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현이가 당했을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확증이 없는 부분은, 정황 증거를 조합한 내 추리일 뿐이지만, 아마 98%이상은 맞으리라 본다.


승현이는 사건 당일날 진로 상담이 있었다고 했다. 범인들은 내 친구들을, 아마 상담 시간이 늦추어졌다는 등의 말로 속여 일찍 돌려보낸 뒤, 범인 중 한 명의 여동생과 결탁해 그녀를 강간하는 시늉을 했을 것이다. 


승현이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고뇌하다 경찰에 신고를 한 뒤 휴대폰을 던지고 범인들에게 달려들어 범인 중 한 명을 가격, 그 한 명은 아마 뒤로 크게 밀려났을 것이다. 전화를 끊지 않고 휴대폰을 굳이 던진 이유는 자기 휴대폰 통화 설정을 이용해 상황을 몰래 기록하기 위해서 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뒤로 밀려난 범인 한 명은 나머지 일행이 제압하고 있는 승현과 일행 중 한 명인 여성의 사진을 멀리서 찍은 뒤, 상황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여성에게 도망가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아마 그 후로 여성은 현장을 이탈, 이후 마주친 경찰관에게 장난 전화라며 얼버무려 경찰을 물렸을 것이다. 그 뒤, 일행은 수집한 가짜 증거를 들고 도주, 승현이는 던진 휴대전화를 잃어버려 누구와도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 사이 범인들은 수집한 가짜 증거들을 더욱 정교하게 조작, 약간의 위화감을 제외하면 아무 흠결이 없어 보이는 증거를 만들어 게시판에 게재했다.


이상이다.


음, 절망적이군.


***


우리는 승현이의 무결함을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연화가 찾아온 승현이의 휴대전화만 있으면, 모든 게 술술 풀릴 줄 알았다. 그 휴대전화가, 어째선지 먹통이 되어 다시는 켜지지 않을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서비스 센터에 가 보니, 메모리 카드를 포함한 이런 저런 장치들이 한꺼번에 망가졌다고 한다. 수리비용도, 꽤 나올 테고 데이터 복구도 힘들 것이니 새 제품을 구매하라는 상담원의 권유를 뿌리치고 우리는 터덜 터덜 걸어나왔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차라리 우리도 그 통화 녹음본을 듣지 못했더라면 연화가 죄책감에 정신이 나갔나보다, 할 텐데.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가 그 녹음본을 들은 직후 휴대전화가 꺼지더니 영원히 먹통이 되었다.


학교에서의 내 입지를 이용해서라도 사람들을 설득해 보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당연했다. 세화나, 하은이, 주영이나 되니 내 설명을 단번에 이해한 것이지, 대부분 아이들은 가짜 녹음본과 사진의 위화감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애들을 설득하고 다니던 중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랬다.



'으응,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는 거 아닐까?'



우스웠다. 합리적인 추론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찢어 죽이고 싶은 범인이 악의를 담고 조작한 증거에 놀아나는 우매한 학우들이. 비유하자면 중국에서 초능력자 포착이랍시고 올린 조작 동영상을 그대로 믿는 초등학생같았다.


하아.


사실 당연한 것이다. 내가 물질적 증거를 들이밀었다면, 모두들 내 말을 믿어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예전부터 승현이와 친하게 지내왔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우리 8명은, 승현이에 대한 객관적 진술을 하기 힘든 상태였다. 적어도 외부에서 보기엔 그랬다.


설상가상으로, 세화나 유진이, 연화같은 경우엔 승현이를 직접적으로 괴롭혔던 탓일까. 다른 아이들이 멋대로 오해를 하는 바람에 더욱 더 설득하기 어려웠다. 


태희는 계속 자기탓만 했다. 자기가 수상한 정황을 눈치 채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났다고. 속아 넘어간 사람이 아니라 속인 사람이 잘못이다. 몇번이고 그렇게 말해도 태희는 말을 듣지 않고 울기만 한다.


