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실시한 실지주 인기투표 우승자(아야노코지 키요타카), 준우승자(사카야나기 아리스) 대상으로 써본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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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게 빛나는 실내조명.

 

 

그 아래 한 칸짜리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저는 아야노코지 군과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그저 상대와 함께 차례대로 기물을 놓을 뿐인 행위.

 

 

하지만 그러한 저희의 얼굴엔 필사의 진심어린 표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잡을 수 있을까요?'

 

 

탁!

 

 

'살 수 있을까요?'

 

 

탁!

 

 

그런 교차할 수 없는 서로의 바람이 64칸의 흑백보드 위에서 어지러이 춤춥니다.

 

 

 

마주앉은 아야노코지 군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흐르는 것이 보입니다. 

 

 

그 이상으로 저의 호흡 또한 가빠집니다.

 

 

한 수 한 수에 서로간의 전략을 파훼하고, 견제하고, 꿰뚫기를 수차례.

 

 

더없이 가속되는 저의 의식 너머로 끊어질 것 같은 긴장감과 황홀함이 몰려옵니다. 

 

 

부디... 이 순간이 계속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너무나도 빠르게 다가온 종국.

 

 

서로의 시선이 보드 위로 교차합니다.

 

 

‘아야노코지 군. 당신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이 요동치는 침묵 속에서 저희 대국의 마지막 기보가 #(체크메이트)로 장식됩니다.

 

 

 

 

 

 

아야노코지와 사카야나기의 주말 - coffee & chess

 

 

 

 

 

 

1시간 30분 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주말.

 

 

학생들이라곤 전혀 없는 고요한 학교 안. 창가에 토독토독 튕기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이 복도를 잔잔하게 매우는 적막한 오후였다. 

 

 

그런 고요함을 찢고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어느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교복을 갖춰 입은 것은 지금 내가 나오는 곳이 이사장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말이라 한들 이사장을 뵙는 자리에 최소한의 격식은 차려야 한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

 

 

그리고 그런 나의 뒤로...

 

 

“주말에까지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버지.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학교에서 이사장을 유일하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학생, 사카야나기 아리스가 내 뒤에서 이사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카야나기에 대한 이사장의 인사는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인가. 

 

 

문 옆에 잠시 선채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러고 있자니 조금 전 사카야나기 이사장과 나눈 말들이 머릿속에 지나간다.

 

 

‘화이트 룸... 움직이기 시작했나?’

 

 

이런 주말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굳이 이사장실에까지 나를 부른 것은,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되는 이야기가 주제였기 때문이다.

 

 

우선은 법적상 나의 학부모인 아츠오미로부터 투고된 '아야노코지 키요타카에 대한 퇴학 요청 탄원서'.

 

 

복잡한 절차가 되겠지만, 결과적으론 나의 의사에 반해 내가 퇴학당할 일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주제였다.

 

 

동시에 일전의 시바 선생과도 같이 이 학교에 있을지 모를 화이트 룸의 사람들을 찾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이사장의 설명이 두 번째 주제.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이사장 특유의 차분한 태도와 사카야나기의 보조가 맞춰져 물 흐르듯 진행된 30분가량의 면담이었다.

 

 

비록 주말의 일부분을 할애해야 했지만, 그 정도의 가치는 있는 시간이었다고 자평하고 있자니, 곧 다시 한 번 문이 열리며 사카야나기가 걸어 나왔다.

 

 

지팡이를 짚은 그녀가 나오기 편하도록 문을 잡아주자 자연스레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런 나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사카야나기가 입을 뗐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아야노코지 군. 주말에까지 쉬시지도 못하고 불러내버렸군요.”

 

 

“괜찮아, 어차피 나의 일인걸.”

 

 

그 말대로 결국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나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나의 일에 사카야나기의 주말을 소비하게 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테지.

 

 

“의외로 차분하시네요. 가끔가다 느끼는 거지만, 아야노코지 군은 화이트 룸에 대해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두려워한다.. 내가?”

 

 

“아니신가요?”

 

 

그런 모습은 사카야나기의 앞은 물론, 이 학교 어디서도 보인 적이 없다. 

 

 

이것은 사카야나기가 던져오는 일종의 콜드리딩인가?

 

 

“두렵지 않아. 어차피 1년 정도 후면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니까. 각오는 되어 있어.”

 

 

그런 담담한 발언. 아무런 거짓도 꾸밈도 없이 솔직한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런 나의 말에 어딘가 복잡한 심정인 듯 사카야나기가 나지막이 전해온다.

 

 

“... 알고 계시겠지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 반드시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야노코지 군. 당신에게... 그곳으로 돌아가셔야 할 의무는 없어요.”

 

 

“하지만 목적지로 향하는 최단의 경로는 언제나 하나뿐이지.”

 

 

짧은 한 마디씩을 주고받았지만, 그 안에 서로간의 인식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을 짐작한다.

 

 

어딘가 씁쓸한 듯한 표정은 지우지 못했지만, 그것을 이해한 듯 사카야나기도 더 이상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짧은 사담을 더 나눈 후 사카야나기가 새롭게 운을 뗐다.

 

 

“그건 그렇고, 혹시 지금부터 다른 일정이 있으실까요, 아야노코지 군?”

 

 

“글쎄, 딱히 생각해둔 것은 없어.”

 

 

확실히 애매하군. 

 

 

고요하게 비가 내리는 오후 3시. 너무나 애매한 시간이다. 

 

 

가령 식사를 하기에도,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도, 끝내기에도 말이지. 

 

 

그런 나의 고민 뒤로 사카야나기가 그녀답지 않게 쭈뼛대며 무언가 말을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야?” 

 

 

“음... 그러니까...” 

 

 

마음을 다잡듯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사카야나기가 주저하듯 말했다. 

 

 

“얼마 전 케야키 몰 신관에 보드게임 카페가 새로 입점했다는 걸 알고계신가요?” 

 

 

“음, 그러고 보니 한동안 공사 중이었던 것 같네. 뭔가 특별한 점이라도 있는 거야?” 

 

 

“... 그러니까... 보드게임도 즐기면서 커피도 한 잔할 수 있는 그런 곳이랍니다? 바리스타분의 실력도 훌륭하시고요.” 

 

 

“괜찮은 카페겠네. 나름 아이디어를 잘 냈다고 생각해.” 

 

 

바야흐로 다양화 전략의 시대. 한 가지 업종에만 얽매이지 않는 발상은 분명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시선을 피하며 그런 정보를 말하던 사카야나기가 이제는 왜인지 뾰로통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답지 않게 살짝 볼을 부풀리는 것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 아야노코지 군은 이런 면에선 참으로 둔감한 분이시군요.” 

