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발키리의 부름에도 무지개다리가 내려오지 않게 되었다.

신계에 버림받은 발키리들이 내전을 일으켰다.

한쪽은 어떻게든 아스가르드로 돌아가 왕을 죽이고자 한다.

다른 한쪽은 반란을 막고자 한다.

그리고, 전쟁의 한복판에 발키리를 자칭하는 마법소녀가 나타났다.



*





버림받은 스스로의 처치를 비관한 여전사들이 서로 반목할 때, 그 모든 상황을 단지 하나의 오락으로 즐기던 사람이 있었다.


여전사들의 혈투를 단지 스크린 속 게임으로 즐기던 남자가 있었다.


지금은 어린 작은 발키리가 된 자의 이야기이다.


푹신한 드레스의 어린 발키리가 치마를 움켜쥐었다.



"버, 벗으라고요?"


"그래. 어서 벗어."



이제는 소년이 아니게 된 소녀의 머릿속에, 달갑지 않은 추억이 겹쳐보였다.


이를테면 '우리 애기 고추 좀 보자'라던가.


그리고, 여기서 아랫도리를 보였다간 어쩐지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직감도 올라왔다.


소녀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아, 안 돼요."


"얼른 벗으래도."


"싫어요! 부끄럽게!"


"입으론 싫다면서 얼굴에 홍조는 솔직하네. 빨리 벗어."


"이건 무서워서 그런 거에요!"



말로만 재촉하기엔 진척이 없었다.


심문하던 발키리는 어린 소녀의 양손을 잡아챘다.


소녀의 두 손목은 얇고 작아, 성인이 한손으로 쥐고 고정시킬 수 있는 굵기였다.


한손으론 소녀의 손을 잡은 채로,

여전사는 양팔의 자유를 잃은 소녀의 치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꺄아! 엄마!"


"가만히 있어, 곧 끝나니까."


"조장님 거기 계시죠? 실례합니-."



심문실의 문이 열리고, 전령이 들어온 건 그 순간이었다.


전령 또한 발키리의 일원이었는데, 막 방에 들어온 그녀의 눈엔

겁에 질려 바둥거리는 어린 여자아이와, 그 여자아이의 치마를 들어올리려는 조장이 비쳐졌다.



"천장의 무늬를 세고 있으렴. 금방 끝날 거야."



의미불명의 대사로 조장을 거드는 다른 여전사와, 배를 드러내고 뒹굴거리며 코를 고는 여우도 있긴 했다.


전령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들 넷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우를 제외한, 깨어있는 세명도 전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겨울의 추위를 머금은 황소바람이 자꾸만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



"그래서, 전하려던 소식은 뭐야."


"그게...."


"눈치보지 말고 말해. 급한 일일 거 아냐."


"... '안개'가 이탈파에 합류했습니다."


"미스트 부대가?"



발키리들도 저들끼리의 세부적인 소속이 나눠져있었다.


전사들 사이의 계율과 치안을 맡는 팀도 있고, 물자나 장비를 보급하는 부대도 있었다.


이탈파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미스트'는 첩보전 전문의 팀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도청을 당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귀찮아지겠네. 그렇잖아도 전황에 진척이 없어 고민인데."

 

"그렇잖아도 그 문제 말입니다만.... 아무래도 전세가 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어째서."


"무기 문제죠. 창이 다 닳았으니.

저쪽도 비슷한 상황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요."



보고를 받던 발키리가 이마에 종주먹을 댔다.



"으으, 보급 부대 놈들."



무기가 부족하니 만드는 대로 송달하라고 요청한지도 한참 되었다.


그러곤 입때껏 감감무소식이었다.



"찾아가 항의를 하든가 해야지 원."


"마지막으로 전하려던 소식이 그건데요."


"전하려던 비보가 또 남아있었다고?"


"아직 비보라곤 안 했는데요."


"그럼 낭보야?"



여전사의 얼굴이 펴졌다.


아무래도 이 며칠 연이은 비보 탓에 기분이 울적하던 참이었다.



"아뇨? 비보 맞긴 해요."


"아오, 이걸 그냥."


"그래도 다행히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에요.

홀뤽 부대 대장간 근처에 괴물이 나타났다고 하더라고요."



홀뤽 부대.


동료의 무기를 제작하는 발키리들이었다.



"괴물? 서리거인 놈들이야?"


"인간 형태 같진 않다던데요?"



말끝에 확신이 없으니 필시 전해들은 바로구나.


여전사는 그리 생각하였다.



"누가 가봐야 한단 거잖아 그럼."


"누구 보내실 거에요?"


"그러게 말이다.

지금 그렇잖아도 전선에 손이 부족한데 누굴 보내냐."


'애초에 몇명을 보내야하는지도 가늠이 안 되고.'



여전사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어디 누구 없나?

대장간쪽 괴물을 잡아줄 확실한 전력이면서 전선에서 빠져도 되고, 후방 부대 사람도 아닌 발키리는?"


"강한 전력이면서 싸우지 않고 있으며, 후방도 아닌 발키리. 

여기 있잖아요."



문득, 전령역을 맡고 있던 전사가 제 허리께를 가리켰다.


그녀의 늘씬한 다리엔 어린애 같은 여전사가 붙어있었다.


맞다. 방금까지 남성성을 의심받던 그 소녀이다.



"얘, 그 전설의 레긴레이프라면서요?

그 말이 진실이라면 무력은 충분하겠네요."


"말 되네.

얘, 꼬마야. 나 좀 보자."



꼬마 발키리는 어른 발키리가 허리를 숙이며 다가오자 '히익'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겁먹지 말고. 너 정말로 레긴레이프인 거지?"


"네.... 분명히 출발 전에 왕께서 그렇게 일렀어요."


"가서 일을 하나 해줘야겠다.

대장간에 나쁜 놈이 나타났단다. 때려잡고 오렴."


"혼자서요? 혼자선 무서운데...."


"혼자라니! 네 친구, 여우 있잖아."


"저 싸우는 법 몰라요."


"이참에 배워. 발키리면 싸우는 게 일이야."


"저, 저.... 히이잉."


"남자라며? 레긴레이프라며? 용감히 가서 무찌르고 와."


"레긴레이프가 뭐 대단한 거라고 저한테 그렇게 떠넘기세요...."



여전사는 방향까지 알려주며 스파르타식 진행을 이어나갔다.



"여기, 이 여우 들고 가고.

헤르표투르 부대 대장이 멀쩡한 무기가 적어 나날이 골치라고 전해줘."



아직까지도 꿈속을 헤메던 여우는 한손으로 들려서 전달되었다.


울상이 된 소녀는 반박도 못하고 발을 뗄 뿐이었다.



*


백업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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