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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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이번 대회글은 완결임
첨에 구상했을 땐 좀 더 잘써보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뭔가 맘에 안들어서 고치고 다시 쓰고를 반복하다보니 중구난방이 되어버렸서...
일단 오랜만에 의욕을 불태우게 만들어 준 대회 주최자님께 감사하고 못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다들 복받으십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