 

 

“둔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편안한 주말되시길...” 

 

 

그리고는 조용히 돌아서서 텅 빈 복도를 사카야나기가 홀로 걸어갔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사카야나기의 뒷모습. 지팡이 끝에 실리는 힘으로 보건데 시무룩하고 힘이 빠진 모습이다. 

 

 

사실 나라고해서 그런 말을 꺼낸 사카야나기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난 그저 사카야나기의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런 그녀를 뒤따라가 불러 세운다. 

 

 

“사카야나기?” 

 

 

우뚝 멈춰선 채 돌아보지 않는다. 

 

 

“괜찮다면 지금부터 잠깐 시간 좀 내줄래? 네가 말한 그 카페, 나도 한 번 가보고 싶은데 말이지?” 

 

 

부들부들 떨리는 사카야나기의 뒷모습. 

 

 

천천히 돌아서는 그 모습은... 역시나 웃음을 참고 있었나? 

 

 

“쿡쿡쿡... 이런 이런, 데이트 신청이라니. 영광이네요, 아야노코지 군.” 

 

 

“음...? 아니... 그런 말은 한 적 없...”

 

 

“그 제안,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가시죠, 아야노코지 군.” 

 

 

뿌듯한 듯 고개를 살짝 치켜 올리며 앞장서는 사카야나기의 지팡이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맑게 울린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던 걸까?

 

 

어쩌면 시무룩해하던 뒷모습마저 사카야나기의 의도였던 건...?

 

 

여전히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사카야나기의 뒤를 따라 나는 학교의 밖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30여 분 후.

 

 

사카야나기와 함께 그녀가 안내해준 보드카페에 들어선다.

 

 

아무래도 걸음이 불편한 사카야나기와 동행하다 보니 이동시간이 길어진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사카야나기의 걸음이 이 정도로 느렸던가?’

 

 

아무리 비가 와서 그녀의 우산을 들어줬기로서니, 생각보다도 도착이 지연된 기분이 든다.

 

 

덕분에 사카야나기와의 대화 시간은 차고도 넘쳤지만...

 

 

“이런... 벌써 도착했나요?”

 

 

오히려 사카야나기는 도착이 아쉽다는 반응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사카야나기 너 혹시...”

 

 

... 아니 추궁을 하려해도 증거는 없다. 

 

 

얼마 전 우연히 보았던 용의자인 절름발이가 마지막에 뚜벅뚜벅 걸어가던 반전영화처럼 사카야나기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흐음? 무슨 말이실까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생긋 미소 짓는 사카야나기에게 결국 추궁하기를 포기했다.

 


 

 

그런 나의 코끝을 어느새 깊고 진한 커피향이 사로잡는다.

 

 

내가 바리스타라도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숫하게 다녔던 카페에서와는 또 다른 향이 느껴진다. 

 

 

‘무언가 색다른 원두라도 취급하는 걸까?’ 

 

 

치이익 하고 증기를 뿜는 커피머신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덧 우리의 주문차례가 다가왔다.

 

 

보아하니 진열된 다양한 원두들 중에서 자신이 직접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방식인 것 같았다.

 

 

“그럼 천천히 골라보세요, 아야노코지 군. 데이트 신청은 당신이 하셨지만, 장소를 정한 것은 저이니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내가 좀 미안한데?” 

 

 

“오늘 당신의 주말시간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주시죠.” 

 

 

보아하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다. 

 

 

여기서는 사양하는 것도 실례이려나?

 

 

“흐음... 그럼 고맙게 마실게. 하지만... 원두인가?” 

 

 

원두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어느 정도 있지만 직접 눈앞에 놓고 고민하게 되는 건 처음이군. 

 

 

미간을 약간 찡그린 채 고민하는 내 모습이 볼만한 듯 한동안 옆에서 미소를 지은 채 사카야나기가 나를 응시했다. 

 

 

“후후후 계속 지켜보고 싶지만, 그 이상 고민하시면 너무 지연되겠네요. 괜찮다면 제가 추천해드려도 될까요?”

 

 

추천인가? 확실히. 사카야나기의 추천이라면 받아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 그럼 미안하지만 부탁할게.” 

 

 

“그럼, 모처럼이고 하니 블라인드로 대접해 드리죠. 부디 자리에 먼저 가계시길.” 

 

 

블라인드라... 무슨 원두인지 모르고 마시는 것도 하나의 여흥이 될 수 있겠지. 

 

 

순순히 그녀의 제안에 응하며 자리를 잡기 위해 카페를 한 바퀴 둘러보자 그럭저럭 괜찮은 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개방된 자리,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자리들을 제외하고 카페 구석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을 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잠시 후 주문을 마친 사카야나기 또한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와 내 앞자리에 착석했다.

 

 

“그래서. 사카야나기?” 

 

 

“말씀하시죠. 아야노코지 군.”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뭐지?” 

 

 

“이유... 말씀인가요?” 

 

 

“그래. 뭔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나를 부른 것 아냐?” 

 

 

나의 그런 질문에 사카야나기가 작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이런.. 후후 잘못짚으셨네요. 오늘은 정말 별 목적 없이 아야노코지 군과 시간을 보내고자 모신 거랍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응시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정 목적이 필요하시다면... 그렇군요. 아야노코지 군 당신과 차 한 잔을 나누고 싶어서 그랬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 그런가?” 

 

 

사카야나기 치고는 꽤나 싱거운 이유로군.

 

 

동시에 어디까지가 그녀의 농담이고 진담인지도 애매해진다.

 

 

그야 그럴게, 별다른 이유 없이 남녀가 주말에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야 마치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카페점원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주문한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커피머그가 가볍게 흔들리며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고, 동시에 사카야나기의 의도를 생각하던 것도 잊을 만큼 깊은 향기가 퍼져 오른다. 

 

 

‘과연... 사카야나기가 고른 카페인가.’

 

 

잘 마시겠다는 감사의 말과 함께 커피잔을 살며시 집어 들었다.

 

 

‘모처럼이고 하니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맛을 음미해보도록 할까?’

 

 

찻잔을 들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향을 코에 담자 진한 커피향기가 머리를 사로잡는다.

 

 

조심스레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그 상태로 코로 숨을 내쉬자 꽃 같기도 하고 과일 같기도 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혀 위에 솟아나는 상큼한 산미를 느끼며 이윽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한 모금의 액체가 진한 바디감을 남긴다. 

