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1.


언젠가 언급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먼 옛적에는, 나도 촉망받는 인재였던 적이 있었다고.


아직 축복이 수여되지 않아 입지가 좁아지기 전. 나는 영지 내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이들 중 하나였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만큼 정의감도 투철했었지 아마.


리오넬은 당시 영지에서 유명한 망나니였다.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영세한 상인의 아들이었던지라, 대다수의 약자는 그에게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중에는 내 지인도 껴 있었고.


진짜 별것도 아닌 일이다.


참다못해 다가가 주의를 줬을 뿐.


그 뒤론 내 눈치를 보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싸움으로 도전을 걸어왔었다. 그럴 때마다 흠씬 두들겨 패줬었지만.


체격 차이가 있긴 했어도 당시의 나는 귀족으로서 기본적인 전투법은 배웠었고,


놈은 그냥 좀 뻗댈 뿐인 평민이었으니까.


"혹시 아직도 그 일을 신경 쓰고 계신 건가요?"


하긴, 이 남자는 전 회차에서도 계속 내게 앙심을 품고 다니긴 했다. 가끔씩 위험한 상황에 처한 내 앞에 나타나 비웃고 지나갔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배후에 이 녀석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 당연하지. 내가 여태 너한테 굴욕을 주려고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지 알아?"


"속도 좁으셔라."


리오넬은 내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박스레 말을 이어갔다.


"성인식이 있던 날 내가 얼마나 기뻤던지. 네가 축복받지 못했다는 그 소식을 듣고 말이야."


놈은 자신의 손바닥 위로 새하얀 빚덩이를 띄웠다. 신성력의 발현이었다.


"반면 난? 꽤 멋들어진 축복 아닌가?"


"네 뭐…."


이후 그는 흥분한 채 연신 말을 내뱉었다.


몰락귀족이 어쩌구 시녀가 어쩌고. 그 대부분이 날 조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기사에 공작 영애의 측근까지 됐지. 인생 참 기구하지 않아?"


측근. 그래.


놈은 기사임과 동시에 권력자의 측근이었다.


유펜트리아 오라토리오.


방금 만나고 온 그 여자의 측근 말이다.


유펜트리아가 지금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 이 놈밖에 없는 처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리오넬 외의 인재들은 이미 다른 이들이 채 갔을 테니.


"그러게요. 이제 완전 반대 입장이네요."


놈에겐 힘이 있고, 신은 놈을 축복했으며, 권력자를 등에 업고 있다.


"인제야 입장을 이해한 건가? 이렇게 멍청할 줄은 또 몰랐군."


리오넬은 내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인지했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허나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다.


[영입 가능한 신도 리스트]


-유펜트리아 오라토리오 [신앙 등급: 0(1/100)] (영입 불가능)


전 회차와는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그건 그렇고. 슬슬 비켜주시면 안 될까요?"


"흠?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글쎄요. 후후, 저 같은 여자랑은 다르게 기사님은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서요. 저한테 신경 쓰는 건 시간 낭비 아닐까 싶네요."


"흐. 아부는 참 잘하네. 시녀가 아니라 몸이라도 팔러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꽤 수위 있는 도발이다. 대부분의 영애들은 여기서 당황해버리겠지.


허나 내겐 그저 코웃음만 유발할 뿐이었다.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들어본 말이었으니까.


"너무 그러지 말고, 그냥 술이나 좀 마시러 가자니까? 너도 타지에서 괴롭힘당하는 건 싫잖아?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재미 좀 볼 수 있을걸?"


"요컨대, 뒷배가 되어주겠다. 이건가요? 이유는?"


"개인적으로. 너한테 관심이 많거든."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리오넬이 뒷배로 막아주기엔, 내가 들쑤시고 다닐 둥지가 너무 크고 많으니까.


게다가 이미 노리고 있는 물고기도 있고.


'미끼로 쓰는 건, 제법 괜찮아 보이네.'


바라는 건 많지 않다.

