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요?"


"몰라요."


"출신지는요?"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가족은요?"


"...그것도 모르겠어요."


의사는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난감했을 터이다. 그리고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네요. 다른건 대부분 기억하면서도 유독 인적사항 부분만 기억하지 못한다는게."


정신을 차려보니 낮선 천장이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팔에 꽂힌 링거도, 이따금씩 들어오는 간호사와 의사들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누군지.

어째서 이 병동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조차도 하나 기억나는게 없었다.


"기억상실증"


나의 증상을 두고 의사는 그렇게 말하였다.

아마 크나큰 충격이 두뇌에 가해졌거나 그에 필적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데, 내가 뭐 아는게 있어야지.


다행히 기초적인 생존 지식이나 사회적 규율은 멀쩡한 듯 했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불행 중 다행이라나 뭐라나.


"3달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지금 가족분들께 연락을 취한 상태이니, 조금만 더 경과를 지켜보다가 별 이상이 없으면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단기간에 너무나도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 탓일까.

문득 나는 어지럼증을 느끼고 도로 병상에 드러누웠다.


윤지원. 18세. 남성.

내 발 아래, 병상 끝 매달려 있는 인식표에 적혀있던 내용이었다.

아마 그것이 내 신상정보인 듯 했다.


막막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전에, 나는 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걸까?


뭐, 이제와서 추론하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만.

그래도 씁쓸했다. 나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그때 병실 밖으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흑발을 지닌 미모의 여성이 헐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허억... 허억..."


모든 기억을 잃은 후 처음으로 든 생각이 '막막하다' 였다면 두번째로 든 생각은 '개꼴린다' 였다.

부정하기도 힘든것이, 여성은 실로 굉장한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미모의 얼굴에 큰 바스트. 그리고 적절하게 들어오고 나온 바디까지. 

만약 애인이 있다면 부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바쁘게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여성이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째선지는 모른다. 본능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과 괜히 엮였다가 피곤해 질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너무 늦었던걸까. 왠지 모르게 여성의 발소리가 점차 커지는 듯 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는다고 했나.

어느새 여성은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내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게 무슨일인가 싶어 당황한 탓에 쉽사리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무렵,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원...아?"


"...에?"


"지원... 지원아..."

"지원아!!!!"


잠시 뒤, 향긋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품으로 파고든 여성은 마치 각인이라도 새기듯 나의 온 몸에 그녀 자신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그녀를 때어놓을 수 조차도 없었다.


"자,잠시만ㅇ..."


"지원아!!!! 이게... 이게 무슨 꼴이니..."

"세상에... 지원아... 지원아...!!"


내 이름을 알고 있는것으로 보아 그녀는 나와 밀접한 사이인듯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몰랐다. 그녀에 대한 일말의 정보조차 아는 바가 없었다.


"..저,저기... 누구...세요...?"


"..."

"ㅁ,뭐어...?"

"자,장난치지 마렴 지원아... 3달 만에 깨어났는데 그런...!"


"아뇨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만 하나도 기억나질 않아요..."


"그,그런..."

"아...아니야... 그럴리 없어. 응? 지원아! 지원아...!?!"


그녀는 두 눈을 부릅 뜬 채, 내 두 팔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의사가 와서 말려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할뻔한 상황이었다.


"...기억... 상실증이요...???"


"네, 보시는 바와 같이 지원 군의 기억은 모종의 이유로 인하여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잠시 뒤, 그녀의 얼굴이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다시금 내게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쓰다듬는 그녀에게서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지원아. 정말 내가 기억나지 않는거니...?"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떨어트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미안... 미안해..."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으며,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눈물 방울은 어느새 큰 줄기가 되고, 평온하던 그녀의 어깨는 거친 들숨으로 인해 불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야 아무것도 아는게 없으니까.


그녀가 누군지도, 나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감정을 이입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기엔 또 뭐 했기에, 나는 조용히 팔을 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


"그... 괜찮으세요?"


그녀는 적잖히 놀란 듯 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응... 약간 놀랐을 뿐이야."

"고맙고... 미안하구나... 지원아..."


뭐랄까, 오묘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는 바 하나 없었지만 뭔가 편한 느낌.


집으로 돌아온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


퇴원 수속을 하다 알게된 것인데, 어제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온 그녀는 나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오늘 하루종일 내 옆에 붙어 있더라니, 그제서야 어제 보인 반응을 비롯한 모든것이 이해되었다.


"자, 돌아가자꾸나."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나의 어머니라고 주장해봤자 솔직히 잘 체감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일말의 기억이라도 남아있었으면 모를까,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가 않았으니...


무엇보다 그.

