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


학교를 가는 나의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세 달. 워낙 오랜만이기도 했고 새로운 경험은 늘 기대되는 법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나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나는 발걸음을 한층 더 빠르게 재촉했다.


"이...이럴수가. 지원이니?"


교무실을 찾아가니 선생님 한 분께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맞이해 주셨다.

검은 치마가 잘 어울리는 그녀는 자신을 나의 담임 선생님이라고 소개한 뒤, 교실을 향해 안내해 주셨다.


"그건 그렇고 다행이구나...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네? 무슨 이야기요?"


"어... 아차...!"

"크흠, 그래서 병세는 좀 어떻니?"


"병세...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머리가 멍해요. 헤헤..."

"그...제가 기억상실증이라는것은..."


"걱정마렴. 어머니께 들어서 알고 있단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거나 적응이 어렵다면 바로 선생님에게 말해주렴."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겠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거란다."


이윽고 도착한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만 문 밖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기운을 알아채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 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드르륵, 쾅."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반에 있는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문을 너무 강하게 연 탓일까? 초장부터 실수라니, 낭패였다.


"어...어... 그러니까..."

"안녕...? 반가워...?"


이어지는 정적.

아이들은 일시정지한 듯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나를 멀뚱히 바라볼 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눈 앞이 노래지고 사방이 좁혀져왔다.

속으로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할 그 무렵.

한 남자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는 말했다.


"...선생님, 걔 지원이에요?"


선생님께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자 머잖아 우레와도 같은 함성이 아이들로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나도 놀라 눈만 끔뻑거릴 뿐 이었다.


"지원이...? 쟤 진짜 지원이야?"


"어머 세상에... 완전 대박이다!!"


"다들 주목! 지원이가 병원에서 돌아왔단다."

"사고 탓에 아직 지원이의 기억이 온전치 않은 상태니까, 너무 자극적인 말은 하지 말고! 알겠지?"


"네에!!"


나는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교실 뒷쪽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 선생님께서 반을 나가시자마자 내 주위로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원아, 3개월 동안 누워있던거야?"


"기억이 온전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원아 나 기억나? 내가 누군지 알겠어?"


"지원아..."


"지원아...!!"


"그...그러니까..."


심장이 쿵쾅거리고 호흡은 점차 가빠져왔다.

고개를 똑바로 들어 아이들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흐려지는 눈 앞 탓에 그럴수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하며 시간만 허비하고 있을 무렵.


"야!! 선생님 말 못 들었어? 지원이가 힘들다잖아!!"


불현듯 멀리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성. 그것도 아주 당차보이는 여성이었다.

운동이라도 하는지 까무잡잡한 피부에 짧은 똑단발을 한 자그마한 여성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따라와."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이었기에 나는 저항할 틈도 없이 무력하게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등 뒷편으로부터 남자아이들의 호응섞인 함성이 들려왔지만 그들에게 집중할 시간조차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복도 끄트머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여성은 나의 팔을 풀어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억을 잃었다니?"


"어? 그,그러니까 말 그대로..."


"알아 그 쯤은! 내 말은 어디까지 기억나냐 그 뜻이라고!"


"어... 어... 아마 중학교 때 까지...?"

"미안... 나도 잘 모르겠어... 미적분은 기억나는데 다른건..."


"ㅁ...뭐...?"

"ㄴ...나는? 나도 기억나지 않는거야?"


여성은 애처로운 표정과 시선으로 내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런 표정으로 말해봤자 나는 아는게 없기에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나의 사정에 대한 모든것을 천천히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그런...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소리잖아..."


"응... 미안..."

"그, 그래도 아예 가망이 없는건 또 아니랬어. 지금도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중이고..."


"하아... 무슨 이런..."


여성은 현기증을 호소하며 벽으로 그 가녀린 몸뚱아리를 기대었다.

행동으로 보나 언행으로 보나, 아무래도 그녀에게 있어 꽤나 큰 충격인듯 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모든것이 끝날 때 까지 가만히 지켜보는 것 뿐.

잠시 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퍽 진정이 되었는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아?"


"뭐,뭐가?"


"네 몸 말이야. 괜찮냐고."


