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종 즉위년, 9월 5일 무술년


XX도에서 젊은 마처자(말딸)가 산에서 고사枯死한 시체를 한 구 발견하다.

주상이 즉위 한 이래 벌써 열 구도 넘는 남자 시체가 발견 되다.




X종 즉위년, 10월 6일 무술년


OO도 XX리 옆 고을에서 젊은 청년의 시체가 또 발견되다.

그 몸이 비쩍 마른 게 꼭 고목 같았고 온 몸에 눌러 붙은 묘한 딱지는 불쾌한 향을 풍기더라.

이를 이상케 여긴 고을의 수령이 범인을 찾기 위해 병마절도사에게 수사 협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OO좌도 병마절도사는 제 관할이 아니라며 거절하다.




X종 즉위년, 10월 8일 무술년


해괴한 일에 임금은 직접 이르기를,

"나라의 젊은 이들이 자꾸만 죽어나가므로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하도록 하라."

라며 엄명을 내리다.




X종 즉위년, 10월 12일 무술년


첫 시체가 발견된 SS도의 D고을 수령이 시체들의 공통점을 찾다.

시체들은 전부 나흐레 혹은 보름 전부터 실종 되었으며,

고을 내에서 가장 "정력이 좋다."라며 소문이 나있는 이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군영에서 10리 내에 살던 이였다.


이에 SS도 관찰사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주상께서는 일의 심각함을 깨달아주시어

속히 마처자가 속한 각 군영을 감찰하여 주시옵소서. 예로부터

논어 자한편에도 이르길, 子曰: 吾未見好德, 如好色馬也.

(공자 왈 : 나는 아직 남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덕을 좋아하는 마처자[말딸]를 본 적이 없다.)

라고 하였나이다. 이는 분명 모두 각 군영의 마처자로 인한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를 보고 임금은, "과연 그 말이 옳은 듯 하다."라고 하며 각 군영에 감찰관을 보내다.




X종 즉위년, 10월 30일 무술년


각 군영에서 붙잡혀 마처자들에게 매일 밤 착취 당하던 남자들이 모두 풀려나다.

개중엔 죄 없이 누명을 씌워져 갇히거나 보쌈을 당하여 성적으로 착취 당한 자들도 있었다.

각 감영에서 최소 스물에서 백에 이르는 숫자의 남자들을 해방하다.

완력이 뛰어난 마처자들을 효율적으로 다루고 위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상소를 올려 해방을 방해하던 각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모두 탐라로 유배를 가다.

임금은 상왕에게 가 해당 사건을 상세히 알리었고 이에 상왕이 깊게 탄식하길,

"내 이미 상왕 시절부터 사찰에서 이와 같은 일이 있어 사찰을 모두 폐하였는데,

정작 같은 일이 벌어지던 다른 곳은 보지도 못하였구나. 비참할 따름이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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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종 元년, 8월 3일 기해년


또 고사한 젊은 청년의 시체가 발견 되어 임금이 크게 노하여 고성을 지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포를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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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종 4년, 1월 5일 임인년


상왕의 반대에도 강씨를 세워 덕비로 삼다. (마처자 강씨 - 개국공신 집 장녀, F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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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종 4년, 2월 17일 임인년


임금의 기력이 급격히 쇠하여 경연 중에도 보약을 지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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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종 4년, 3월 11일 임인년


임금이 명하길, "앞으로는 각 군영에서 절대 마처자를 등용하지 말지어다.

또한 탐라로 유배 간 자들을 모두 풀어주어라."라고 하다.

그러자 영의정이, "그 자들은 이미 죽어 살아 돌아오지 못합니다."라고 아뢰다.

이에 임금은 "내 속단에 비참한 일이 또 일어났도다. 이 모두 나의 부덕함 탓이로다."라며 한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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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종 5년, 4월 7일 계묘년

임금이 CC대군 집 CX궁에서 훙(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