하은이나 주영이, 채민이도 열심히 돌아다녀 봤지만 몇몇 애들을 제외하곤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다.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달았다. 수능이 가까워지며 아이들의 사건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져 갔다. 선생님들도 정숙하기를 종용했다. 쉬는 시간에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어려워졌다.


정말 불쾌한 점은 이 사건을 막은 사람들로 알려진, 즉 실제로는 이 사건의 범인인 작자들이 내 친구들 주위를 어슬렁거렸단 점이다. 마음의 빈틈을 노린 거겠지. 애들이 적극적으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나선 시점에서는 그러는 일이 없었지만, 승현이가 정학을 당한 뒤로 한동안 주변을 맴돌았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욕망에 사로잡혀 사람 한 명을 나락으로 떨어트려놓고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는 듯, 정말 자신들이 사건을 막은 사람인 듯,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진정 이 사회가 타락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승현이의 결백을 밝히는 것도, 그것으로 친구들의 죄책감을 씻어내는 것도, 범인들이 벌을 받게 하는 것도. 정의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사악한 자들의 합리화를 반증할 수도 없었다. 반증할 수 없는 거짓은 사실이나 다를 바 없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오니 여러 잡념들이 뇌리를 스친다.


최소한, 교사들은 자신들이 지도하는 학생을 믿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최소한, 학생들도 반에서 조용한 아이가 저질렀다는 흉악한 짓에 대해 의심이라도 해볼 만 하지 않은가.


최소한, 범인들 중 한 명쯤은 양심을 갖고 실토할 만도 하지 않은가.


최소한, 십 수년간 알아온 친구의 말을 믿어볼 만도 하지 않은가.


최소한, 최소한 내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버텨볼 만도 하지 않은가.



...


절망은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다. 


나도 알고 있다. 잘못은 속인 사람의 것이지, 속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내 추리가 맞든 맞지 않든, 내 친구는 그저 불쌍하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딛고 다수의 악과 맞섰으나, 그 악과 맞서 구해낸 자 또한 악이었을 뿐이다. 자신들의 행실에 대한 반성과 고찰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저열한 욕망에 사로잡혀 사악한 짓을 꾸민 자들에게 철저히 짓밟혔다. 


선한 마음을 갖고 행한 행위가, 이런 최악의 방식으로 배신당했다. 그런 친구에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지—라는 말은, 너무도 잔혹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난, 일단 친구들과 함께 승현이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무능한 내가 그를 찾아갈 자격따위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지금 그를 혼자 둘 순 없었다. 내 예상으로는 그는 수 일 후, 끔찍한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꼴사나운 모습으로라도, 찾아가지 않을 순 없었다.



똑똑똑—


그의 집은 초인종이 고장났기에 문을 두드린다. 부스럭 부스럭. 누군가가 무언가를 헤집고 현관쪽으로 걸어 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


방과 후,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편의점 앞에 남자 고등학생 5명이 모였다.



그 중 마지막으로 도착한 한 명이 도착과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까였어."


"너도냐? 걔는 그래도 얌전해 보여서 받아줄 법도 해 보였는데."


"아냐, 완전 칼이더라.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걔도 그랬냐?"


"뭐야...이하은도 좋아하는 사람 있대?"


"그러던데."


"...연화도 그러더라."


"걔도?"


"응. 걔 성격 알잖아. 쪽팔려 뒤지는 줄 알았어. 막 요란 떨면서...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내가 괜한 마음 고생 안 했으면 좋겠다고~"


"양반이네."


"양반은. 그걸 완전 명랑하게 말하는데, 진짜 살기 싫더라. 비유하자면 바지에 오줌 쌌는데 '그걸 보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겁나 킥킥대면서 말하는 느낌?"


"혹시 허주영도 그랬냐?"


"오줌싼 거 보고 웃었냐고?"


"아니, 뭐라는 거야. 좋아하는 애 있다고 거절했냐고?"


"아, 응. 그랬는데."


"...천세화도 그랬어."


"이게 말이나 되냐?"


"말은 되지. 뭐 문제 있나? 그냥 까고 싶은데 적당한 구실 만들었을 수도 있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을 수도 있고."


"그럼 그 새끼랑은 왜 붙어 다니질 못해 안달인데."