그녀를 보자마자 맨 처음 들었던 그 생각 때문에.


'개꼴린다'


정말이지, 그녀를 볼 때 마다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남성으로써의 본능이라고 해도...


"괜찮니?"


내가 염려되었는지,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저기, 익숙하지 않겠지만 난 정말로 네 엄마란다. 그러니 안심하고 편하게 대해주렴."


"아... 네. 헤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나는 잠자코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런 나를 이해했는지, 이후 도착할 때까지 내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도착했다. 내리자꾸나."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그녀가 말하는 '집' 이라는 장소로 향했다.

적당히 높은 아파트의 벽면에 선명하게 그려진 브랜드 로고가 왠지 모를 기시감을 준 것도 잠시.

어느덧 도착한 대문 앞에서 그녀는 잠시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지원아."


"...네?"


"알아... 너가 혼란스럽다는거."

"나도 처음엔 그랬단다. 내 아들이 모든 기억을 잃고 그렇게... 남남처럼 되어버렸으니까."


"..."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응.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집으로 돌아온걸 환영한단다. 아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도어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기분탓일까. 그녀의 눈가에 무언가가 반짝하고 빛나는 듯 했다.


문이 열리자, 향긋하면서도 눅눅한 녹말 내음이 풍겨져왔다.

딱딱하면서도 정제된 느낌이었던 병원 냄새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가정의 향기.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이 체감되었다.


"지솔아? 엄마 다녀왔단다~"


그녀는 머리 윗쪽을 향하여 조금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위층으로 부터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뒤, 계단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여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잠깐... 지원... 정말로 지원이야??"

"지원이가... 돌아온거야???"


그녀, 즉 나의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여성은 온 몸을 부르르 떨더니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이윽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은 채 이리저리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잠깐만요... 이게 뭐하는"


"맞아... 이 감촉... 이 느낌..."

"지원이가 맞아... 정말로 지원이가 돌아왔어!!"


"잠깐... 잠깐만요...!!"


"지원아!!!!!"

"돌아왔구나 지원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나를 끌어안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원, 어제와 똑같잖아. 


나는 잠시 당황하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그녀를 때어놓았다.

그러자 내 행동에 그녀는 꽤나 당황한 듯 했다.


"왜,왜 그...래...?"

"서,설마 아직ㄷ..."


"쉬잇."


어머니는 울먹이는 그녀를 향해 침묵의 표시를 내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물을 훔치며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그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것은 확실했다.

그야 그럴것이,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가 거리낌 없이 내 이름을 부르며 끌어 안을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도 잠시. 머잖아 내 마음속 깊은곳으로부터 불안감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토록 친밀하면서도, 나의 어머니 되는 사람과 똑 닮았다는 말은... 즉...


"지원아, 이쪽은 네 누나. 지솔이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뿔싸. 하마터면 저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할 뻔 했다.

한 순간이지만 진지하게 내 핏줄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섞여있는게 아닐까 고민하던 와중, 어머니가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솔아. 지금 지원이는 기억상실증 때문에 그동안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란다."

"그러니... 당분간은 네가 지원이를 곁에서 도와주도록 하렴."


"뭐... 뭐라구요...??"

"그런... 그런일이..."


그녀는 꽤나 큰 충격을 받은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도 잠시. 그녀. 아니, 누나는 말없이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원이. 지원이는 아직 기억이 완전하게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당분간은 누나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도록 하렴."


"네. 알겠습니다..."


"그,그럼... 갈까...?"


나는 누나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어둡고 음침했지만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저기..."


"ㅇ,예?"


"응? 너,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대할 필요는 없고..."

"누나... 라고 불러줘. 응..."


"아... 알겠어요 누나..."


"그...그래... 헤헤..."


누나는 이 상황이 어색한 듯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어색한게 당연했다.


3달이라고 했나? 그 동안 한 번도 나를 보지 못했을테고, 돌아온 동생은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이니.

과거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전처럼 돌아가기엔 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

나는 그런 누나의 심정을 이해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겠어?"


"네? 아... 그,그러니까... 뭐라고?"

"여기서... 지내는거야? 내 방은 따로 없었어...?"


"어...? 네 방...?"

"네 방은... 그게... 따로 없었는데..."


"엥? 진짜?"


"으응... 넌 그동안 계속 내 방에서 나와 함께 지내왔거든."

"그,그러니까 어색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알겠어. 누나 말이 뭔 뜻인지."

"쨋든 앞으로 여기서 계속 지내면 되는거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누나도 똑같이 환한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누나도, 나도. 이 상황이 한없이 어색한 듯 했다.

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그럼 나는 잠시 나가볼게."


"ㅁ,뭐? 나간다고? 어딜? 어디로??"