"내 몸...? 잘 모르겠는데... 내가 뭐 다치기라도 했었어?"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동공이 미세하게 작아졌다가 커지는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도 잠시. 그녀는 헛기침을 수차례 한 후 자그마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기억 못 하면 됐어."

"어쨌든, 난 소영이야. 한소영. 네 부랄친구 정도 되는 사람이지."


"부, 부ㄹ...?"


"아무튼 다시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잘 지내보자. 지원아."


자신을 한소영이라 소개한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미소 너머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산재해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조용히 떨려는 손과 이따금씩 들려오는 훌쩍임까지. 

솔직히 말해 다 티가 났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는 없겠지.


분명히 많은 추억이 있었을 터.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와의 추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슬픔을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할 수 있는것은 오직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 뿐.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촉촉하게 땀으로 젖은 소영이의 손에 나의 투박한 손이 닿자, 그녀는 다리가 풀리며 털썩하고 주저 앉고야 말았다.

나는 당황하여 황급히 그녀를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무슨 일에서인지 그녀는 나의 손을 잡지 않았다.


"...?"

"왜,왜 그래...? 어디 아파...??"


그녀는 대답 대신 눈물로 화답해 주었다.

벙쩌있는 나를 두고, 서럽게 흐느끼며 그녀가 말했다.


"흑... 흐윽..."

"진짜로... 진짜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거구나..."

"어떡해.... 훌쩍, 흐아아앙....."


"앵...? 내,내가 뭘 잘못한거야 방금...??"

"잠깐... 잠깐만...! 일단 진정하고 울지 말아봐... 왜 그러는건데...??"


"그래! 이거야 이거!!! 이 친절한 말투와 배려!!!"

"내가 아는 지원이는... 이렇게 친절하지 않았어... 이렇게 착하지도 않았다고...!"

"내가 울고 있으면 다가와서 놀리면 놀렸지, 이렇게 위로해주지 않았단 말이야...!!"


"...에??"


대체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 왔던걸까?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우선 그녀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잠시 뒤, 어느 정도 눈물을 그친 소영이가 내게 말했다.


"...예전의 너, 그러니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너는 지금과는 달랐어."

"장난기 많고... 악동에다가 천방지축인... 속된 말로 철이 덜 든 아이였다고."

"내가 손을 내민것도 그 이유였어... 본래 너라면 절대 그 손을 잡지 않았을거니까..."


"내...내가 그 정도였어?"


"솔직히 말해 너가 처음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때, 난 네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

"찐따쉨이 또 지랄하는구나 하고. 그런데... 그런데 그렇다기엔 너무 세밀하고 자세한거야... 너 답지 않게..."

"설마 진짜 기억을 잃어 버렸을 줄은... 흐윽... 미안해... 내가 오해해서..."


나 답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람.

그건 그렇고 찐따라니. 대체 그녀에게 있어 나는 무슨 이미지였던걸까?

결국 또 다시 울음이 터져버린 그녀를 진정시키기 까진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헤헤... 미안... 아직 혼란스러울텐데 울기나 하고..."


"아냐! 난 괜찮아."


"...역시 안 어울려 그 친절함."

"미안해 지원아... 내가... 제때 알아차리지 못해서..."


"응? 방금 뭐라ㄱ..."


"신경쓰지마! 그냥 아무 의미 없는 혼잣말이니까."

"가자! 학교 구경시켜줄게."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학교의 주요 시설을 둘러보았다.

비록 거리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절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그때, 문득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 여자 아이가 구석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아침, 우리 집으로 찾아와 통신문을 건내 주었던 그 여자 아이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황급히 나의 시선을 피했다.


'분명히 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피할 이유가...'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어? 응... 아무것도."


다시금 고개를 돌려보니 그 여자 아이는 이미 사라진 뒤 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처럼 말이다.


그 이후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잊으려고 해봐도 자꾸만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게 해집어 놓기 일수였다.

그 덕분일까,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는데 이미 심적으로는 한없이 가까워진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저 여자애... 이름이 뭘까...'


의식을 되찾은 이래.

나 이외의 대상에게 처음으로 관심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야야~ 이거 봐봐 진짜 존나 웃겨~!'


'...아. 혹시 오늘 시간 괜찮아?'