"백승현?"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진짜 있다고 치면, 걘 남자 아니야?"


"아니 뭐, 요즘 시대에 그냥 남사친 여사친 할 수도 있지."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 그리고, 그래. 뭐 친구라 치자. 근데, 남성 친구라곤 한 둘 밖에 안되는 그 백승현 근처에, 학교 최고 인기녀가 8명이 들러 붙는 게, 말이나 되냐? 상식적으로? 한둘이면 몰라도, 8명이 죄다 걔랑만 남사친 여사친 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거야..."


"걔네 백승현 말고는 남사친 거의 없다시피한데, 그 8명의 교집합이 되는 남사친이 백승현이라면. 뭔가 있는 거 아니겠냐?"


"네 말은, 걔네가 죄다 백승현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하...개같네."


"개같지?"


"근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 걔넨 초등학교때부터 부모님끼리 친했다는데, 걔네가 진짜 다 백승현 좋아하는 거면, 낄 틈같은 거 없는 거 아니냐? 푹 빠져 있으니까 지금까지 붙어다닐 거 아냐."


"...아니. 방법이 하나, 도박이긴 한데 있다."


"뭔데?"


"내 여동생이, 백승현 좋아하거든?"


"그건 어떻게 알았냐?"


"지가 말하던데? 3학년 이 오빠 아냐면서 사진 보여줬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판을 한 번 짜보자고."


"무슨 말이야?"


"상식적으로, 백승현이랑 걔네가 떨어져 다닐 일이 뭐가 있겠냐?"


"서로 싫어하면 안 붙어 다니겠지."


"그래. 근데, 저 9명 모임의 주도권은 백승현이 아니야. 나머지 8명이지. 그러니까, 저 8명이 백승현을 싫어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백승현이 걔들을 싫어하게 만드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이게 맞냐?"


"싫으면 넌 빠져. 난 안 그래도 백승현 평소부터 개같았거든. 지 얼굴 좀 반반한 거 믿고 8명이나 여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게 열받잖아, 음침한 놈이. 이렇게 지 주제 파악좀 시켜주고, 그 김에 애인도 만들자는 거니까."


"...누가 안 한댔냐."


"재긴. 그럼, 하는 거지? 나 동생한테 전화좀. 얘가 안 한다 하면 힘들어지니까 기도나 하고 있어."


"..."


"하겠대. 일시는 대충, 걔 진로 상담 하는 날로. 상세한 설정은..."




우리 6명은 그렇게 일을 계획하게 되었다. 


일시는 앞서 말했듯 그 녀석의 진로 상담일. 그 날 어떻게 해서든 여자들 8명을 그 녀석 보다 먼저 귀가하게 만들어야 했다. 


운이 좋게도 제일 까다로운 심수아는 그 날을 포함한 며칠간 아예 결석이었고, 막무가내로 기다리겠다고 할 확률이 높은 박유진도 오전 수업만 들었다. 나머지는 쉽게 속여넘길 수 있었다만, 정태희. 이 녀석이 의외로 큰 문제였다.



"응? 내가 기억하기론 선생님께서 승현이 상담은 길어야 30분 정도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아, 하하. 그, 선생님께서 지금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셔서..."


"그러면 보통...은 일자를 미루지 않나?"


"어,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승현이 이놈이 그냥 해치워 버리고 싶다고 오늘 하겠다더라."


"응, 그렇구나.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걘 우리한텐 별 말 없던데..."


"아잇, 내가 또 승현이랑 중학교때엔 친했거든."


"음, 그랬나? 내 기억으론 승현이 중학교때 동성 친구는 한 명도 없었는데."


"네, 네 앞에서 친하게 논 적은 없었지. 따로 논 적도 많이는 없었고. 그래도 교실 안에선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기억력만 좋은 맹탕인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까다롭다. 아니, 당연한가. 녀석 입장에선 4년전 일도 어젯밤 일처럼 생생할 테니. 


