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 도시 모나티엄, 쨍한 햇빛을 피해 고가도로 밑으로 피서를 온 엘프들의 눈엔

붉은 옷을 차려입은 수인이 능숙하게 현악기를 조율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이내 그 곁을 지키던 작은 뿔 달린 말들이 준 물까지 받아마신 수인은

헛기침을 가볍게 하고는 소리가 났다 느낄 정도로 벌떡 일어나 말하였다.


 

“교단의 재정난을 타파하기 위해 심야에 밀회를 갖는 교주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소?”

 

지구에서의 고된 노예 생활을 지낸 엘프들이 느끼기에 더욱 자극적인 ‘밀회’라는 단어가

지구에서 온 ‘교주’라는 종교 및 정계 권위자의 직함과 합쳐져 유난스런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평소 보이던 것과는 다른 큰 관심

걱정어린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관중들

어딘가 실수를 했나 하였지만, 듣고자 하는 방청객들이 평소보다 많은 듯한데

모쪼록 준비한 극은 모두 마치고서나 개선할 점을 찾는 편이 낫겠지.

 

수인은 손에 들린 하프를 퉁기며 말하였다.


“가는 이에게 그러하듯 오는 이 역시 막지 않으니,

관심이 동한다면 느긋이 듣고들 가시오!”

 

가까이서 듣기 위해 다가오는 시민들이 자리에 앉는 것도 기다리지 않은 채

수인의 반주와 연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교주, 나도 그대들도 몸담은 세계수 교단의 수장, 교주께선 짓궂고도 살가우시어

늘상 사도에겐 미소로 대하려 하시지.

허나, 언제나 그러하진 못하니 그런 모습 또한 어느 누구라도 보았으리라 생각하오.

그날 또한 그러했지. 서류를 잔뜩 안은 사제장과 같은 방에서 나온 교주는

피곤을 이겨내지 못했는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제 키보다 작은 문을 빠져나왔소.”

 

“그럼 사제장과의 스캔들인 건가?”

“저 수인이 돈 내고 샀다는 거 아니야?”

따위의 추측성 수군거림이 서론의 끝이 모습을 보이기도 전부터 장황히 이어졌다.


 

“..이어 교주는 낱장의 서류를 들어 하나하나 짚어 무언가를 세고는

상심한 듯 머리 뒤를 쥔 손을 떼 눈을 덮고 쓸어내렸네."

"그 서류에 적힌 것을 소인도 보았지만, 심히 두려웠지.

상상하기 어려운 큰 금액이 적힌 모나티엄 시청발 청구서였소. 그것도 기한은 익일까지!”

 

‘절망에 빠진 교주’, ‘모나티엄 시청’ ‘내일까지’

한 문단 사이에 자극적인 소재가 연달아 쏟아지자 엘프 군중의 웅성거림은

"와, 역시 엘레나 시장님! 완전 교단을 뒤집어 놓으셨다."

"모나티엄을 다시 위대하게!"

따위의 몇 마디를 제하고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아. 영웅의 기상이란 그런 것일까?

숨을 죄어오는 압박감을 떨쳐낸 듯 웃어 보이고는

결연히 어디론가 힘차게 걸어 나가시었소!”


 

“그런데 웬걸, 처연히도 발길이 닿은 곳은

익히 잘 알려진 무법지대, 요정 왕국의 뒷골목이었소.

심지어는 가장 가서는 안 될 곳이 다가오자 두려움이 온몸을 훑어왔지.”

 

~~~~~

“마요, 나를 팔러 왔다!”

“수집품, 그거 이미 했음.”

“그건 네가 그렇게 하도록 손을 쓴 거였잖아.

이번에는 그런 거 없잖아. 없는 거 맞지?”

 

음슴한 요정은 천천히 눈을 굴리더니 이내 음습하게 웃으며 말하였소.


 

“없음. 흐흐. 교주용 진열장을 꺼낼 때가 옴.”

“그러지 말아다오. 아니 그것보다 일단 나부터 도와주고 하지 않을래?”


 

교주는 청구서를 보이며 대금을 빌려주면 담보로써 자신의 소유권을 대여해주겠다고

처절히도 설득했지. 허나 서류를 본 순간부터 그 요정은 서서히 표정이 굳어갔소.

 

“수집품은 다음에 사겠음. 너무 비쌈.”

“제발마요야부탁한다이렇게싹싹빌게내가마요의개가되라면개가된다왈왈꼬리살랑살랑..”

“지금은 그만한 큰 돈이 없음. 수집품 이상함.

전당포가 국가 예산에 준하는 돈을 가지고 있을 리 없음.”

“..흐흐.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서 빚 노예의 소유권을 구매하는 편이 더 싸고 적법함.”

“더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군. 계획 수정이다. 돈이 필요하다. 존나게 큰 돈이!”