딱, 관심만 끌어주면 된다.


"맞다. 어떤 여성분이 당신을 찾고 있던 것 같은데요."


"뭐?"


"이름이 유펜트리아…라고 했던가. 혹시 무슨 밉보일 짓이라도 했나요? 하핫, 혹시 예전처럼 술집에서 행패라도 부렸던 건가요?"


리오넬은 표정을 구겼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거겠지.


뭐, 거짓말이지만.


"젠장, 또 귀찮게 구는구만…."


상사를 대하는 것 치고는 꽤나 불손한 태도였다.


오히려 좋다. 그가 이렇게 행동 할 수록 원하는 걸 얻기 쉬워질 테니까.


"그럼 뭐, 좀 있다 보자고."


나는 그를 간단한 손 인사로 배웅해주었다.


2.


짐가방에는 별 게 들어있지 않았다. 며칠 동안 입을 만한 옷 몇 벌과 속옷. 그리고 이동할 때 먹다 남은 식량 조금일까.


그야 그렇겠지. 이 시기의 내가 귀중품을 소지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니까.


차라리 잘 됐다. 짐 정리 할 필요는 없으니까.

창고에 가까운 먼지 쌓인 방. 청소할 시간도 모자라다.


창문을 열자 묵은 공기가 단숨에 빠져나감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창틀에 턱을 괴고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해야 할 게 많다.


전 회차에서 참 많은 것을 들고 왔다.


그 대다수는 원한이다.


오로바스. 아멜리아. 그리고 그녀를 이용해 내 죽음을 사주한 이 가문. 그 외에도 수많은 적들.


또 나머지는 대책이다.


앞으로 찾아올 수 많은 위기에 대한 대응법. 혹은 아예 맞닥트리지 않기 위한 방법들.


허나 그것들은 전부 거쳐 가야 할 징검다리일 뿐.


결국 최종 목표는 하나뿐이다.


'살아남는 것.'


복수도 좋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정해진 대로 행동하는 게임 속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앙갚음하는 데에 일생을 다 써버리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저 일상을 향유하는 것은 어리석다.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종말이 찾아올 뿐이니까.


게다가 이미 겪어봤듯, 내가 최선을 다해 종말을 막아내려 해도 결국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멸망이 찾아온다.


고로 이 세계에 안주해선 안 된다.


종말을 막아낼 수 없다면 이쪽에서 먼저 도망쳐야 한다.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귀환할 수 있습니다.]


올 클리어 특전으로 걸려있는 귀환. 그것이 가장 적법한 해결책이리라.


다만 한가지 난항이 존재했다.


"읏…."


조금 전 맞은 뺨이 진저리나게 따가웠다.


그 사실은 즉슨 이 몸 자체는 여타 필멸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성좌가 되어 성장한 것은 '격' 일 뿐. 내 무력은 그대로였다. 이 상태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겠다고 개겨봤자 쥐도 새도 모르게 저승으로 가버리겠지.


물론, 성좌가 된 만큼 신성력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약간의 빛과 함께 벌겋게 부은 뺨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금 당장 가능한 건 이 정도인가.'


충만하게 느껴지던 신성력이 텅텅 비워버렸다. 신체 강화로 전투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찰과상 좀 치료했다고 말이다.


[보유 신자:0]


[종교 영향력: 최하]


이게 원인이겠지.


신으로서의 영향력도 없다.


믿고 따르는 신자도 없다.


그렇다고 칭송받을 만한 업적도 없다.


성좌를 이루는 삼박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시스템에 의해 억지로 성좌가 된 상태. 이 상태에서 다른 성좌 같은 체급을 기대하는 게 말이나 될까.


해결법은 확실히 존재한다.


종교를 만들어 신자를 모으고 천천히 신앙을 쌓아 나가면 된다.


다만 솔직히 난 그 방식에 회의적이었다.