실제로 난 백승현과 중학교 시절 2번이나 같은 반이었지만 친하게 지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시의 녀석은 지금보다도 더 음침해서 가까이 가고 싶은 생각은 먼지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이 녀석을 속여넘기지 못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린다. 이 녀석 혼자 백승현을 기다린다면 분명 다른 녀석들이 왜 혼자 기다리는지 궁금해할 것이고, 그때 이 녀석이 이렇게 말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선생님께서 승현이랑 상담 30분도 안 걸릴 것 같으시다는데 그냥 기다리려구.'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 녀석들은 분명 가짜 뉴스를 퍼뜨린 우리에게 책임소재를 물을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 우리는 녀석들의 기억에 확실히 각인되어 다시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덤으로 백승현과 녀석들 사이는 더욱 돈독해질 것이고. 그 뿐만이랴, 이런 일을 모략한 우리의 평판도 최악으로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정태희가 다음으로 어떤 말을 뱉을지가 우리에겐 매우 중요했다.


긴장되는 순간.







"음, 그래? 그럼 하루쯤 그냥 애들이랑 먼저 가지 뭐."



성공이다! 


우리는 그 즉시 2단계에 대한 최종협의를 거쳐 그 날 백승현을 어떻게 끌어들일지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내 여동생을 성폭행 당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시킨다.'


일단은 위처럼 계획을 잡았다. 최악의 경우 녀석이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녀석을 발견해 입막음을 위해 달려가는 척 할 계획이다. 녀석은 운동신경도 최악이니 쫓는 건 문제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녀석은, 미끼를 물었다. 


예상치못한 드롭킥에 한 대 얻어맞긴 했다만 그 뒤론 짝사랑들을 모조리 빼앗긴 스트레스 해소겸 가짜 증거들을 수집하기 위해 녀석을 제압하고 두들겨 팼다. 


그 뒤로는 간단했다. 녹음한 음성 파일을 조작해 중간에 성 범죄자란 단어를 끼워넣었고, 이걸 익명으로 학교 게시판에 게재했다. 


하루만에 거의 전교생에 달하는 인원들이 그 게시물을 보았고, 여자애들의 반박글이 올라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종의 이유로 백승현과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어찌됐든 행운이 따른 것이었다. 


증거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한명만 따로 떨어져 녹음을 하고 사진을 찍은 것이다. 따라서 모두 우리의 말을 믿을 것이다. 우린 객관적 증거를 제시했고, 녀석은 그러지 못할 테니.


수시 마감도 얼마 남지 않았다. 수능은 내다 버린 우리이기에, 남은 기간동안은 애인을 만들어 희희낙락하게 보낼 것이다.


***


똑똑똑


수아가 문을 두드렸다. 


부스럭, 하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세화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나도 있어도 되는 건가...?"


세화는 자신이 그에게 물감을 부은 일로 많이 위축된 듯 보였다. 나는 오히려 얼굴 마주보고 사과해야하지 않겠냐고 일단은 조용히 하라고 시킨 뒤 다시 승현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혹시나 우리인 걸 알고 안 열어주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잠시. 그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래서 오히려 당황해 사고가 정리되지 않았고, 일단은 가장 먼저 인사를 하기로 했다. 



"...아, 안녕."



인사를 하고 왠지 그를 쳐다볼 수 없어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는 예상밖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 안녕."



비록 그 목소리는 심하게 내려앉아 있었으나 일단은 인사를 받아준 상황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저, 저기!"


"우리 집엔 왜 왔어?"


"으, 응?"


"물었잖아. 우리 집엔 왜 왔어?"


"아니, 그, 그게..."



준비해온 수많은 말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바닥을 보고 있다 용기내어 올려다 본 그의 모습은 심하게 초췌했다. 지저분하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심히 지친 사람처럼 힘들어 보였다. 눈가엔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으며, 머리는 한참을 자르지 않았는지 길게 늘어져 있어 눈을 조금 가렸다. 



"할 말 없으면 들어가 봐도 돼? 조금 이따 정수기 점검인데."



정수기 점검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그를 보낼 순 없었다. 



"그, 저기! 우리, 사과...하러 왔어."


"사과?"



