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12 채널

상편

https://arca.live/b/ak12/32117651


헬리안에게 카리나의 퇴원 일정을 전해 받은 지휘관이 슬그머니 식당에 들어왔을 때, 식당에서는 마흐리안의 환영회를 포함한 인형들의 작은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지휘관님도 한 잔 어떠세요?"


우연인지 이미 어디선가 정보를 얻고 계산을 마친 것인지 군수지원에 나갔던 인형들도 참석해 있었고, 지휘관은 한층 더 날카로운 표정으로 연회를 지켜보는 G36의 눈치를 보며 스프링필드가 내미는 잔을 받았다.


"...말해두겠는데, 이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알아요, 지휘관님. 원래 지휘관님이 무사히 돌아오신 걸 축하하는 자리였거든요."


"저는 그 점에 대해서는 불만은 없지만, 마흐리안의 환영회를 한다고 몇몇 인형이 추가로 물자를 요청해 처음 상정한 것보다 더 많은 물자가 소모되었습니다."


스프링필드의 말에 G36은 눈매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이번에 사용한 물자는 사용 명세를 제출하면 보충을 요청할게. 그보다도, 실은 카리나가 내일 퇴원해서 돌아오거든. 그래서 둘에게 부탁할 게 있는데..."


G36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휘관은 두 사람에게만 들리게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거라면 가능하겠네요.""


"두 사람의 힘이 필요해. 스프링필드, 오늘 카페는 일찍 닫아도 좋아."


고개를 끄덕인 G36과 스프링필드의 말에 잔에 든 음료를 쭉 들이켠 지휘관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마흐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잘 마셨어, 스프링필드."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것을 깨달은 지휘관은 스프링필드에게 잔을 돌려준 뒤, 인파를 헤치고 마흐리안에게 다가갔다.



"누구를 찾던 것 같았는데."


연회가 끝나고, 다시 한번 마흐리안을 심층 검사하고 싶다는 페르시카의 연락에 연구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던 중 지휘관은 문득 생각난 듯 마흐리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카리나라는 분을 찾고 있었어요."


"카리나?"


"네. 베를린에 있었을 때, AR팀이 말해줬어요. 로빈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카리나는 내일 퇴원해. 네가 준 치료제 덕분이야. 그리고, 나에겐 모두가 다 소중한 사람이야. 카리나도, AR팀도, 다른 인형들도. 그리고 마흐리안 너도." 


"...왜 다들 로빈을 따르고 좋아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눈 앞에서 말하기 쑥스러웠는지 마흐리안에게 등을 보이며 대답한 지휘관의 말에 마흐리안은 얼굴을 붉혔다.


"저는 모두가 소중하면, 진정 소중한 사람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로빈의 모두가 소중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흐리안의 말에 지휘관은 한쪽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했고, 마흐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지휘관의 반대쪽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여기가 제 레벨2 플랫폼인가요?"


"맞아." 


페르시카의 인도에 의식을 레벨2 플랫폼으로 내린 마흐리안이 본 것은 본 마을이었다.  


"마치 옛 기억을 회상하는 것 같아요."


아무도 없는 의식 속의 본 마을을 마흐리안은 조심스럽게 걸었다. 이 마을에서 마흐리안은 엘사를 만났고, 로빈을 만났다.


"이상은 없지?"


"네."


"그럼, 이제 의식 레벨을 3까지 내릴게. 조심해, 너의 의식 밑바닥에 무엇이 있을지는 너도 모를 테니까."


페르시카의 말과 함께 본 마을이 사라지고, 마치 기억세척을 받을 때처럼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마흐리안의 주변에는 그저 희미한 가루만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건..."


또각... 또각... 또각...


희미하게 떠다니는 가루의 정체를 파악한 마흐리안은 저편에 울리는 구두 소리에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구두 소리가 점차 크고 가깝게 울릴수록, 어둠만이 존재하던 공간은 서서히 형체를 바꿔, 어느덧 주위는 혈청 제조 시설의 출구 근처로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언니."


"몰리도..."


구두 소리가 멈추고, 빛이 새어 나오는 출구를 등진 채 마흐리안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몰리도를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죽이고 반쪽짜리 정신까지 완전히 거둬들였는데 설마 인형으로 되살아날 줄이야."


"왜 네가 여기 있는거야..."


몰리도의 말 한마디마다 찔렸던 가슴이 아파진 마흐리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언니의 영혼 반쪽은, 제 영혼이기도 하다구요?"


"......"


등에 장착한 기계 팔을 움직이려는 몰리도의 모습에 마흐리안은 긴장했지만, 몰리도는 공격할 기색이 없었다. 


"바보 같은 언니, 언니는 아직도 자기가 인형 소체에 영혼을 넣어졌다고 믿나요?"


"......"


몰리도의 말에 마흐리안은 눈을 감았다.


"말이 의식 데이터고 영혼이지, 실제로 있는지는 누가 아나요? 언니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기억 흔적을 긁어모은 인형일 뿐이에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로빈은 나를 믿어."