아무런 베이스 없이 종교를 형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지닌 능력을 십분 활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특히 다른 교단 측에서 나를 성좌로 인정해 줄리가 만무하다.


'불경하다고 토벌이라도 안 당하면 다행이지.'


다행히도. 계획은 있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신앙심도 모을만한 계획이.


활성화 되어 있는 시나리오 중 하나. 그 상세 내용을 펼쳐냈다.


[구원교 토벌]


[이 땅에는 사악한 거짓 신앙이 맥동하고 있습니다. 성좌 중 일각으로서 사교를 벌하고 교세를 빼앗으십시오.]


그래. 이 시기라면 이 부근에 놈들이 자리 잡고 있을 테니.


비단 시스템이나 원작에 대한 정보뿐 만이 아니다. 전 회차. 황금성의 교주로 활동할 때 입수한 정보라고 해야 할까. 오로바스의 입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계획 때문에 따로 키우고 있던 다른 종교가 몇 개 있었단다. 지금은 전부 없애버렸지만.


-그런 식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게 흔한 일인가요?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지. 한데 여의 경우는 그게 아니란다.


-무슨 뜻인가요?


-계획 추진을 위해 만들어두긴 했지만, 그 교단들이 섬기는 건 여가 아니라는 게지.


즉. 구원교라 불리는 이 종교에서 모이는 신성력은 다른 누구에게도 흘러가지 않는다. 그 자리를 내가 빼앗는다면, 그곳은 온전히 내게 신앙을 바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좋든 싫든 오로바스의 계획을 망치게 되겠지.'


필연적으로 그녀와 적대하게 될 거라는 뜻이다.


바라던 바다. 결국 언젠가 적대해야 할 인물이다. 갚아줄 것도 있고.


물론 그를 위해선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십분 활용해야 했다. 힘도 제대로 발휘 못하는 성좌에게 어떤 무기가 있겠냐 싶지만, 의외로 강력한 무기가 하나 존재했다.


내가 발휘 할 수 있는 유일한 이능이자, 성좌가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


즉, 권능이다.


[권능 - 찬탈]


[본체나 신도에 의해 굴복, 혹은 사살된 대상의 축복과 권능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찬탈이라.


나는 무심코 그 이름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태껏 교주로서 신도들을 수탈해온 나에게 있어, 가장 잘 활용 할 수 있는 권능이 아닌가.


물론 이런 종류의 능력이 으레 그렇듯 능력을 발휘 하기 위해선 많은 일을 해야할 것이다.


계획의 갈피가 잡혔다.


첫번째,


'최대한 쓸만한 축복을 많이 거두어들인다.'


두번째,


'사정을 봐줄만한 뒷배를 만든다.'


구원교는 단신으로 집어삼키기엔 꽤 규모가 큰 조직이다. 아직 여러모로 힘과 입지가 부족한 상태니까.


세력을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뒤를 봐줄 권력자가 없다면 순식간에 목이 날아갈테고.


다행히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유펜트리아 오라토리오.'


권력을 발휘할 포텐셜을 가지고 있고


해결 가능한 직관적인 고난을 겪고 있으며


인간 관계에서 고립되어 있는 인물.


내가 가장 선호하는 인물상이었다.


자빠뜨리기 쉬운데 반해 빼먹을 수 있는 건 너무나 많으니까.


전 회차에서의 경험상 지금 당장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금방 자리를 잡을 것이다.


방금 만나본 바로는 개인적인 호감을 얻어 편을 먹기도 쉬워보이고.


문제는 그녀에게 어떻게 접근하냐인데…


그때 끼익, 하고 방문이 열렸다.


"아…"


그곳에는 기세등등하게 걸어들어오고 있는, 아멜리아가 있었다.


나는 창밖에서 허겁지겁 뛰어가고 있는 리오넬을 뒤로 하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리오넬. 그리고 아멜리아.


먹을 건 없는 계륵 같은 놈들이지만, 거물로 넘어갈 징검다리로 사용하기엔 안성맞춤인 녀석들이었다.