그 직후 우리는 차례대로 각자가 생각하는 본인의 잘못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뺘, 뺨 때려서 미안해..."


"나, 난 물감, 부은 거... 지, 진짜 미안해애..."


"...네 말 끊으면서 마술이니 뭐니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 지껄여서 미안해..."


"애, 애들이랑...뒤에서 네, 네 뒷담화한 거, 진짜 미안해..."


"네 물건...버려서 미안해..."


"걔들이 그럴 빌미 만든 거, 애들한테 네, 아픈 이야기한 거, 미안해..."


"...네가 이렇게 힘든데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네 말 믿어주지 않아서 정말로 미안해...!""



거의 모두가 울먹이면서 자기 잘못을 실토했다. 학교에 있지조차 않았던 채민이와 수아를 제외하곤, 모두가 그에게 씻지못할 상처를 안겨주었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그의 말을 믿어주었더라면, 이런 힘든 자리를 주선할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 우리는 가만히 서서 그의 답변, 을 기다렸다. 그러길 몇 분. 마침내 그가 입을 떼었다.



"응, 그래. 알았어."


"으, 응?"


"알았으니까 이제 가봐. 거실 치우러 가야 되니까."


상상이상으로 의외인 답변이었다. 물론, 단번에 용서받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이런 뒤틀린 답변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우리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그에게 유진이가 눈치없이 물었다.



"그, 그럼 우리 용서해 주는 거야...?"


"응. 그러니까 빨리 가. 머리도 빗어야 되고, 할 거 많아."


"자, 잠깐만...!"



이대로, 이대로 가면 안된다. 이건, 절대 용서따위가 아니다. 이건, 그냥 포기이지 않은가. 간절한 마음에 그의 다리를 붙잡고 울었다.



"아직도 할 말이 있어?"


"스, 승현아...! 우리가,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우리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까...!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제발, 제발 우리 그렇게 보지 마..."


"..."


"난, 너희가 왜 이러는지를 모르겠어."


"왜 별것도 아닌 걸 갖고 그렇게들 울어."


"...?"


"너희 보내는 것도 너희 생각해서 하는 말이잖아. 강간 미수범 집에 찾아온 거 들키면 어쩌려구."


"아니이...아니야... 미안해.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아..."


"...뭐가? 사실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뭐랄까. 정말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과연 이것은 우리를 비꼬기 위한 연기인 것일까, 아니면 정신이 나가 정말로 그렇게 믿게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포기일까.


우리는 어딘지 두려운 마음에 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었다.



"너도 알잖아. 내가 한 말 다 거짓말이야. 내 휴대폰 같은 거 아무데도 없잖아."


"아니이, 아니야아... 네 휴대폰 내가 찾았단 말이야아..."


"...정말? 그럼 돌려줘."


"여, 여기."


"안 켜지네..."


"망가졌대..."


"그래? 어쩔 수 없지. 새 거 사달라 해야겠네."


"제발 승현아. 장난으로라도 네가 강간범이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마."



수아가 승현이의 두 손을 핏줄이 보일 정도로 꽉 잡고 말했다. 승현이는 아팠는지 그 손을 뿌리쳤고, 수아는, 자기도 이 사건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임했지만 적어도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자신이라면 최소한 악감정은 없을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듯, 손이 뿌리쳐지자 놀란 표정으로 주저 앉았다.



"...네가 아니라고 한들 뭐가 바뀌어. 난 이미 강간 미수범이 됐는데."


"스, 승현..."


"그만."



그는 이제 지친다는 듯, 한 평생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던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수아나 채민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너희가 이제 와서 이런다고 뭐가 바뀌어? 아직도 우리 엄마는 어디 나갈 때마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냐면서 욕을 들어먹고, 우리 집 문은 닫았다 열 때마다 다른 쓰레기가 놓이고 있는데, 너희가 이렇게 찾아와서 울고 불면, 내 누명이 다 밝혀지길 해,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길 해? 뭐가 바뀌느냔 말이야."


"진짜 피곤해.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니까 좀 귀찮게 굴지 마."



그는 그렇게 말하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우리는 한참을 얼빠진 표정으로 그 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