다시 눈을 뜨고, 레벨2 플랫폼에 도달하고, 몰리도까지 대면하면서 고민은 깊어졌지만, 대답하는 마흐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로빈은 마흐리안을 믿는다. 그런 로빈을 마흐리안도 믿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몰리도가 아니야. 몰리도는 이미 죽었어."


"언니!"


"내 앞에 있는 건, 아직 무의식에 남아있는 몰리도에 대한 두려움뿐이야."


연구실에 누워있던 몰리도의 시체를 떠올리며 다시 눈을 뜬 마흐리안의 말에 몰리도는 점차 부서져, 시체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갔다. 


"나는 이제 더는 두렵지 않아."


마침내 눈이 녹듯 사라진 몰리도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며, 마흐리안은 그때 나가지 못했던 출구를 향해 걸었고, 출구를 통과한 순간 의식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꺄아~"


검사가 끝난 후, 마흐리안에게 기지를 안내하던 지휘관은 환호성을 지으며 뛰어다니던 안나와 충돌할뻔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괜찮아, 보스?"


부딪힐뻔한 안나의 머리를 지휘관이 쓰다듬어주고 있을 때, 저 멀리서 VSK-94가 다가왔다.


"VSK-94구나. 뭐 하고 있어?"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있었어."


VSK-94가 왔기 때문인지, 주변의 아이들이 다 이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은..."


"패러데우스 실험실에서 데려온 아이들이야."


"내 이름은 안나야. 새로운 언니는 이름이 뭐야?"  


지휘관의 대답에 머리를 쓰다듬어지던 안나는 마흐리안을 보며 물었다.


"나는... 마흐리안이라고 해."


"그럼 마흐리안 언니라고 부를게."


안나의 말에 마흐리안은 더는 말하지 않고 안나를 꼭 안았다. VSK-94는 그 모습을 보며, 부러움에 몸을 떨었다.



늦은 밤, 그리폰 소대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자던 마흐리안은 꿈을 꾸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꿈은 꾸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을 때 페르시카에게 들었던 말을 생각해보면서, 마흐리안은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왔다. 


"로빈?"


"지휘관님이 아니라 실망했어?"


자판기에 가서 스팀 밀크를 뽑아 마시던 마흐리안은 익숙한 제복의 끝자락이 보여 지휘관을 불렀지만, 나타난 것은 댄들라이였다. 


"아뇨. 저도 당신에게 여러모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감사라면 돌아온 M4한테나 하렴. M4라면 너를 믿었기에 나도 믿었고, 그때 M4가 아니었으면 네 영혼을 몰리도에서 되찾기는커녕 다 같이 따라갔을걸."


"하지만 페르시카에게서 로빈을 설득한 건 댄들라이, 당신이라고 들었어요."


"그건 그냥 페르시카가 지휘관님한테 혼나는 걸 말린 거야. 나도 원래 생각은 그때의 지휘관님이랑 별로 다르지 않아."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뜻이야. 아이들은 버려졌고, 구원받았어. 너도 이 아이들처럼 버려졌으니,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을 거야. 그래서, 너는 구원받았어?" 



"충분히요."


마흐리안의 대답에 댄들라이는 다시 조용히 떠났고, 식어버린 스팀 밀크를 마저 홀짝거린 마흐리안은 다시 방에 들어가 누웠다. 이번 잠은, 꿈 없이 평온했다.



"지휘관님, 오랜만이네요. 카리나, 복귀했습니다."


"그러게. 어서 와, 카리나."


다음날, 카리나가 헬기를 타고 기지에 복귀했다. 지휘관실에 와서 복귀를 신고하는 카리나는 오랜 투병 생활 탓인지 조금 수척해졌지만, 변함없는 씩씩한 모습에 지휘관은 조금 안도했다.


"제가 없어서 큰일이었겠어요."


"말도 마.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처음엔 완전 정신없더라." 


"하나뿐인 보급관을 너무 혹사시켰다니까요, 지휘관님은. 그래서 할 일 있나요?"


"말은 고맙지만, 카리나는 한동안 휴가야."


"네?"


"막 퇴원한 사람한테 일을 시킬 수 없잖아."


"하지만..."


"카리나한테 휴가를 주는 건 내 뜻이기도 하지만, 헬리안 씨의 뜻이기도 하고, 크루거 씨의 뜻이기도 해. 카리나도 나는 몰라도 사장님의 뜻을 무시할 생각은 아니겠지?"


"...알겠어요. 하지만 나중에 죽는소리 하셔도 일 안 할 거에요."


"괜찮아. 어느정도 요령이 생겼으니까. 그리고, 소개할 사람이 있어."


지휘관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마흐리안이 앞에 나왔다.


"...마흐리안이라고 해요."


"카리나에요. 지휘관님, 이분은?"


"카리나가 입원 중일 때 베를린에서 만났는데, 너한테 복사감염증 치료제를 준 사람이 마흐리안이야."