 

 

과연... 사카야나기가 굳이 이곳까지 데려와서 대접한 의미를 알 것 같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먹는 커피가 아니라는 걸 그 한 모금만으로도 알 수 있으니까.

 

 

“어떻게, 제가 골라드린 커피는 입에 맞으실까요?”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사카야나기의 질문.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 문득 데자뷰가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사카야나기?”

 

 

“흐음? 얼마든지요, 아야노코지 군.”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나의 말이 기쁘다는 듯 싱긋 웃는 사카야나기에게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키고는 물었다.

 

 

“일전에 내 방에 찾아왔을 때... 몽블랑을 들고 방문했었지?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에는 쇼트케이트를 들고 방문했었고.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말을 들었던 거 같아서.”

 

 

머릿속에 쇼트케이크를 사이좋게 나눠먹는 모습과 몽블랑을 포크로 잘라 내게 건네는 사카야나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사카야나기의 머릿속에서도 같은 장면이 재생되고 있겠지.

 

 

“순전히 궁금해서 묻는 거다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가령 그것으로 내 심리를 분석하기라도 한다든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해서 말이지.”

 

 

그다지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사카야나기에게는 흥미로운 소재로 다가온 것 같았다.

 

 

“과연... 그렇게 느끼고 계셨군요, 아야노코지 군은?”

 

 

이번에는 사카야나기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말을 이어나간다.

 

 

“사실 별 이유는 아니랍니다. 그저 아야노코지 군의 호불호를 알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그런 호불호를 아는 것에 별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매정하기도 하셔라.”

 

 

나를 타박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장난스런 사카야나기의 미소로 보았을 때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것 같다.

 

 

“그럼 조금 더 솔직하게 답을 해볼까요?”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거두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한순간 그 미소의 성격이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야노코지 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라고 대답한다면 납득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저 눈만을 깜빡일 뿐 뭐라 대답할 말이 없다.

 

 

사카야나기 또한 이번에는 잠시 내 눈을 피한 채 다시 한 번 커피를 홀짝일 뿐.

 

 

하지만 그런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사카야나기가 이내 후훗 하고 웃어버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후훗. 아야노코지 군? 본인의 반에서도 보셨겠지만, 사람들이 서로간의 관계를 다져갈 땐 특별할 게 없답니다. 그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로 관계의 초석을 다지는 거라고요?” 

 

 

확실히... 히라타, 쿠시다, 케이와 같이 많은 친구를 보유한 학생들이 그런 식으로 새 친구들과 관계를 시작하는 걸 본 기억이 난다. 

 

 

사람과의 관계는 개개인의 생각이나 선호에서부터 발전해나가기 쉬운 법이니까.

 

 

하지만 과연 그것이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일까? 

 

 

“모르겠네.... 선호라느니, 기호라느니 크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 그런 것을 명확히 단정할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가령... 커피에 대한 지식만이라면 그래도 여느 대화에 낄 정도의 양은 익히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커피는 결국 본인의 입맛에 맞춰 섭취하는 기호식품. 그런 식품을 머릿속의 지식만으로 즐기기엔 한계가 있는 게 당연하다.

 

 

고도 육성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기회가 될 때마다 다양한 커피를 마셔봤지만... 객관적인 맛의 차이만을 구분할 뿐, 그 안에 나의 주관적인 선호나 호불호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저 기계로 답을 내듯, 향이 어떤지, 산미가 어느 정도인지, 바디감이 어떠한지... 그런 '측정'만이 있을 뿐, 거기에 결코 '기호'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금도... 내 입에 잠시 머금은 커피의 향과 맛이 다른 커피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좋아하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쉽사리 답할 수 없다.

 

 

이것은 어릴 적 화이트 룸에서 나에게 당근을 좋아하는지 묻던 유키라는 소녀의 물음에 대해 답을 할 때부터 그래온 것이니까. 

 

 

그런 작은 번뇌에 빠져있으려니, 사카야나기로부터 신선한 대답이 돌아왔다.

 

 

“별로 어려울 것 없는 대답이군요, 아야노코지 군.”

 

 

다시 한 번 찻잔을 든 사카야나기가 기품 있게 향을 음미하고는 잔잔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애초에 선호라는 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랍니다.”

 

 

“아니... 그러니까 나에게는...?”

 

 

“그럼 이렇게 다시 묻도록 하죠.”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는 사카야나기가 양손을 포갠 후 살며시 턱을 받친 채 요염한 미소로 물어왔다.

 

 

“아야노코지 군은 방금 음미 하신 그 커피를 언젠가 다시 마셔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또 의외의 질문. 

 

 

의외이긴 하지만, 어려운 질문은 아니기에 커피잔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나의 생각을 말한다.

 

 

“그렇다고... 생각해. 음, 아마도 말이지?”

 

 

“흐음... 사족이 붙긴 했지만, 후후후 그것 또한 아야노코지 군의 매력이겠지요. 음식에 대한 선호, 취향이라는 건 그런 것부터 시작하는 거랍니다. 다른 생각 없이 그저 ‘또 맛보고 싶은가’, ‘다른 사람에게도 대접하고 싶은가’ 그런 솔직한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 건가?”

 

 

“예. 그런 거랍니다.”

 

 

이해 할 수 있을 듯 하면서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명한 사카야나기가 하는 말이다. 분명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도움이 되는 말일 테니 우선은 기억해 두기로 하자.

 





잠시 커피에서 시선을 땐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드카페라는 곳은 처음 와봤지만, 그것만으로도 이곳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알 것 같았다.

 

 

4인용 테이블에서 블록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빼내는 학생들의 모습. 틀림없이 젠가라는 이름의 게임이었던가?

 

 

중앙의 커다란 홀에서는 테이블축구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책장의 너머에서는 중앙에 종을 놓고 할리갈리 게임을 하는 성인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제각각 하는 게임은 달랐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다들 즐거워 보이죠, 아야노코지 군?”

 

 

나의 시선을 진작에 읽고 있었던 듯 사카야나기가 그런 질문을 던진다.

 

 

“모처럼 방문한 보드카페이니, 뭐라도 즐겨보시는 게 어떨까요?”

 

 

“흠, 그럴까...?”

 

 

솔직히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사카야나기의 권유로 오긴 했지만, 나 혼자였다면 올 일이 없는 보드카페. 그렇다면 기왕 온 김에 뭐라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다시 한 번 카페의 내부와 보드게임 장식장을 둘러보았다. 

 

 

당구, 바둑, 트럼프카드, 클루, 모노폴리, 젠가, 도미노, 장기... 의외로 경험해본 적 있는 보드게임들도 많았다.

