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천 5년(1210) 1월.


서하 흥경(興慶, 현 중국 인촨시).


응천 2년(1207년)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략으로부터 어느새 3년이 흐른 해.


서하의 군대는 몽골군의 공격을 최대한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그간 별다른 전쟁이 없어 기강이 한껏 헤이해진 서하군과 달리, 본래 유목민이라 야전에 이골이 났고, 몽골 초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한껏 풍부한 전쟁 경험을 쌓은 몽골군은 서하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약체화된 서하군은 겨우 3만의 몽골 군에게 차례차례 각개격파당하며 서하의 지역들을 빼앗겨가고 있었다.


서하의 황제는 그동안 상국으로 섬겨 온 금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금나라 황제가 거절하며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서하의 국경을 돌파하며, 마침내 서하의 도읍인 흥경을 포위했다.


그러나, 흥경 내에는 15만의 군사가 있었고, 높디 높은 성벽이 있었다.


몽골군은 야전에는 비할 바가 없는 최강의 군대지만, 공성전은 경험이 부족한지라 흥경이 꽤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이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항복하는 수밖에 없겠구려."


정전의 옥좌에 앉아있는 황제가, 어딘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신하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몽골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하여 전 황제를 쫓아낸 금상이, 어찌 그 오랑캐에게 항복을 하는 것을 논하는가?


"아니 되옵니다! 폐하, 어찌 그리 쉽게 오랑캐들에게 무릎을 꿇으려 하십니까?"


"폐하! 오랑캐들도 지난 수공이 실패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사옵니다. 흥경에는 아직 15만의 정예한 군사가 있사온데, 어찌 이리 쉽게 항복을 논하시옵니까?"


"청컨대 한 번만 다시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정예한 군사가 15만이나 남았는데도 이리 쉽게 오랑캐들에게 사직을 넘긴다면, 하늘에 계신 성무황제(서하 초대 황제 경종)께서 통곡하실 일이옵니다!"


"그만! 조용히들 하시오!"


황제의 노기 가득한 목소리에, 중신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으나, 입을 곱씹으며 불만이 가득한 티를 숨기지는 못 했다.


황제는 그런 중신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경들이 이리도 반대하는 것을 보니, 흥경을 지킬 계책이 있나 보구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 노신이 급히 앞으로 나와 엎드리며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방금 전 신이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오랑캐들은 지난 번의 수공이 실패하고 강물이 그들을 덮치는 바람에 그들 또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5만 군대를 움직여 저들을 친다면 필시 저들은 마치 사마귀가 철 바퀴에 깔리듯 무너질 것입니다. 헌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이 군사로 하여금 적을 공격케 하지 않으시고 항복을 논하신단 말입니까? 청컨대, 군사들로 하여금 오랑캐들을 공격하게 하시옵소서,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신료들이 합창하며 그 노신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황제는 그런 노신을 바라보고선,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경의 말은 수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치자 이거요?"


"그러하옵니다."


"포위로 지치고 굶주린 병사들을 싸움터로 내보내자?"


"아..!"


순간, 머리가 띵 하는 충격이 노신을 덮쳤다.


황제가 항복한다는 말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 수도 내의 식량이 바닥났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 하오나, 아무리 그래도.."


"경은 물러나 계시오."


황제는 그 노신을 다시 자리로 쫓아내고는, 신료들을 향해 물었다.


"경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토록 성세를 누린 것이 무엇 덕분이라 생각하시오?"


황제의 뚱딴지같은 말에 그 어느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자, 황제는 다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바로 무역로요. 무역로를 꽉 틀어쥐었기 때문에, 그 중간에서 금전을 받으며, 이렇게 성세를 누릴 수 있던 거요.  


헌데, 지금 오랑캐들에게 침략을 당하여, 서역과 금의 상인들이 우리 나라에서 철수하거나 혹은 아예 상인을 보내지도 못하고 있소.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그것이 다시 복구될 수가 있지만, 계속 항전한다면 저들은 이 나라 곳곳을 철저히 파괴하여 다시는 일어서지도 못하게 할 것이니, 그럼 설령 적들을 물러가게 하는 데 성공해도 상인들이 파괴된 나라에 다시 오겠소? 


먹이고 잠을 잘 숙소조차도 없어진 파괴된 나라에?"


""...""


"또, 이미 저들이 농경지의 대부분을 파괴하였으니, 이 상황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결코 식량을 얻지도 못할 거요.


지금에 있어 항복은 최선이 아니오, 유일한 선택지지. 항복하여 군사와 백성을 보존한다면, 최소한 후일을 도모할 기회는 있을 테요, 허나 계속 무의미하게 항전하여 무고한 백성을 잃는다면, 결코 우리 백고대하국(서하인들이 자기 나라를 부르던 명칭)은 다시는 성세를 되찾지 못할 거요.


그러니, 경들은 이것에 대해 더는 말을 꺼내지 마시오. 흥경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다시 상인들을 불러 올 계책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제발 가만히 있어 주시오."


황제는 그리 말하고서는, 옥좌에서 내려와 입이 벙어리가 된 중신들을 지나치면서 정전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