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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아..”


얼어붙었다. 다르게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을 빼곤 여자를 몰랐을 하준의 곁에 여자가 있다니..


“무슨 일이야?”


“…그 여잔, 누구야?”


흑색 장발과 순박해보이는 외모를 가진 여자. 아무리 가려도 흘러나오는 전자담배의 향기를 가진 자신과 다른 샴푸의 향기를 가진 여자.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여자친구 따윈 만들지도 못할 상태였을텐데, 반년이라는 시간으로 이렇게 회복할 수 있다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민의 질문이 처음 당황했던 하준의 안색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빠라 불렀던 여자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그녀에게 되려 질문했다.


“…보고도 몰라?”


“아니, 몰라서 하는 말이야. 옆의 여자는 누구야? 친척 동생? 아니면..”


“하준이의 여친, 미영이라 해요.”


“무, 뭐라고?!”


수민의 모습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여성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하준의 여자친구. 그 말을 듣는 순간, 수민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고작 반년 만에 자신을 잊고 여자친구를 만들었다고? 어떻게? 말도 안 돼!


“…거, 거짓말이지? 하준아. 넌 날 좋아했잖아.”


“그건 옛날 이야기지. 네가 나한테 한 걸 생각해봐. 착각하지 마, 우울증 때문에 묶였던 것 뿐이야.”


“아니! 아니.. 그게...”


좋아했다는 말에 하준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수민에게 구역질 나는 쓰레기라도 보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이 수민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안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준과 수민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준아, 미영이랑 먼저 들어가. 수민이는 내가 이야기 해서 돌려보낼테니.”


“…부탁할게..”


“아, 안 돼! 하준아. 나, 나 할말이 있어! 정말..”


“참 추하다. ㅋㅋㅋ”


“…에?”


하준과 미영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안준에게 가로 막혀 버렸다. 그는 수민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의 눈에 수민은 성욕에 눈이 멀어 소꿉친구인 자신의 동생을 망가뜨린 쓰레기였다.


“오빠, 나 막지 마! 하준이한테 할 말이 있단 말야! 나, 나...!”


“그 꼴로 하준이한테 찝적대려고?”


“아냐, 그게 아냐.. 잘못했다고....”


“아하~ 용서 받을려고? 받고는 싶겠지. 다 알아! 근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다급한 외침이 가진 의미를 눈치 챈 안준의 질문에 수민이 얼어붙고 말았다.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우습게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용서를 받고 못해준 만큼 사랑하겠다는 핑크색 꿈을 꿨을 뿐이지 그의 고통을 마주하려 했던 적은 없었다.


안준은 질문에 답하기는 커녕 얼어붙은 모습을 비웃으며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수민이 하준에게 보냈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씨발 난 처음에 무슨 AV 찍는줄 알았어. 걸작이라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더라고. 비참하게 딸이나 치는게 내 동생이었다는 것만 빼면 말야. 내 동생한테 돈이라도 준 거냐?”


“아냐! 그런 거 아냐! 그건 진심이..”


우성의 품에 안겨 헐떡이던 자신과 패배감과 우울증에 흥분까지 겹친 하준이 비참하게 자위를 하는 사진, 분명히 우성이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수민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애써 소리를 지르며 부정하고 안준의 휴대전화를 뺏으려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사진을 부정하며 그 모든 죄를 우성에게 떠넘기려 했다.


“그건 우성이가 한 거야! 내가 아니야!”


“하항~? 그 우성이란 새끼가 했다 이거지? 그렇구나?! 난 또 뭐라고!! 내가 잘못했네!”


“맞아, 맞아! 다 우성이 때문이야. 난 잘못 없어! 오빠도 알고 있었구나?! 그럼 하준이..”


이에 안준이 손뼉을 치며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으려 했다.

그 모습이 혹시 모를 가능성이라 여겼던 수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안준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안준이 꺼낸 다른 사진이 수민을 무너뜨렸다.



“이것도 그 새끼가 시켰다고 할 생각이냐? ㅋㅋㅋㅋ”


“……………”


격렬하고 뜨거웠던 관계를 마친 여운에 취해 우성의 성기를 보듬으려던 순간, 울분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른 하준의 성기에 담배 연기를 뱉고 경멸의 시선과 손가락을 들었던 사진.


“…아…아……아아……”


그 사진을 본 수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외면하려던 진실을 깨달았다. 용서를 구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음을, 처음부터 돌아갈 여지 따윈 없었음을.


“꺼져 병신아. 이 짓하고 용서받을 새낀 없다는 걸 모르겠냐? 넌 약이나 처먹고 일이나 해라. 어디 에이즈 걸린 창녀새끼가 내 동생한테 찝적거려. 소금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 말을 끝으로 안준 역시 집으로 들어갔다.

어떻게든 집으로 들어가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하겠다는 희망은 처음부터 없었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 앉은 수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하…나……바보잖아……처음부터……처음부터……내가…다…전부…부숴버렸어……”


수민의 입에서 공허한 웃음소리와 자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눈물이 방울처럼 흘러 내렸지만 그녀의 곁에서 눈물을 닦아줄 사람은 없다.


“…전부……전부……남은 게……없어……하…하하하..…흐윽…”


“…줄 게 있어.”


“…어?”


흐느끼려는 순간, 하준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모습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느낀 수민이 그의 품에 달라붙어 울부짖기 시작했다.


“…미안해미안해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너한테 그러는 게 아니었어!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리고 그런 바보같은 짓을 했어! 제발 용서해줘! 용서해줘!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제발.. 제발!”


“그만해.”


“…하준…아…”


한때 사랑했던 소꿉친구의 비참한 모습을 마주하고도 하준의 안색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수민의 손에 사진을 쥐어주었다. 눈물 범벅이 된 수민이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얼어붙고 말았다.


그것은 소꿉친구, 그 소중한 과거의 꿈과 같은 기억이 남겨진 사진이었다. 하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수민에게 작별을 고했다.


“…널 미워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린 친구야. 그 뿐이야. 이제 돌아가. 아주머니랑 아저씨가 걱정할 거야.”


“…하준아…제발…날 버리지 말아줘…”


“난 널 버리지 않아. 그저 친구일 뿐이야. 그럼 잘 가.”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가는 하준의 뒷모습을 보던 수민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 의미를 모를 수 없다. 기억이 남은 사진을 버린다. 친구일 뿐이다..


하준은 수민을 향한 마음을 접었다.


소꿉친구의 마지막 통보에 수민은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사진을 품에 안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 울음 소리가 닿을 장소 따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수민은 울부짖었다. 스스로를 향한 혐오와 끝없는 슬픔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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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조금 짧게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