 

 

새로운 게임을 알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사카야나기와 즐기기 위해서는 기존에 해본 적 있는 익숙한 보드게임이 좋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던 나의 눈에... 

 

 

“...흐음?”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에서 목표로 삼은 물건을 꺼낸다.

 

 

보아하니 나무를 깎아 만든 제법 고풍스런 핸드메이드 보드와 기물들인 것 같았다. 

 

 

“역시 우리 사이에는 이거 아닐까?” 

 

 

테이블 위에 툭하고 고풍스런 64칸짜리 흑백보드를 내려놓는다.

 

 

그와 동시에 사카야나기의 눈동자가 오늘하루 한 번도 본적 없는 빛으로 일렁인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1학년말 특별시험 때와 같이 승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빛나는 눈빛이었다. 

 

 

“체스... 인가요!”

 

 

거의 1년만인가? 사카야나기의 앞에 체스판이 놓이는 것을 보는 것은. 

 

 

물론 그동안 혼자서도 기보를 늘어놓는 등 실력을 쌓아온 듯하니, 그때와는 또 다른 기량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후후 괜찮으실까요? 아시겠지만... 아주 진지한 승부가 될 거라고요? 오늘은 그저... 아야노코지 군과 가볍게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습니다만?”

 

 

그런 말과 달리 사카야나기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흥분감이 퍼져 나온다.

 

 

확실히. 우리 둘의 기량으로는 아무리 가볍게 둔다고 한들 결국엔 진지한 승부가 될 수밖에 없다.

 

 

비록 그날의 승부 이후 체스는 즐거운 오락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것이 사카야나기의 바람이었지만, 막상 체스판 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진정한 체스플레이어라는 뜻일 테지. 

 

 

“그럼 제한시간을 조정해서 두자. 그렇게 하면 승부에서도 어느 정도 진지함은 빼고 즐길 수 있겠지.” 

 

 

속기승부를 사카야나기에게 제안한다. 

 

 

일반적인 체스보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제한시간이 훨씬 적은 변칙 룰. 

 

 

장고가 허용되지 않는 숨 가쁨 속에 속기만의 변칙적인 전략, 자주 나오는 실수 등을 감안하면 서로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는 진지함은 덜어낸 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승패와도 상관없이 체스는 오락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사카야나기의 바람도 어느 정도 지켜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과연... 그럼 희망하시는 카테고리가 있으실까요? 저는 불렛(제한시간 3분 미만의 속기 체스)도 상관없습니다만?” 

 

 

자신만만한 표정의 사카야나기에게서 속기에 대한 자신감이 비친다.

 

 

“그보다는 블리츠(제한시간 3분 이상~10분 미만의 속기 체스)로 가자. 각자 3분이면 충분하겠지. 너무 급하게 두다가 커피를 쏟고 싶지는 않으니까.”

 

 

체스판을 마주한 흥분 때문일까? 내가 좀처럼 하지 않는 농담을 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이 시간 자체가 즐거운 걸까? 사카야나기의 얼굴에 한 점 거짓 없는 순수한 웃음이 드리운다. 

 

 

“후후후 좋고 말고요, 아야노코지 군. 그럼... 승부는 어떻게 가리실건지요?”

 

 

1학년 당시 펼쳤던 A반과의 7번의 승부가 머릿속에 지나간다.

 

 

“7전 4선승제로 하자. 속기승부이니만큼 그 정도면 되겠지.”

 

 

7번의 승부라는 나의 말에서 사카야나기 또한 당시의 승부를 떠올린 듯 아련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초시계를 세팅하고 보드위에 기물들을 배치하는 동안 이번에는 사카야나기가 한 가지 제안을 해온다.

 

 

“모처럼의 승부이니 내기라도 하나 해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내기?”

 

 

“후후 별거 아니랍니다. 그저 ‘승자의 소원 한 가지 들어주기’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소원 들어주기라... 확실히 심플한 내기인가.’

 

 

“음... 그렇다고 소원으로 상대방의 퇴학을 바라거나 거액의 포인트를 요구하거나 하는 건 곤란하다고?”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름의 농담을 시도해 본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실패였나?’

 

 

잘 나가다가 초를 쳤다는 듯 사카야나기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농담이었다고, 사카야나기?”

 

 

“물론, 그러셨겠죠.”

 

 

웃음으로 사카야나기의 표정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공기가 무겁다.

 

 

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볼게. 사카야나기가 나에게 바라는 소원은 뭔데?”

 

 

역으로 다시 질문을 건넨다.

 

 

그런 질문이 효과가 있었던 듯 사카야나기가 흠칫 하는 듯하더니 나에게서 겨우 시선을 돌려주었다.

 

 

“그... 별다른 건 아닙니다. 그저 아야노코지 군의 학교생활에는 영향이 없는 소원이라고... 그것만 우선 약속드리죠.”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손가락으로 말며 조금 전과는 달리 내 눈을 피하는 것이 다른 한 편으론 의심스럽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겠지.

 

 

“알겠어, 사카야나기. 그리고 내 소원이라면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는데, 괜찮다면 내가 이길 경우에 생각해보도록 할게. 물론 나 역시 너의 학교생활에 영향이 가는 소원은 바라지 않아.”

 

 

“좋습니다. 그거면 충분하군요.”

 

 

이미 배치가 끝난 체스 기물들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던 사카야나기가 겨우 분위기를 다잡으며 겨우 승부의 장으로 들어서는 우리였다.

 

 

모든 것을 쏟아내는 진검승부라기보다 서로의 기량을 재어보는 대련의 느낌이라고 봐야겠지만, 사실 그럼에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둘 생각은 없다.

 

 

“말해두지만. 저는 속기에 상당히 자신이 있답니다, 아야노코지 군? 시간제한 때문에 블런더(체스에서 자신에게 불리하게 두는 악수)를 두어버린다고 해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고요?” 

 

 

역시나 사카야나기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가.

 

 

“글쎄. 내가 할 소리네, 사카야나기.”

 

 

스며드는 긴장감 속에 선수, 후수를 가리기 위해 흑백 각각의 폰을 양손에 쥔 채 내밀자 망설임 없이 나의 오른쪽 손을 고르는 사카야나기.

 

 

천천히 펴 보인 나의 오른손에선 백색 폰이 모습을 보인다.

 

 

첫판은 사카야나기의 선수인가. 

 

 

이것으로 홀수차례의 대국에는 사카야나기가, 짝수차례의 대국에는 내가 백을 쥐게 되었다.

 

 

“잘 부탁드려요. 아야노코지 군.”