시스템을 활용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정말 모든 종류의 호감이 신앙으로 치환되는 것이라면 괜찮은 방법이 있으니까.


"좋은 아침이네요. 아, 혹시 시간 되시나요?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당신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


비단 아멜리아에게만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3.


유펜트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맞은편에 신경질적으로 앉은 리오넬을 노려보았다.


"혹시 제가 따라다니면서 주의를 드려야 하는 걸까요?"


"또 뭔 얘기 하나 했더니…"


"제 말이 틀렸나요, 볼턴 경?"


리오넬 볼턴.


굳이 따지자면 유펜트리아의 심복이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를 따르는 인물이 그 외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 마저도 따른다고 하기엔 미묘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호출하지도 않았는데 리오넬이 불쑥 방으로 찾아왔을 때는 깜짝 놀랐었다.


그가 평소에 안부를 묻고 다닐 위인은 아니었으니.


뭘 말하나 했더니 자길 벌하러 부른줄 알았다더라.


며칠 전 술집에서 행패 부린 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경고 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말을 해줘도 행동을 고칠 생각을 안 하는데 뭘 더 말하겠는가?


유펜트리아가 신경 쓰는 점은 그게 아니었다.


'하와 와일디브, 그 여자….'


그 사실을 이용해 자신에게 리오넬을 보낸 이.


이 유착 관계를 꿰뚫고 있다는 뜻이다.


유펜트리아는 리오넬이 자신의 측근임이 밝혀지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이 재기를 노린다는 사실이 주위에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충분한 공적을 쌓기 전까지는.


"하, 솔직히 그 정도는 제가 맘대로 할 수 있는 부분 아닙니까?"


유펜트리아는 당장이라도 리오넬을 쳐내고 다른 수행원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에 처했다.


"하아…."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현재 자신이 쫓고 있는 사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그였으니까.


'구원교, 라고 했던가요.'


최근 근처에 생겨난 신생 종교.


일반적으로 성좌가 아닌 무언가를 숭배하는 종교는 어디선가 나타난 이단심문관들이 들쑤셔 놓기 마련이다.


그러나 구원교가 처한 상황은 다른 사이비 종교들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명 어떤 성좌가 그 뒤를 봐주고 있는 거겠지.


'정황상 황금성 이겠죠.'


구원교가 신도를 끌어모으는 방식은 그녀가 사용하는 수법과 굉장히 맞닿아 있었으니까.


그래. 벌집이다.

건드려서 좋을 거 하나 없는.


허나 오라토리오 가문은 예로부터 한 성좌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단순한 신도가 벌집을 들쑤신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릴 테지만, 성좌의 사도와도 같은 위치에 있는 이 가문이라면. 다른 성좌의 자리를 위협할만한 증거도 충분한 공적이 될 터.


리오넬은 구원교를 찌르기 위해서 영입한 비수였다.


정보를 취합한 결과 구원교가 사용하는 주수단은 규격 외의 저주.


아무리 강한 이도 수많은 저주를 몸에 담고는 버틸 수 없다.


반면 리오넬은 그렇지 않다.


그가 지닌 축복은 반전.


자신에게 걸린 부정적인 효과를 반대로 적용하는 축복.


저주 사용자에게는 쥐약이다.


"그럼 좀, 혹시 금화 몇 푼만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럼 한동안 닥치고 있어 드리죠."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리오넬은 자신을 자르지 못할 걸 알기에 점점 더 무례한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 싫으면 제가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당신, 이제 물러날 곳도 없잖습니까?"


리오넬도 알고 있으리라.


이미 유펜트리아에게 밉보인 이상 자신이 팽 당할 거라는 걸.


그렇기에 임무를 진행하기 전에 최대한 몸을 키우려는 거겠지.


확실한 건 아니다. 그에게선 속마음이 들리지 않고 있으니까. 유펜트리아가 혹시나 자신의 마음을 읽을까 의식적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다만 축복 따위 없더라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태도와 표정에 뻔히 드러나고 있었다.