'뭐래~ 좆도 아무런 사이 아니거든?'


'그걸 믿었냐? 세상에... 너 혹시 바보야?'


.

.

.


"..."


수업이 끝나고 끔뻑 졸았던 탓일까.

그 찰나의 시간에 또 다시 꿈을 꾸고야 말았다.


꿈의 내용이라고 해봤자, 늘 똑같았다.

얼굴 없는 익명의 여성들이 나와서 나를 매도하고 핍박하는 상황.

그리고 그 끝은 항상 암흑.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암흑이었다.


기분탓인지는 몰라도 꿈의 내용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뭐, 내 뇌기능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그리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만.

문제는 그 꿈의 상징성이었다.


꿈은 결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는다.

그 말인 즉슨, 꿈을 만들 때 사용되는 재료들은 모두 나의 경험에 바탕을 둔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꾼 꿈이 모두 내가 경험했거나,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간접 경험 이라는 의미나 다름 없었다.

결론적으로 꿈속에서 그녀들이 내게 했던 말들을 과거 내가 경험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누가 내게 그런 말을 한 것 일까.


어머니?

분명히 첫번째 꿈은 나에게 화를 낸다기 보다는 훈계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나를 과보호 했으면 했지, 그렇게 깎아내리고 헐뜯을 분이 아니셨다.


누나?

지금도 내가 싫다는 티를 조금이라도 내면 바로 자해를 시작하는 그녀인데, 가능성이 낮아도 너무 낮았다.

나를 끔찍히 아끼다 못해 집착하는 누나가 내게 그런 말을 한다고? 당치도 않는 소리였다.


소영이?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많은 이상 그녀일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녀와 보낸 시간이 굉장히 길다는것이 문제였다.

만일 그녀가 내게 꿈과 같이 비방을 했더라면 사이가 그렇게 오래 유지될 리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허억... 허억..."


주변을 둘러보니 교실에는 오직 나 혼자 뿐이었다.

시곗 바늘은 어느덧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시간..."


흘러내린 식은 땀을 닦으려고 손을 뻗자 무언가가 나의 손등을 간질였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누군가가 내게 남긴, 꼬깃꼬깃하게 접혀 있는 종이 쪽지였다.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먼저 갈게.]

[그건 그렇고 잠꼬대 까지 하던데, 집에서 일찍 좀 자고 그래.]


"나중에 돌아오면 빵 하나 살게... 소영이가..."


나는 쪽지를 도로 접어 넣었다.

그건 그렇고 잠꼬대라니, 그 정도로 깊이 잠들었단 말인가 나는.


"...핫!!"


그때였다. 교실 앞 문이 쾅 하고 열린것은.

덕분에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ㄴ...누구?"


문 앞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며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아까 오전, 나의 눈을 애써 피했던 그 여자아이였다.


"미...미안. 꺠워서..."

"그,그럼 이만..."


"자,잠깐!"

"왜, 무슨 일인데 그래?"


"ㅁ..뭐라고?"


"왜 날 그렇게 피하는거야?"

"미안할 필요가 대체 어딨다고...?"


나의 질문에 그녀는 꽤나 당황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렇게 이유도 없이 모르는 사람에게 미움 받아버리면, 궁금해서 못 견디는게 사람 심리라고.


"피..피한다니 그런적 없..."


"거짓말! 방금도 나 보고 나가려고 했잖아!"


"그,그건 너가 자고 있어서 안 깨우려고 한건데..."

"그... 잠꼬대까지 하면서 자고 있길래... 그냥 나가는게 좋을 것 같아서...."

"깨,깨울 생각은 절대 아니었어... 미안...!"


"잠깐, 잠꼬대를 들었다고?"


"그, 그런데 왜...?"


"자세히 좀 말해줘봐! 뭘 들었어?"


"어... 어어어...."


거듭된 취조에 그녀의 눈빛도 서서히 생기를 잃어갔다.

이런. 겁주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그녀 팔은 또 언제 잡은거야?


"미,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으... 으응..."


어색한 침묵이 거듭돠던 그때.

얼얼한 팔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별... 내용 없었어."

"그냥 음냐... 음냐 하는 그런... 흔하디 흔한 내용 있잖아..."