 

 

웃음을 짓고 있지만, 눈만큼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1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투지뿐.

 

 

“그래 나도 잘 부탁해.”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사카야나기의 눈에서 투지를 읽어냈다면... 반대로 ‘사카야나기 너는 나의 눈에서 무엇을 읽고 있지?’ 

 

 

그 답은 잠시 후 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가벼운 인사를 마친 후 작게 심호흡을 한 사카야나기가 초시계를 누르며 타이머를 켜는 순간. 

 

 

 

 

 

우리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시야와 소리가 사라졌다. 

 

 

 

 

 

토독! 탁!

 

 

1초의 주저함도 없이 폰을 전진시키며 초시계를 누르는 사카야나기.

 

 

토독! 탁!

 

 

그에 맞춰 나 또한 노타임으로 내 차례를 완료한다. 

 

 

3분이라는 제한시간. 블리츠 게임에서 시간이란 곧 자원. 1초도 허비할 수 없으니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카야나기와 온전하게 첫 수부터 수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게임 안에서도 마주앉았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그녀의 기량이 전해져 온다.

 

 

이윽고 진행에 따라 차츰차츰 줄어들어 나가기 시작한 초시계의 옆으로 쉴 새 없이 보드 위와 초시계 버튼을 오고가는 손동작만이 이어진다.

 

 

토독, 탁! 토독, 탁! 토독, 탁! 토독, 탁!

 

 

한동안은 여유롭게 정석적인 오프닝에 맞춰 배치가 이어질 무렵.

 

 

탁! 

 

 

사카야나기의 다음 한 수에 한순간 전장의 분위기가 변한다.

 

 

날카로운 공세로 접어드는 사카야나기의 한 수. 

 

 

공격과 수비 모두에 빛을 발하는 좋은 수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한 수이기에 기물을 배치해가며 대응하는 한 편, 재빠르게 다음전략을 새로 구상하고 지우고, 또 구상하기를 반복한다.

 

 

그런 나의 전략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순순히 내가 편한 길을 가게 하지 않겠다는 듯 전장 여기저기에 변화를 꾀하는 사카야나기.

 

 

비록 아직은 혼전양상이었지만...

 

 

‘이대로라면 내가 승기를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초시계를 흘끗 바라본 순간.

 

 

탁!

 

 

‘음!?’

 

 

나이트를 놓는 사카야나기의 다음 수에 나도 모르게 손이 멈춘다. 

 

 

예상치 못한 수는 아니었다.

 

 

다만 그 수에서 이어지고 파생될 무수한 가지 같은 경우의 수 너머에, 내 목을 조를 단 하나의 행마가 그제야 한줄기 섬광처럼 스쳐지나간다.

 

 

‘사카야나기가 이 수를 읽고 있었던 거라면...’ 

 

 

게임의 후반부까지 짜놓은 나의 계획이 사카야나기의 한 수로 위태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느긋하게 관망할 시간은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보드위에 결과로 남길 뿐.

 

 

탁!

 

 

그런 나의 전략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 두 번째 백색 나이트가 나에게 위협을 가해온다.

 

 

하필이면 ‘그 수만은 아니길...’ 하고 바랐던 바로 그 위치로. 

 

 

어느덧 포크(양걸이)를 걸며 종횡무진 나의 진영을 파고드는 사카야나기의 나이트에서 마치 진짜 전장을 누비는 기사의 기백이... 느껴진다.





한 수 한 수 날카로움이 돋보이는 그 손놀림에 나도 모르게 조금씩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일반 체스게임이었다면 장고라 할 시간도 아니겠지만, 블리츠에선 그마저도 충분히 긴 시간. 

 

 

정신을 차려보니 금이 간 단지에서 물이 새듯 어느새 나의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만 좀 더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어느덧 초읽기에 들어가는 초시계를 두고 이만 물러날 때임을 느낀다.

 

 

과연... 대국 전 속기에 자신있어하던 사카야나기의 실력은 충분히 알 것 같다.

 

 

역시나 변수를 창출해내는 사카야나기의 실력은 틀림없는 진짜다. 

 

 

“역시 강하네... 사카야나기.”

 

 

“우선은 저의 1승이군요.”

 

 

순순히 킹을 쓰러뜨리는 나의 패배선언에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기쁨의 빛을 숨기지 않는 사카야나기였다.

 

 

 

 

흑백을 교체하여 이어지는 2국 

 

 

역시나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다

 

 

토독 토독 현란하게 기물들을 이동시키는 소리와 타닥 하고 초시계를 누르는 소리만이 요란하다. 

 

 

하나둘씩 줄어가는 기물들 사이에서 서로가 기회만을 엿보고 있을 무렵, 

 

 

탁! 

 

 

이번에도 먼저 싸움을 걸어오는 사카야나기인가.

 

 

과감하다고 좋을 만큼 치고 들어오는 흑색 나이트에 지체 없이 나 또한 나이트로 응수한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기물들이 보드에서 퇴장하고 남은 기물들이 우리들의 손안에서 춤추고 또 춤춘다. 

 

 

백에게서 흑으로, 다시 흑에게서 백으로. 

 

 

거침없는 파도와도 같이 시시각각 전황이 요동친다. 

 

 

서로의 제한시간을 2/3가량 소모한 시점.

 

 

보드위의 전황이 다시 한 번 사카야나기에게로 기운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겠지.

 

 

 

사카야나기가 자신의 퀸으로 나의 나이트를 취하는 순간.

 

 

‘거기다!’

 

 

탁!

 

 

날카롭게 뒤를 파고드는 나의 비숍에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는 섬뜩함을 느낀 듯, 사카야나기의 입에서 ‘헛’ 하는 작은 비명이 새어나온다.

 

 

‘사카야나기, 이 순간 너에게도 보였겠지.’

 

 

이 한 수로 시작될 내가 노리는 종국의 길이 말이다.

 

 

이번에는 사카야나기의 손이 한동안 멈춘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조금 전 나에게도 그러했듯이.

 

 

“크흑!”

 

 

이를 악 물고 서둘러 응수하는 사카야나기였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이 앞으로는 어떠한 변수도 없는 그저 길고도 긴 외길수순을 따라갈 뿐. 

 

 

“체크메이트.”

 

 

두 개의 비숍이 나란히 사카야나기의 킹을 무릎 꿇리며 약 5분 만에 1국의 패배를 되갚고 승부의 균형을 바로잡는다.

 

 

문득 손바닥에 살짝 땀이 맺힌 게 느껴진다.

 

 

비록 승리한 2국이었지만 대국 내내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이 긴장감은... 언젠가부터 화이트 룸에서도 체스를 둘 때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해진다.

