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on's Arm의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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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되지 않은 종족 : HIE201NPE


행성 지각 깊숙한 곳에 있는 벙커로 피신한 멸종된 외계 문명

태양계로부터 4300광년 떨어진 쌍둥이자리 6 성계에 있는 거대한 후기가이아(PostGaian) 유형 행성인 (참고로 테라젠 문명은 행성의 기후와 환경을 구분하는 매우 세세하고 다양한 명명법을 고안해 냈음. 영어가 되면 여기 참조해서 읽어보셈. 일단 후기 가이아 유형은 한때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모항성이 팽창하면서 서서히 수권과 생물권을 잃어가고 있는, 멸망하는 중이거나 이미 멸망한 행성을 말함) YTS 9969-0091-443b에서 발견된 고대 문명. 이 행성은 AT 8769년 메타소프트 버젼 트리 소속의 탐험선 라이트스크라이브(Lightscribe) 호가 처음 발견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성계의 거의 전체 영역을 베텔게우스와 크기와 연령이 비슷한 적색 거성이 차지하고 있는 터라 40광년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모항성이 행성 표면의 하늘에서 엄청 크고 밝게, 붉은색으로 빛난빛난다는것이다. 당연하게도, 궤도상에서 관측했을 땐 행성 표면에서 어떤 생명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존재하던 대기권은 죄다 우주로 날아가 사라졌고 대신 화산 분출로 인해 생성된 희박한 이산화탄소와 질소 대기가 생겨버렸을 뿐이었다. 더 조사해본 결과,  행성 표면은 약 10억년 전에 근처 항성에서 나온 거대한 감마선 폭발에 휩쓸린 흔적이 있었고, 그 사건을 기점으로 원래도 고유운동(항성이 자기 위치에서 이탈하여 이동하는 현상)을 많이 하던 성계는 은하계 기준으로도 원래 위치에서 꽤 멀리까지 밀려나갔었다. 그 동안 YTS 9969-0091-443의 모항성은 주계열성 단계를 벗어났고, 점점 적색거성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밟았다.


항성의 크기가 커지면서 행성 표면에 내리쬐는 열은 점점 뜨거워졌고, 원래 존재하던 바다는 전부 증발해 버리고 끝내 행성의 판구조 운동까지 멈춰 버린 걸로 추정된다. 또한 행성의 지질학적 특징 중 하나는 지하에 수많은 화강암 저반(Batholith)이 존재해서 눈에 띌 정도로 지형 자체를 높였지만 지각을 뜷고 나올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그 덕분에 저반 밑에 존재하는 지하 구조물들이 맨틀 밑으로 파묻히지 않고 지금까지 꽤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저반(Batholith)은 마그마방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거대한 심성암 덩어리를 말한다. 이것들은 마그마의 열로 인해 변성된 퇴적암들이나 아예 다른 암석을 뚫고 들어간 관입과는 다른것이다.)


라이트스크라이브 호는 여러 개의 저반을 심층 스캔하던 도중 몇몇 지점의 밀도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붕괴된 흔적이 역력한 커다란 공동들과 밀도가 높은 영역이 규칙적인 패턴을 보이며 나타나는 현상은 행성 지하 12km 지점에 무언가 인공적인 구조물들이 있다는 걸 암시했고, 곧이어 정교한 지질-물리학적 조사와 매핑 후 발굴 작업이 뒤따르게 되었다.