"그, 그렇구나... 난 또..."

"미안...! 너도 알잖아, 내가 깨어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만..."


"아, 아냐...!! 미안할 필요 전혀 없어..."

"미안할 필요... 전혀... 응. 없어."


잠시 동안 이어지는 정적.

그녀도, 나도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함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은은한 떨림이 느껴지는 듯 했다.


"저기... 지원이라고 했지?"


"응. 그런데..?"


"아, 아니야... 잘 돌아왔다고... 응."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널 걱정했어. 너가 돌아오기를 고대하면서 말야..."


"아... 그렇구나. 고마워."


"...으응."

"그, 그럼 이만 가볼ㄱ..."


"자, 잠깐."


나는 돌아서려는 그녀의 손을 재빨리 잡았다.

물론, 아까처럼 아플 정도로 세게 잡은 것은 아니었다.

나의 행동에 그녀는 꽤나 놀란 듯 했지만 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름... 혹시 이름이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


"내... 이름...? 왜?"


"어, 그...그러니까..."

"혹시나 기억을 못찾게 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억이고 인연이 되니까...?"


말은 장황하게 했지만 솔직히 끌렸기 떄문이다.

아, 물론 그녀에게 반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왠지 모르게 그녀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내 기억이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민지."

"오민지야. 내 이름..."


"민지... 오케이. 알겠어."

"민지야. 앞으로 잘 부탁해."


"...!"

"...으, 으응. 고마워... 지원아..."


그녀와 훈훈한 인사를 나눈 후 해어지려던 그때.

불현듯 앞문이 열리고, 딱봐도 행실이 나빠 보이는 여자 아이들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짧게 줄인 치마에 주렁주렁 매달린 헤어롤, 짝 달라붙은 교복까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어? 이게 누구야?"

"민지뀽이~! 오랜만이다, 응? 너도 학교 오는거야?"


"어... 어어??"


"말없이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냐구 이년아~"

"야들아, 안되겠다! 오늘 민지뀽이 재림 기념 파티 한 번 열자!!"


무리들은 이내 민지를 빙 둘러싼 뒤, 껴안고 휘두르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친한 친구들 사이의 재회인 것 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마치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포식자들에게 시달리는 먹잇감의 눈빛처럼 보였다.


왠지 모르게 낮익은 그런 눈빛 말이다.


"저기, 너희들 뭐하는거야?"


그래서 주제넘게 나섰다.

내가 한 마디를 하자 이내 그녀들의 시선이 모조리 나를 향하여 쏟아져왔다.

덜컥, 하고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왕따잖아? 막아야 하는 일이잖아?


"...너, 지원이. 맞지?"


"그, 그런데?"


"너 말야... 기억 상실증이라며? 소문 쫙 퍼졌던데."

"뇌 세탁하고 왔으면 조용히 짜져있기나 하라고... 주제 넘게 나서지 말고 새끼야."


"그래~ 우리가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헤실거리며 다가온 그녀들이 내 가슴을 주먹으로 천천히 두드리며 말했다.

꽤나 모욕적인 상황이었지만 왠지, 정말 본심은 아니다만 왠지 모르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두려워서일까. 그럴리가. 싸우면 내가 이길게 분명한데.

하지만 당당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몸은 그게 아닌 듯 했다.


"..."


"...까불고 있어."


"지원... 아..."


"그리고 오민지."

"앞으로 부르면 재깍재깍 뛰어와라? 튈 생각일랑 하지도 말고. 쯧."


폭풍같던 시간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멍하니 앉아있는 나에게 민지가 다가왔다.


"지원아... 괜찮아...?"

"미안...! 나 때문에 너까지..."


"아니, 괜찮아. 어차피 각오하고 한거였으니까."


"정말... 난 끝까지 너에게 짐짝만 되는구나..."


"..응? 방금 뭐라고?"


"아, 아아니! 아무 것도... 그냥 혼잣말 한거야..."

"저, 저기 지원아..."


"응?"


"그, 그게... 고맙...다고."


"뭘. 당연히 했어야할 일인데."

"그리고 너도,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마. 딱 보니 일진들 같던데."


"아..! 알겠... 어."