 

 

 

‘과연, 내 앞에 앉은 사카야나기도 나와 같은 기분인 것일까?’ 

 

 

확인하는 방법은.. 대국을 이어나가는 방법뿐이겠지.

 

 

보드위에 다시금 기물들을 배치하며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5국의 중반.

 

 

현재까지의 결과는 2대2.

 

 

나의 기준으로는 패-승-승-패의 순서인가.

 

 

조금 전 사카야나기가 4국에서 보여준 훌륭한 아나스타샤 메이트(룩과 나이트를 이용한 체크메이트 패턴의 하나)로 따라붙은 것도 잠시.

 

 

현재의 상황은 다시 한 번 내가 몰아붙이고 있는 형세였다.

 

 

사카야나기의 퀸이 보드위에서 제법 매섭게 날뛰고 있지만 결국 최후의 발버둥일 뿐.

 

 

대부분의 마이너피스를 잃은 사카야나기의 손이 갈수록 무거워진다.

 

 

이어지는 내 흑색 룩과 나이트의 압박에 사카야나기의 킹이 몰리는 순간.

 

 

아직 보드위의 여유가 있음에도 사카야나기가 자신의 백색 킹을 쓰러트리며 패배를 선언했다.

 

 

 

여기서 비로소 잠시 숨을 거두고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꽤나 식어버렸군.’

 

 

커피와 승부의 열기 모두에 해당하는 감상이었다.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사카야나기에게도 잠시 대화를 건넨다.

 

 

“괜찮은 거야 사카야나기? 조금 전에는 아직 더 둘 수 있었던 거 같은데?”

 

 

“예에... 어차피 이번에도 저의 패배로 이어지는 외길수순이었는지라 말이죠.”

 

 

“...? 그런가? 솔직히 나에게는 아직 길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지?”

 

 

“호오?” 

 

 

자신이 외통수였다는 사카야나기의 말과 아직 그녀에게 회생의 길이 있었다는 나의 주장이 대립한다.

 

 

그렇기에 6국에 들어서기에 앞서 잠시 조금 전의 상황을 재현해 사카야나기와 복기를 해보기로 했다.

 

 

“여기서 이렇게... 그리고 이렇게...”

 

 

“예에... 그러면 저는 이렇게... 또 이렇게 받았겠죠.”

 

 

마치 사전에 서로 짜기라도 한 듯, 그녀와 같은 미래를 보았던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종료된 대국에서 추가로 합을 맞춰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방금 전 대국의 분수령이 되었을 지점.

 

 

“그리고, 여기...가 승부처였겠지? 틀림없이 사카야나기도 여기선 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거야. 만약 퀸이 이렇게 이동해 내게 불리한 교환을 강요한다면... 어때? 나는 체크를 부를 수 없고 사카야나기에겐 활로가 생기... 아...?”

 

 

손이 멈추고 그제야 문득 내가 머릿속에서 간과했던 다른 한 수가 떠오른다.

 

 

사카야나기의 입장에서는 안 된 일이었지만 확실히 역전을 해내었다고 생각한 그녀의 여왕은, 마지막 순간 결국 그녀의 왕과 함께 목이 잘릴 운명이었다.

 

 

결코... 떠올릴 수 없었던 수는 아니다. 

 

 

애당초 게임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빠르든 늦든 내가 생각해 내었을 수. 

 

 

그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사카야나기가 나보다 먼저 찾아내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사카야나기가 계속 두었다 한들 5국의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의 대국에서 흑백이 반대였다면? 

 

 

“...”

 

 

“아야노코지 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야 사카야나기. 내가 수를 읽는 게 늦었어.”

 

 

“그거... 졌지만 왠지 기분은 나쁘지 않은 말이군요.”

 

 

사카야나기가 기쁘면서도 아쉬운 복잡한 미소를 보인다. 

 

 

 

손바닥의 긴장을 풀듯 두 손을 살살 털어낸다.

 

 

3승2패.

 

 

사카야나기에게 있어서는 코너에 몰린 스코어.

 

 

분명 스코어상으로는 내가 앞서는 점수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의 복기가 마음을 누른다.

 

 

수읽기에 있어서는 패배나 다름없던 승부.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승리라면 상관없다... 라는 면에서는 신경 쓸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승리를 도출해낸 과정이 나조차 이해 못한 요행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런 재현성 없는 승리는 모든 것을 이해한 패배만도 못한 것이니까.

 

 

그렇기에

 

 

다시 지휘하게 된 백색기물들을 배치하며 다짐한다.

 

 

스스로가 나는 사실상 1패를 추가로 떠안고 있다고.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대련의 느낌으로 두려했던 이 승부에 대해 어느덧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자.. 다시 시작할까?”

 

 

 

6번째 오프닝을 맞이하며 보드위에는 다시금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토독! 탁! 토독! 탁!

 

 

초시계를 움직이게 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 현란한 속도로 게임이 진행된다.

 

 

거의 노타임에 가까운 그 빠르기는 순식간에 접어든 미들게임이 되어서야 겨우 잦아들기 시작한다.

 

 

서로가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빽빽한 대치.

 

 

과감하게 치고 나오던 이전 대국과는 달리 이번에는 스타일을 바꾼 듯 사카야나기의 흑색기물들이 조용히 나의 진영을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탁!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 균형을 무너뜨리기로 한다.

 

 

나의 도발과도 같은 한 수에 응수하는 사카야나기의 눈이 빛난다.

 

 

탁!

 

 

그 수는...

 

 

‘예상했다!’

 

 

탁!    탁!   탁!  탁! 탁!....

 

 

주도권을 잡으려는 수차례의 공방과 기물교환 이어진 후, 어느 순간 사카야나기가 한동안 손을 멈춘다.

 

 

무언가의 미래를 읽은 것일까?

 

 

흘러가는 시간에도 아랑곳 않고 마치 꿈을 꾸는 듯, 초점을 잃은 그 눈으로 사카야나기가 장고 끝에 자신의 퀸을 집는 순간...

 

 

“...!” 

 

 

한순간 사카야나기의 눈이 다시 번뜩인다 싶더니, 그 순간 맹금의 발톱과도 같은 날카로움을 띄며 그녀의 손이 다음 수를 놓는다.

 

 

그저 한 수.

 

 

하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한 수.

 

 

 

사카야나기가 자신의 여왕을 스스로 포기한다.

 

 

 

1년 전에 이어 또다시 등장한...

 

 

‘퀸 새크리파이스...?’

 

 

자신의 여왕을 희생시켜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사카야나기의 승부수.

