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방송을 보다가 중간에 잠들고 깨어나니, 어느샌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이었다.


상체를 일으키니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느껴지며, 베개 옆에는 엎어진 상태로 놓인 스마트폰이 보였다.


방송은… 생각보다는 평범했지만, 시청자들이 약간 문제가 많았다.


필리아가 하는 게임이나 대화 주제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이, 나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꺼내는 사람들이 조금, 많았다.


그런 시청자들을 볼 때마다 방송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밴을 먹이는 동안에도 이야기가 계속 나오다가, 어느 시점에 들어서니 확 줄어들었다.


졸면서 보았기에 무슨 말을 했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뒤로는 그대로 잠에 빠져서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아마, 희귀종에 관련된 법이라던가 그런 것에 관해서 말이 나왔던 것 같았는데….


다시보기에 올라오지 않을까 싶어서 스마트폰을 켜서 확인해보니 이미 삭제된 영상이었다.


잠에 취한 상태의 기억들을 잠깐 되짚어보면, 필리아가 화내는 모습도 얼핏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장면을 다시 보려고 해도 영상이 삭제되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었지만.


끄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니, 비몽사몽한 정신이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잠은 이미 충분히 잤기에 어느정도 깬 상태였지만, 몸과는 다르게 뇌의 반이 잠에 취해있는 느낌이었다.


스마트폰의 충전기를 빼고 주머니에 집어 넣은 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걸어가서 찬물로 얼굴을 밖밖 닦았다.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모르는 상태로 살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것을 알게 되었나.


전부 필리아의 실수로 비롯된 일이었지만, 정말로 실수가 맞는 걸까 의심이 생긴다.


이미 다 해결된 일이니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지만, 필리아가 자기 방에서 마법을 쓰는 것 치고는 상태가 괜찮았다.


나도 아미야의 공방에서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실패에 가깝게 마법을 써본 경험이 있으니.


청하의 마력은 움직이는 듯 싶다가도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따라주지를 않는, 정말로 청하의 일부가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집불통이었다.


그 덕분에 귀찮았던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아미야가 건네준 지팡이가 있었으니 괜찮아질 예정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청하의 비늘에 담긴 마력이 어떻게 반응할 지를 모르겠다.


아미야가 건네준 지팡이만 사용하지 자기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따지는 청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 의도대로 잘 움직였다면 이런 일도 없었지 않나, 하며 머릿속의 청하에게 따져보니 뭣! 하고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는 울먹거리면서 내게 달라붙는 청하의 모습이 상상된다.


너무 현실감이 넘쳐나서 으 하고 진저리를 칠 정도였다.


머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어서 머릿속의 청하를 지워버리고, 얼굴에 묻은 물을 수건으로 닦아낸 뒤, 밖으로 나왔다.


잠깐 스마트폰을 켜면서 봤던 시각으로는 지금이 거의 점심 무렵이었는데, 그렇게 배가 고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약간의 시간만 더 지나면 금방 배가 고프다고 꼬르륵 소리를 내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뭘 먹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뭐라도 먹기는 해야겠는데, 뭘 먹는 게 좋나.


모처럼 배달이라도 시켜먹는 것도 괜찮겠지 하며 스마트폰을 켜서 배달앱을 뒤적거리고 있었더니, 청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걸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머릿속의 청하가 어느샌가 다시 나타나서는 전화를 받으라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안 받으면 귀찮게 굴겠다느니 뭐니, 내 상상속에 불과한 청하일텐데도 이렇게나 귀찮게 군다는 점에서 진짜 청하와 별 다른 게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청하의 전화를 받았다.


"여태까지 카페에 안 오길래 문제라도 생겼나 걱정했는데, 늦게 잤느냐?"


"예. 어제 방송을 보다가 늦게 잤습니다."


"…방송? 이건 또, 꽤 드문 일이구나. 요즘 시대에 방송을 본다니."


"청하가 생각하는 그런 방송이 아닐 겁니다."


"그런가?"


청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어떤 모습일 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고 있을 청하의 모습을 상상하니 왜 이렇게 어울리는 건지.


청하는 방송이라는 내 말을 듣고는 잠깐 고민하는 듯이 침묵만 보내오다가, 옆에 있는 건지 금향에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송이라는 게 우리가 보는 것 말고도 있나, 금향?"


"그거, 그거 말하는 거 아니야? 그, 뭐지? 방송인이 아니어도 개인적으로 방송을 할 수 있는 게 있던데."


"그게 그거인가? 잘 모르겠구나."


"아마, 맞지 않을까?"


청하의 스마트폰과 거리가 살짝 멀었을텐데도 입에 가까이 대고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리는 금향의 목소리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나름대로 작게 말한다고 저렇게 말하는 걸텐데도 이렇게나 크게 들릴 정도라면, 평소에는 훨씬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게 아닌가.


카페에서 둘이 떠들 때의 성량을 생각해보면 아마, 평소에도 그렇게 크게 말하는 게 일상이었을 것이었다.


내가 중간에 낌으로서 약간…은 아닐지 몰라도, 변화가 온거겠지만.


"방송을 봤다는 게 개인이 하는 걸 말하는게냐?"


"맞습니다."


"호…. 누구의 방송을 보았느냐?"


"그, 전에 말씀드렸던 필리아입니다."


"금향에게 조언을 부탁했던 그 때의 흡혈귀가 방송을 한단 말이냐?"


"예."


"…하긴. 요즘 시대에 드문 종족이니 방송을 한다고 하면 충분히 관심을 받을 수 있겠지."


"예전에는 그렇게 드물지도 않았고, 많지도 않았지만."


"어허, 전화 중이지 않느냐. 잡담은 안 받느니라."