시계를 보니 바늘은 어느덧 점심시간 막바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곧 있으면 아이들이 돌아올 것 같았기에, 나는 다음 이동 수업을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아까 처음으로 통성명한거 치곤 굉장히 친해진 것 같지 않아?"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말이야."


"어, 어어? 그, 그렇... 네..."

"기분탓... 이겠지...?"


"그건 그렇고, 너 내 이름 알고 있던데."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엔 너와 무슨 사이였어?"


"어...????"

"어.... 어어어.... 그, 그게..."


"뭔데 그래? 이러니까 더욱 궁금해지는데."


"아아... 아무것도 아니였어!!"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오, 오오늘 처음 본거야..."


보통 처음 본 사이가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가는 재처두더라도.

그녀가 보여주는 반응. 그 반응은 분명 이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

특유의 불신과 혼란, 공포의 혼탁이 가득한 그런 눈빛.

민지는 나와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딱 그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눈빛을 지닌 사람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바로 나. 윤지원이 병원에서 깨어났던 첫날.

자그마한 손거울에 거울에 비친 나의 눈빛이 딱 그러했으니까.


"흐음... 그럼 지금부터 친해지면 되는거잖아?"


"에?? 뭐, 뭐라고? 방금 뭐ㄹ..."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으면 이제부터 사이가 되면 되는거 아니겠어?"


"..."


어째서일까.

나도 내 행동에 담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이대로 보내고싶진 않았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기 보다는 본능적인 이끌림에 더 가까웠다.


그녀와 더 친해지고 싶었고 그녀를 더 알고 싶었다.

나와 같은 눈빛을 가진 이상, 나와 같은 상처 또한 공유하고 있을테니까.


"그... 사, 사이라면 무슨 사ㅇ..."


"음? 괜찮다면 친구부터 할래?"

"내가 학교에 오늘 막 와서 그런지 친구가 별로 없거든."


"그, 그렇구나... 친구... 친구라..."

"응... 그럼 친구하자. 너랑 나 친구... 헤헤..."


남몰래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 하는 그녀를 보자니 절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기억을 잃은 후 처음으로 보다 의미있는 일을 한 것 같아 가슴이 벅참은 덤이었다.


그래. 분명 나의 최우선 과제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일테지만.

때때로 이렇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거머줘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 아냐.

뭐가 어찌되었든 나의 삶이고 두번째 기회인 만큼, 적어도 후회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후회없는 삶이라니, 말이 좀 이상하긴 하다만.

뭐어, 행복한 삶은 세상 만인의 롤모델이니 말이지.


소소하게 인사를 나누고 해어지려던 그 순간.


"지원이 일어났냐???"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억양으로 보나 어투로 보나 소영이의 목소리였다.


이내 콰앙- 하는 소리와 함꼐 열어 젖혀진 문.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소영이는 뛰기라도 했는지 땀범벅인 상태였다.


"오? 깨어 있었네?"

"깼으면 바로 수업하러 와야지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응? 그, 그러니까 여기서 이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어라?

아까 분명히 여기서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아무도 없는데 무슨 친구라는거야?"

"지원아 너... 진짜 괜찮은거 맞아? 멀쩡한거 맞지??"


"아니, 진짜라니까??"


기분 탓이었던걸까.

돌아본 그곳에는 사람은 커녕,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영이의 말처럼 정말 환각이라도 본거였을까.


"됐고, 수업 곧 시작하니까 따라와 인마."


억지로 잡아끄는 그녀의 손에 이끌리며.

나는 알싸한 봄매화의 향기에 취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칠 수 밖에 없었다.


***


이번편은 빌드업. 그래서 분량도 조금 길게 넣었음

다들 잘 읽어줬으면 함


그나저나 존나 늦어버렸는데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읎다

일부러 늦은건 아니고 병신같이 주머니에 손 넣고 가다가 빙판길에서 미끄러져서 손목이 작살나버렸음

덕분에 키보드가 뭐야 핸드폰 타자도 한 손으로 겨우 칠 수준이었는지라 글을 쓸 수 없다가 최근에서야 호전되어 부랴부랴 썼음


물론 그렇다고해서 지각에 대한 정당한 사유가 되진 않겠지

미안하다 앞으론 이런 일 없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