 

 

그런 대담한 수를 어쩌면 마지막 판이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놓는다.

 

 

그것이 방금 전 사카야나기가 1분이라는 장고 끝에 내린 대답.

 

 

‘어디까지 읽은 거지, 사카야나기?’ 

 

 

잠시 보드에서 눈을 때고 사카야나기의 눈을 바라본다.

 

 

하지만 내가 바라본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보드에 고정된 그녀의 눈동자엔 한 치의 흔들림이 없다. 

 

 

그녀의 수를 음미하며 좀 더 고민해보고 싶지만... 나 또한 남은 시간에 그리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내릴 결론은 하나뿐.

 

 

‘받아주마 사카야나기. 보여다오, 네가 본 미래를!’

 

 

서로의 여왕이 격돌하며 6번째 대국이, 우리의 대국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이었다.

 

 

 

.

.

 

 

 

“뭐랄까... 마치 3개의 비숍을 상대하는 듯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난감하더군요.”

 

 

“나이트의 운영에 있어서는 나도 자신 있다고 자부하지만... 오랜만이네 기물운영에 영감을 받는 승부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기에 할 수 있는 그런 평가가 이어졌다.

 

 

“이렇게 보니 3번째 대국은 아쉬웠군요. 하다못해 스테일메이트(무승부)도 노릴 수 있었는데 말이죠.”

 

 

“동감이야. 그만큼 쉽지 않은 승부였으니까 말이야.”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경과한 후, 우리의 최종적인 스코어는 3승 3패를 기록했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승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균형을 맞춘 스코어엔 양자 모두가 만족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6국을 끝으로 마지막 7번째 대국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이제는 괜찮은 거야 사카야나기?”

 

 

“예에... 이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건 오랜만이다 보니...”

 

 

6번째 대국이 끝난 후, 연이은 대국에 따른 긴장감과 흥분이 몰려온 듯 사카야나기의 심장에 아무래도 무리가 온 것 같았다.

 

 

확실히, 마지막 6번째 대국은 특히나 피 말리는 승부였다. 

 

 

사카야나기의 번뜩이는 한 수 외에도 서로의 시간을 10초가량 남긴 시점에서야 승부가 날 정도로 접전이었으니까.

 

 

그만큼 사카야나기가 이 승부에 진심을 다했다는 뜻이기도 할 테지.

 

 

 

6국이 끝나자 가슴을 짚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카야나기. 

 

 

그런 그녀의 심상찮음을 눈치 챈 나는 바로 그녀의 웃옷을 벗기고 물을 건넸다. 

 

 

유사시에 언제라도 응급호출을 할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다행히도 상태가 가라앉는 사카야나기였지만...

 

 

혹시나 몰라 그럼에도 응급전화를 하려했지만 정말로 괜찮다고 만류하는 사카야나기의 말을 듣고 휴식을 취할 겸 지금까지 복기를 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지금까지도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정말로 사카야나기의 몸은 안정화 되었다고 봐야겠지.

 

 

“문득 궁금해지는 건데 사카야나기, 혼자 있을 때 이런 상황에 빠지면 어떻게 대응하는 거야? 기숙사 안이라든가 주변에 친구들도 없을 땐 위험 한 거 아냐?” 

 

 

“저를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흐음... 그러네요. 그렇다면 아야노코지 군이 곁에 계셔주시면 어떨까요?”

 

 

복기 중이던 퀸을 손 안에서 굴리며 어딘가 기대감이 담긴 듯한 눈으로 사카야나기가 미소 짓는다

 

 

“진지하게 묻는 거라고, 사카야나기?”

 

 

“쿠쿠쿡. 농담이에요, 아야노코지 군.”

 

 

입을 가린 채 눈웃음을 지으며 사카야나기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게 보여준다.

 

 

“이건?”

 

 

“이 학교에서 저에게만 설치되어있는 어플리케이션이에요. 전원버튼을 연속으로 누르면 저의 위치가 경비업체와 아버지에게 전송되도록 되어있답니다.”

 

 

“과연. 최소한의 장치는 해두었다는 건가.”

 

 

확실히 이 정도의 보험도 없어서야 이사장이라 한들 자신의 딸을 쉬이 등교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정한 심판자역인 이사장에게서 딸을 위한 애정이 엿보이는 순간이다.

 

 

 

그런 생각의 너머로 사카야나기가 넌지시 초시계를 만지며 묻는다. 

 

 

“그럼, 어떻게... 못다 한 7국은 마저 두실건지요?”

 

 

솔직히 한 사람의 체스 플레이어로서 조금 전의 열기를 느끼고 그 결말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구분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아니... 그만두도록 하지. 설령 네가 괜찮다고 한들 지금은 내가 거절 하마, 사카야나기.” 

 

 

“그런...! 저는 정말로 괜찮...”

 

 

“진정해. 아예 안 두겠다는 게 아니야.” 

 

 

기물들을 주섬주섬 모으며 덤덤히 말한다.

 

 

자신으로 인해 승부의 열기가 식어버렸다는 듯 자책하는 사카야나기. 

 

 

이어지는 대국으로 그녀가 다시금 흥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에게 건네는 것은 적당한 절충안이다.

 

 

“그저 오늘 두지 못한 7번째 승부, 다음으로 미뤄두자는 이야기야. 그거라면 납득할 수 있겠지?”

 

 

“... 과연, 다음을 기약하자는 말씀이로군요?”

 

 

조금은 납득한 듯,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운 듯 작은 탄성을 사카야나기가 내뱉는다.

 

 

“... 알겠습니다. 보아하니 이미 뜻을 굳힌 듯싶으니, 당신의 말대로 오늘의 이 승부, 언젠가는 꼭...”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온다 한들 체스는 둘이 있어야만 둘 수 있는 게임이다. 

 

 

내가 거부하는 이상 자신의 뜻을 밀어붙일 수만은 없는 노릇일 테니 사카야나기도 순순히 타협에 응하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사카야나기.”

 

 

그와는 별도로 나 또한 남아있던 작은 궁금증을 털어내기로 한다.

 

 

“만약 7국에서도 이겼으면 내게 어떤 소원을 부탁하려고 한 거야? 아직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아서.”

 

 

“아... 그거 말인가요?”

 

 

분명 별다른 소원은 아니라고 했지만... 사카야나기가 몸에 무리가 올 정도로 전력을 다한 이상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자신의 한계까지 넘어가며 이렇게 한 것이지 말이지.