-날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조만간 네 약점을 온 세상에 까발리고 적대 세력으로 소속을 옮겨주겠다!


…대충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멍청한 망상이었지만 유펜트리아는 마냥 웃음을 흘릴 수 없었다.


이대로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만 했다간 정작 이번 일을 완수했다 하더라도 그와 적대해야 할 판이다.



야금야금 자원과 입지를 앗아간 그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테고.


"하아…가보세요. 돈은 곧 보내드릴게요."


그러나 그의 말대로. 유펜트리아에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가문에게 쓸모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결국 좋지 않은 말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리오넬은 그럴줄 알았다는 고취감에 가득 차선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유펜트리아는 한참 동안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스스로 방문을 닫았다.


"쯧…."


지금이라도 대체제를 찾아봐야 할까?


차라리 말이 잘 통하는 누군가가 그의 축복을 빼앗아 줬으면 싶었다.


근데 그렇다고 그런 인물이 선뜻 유펜트리아를 위해 나서줄까?


"그럴 리가."


그녀는 자신에게 코웃음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 너머의 큼직한 광장. 낯익다면 낯익고, 낯설다면 낯설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거닐고 있었다.


"저건…."


하와 와일디브.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수상할 정도로 자신과 많이 엮이고 있는 그 여자.


시녀복, 흔히 메이드 복이라 불리는 그것을 입고 있어 못 알아볼 뻔 했다.


'짜증 나네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걸리적거린다. 그 정도의 감상일 것이다.


그녀에게 흥미를 갖게 되는 상황 자체가 말이다.


그리고 그 흥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동정심이었다.


자신보다 한없이 낮은 곳에 있는 이에 대한 동정심.


언젠가, 그녀의 삶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여동생에게 말이다.


축복받지 못했다고 가문과 사교계에서 소외당하고 이젠 그 가족마저 모두 잃었다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유펜트리아는 레아가 자신의 처지를 놀리는가 싶었다.


축복 때문에 가문에 쓸모를 계속해서 증명해야만 하고, 축복의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남을 밀쳐내며 사람들에게 마저 버려진 자신의 처지를.


직접 만나보고 나선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펜트리아 자신을 사용해 그녀를 겁박하려는 무리까지 있었으니.


'역시, 주의를 줘야 하는 걸까요.'


이미 하와는 도움을 한 차례 거절한 적 있었다. 허나 유펜트리아 또한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딱히 시녀들에게 무시당한 것에서 그런 감정이 든 건 아니다.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가주 후보자에서 밀려난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와도 연관은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유펜트리아의,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였다.


어쩔 수 없던 것일지라고 해도, 타인에게 매몰차게 대하는 방도를 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결정에 타인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죠.'


홀로 감내하는 것은 익숙하다.


다만 그걸 타인에게 들이미는 것은 싫었다.


그것도 이미 한 차례 이야기를 들어 사정을 알고 있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하와의 불행에 자신이 직접 이바지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동정심, 또 거기서 나오는 호기심.


그 모든 것이 뭉친 관심.


유펜트리아가 결벽적으로 인간관계를 차단하고 있는 이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꼴이었다.


'하루 빨리 뭐라도 쥐어주고 눈 앞에서 치워버리는 수 밖에.'


그래. 단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


하와가 창 밖에서 유펜트리아 자신을 명확하게 노려보기 전까지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뭔가, 으스스한 미소였다.


그리곤 말없이 입술만을 뻐끔거렸다.


-도 와 드 릴 까 요?


라고.


"…"


괴리감.


여태 듣고 겪어온 정보와는 상반되는 감각.


뭔지 모를 오싹함에, 유펜트리아는 커튼을 펼쳐 창문을 가려버렸다.


----


반응 미묘한 걸 보니 재미 없는 것으로 판단

깔끔하게 써둔 분량 다 털고 새거 쓰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