~~~~~

 

굳은 표정으로 그날의 기억을 음미하듯 회상해

연기해내는 수인을 보던 관중들은 괜시리 초여름 날씨에도 오한이 들었다.

우범지역은 발을 들이는 꿈조차 꾸지 말고 모나티엄 애국시민으로 살 것을 다짐하는 이도 있었..던가?

그 정돈 아니었던 것 같다.


“세계수도 무심하시지! 결연에 찬 거래가 그리도 쉽게 깨지다니!

희망이 깨어진들 멈춰 설 여유는 없었소. 교주는 급박하게 다음 장소를 향해 갔지."

"엘리아스 대부분의 엘리프 거래가 오가는 금칠 된 가게에선 짧막한 대화 뒤에 딱 잘라 거절당했고,"

"보랏빛이 나는 동굴 앞에선 교주께서 흙빛이 된 얼굴로 깊이 고심하다가 이내 들어가지도 않고 발을 돌리셨지."

"마주치기도 어려운 용족들 중에는 돈이 많은 자가 그리 많은 줄 소인은 몰랐소!”

 

“갈 곳을 잃은 교주는 고뇌에 빠졌지. 그러나 갈 곳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소.

앞선 선택지보다도 온건하면서도 확실한 해결책을 교주는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오!"

"발품 파느라 저릿한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뉘엿뉘엿 저가는 해를 보며 사색하던 교주는..

우리가 서 있는 곳, 모나티엄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했소.”

 

처음의 시장통은 온데간데없이 한껏 이입해 긴장과 불안감 가득한 눈으로

수인의 공연을 보던 관중들은 옆자리 서로의 침을 꿀떡 넘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지

각자 머릿속으로 앞의 전개를 상상해나갔다.

거대한 채무, 교주의 지위, 모나티엄.

다들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명작은 결말을 알고서도 눈을 뗄 수 없다던가?

이야기의 절정을 목전에 두고 입을 여는 이 없이 공연자의 다음 말을 경청했다.


 

“지금 저 지는 햇님보다 빠르게 그 날의 지던 태양은 수평선 뒤로 숨어버렸지.

이윽고 발길이 닿은.."

"잠깐. 해가 진다고?”

 

해는 빌딩 사이 낮은 수평선에 발을 걸치고 하늘은 이미 잘 익은 감귤빛이었다.

분위기 조절을 위해 이야기를 빠르게도 천천히도 진행시켰지만,

평균적으로는 실제 시간과 비슷한 속도로 전개됐던 탓에

이른 낮 시작된 그 날의 이야기는

이른 낮 시작한 지금의 공연과 같은 시간을 맞이했다.

이야기가 저녁에서 초밤으로 훌쩍 뛰려던 지금의 시간 또한 저녁이었다.


“아아. 미안하오들. 중요한 부분에서 산통을 깨려니 정말 죄송하오.

이야기에 집중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니!"

"교주가 찾아간 모나티엄의 부호는 누구란 말인가?

"부호와 교주의 사이에는 어떤 거래가 오갔을까?

"궁금하시다면 다음 공연을 기대해 주시오!”

 

멍하니 수인을 보던 엘프 시민들의 눈이 광기 서린 분노로 바뀌어갈 조짐이 보이자

수인과 작은 유니콘들은 느긋이 짐을 정리할 새 없이 급하게 악기와 물병을 바리바리 싸들고

급하게 사람들 틈을 헤치고 지나며 외쳤다.

“내, 내일! 내일 봅시다! 내일 오겠소!

또 얼굴 보길 바라오! 음유시인 에피카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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