 

 

잠시 주저하는 사카야나기에게서 2시간 전 이사장실 앞에서 카페의 이야기를 꺼낼 때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앞으로도 오늘처럼... 종종 저와 두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라고...”

 

 

빤히 사카야나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알겠어, 사카야나기.” 

 

 

알겠다는 긍정의 말. 하지만 그 뒤에는 한 가지 문장이 생략되어 있었다. 

 

 

'알겠어 사카야나기. 네가 진짜로 바랐던 소원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와선 의미 없는 이야기. 

 

 

언젠간 그녀 스스로 말할 날이 있을 거라 여기며 여기선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소원 들어주기 내기까지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앞으로도 종종 기회가 되면 같이 둬 보자고, 사카야나기”

 

 

그제야 사카야나기에게도 작은 미소가 어린다. 

 

 

우선은 그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나를 향해 악수를 권하고 내가 응함으로써 한 쌍의 체스 파트너가 탄생했다.

 

 

히요리와의 관계가 독서친구이듯, 사카야나기와의 관계는 체스친구 정도라고 하면 되겠지.

 

 

체크메이트가 아닌 체스메이트. 그런 우리의 손과 손 사이로 따뜻한 온기가 지나간다.

 

 

한편 그러한 악수의 너머로 보이는 시간은 어느덧 5시.

 

 

슬슬 일어날 때인가 하고 살며시 사카야나기에게도 운을 띄운다. 

 

 

“저는 좀 더 있다 가겠습니다. 아야노코지 군. 아무래도 그 편이 당신에게도 나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나를 배려해주는 건가. 

 

 

거절하지 않고 사카야나기의 호의를 받기로 하며 컵과 쟁반을 함께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일어나볼게 사카야나기. 오늘 커피 정말 잘 마셨어.”

 

 

“예... 즐거웠습니다. 아야노코지 군.” 

 

 

 


카운터로 쟁반을 반납하던 나에게 점원이 남은 커피를 테이크아웃 할 건지를 물었다.

 

 

이미 다 식은 커피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사카야나기가 추천해준 커피라는 생각에 좀 더 마셔볼 요량으로 포장을 부탁했다.

 

 

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사이로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가게를 나오면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켜 보았다. 

 

 

왜인지 가게 안에서 처음 마셨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와의 차이라면 사카야나기와의 대국과 날씨 밖에는 없는데 말이지. 

 

 

그런 입에 남는 쌉싸래한 잔향을 머금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나 괜찮은 커피라면 꼭 다시 한 번 마셔보고 싶다고. 

 

 


 

.

.

.

 



 



아야노코지 군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저는 한동안 카페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말이죠.’

 

 

최소한 그와 함께 기숙사까지는 같이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물론 조금 더 안정을 취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만...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어느덧 카페 안에도 사람들이 많이 찬 것이 보입니다. 

 

 

이것은 눈에 띄기를 싫어하는 그를 향한 배려였습니다.

 

 

주말의 이 시간은 성인고객 분들이 대다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인파속에서 같이 움직였다간 누구와 마주칠지 모르니까 말이죠.

 

 

 

카페에 남은 김에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조금 전 6개의 대국을 복기해 보았습니다.

 

 

시간을 들여 복기하는 한 수 한 수에 즐거움과 아쉬움, 깨달음, 그리고 감탄이 공존합니다. 

 

 

혼자서는 6국이 아닌 60국, 600국의 기보를 놓아본다 하더라도 이런 기분은 느낄 수 없을 테죠. 

 

 

오늘의 작은 성과라면 한동안 계속해서 복기해 볼 기보를 6개나 손에 넣었다는 것일 겁니다. 

 

 

그렇기에 승부를 내지 못한 7국에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

 

 

머릿속에는 지금도 새로 체스를 둔다면 어떠한 수를 둘지 계속해서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그와 주고받는 한 수 한 수에 제 자신이 각성하는 것이 느껴졌기에 그러한 즐거움의 하이라이트를 놓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와 승부를 내지 못했기에...

 

 

그에게 제 진짜 소원을 말하지 못한 것이 마지막으로 아쉽습니다.

 

 

사실 아야노코지 군이라면 분명 보드카페에서 저에게 체스를 권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걸 위해 쑥스러워하는 척 그에게 이 장소를 권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가 권한 승부를 제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에게 소원내기를 권할 기회가 생길 테니까요. 

 

 

정말이지... 그렇기에 사실은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었습니다. 

 

 

몸에 무리가 올 정도로 승리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약속한대로 결코 퇴학이나 포인트와 관련된 소원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겼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했으니까요.

 

 

 

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화이트 룸으로는 돌아가지 말아달라고...

 

 

 

어쩌면 내기 한 번에 덜컥 수용할 수 있을 조건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방 앞에서 그와 이야기했을 때도 그의 생각이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앞으로 그와 언제까지 함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저.. 제가 계속해서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했습니다.

 

 

씁쓸한 웃음과 함께 체스기물들을 모아 정리합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아야노코지 군에게 거짓말을 했네요. 

 

 

그가 물었었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찾는 이유라도 있느냐고 말이죠. 

 

 

그에 대해 알아가고 싶다는 것은 또 하나의 작은 이유일 뿐, 사실은 그가 알아주었으면 했습니다. 

 

 

세상엔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 분명 아야노코지 군에게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줄 무언가가 있다는 걸. 

 

 

그리고 만약 그런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때는... 그가 생각을 바꿔줄지도 모르니까요.

 

 

세상의 행복을 느낀 그가 속세에 남아 화이트 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바꿔줄지도 모르니까요.

 

 

 

고로, 오늘 그에게 권한 작은 데이트의 목적은 그에게 세상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알려드리고, 그의 미래를 바꾸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부디 무엇이 되었든 이 사회, 그리고 속세에 남아 있기만을 바라는 저의 작은 억지일 뿐이었습니다. 

 

 

찬찬히 식어버린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저 음미합니다.

 

 

‘맛이 변했군요.’

 

 

대국 직전에 먹었을 때 보다는 아쉬운 맛입니다. 

 

 

하지만 왜일까요?

 

 

그렇기에, 다음에 다시 한 번 그와 함께 마실 그 날이 더욱 기대가 되는 것은.

 

 

그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권할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가 되는 것은.

 

 

 

떠들썩한 카페, 그친 비구름 사이로 찻잔에 기대지는 햇살이 눈부신 어느 주말의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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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투표 4강때부터 조금씩 쓰던 건데, '히요리가 이기려나?' 해서 히요리로 틀 잡았다가 결과보고 다시 쓴 건 안 비밀.


요즘은 원작이든, 애니든 여러가지 의미로 사카야나기가 대세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