"잡담은 무슨 잡담! 어차피 내 목소리도 주빈에게 들리고 있을 텐데!"


"그럴 리가 없다! 그렇지, 주빈?!"


"…죄송합니다만, 두 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이만, 전화를 꺼도 괜찮겠습니까?"


어제의 일을 잊지 않았기에 귀에서 적당히 떼어놓았는데도 스마트폰을 통해서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거의 팔을 쭉 편 상태로 듣고 있었는 데도 이 정도로 크면 조금, 곤란했다.


저번처럼 귀를 찌를 듯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귀가 울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로 큰 소리를 찾으라면 가까이에서 듣는 북소리가 비슷하지 않을까.


"뭣!"


"목소리 좀 낮춰! 나도 신경쓰면서 말하고 있었는데!"


"그게 어딜 봐서 신경쓰는 목소리란 말이냐! 아주, 쩌렁쩌렁하게 다 들리더구나!"


또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는 지 나와 전화중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린 채로 왁 왁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듣는 척을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마 저번처럼 전화가 끊어졌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계속, 내게 말을 걸어오는 둘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어휴. 나이를 생각해보면… 아니, 나이는 생각하지 말자.


금향과 청하의 나이를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몇 살인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아봤자 서로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청하의 나이도 나이일텐데 그런 행동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드래곤과 용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이가 많지 않을까.


궁금은 했지만,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물어보는 일은 아마 없겠지. …아마도.


내가 말실수를 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밖으로 꺼낼 일은 절대로 없을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저녁에 아리센이 올 때까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시간에 카페에 가자니 시간이 시간이라 애매한데다가, 둘의 다툼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찾아가면 금방 끝날 다툼이기는 하겠지만, 그건 중간에 쉬는 시간이라는 느낌에 가까웠다.


내가 사라지면 바로 이어진다고 하는 게 맞겠지.


…점심도 먹기는 해야하는 데, 뭘 먹는 게 좋나.


귀찮음을 감수하고 밖에 나가서 적당한 음식점을 찾아도 괜찮았고, 귀찮으면 배달앱을 켜서 아무거나 시켜먹어도 괜찮았다.


좀 더 나은 선택지가 뭐가 있을까 하고 고민할 무렵,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렸다.


누가 전화를 걸었나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청하였다.


벌써 다툼이 끝났나? 아니, 평소의 모습들을 떠올려보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머리가 의문으로 가득찬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예."


"또 멋대로 끊었구나!"


"두 분이 서로 싸우는 소리를 굳이 들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화를 끊는다면 끊는다고 이야기는 해주고 끊는게 맞지 않느냐!"


"…다투시는 와중에 제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십니까?"


"다 듣고 있느니라! 그러니,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렇게 끊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아무튼! 할 게 없다면 내 도서관에 오거라!"


…언제 오라는 걸까. 지금? 아니면, 내일?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도서관에 와달라는 말에 청하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말입니까?"


"지금도 괜찮고, 조금 있다가도 괜찮다! 오늘 내로 왔으면 좋겠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저번에 부탁했던 책과 관련된 일이니라."


저번에 부탁했던 책, 책… 아.


"그, 봉인이 걸려있는 책 말입니까?"


"그 책 맞다. 멋대로 봉인이 풀려서는, 인간을 보여달라고 온갖 난리를 치는 구나."


"…지금 카페에 계신 것 아닙니까?"


"매일 카페에 오는 것 같길래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매일… 요근래에는 거의, 아침마다 카페에 가고 있기는 했지만 매일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많이 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청하가 보기에는 매일마다 내가 가는 것으로 보였겠지.


"그건 아닙니다. 요근래에 자주 찾아갈 뿐이지, 매일 간 적은 없습니다."


"일주일 중에서 나흘 이상을 꼬박꼬박 찾아가면, 거의 매일 가는 것과 별 다를게 없지 않나?"


"…그렇습니까?"


"내 생각에는 그렇느니라."


청하의 말에 그런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리가 있나 싶었다.


매일매일 찾아간다는 소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간다는 소리였는데 나는 그렇게… 자주….


…다시 생각해보니 청하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일주일의 반 이상을 카페에서 보낸 적이 꽤 많은 걸 보면.


중간에 아미야의 공방에서 보낸 시간도 포함한다면, 매일 찾아간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되었으니, 시간을 좀 내서 도서관에 와줬으면 좋겠구나."


"…할 것도 없으니, 점심만 먹고 가겠습니다."


"점심을 아직 안 먹었다고? 그럼, 도서관에 와서 먹거라. 내가 해줄 테니."


"괜찮습니다. 카페에서 먹는 걸로도 충분합니다."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느니라! 카페에서는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를 않았으니."


"…알겠습니다. 좀 있다가 뵙겠습니다."


"알겠느니라! 아, 그리고. 어제처럼 머리를 묶고 와줄 수 있겠느냐?"


"예."


"끊는다!"


뚝 하고 전화가 끊기고, 살살 아파오는 귀를 주물렀다.


충분히 떼어놓고 대화를 한다고 생각했는 데도, 성량이 얼마나 크면 귀가 이렇게나 울리는 건지.


나중에 목소리를 더 낮출 수는 없냐고 물어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어제도 씻었으니 오늘도 씻기는 너무 귀찮다.


남자였을 때에는 머리카락만 감아도 괜찮았는데, 여자가 된 지금은 머리카락을 감으려면 샤워까지 해야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아. 그러고보니, 저번에 복주머니에 청하가 건네준 부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카락에 갖다대는 것 만으로도 알아서 물에 젖는 데다가, 부드러워지는 아주 좋은 부적이.


머리를 묶는 것도 끈을 갖다대면 알아서 해준다고 했으니, 옷만 적당히 차려입고 도서관에 가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