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로서 굉장히 특이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먼저 극한의 부조리극이라는 점이 이 작품이 다른 작품과 가장 큰 차별점인 것 같아.

다른 작품의 경우에는 등장인물들에게 부조리함이 주어진다 할 지라도 그건 결국 서사를 돋보이게 하는 스파이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

근데 이 작품은 부조리를 서사의 주요 요소로 채택했더라고.


그리고 이 작품은 부조리를 정보 공개의 방식으로 잘 활용한 것 같음.

이 작품의 구조는 대충 (어떠한 사건이 발생 - 주인공이 그 사건을 해결하려 함 - 부조리한 운명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지 못 함)의 구조가 반복되는데,

여기서 부조리한 운명에 부딪힐 때 마다 설정이 하나씩 공개되는 점이 좋았음.

그 덕에 이 작품은 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구조가 반복되고 저항해 봤자 똑같은 결과로 수속되는 부조리함 밖에 없지만 그 부조리함에 익숙해질 겨를이 없었음.


또한 부조리한 극을 진행하는 와중에 떡밥을 계속해서 던져서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추론하게 만드는 부분도 좋았음.

예를 들자면 리오의 흡혈귀 에피소드에서 야미코가 리오에게 한 명령이 언급되는데,

그 명령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하고 추론을 유도함.

그 이후에 '종이 위의 존재'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형식임.


또한 중간중간에 반전을 터뜨려서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켜버리는 것도 아주 좋았음.

물론 이것도 결국 부조리한 상황을 부여하는 장치이긴 함.

근데 이 반전이라는 것이 아주 완성도가 높더라고..

반전의 복선이 아주 철저하게 깔려 있었는데 다 가르쳐 주긴 했지만 그걸 애매하게 만들어서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 훌륭했음.

그래서그런지 반전 하나 터질 때마다 감탄하면서 했음.


가장 인상에 남는 부분은 주인공인 루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였음.

키사키가 죽은 사건 이후 크리소베릴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 직후가 굉장히 애매하게 묘사됨.

그리고 막무가내로 1년을 뛰어넘고 이야기를 진행함.

그리고 크리소베릴이 등장할 때마다 주인공의 기억이 애매해지는 묘사를 넣어서 기억이 애매한 것이 크리소베릴이라는 인물이 지니는 특성으로 인식시킴.

그러나 다른 경우에서는 크리소베릴이 제시한 정보 자체는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루리가 오닉스에 대한 정보를 잊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였음.

그런 식으로 키사키가 죽은 이후에 루리라는 인물 자체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모순점 또한 알려줘서 추론할 수는 있게 했음.

이런 식으로 다 알려주지만 그걸 알아내기는 어렵게 한 것이 마치 추리소설 같았는데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함.


그리고 내가 이 작품이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판타지 세계관임에도 불구하고 영구한 죽음이 적용되는 점과,

그로인해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어둡다는 점 이었음.

원래 마법 같은 설정이 있는 작품에서 극적인 전개를 위해 히로인이나 주인공을 죽이는 연출을 쓰곤 함.

근데 그러한 경우에는 마법의 힘으로 결국에는 부활하는 경우가 많음.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모든 인물에게 영구한 죽음이 적용됨,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는 거임.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허구한 날 메인 인물들을 죽이고 다님.

애초에 제일 먼저 죽은게 메인 히로인 중 한 명 이었으니 말 다한거지 뭐...

거의 모든 창작물에서는 주요 등장인물은 안 죽으니까 이 점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음.


마지막으로 특이했던 점은 주인공의 히로인과 서사의 히로인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 이었음.

이 작품 전체 서사의 주인은 누가봐도 유교지 요루코였음.

애초에 제목과 가장 연관성이 가장 높은 친구가 요루코임.

그래서 스토리는 요루코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요루코가 정신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남.

그러나, 주인공인 시죠 루리의 히로인은 히무카이 카나타라는 점이 신기했음.

사실 카나타는 다른 미연시에서는 서브 히로인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음.

카나타 자체가 서사의 중심 소재의 마법의 책과는 가장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음.

그래서 그런 인물이 주인공과 맺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음.

그런데 진엔딩에서 루리의 여자친구 자리는 카나타가 차지하고 있어서 굉장히 신선했음.


이러한 이유로 이 작품은 매우매우 특이한 작품이고 내가 미연시라는 작품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부숴 준 작품인 것 같음.

그만큼 이 작품은 특이한 작품이라고 생각함.

개인적으로 이정도로 특이한 작품은 스바히비를 제외하면 이 작품이 유일한 것 같음.

스바히비의 경우에는 미연시의 장르적 특성은 기본적인 틀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단 하나도 미연시의 형식을 따르는 것이 없었음.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정도로 이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유저들이 '당연히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을 보란듯이 깨부수는 작품이었음.


이 작품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요루코의 마지막 서사를 풀 때 같은 내용이 너무 많이 반복되어서 살짝 지루했다는 것 뿐이었음.

그러나 그것 이외의 서사는 완성도가 훌륭했고 자주는 먹기 싫지만 가끔 먹기엔 더할 나위 없는 별미인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