저반층을 파고 내려가자 고리 모양의 터널들이 나타난다. 아직 건설 단계에 있는 터널들과 이미 건설된 터널들이 서로를 관통하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형성한 복잡한 구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몇몇은 이미 붕괴된 길다란 터널로 서로를 연결하고 있었고, 몇몇은 부속된 터널 없이 매우 작은 크기로 따로 있었음. 결국, 이 문명은 저반 문명(Batholithic Civilisation)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들의 형상은 껍데기로 둘러쌓인 여러 몸체가 나뉘어 있고 배와 등 부분에서부터 수많은 부속지가 나와 있는, 마치 갑옷 입은 지렁이나 지네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터널의 커다란 방에서는 다른 종류의 화석들도 발견되었는데, 정황상 이들이 만든 생물학적인 기계(생명공학적인 기계도 테라젠 문명에 많음)나 비슷한 무언가로 추정된다. 곧 이 수생 지렁이 종족은 해밀턴 연구소에 의해 카탈로그 번호 HIE201NPE로 명명되었다. 이후 HIE201NPE의 남은 화석은 광범위하게 연구되어 왔고, 이 종족이 지하 깊숙한 곳으로 숨도록 만든 감마선 폭발이 대략 BT 9억 4200만년(어차피 서기랑 2000년 남짓한 차이밖에 안나니까 대충 기원전 9억 4200만년으로 생각해도 무방할듯)에 발생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 멸망의 때가 오기 전까지 수백만 년 동안 이들은 행성 표면 아래 지하수로 가득찬 수많은 고립된 수중동굴에서 생존하다가 결국 육지로 올라와 지상에서 생활하게 된 종족이었지만, 근처의 초신성 폭발로 인한 방사능을 피하기 위해 다시 지하로 들어간 것이었다. 본디 수중생물이었지만 감마선 폭발의 여파로 인해 바다가 다 증발해 버려서 다시 돌아온 지하는 화강암 저반 밑의 뜨겁고 마른, 고압력의 지옥같은 환경이 되어버렸고, 결국 살아남기 위해 신체를 너무 많이 변형해 버려서 원래의 모습과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이 행성에서 발견된 생명체가 하나도 없는 걸로 보아 결국 이들 모두 감마선 폭발이 남긴 환경 파괴를 이겨내지 못하고 멸종했거나.... 신비로운 복원자(Restorer, 이전 문명의 흔적들을 제거하는 가설상의 외계 문명)의 방문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다 죽여버렸다는 거)


하지만 멸종하기 전까지 이들은 지하 벙커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비록 많은 벙커들이 초신성 사건 이후로 몇 년 또는 수십 년 내에 멸망했지만, 살아남은 벙커들은 지열 구배(땅의 깊이에 따라 온도가 차이나는 현상)를 응용한 에너지 발전을 원동력으로 훨씬 더 오랫동안, 백만년 넘게 생존하면서 터널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기도 했고, 때로는 오래된 터널을 버렸다가 수백만 년 후에 재발견하여 정착하기도 했다. 때때로 고립되어 발전한 두개의 '벙커 문화'들이 서로 땅굴을 파다가 만나기도 했는데 이 과정은 마치 인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집단 학살이나 문화적 흡수 과정을 통해 한 벙커 문화가 말살당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혹은 일종의 문화적 르네상스를 통해 두 문화가 융합되어 새롭고 강력한 문명이 되어 수백만 년을 버티기도 했음. 마지막 벙커는 9억 2100만년전에 사라졌는데, 이들은 한때 대륙의 절반을 석권했던 문화의 남은 누더기 조각들이었다.


아마도 이 문명의 어느 시기에는 하나 이상의 거주지가 지표면에 세워졌겠지만, 행성 최후의 판구조운동이나 복원자들에 의해 모든 증거가 지워졌을 껄로 추정된다. 물론 HIE201NPE 종족이 결국 멸망한 모행성을 떠나 다른 행성을 개척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으며, 일부 비주류 고고학자들은 위에서 설명한 터널 속 긁힌 자국을 행성간, 혹은 성계간 임무의 명령문으로 해독하지만 그런 엄청난 임무의 다른 흔적들은 발견되지 않았음. 게다가 이 행성은 고유 운동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자주 자리를 바꾸는 터라 어찌저찌 이들이 지상으로 나왔다고 해도 당시 성계 근처에 있던 다른 별들을 쉽게 식별할 수 있었을것 같진 않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