지휘관의 말에 카리나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카리나는 마흐리안을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정말 괴로워서... 하마터면 죽을뻔했어요..."


울음을 터트리며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카리나에게 안긴 마흐리안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드려주었다.



"완전히 새빨개졌네. 퇴원했는데 그렇게 울면 안 되지."


시간이 좀 지나고, 실컷 운 것으로 속이 후련했는지 울음을 그치고 마흐리안에게서 떨어진 카리나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지휘관님은 제가 얼마나 아팠는지 모를 거에요." 


"저처럼 로빈도 부분면역체니까요."


"뭐에요, 그 주인공 같은 설정!"


"G36, 카리나가 복귀했어." 


지휘관의 말에 뾰로통한 표정으로 쏘아대는 카리나의 말에 지휘관은 고개를 저으며 G36에게 통신을 보냈다.


"격리되고 나서 제가 얼마나..."


"카리나 씨, 퇴원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희가 드리는 축하 선물입니다."


지휘관의 통신을 받고 지휘관실에 온 G36은 선물 상자를 하나 들고 나타났다. G36의 등장에 지휘관을 쪼아대는 것을 멈춘 카리나는 G36이 건넨 선물 상자를 열어보았고, 안에서는 화려하게 장식된 케이크가 나왔다.


"맛있겠다..."


"저와 스프링필드가 만들었습니다. 스프링필드가 카페에서 카리나 씨가 좋아하는 음료를 만들고 있으니, 먹는 것은 카페에서 하길 권해드립니다."


"그래? 그러면 마흐리안 씨, 같이 가서 먹어요."


"그래도 되나요?"


카리나의 말에 마흐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하지만, 지휘관님은 안 돼요. 일이나 하러 가세요."


"먹고 싶다고 한 적도 없잖니."


카리나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지휘관은 갔다 오라는 듯 마흐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 씨."


"응?"


"바로 가는 것도 좋지만, 일단 세수를 하고 가시는 게 어떨까요?"


"윽... 제 얼굴, 많이 엉망인가요?"


"...조금은요."


신나서 마흐리안을 끌고 카페에 가려던 카리나는 G36의 말에 마흐리안을 보며 물었고, 조심스럽게 긍정하는 마흐리안의 대답에 카리나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갔다 올게요."


"매번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언제나 여기에 있으니까."  


지휘관의 말에 마흐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세수를 마친 카리나와 함께 카페로 이동했다. 


"주인님. 어제 있었던 연회에 목적으로 인형들이 반출을 요청한 물자 명세서입니다."


"그래. 그런데 여기 술의 비축분에 변동이 있는데, 어제 연회엔 술이 나온 적이 없어. 낮의 연회엔 술을 허가한 적도 없었고."


"술의 반출을 요청한 인형들의 목록을 조사해서 제출하겠습니다."


"아니, 보고할 필요는 없어. 대신 조사하는 대로 이번에 반출한 술은 다음 배급에서 까고, 추가적인 술 보충은 다다음 정기 보충 전에는 없다고 통보해. 그 외 물자에 대해서는 보충을 요청하도록 할게."


"알겠습니다."  


카리나와 마흐리안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지휘관은 G36에게 어제 있었던 연회의 명세서를 받았고, 지휘관은 그것을 검토하면서 G36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휘관님은 도통 여심을 모른단 말이에요."


마흐리안과 카페를 가면서, 카리나는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배려심 있고 친절하니, 오히려 그런 점도 로빈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네?"


카리나의 물음에 마흐리안은 수줍게 미소짓더니, 마치 비밀이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그 행동에 살짝 배어 나오는 색기에 카리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보다도, 마흐리안 씨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케이크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한 가지 말한다면, 로빈은 처음 만났을 때도 위기에 처해있던 저를 구해주었죠."


"아까부터 말하는 로빈이라는 이름, 지휘관님이죠?"


"맞아요. 그게 진짜 이름은 아니지만, 제게는 진짜 이름이나 다름없답니다. 그보다도, 카리나 씨."  


"네."


"저는 카리나 씨가 아는 로빈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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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을 잃어버린 잿빛에 나는 천사의 이름을 붙였다


백을 잃어버린 잿빛에 나는 악마의 이름을 붙였다


아무것도 아닌 잿빛에 나는 인간의 이름을 붙였다


마흐리안이 카리나를 만나는것까지 써서 한 편 완성하는게 원래 목표였는데 , 제시간에 못맞출거같아서 나눈김에 조금 더 썼음. 



페르시카가 지휘관 몰래 마흐리안의 소체랑 마인드맵을 만들었고, 지휘관이 마흐리안을 인형으로 살리는걸 반대하는것을 댄들라이가 마흐리안의 영혼이 아직 남아있다고 설득해서 마흐리안의 부활이 이뤄졌다는 설정인데, 그걸 어느정도 암시해야할 지휘관 파트를 날리다 보니 상편에 제대로 표현이 안되서 그 설정은 하편에 반영함.


출처

https://gall.dcinside.com/m/gfl2/4953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