그때였다.

갑작스레 누나의 표정이 변하며 나의 팔을 붙잡은것은.

나는 순간적으로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급히 팔을 잡아 빼려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어,어딜 간다고 그래??? 너... 너 아직 아프잖아..."

"아직 기억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며...!"


"왜,왜 그래??? 잠깐 집을 좀 둘러보려고 한 것 뿐이야...!"


"집...? 집을 왜..."


"그,그야 앞으로 내가 살게 될 공간이니까...?"

"그리고 아까 방 하나가 더 있길래 잠깐 들려보려고..."


"ㅁ,뭐어??"


"으읏...!!!"


무슨 영문에서인지 누나는 나를 끌어당긴 뒤, 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픈것도 아픈거였지만 어찌나 세게 밀었는지,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떨어질 정도였다.

누나는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그 방은 안돼."


"으윽... 왜,왜 그러는건데? 거기 뭐 이상한거라도 있ㅇ..."


"안 된다면 안 되는줄로 알아!!"


누나는 사뭇 진지했다.

아무래도 그 방에 대한 나의 관심이 완전히 없어질 때 까지 두 손을 놓지 않을 심산인 것 처럼 보였다.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어색했고, 무엇보다 누나의 손에 잡힌 두 팔이 슬슬 저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단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아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 손들 좀 놔봐!!"

"누나 말대로 그 방에 대한 관심 끌테니까 제발...!!"


"진짜... 진짜로 안 갈거지?"

"누나 말... 들어야한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놓으라고...!!"


그제서야 누나는 안심한 듯 나를 풀어주었다.

문득 누나에게 잡혔던 부위가 욱신, 하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누나는 그런 내가 걱정되었는지, 내 두 팔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야야..."


"미안... 내가 너무 심했지..?"

"미안...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 방은... 너가 절대로 들어가면 안되는 곳이야... 그러니까..."


"아,알겠어 안심해. 처다 보지도 않을테니까."

"...그리고 나에게 그렇게 따박따박 알려줄 필요는 없어. 나도 눈치가 있는데..."


단순히 내뱉듯이 던진 말이었지만 큰 상처였던걸까?

누나는 눈빛이 변한 채 아까처럼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누나는 아까처럼 나의 팔을 잡거나, 벽으로 밀어 붙이지도 않았다.

대신 눈물이 글썽이는 두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영문 모를 사과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화...난거야? 나 때문에 화난거야...?? 미...미,미안해... 미안해...!!! 미워하지 말아줘....!!!"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네 몸에 손대지 않을게...!! 꺼지라면 꺼질게... 아니, 눈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게...!!"


"누나...? 왜 그래...??"

"갑자기 왜... 왜 이상한 짓을..."


"ㅁ...뭐...? 이.... 이상한 짓이라고?"

"아.. 아아아.... 아하하하하하하!!!! 아아... 내가... 내가 또...!!! 아아아...!!!!!"


"누나...!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거야???"

"누나? 누나!!!! 잠깐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누나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벽으로 달려가 자신의 머리를 피가 날 정도로 찧어대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소릴 듣고 급히 와주셔서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다.


"무슨 소리니? 아까부터 쿵쿵 거ㄹ..."

"...지원이는. 지원이는 괜찮니?"


"네... 저는 괜찮은데 누나가...!!!"

"으윽... 누나가 벽에서 안 떨어져요...!!!"


"물러나렴!!"


어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누나를 벽에서 때어낸 뒤, 곧바로 침대를 향해 내려 꽂으셨다.

이후 누나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자, 잠시동안 발광하던 누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세근세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버렸다.

잠시 뒤, 어느새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괜찮니...? 다친데는 없고?"


"네..."


"다행이구나... 걱정했잖니."

"자, 이리오렴..."


어머니는 조용히 두 팔을 벌리셨다.

나는 이끌리듯 그녀의 품 속에 안겼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방금 전 사태로 인해 한껏 고조되어 있던 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많이 놀랐겠구나...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신경써주지 못해서..."


"아,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그래."

"엄마는 저녁 식사 준비 때문에 밑으로 내려가야 한단다. 나중에 식사가 다 되면 부를게."

"그 전까지 잠시만... 누나와 함게 있어주렴. 착하지..."


어머니는 내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뒤,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누나는 잠들고 어머니는 나가신 지금. 그제서야 나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은 깨끗했지만, 군데군데 더러운 부분 또한 있었다.

마치 급하게 치운듯한 인상이라고 해야할까. 그 밖에는 모두 평범했다.


책상 위에는 자그마한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액자 속 사진 속에는 한 쌍의 남녀가 손가락 브이를 한 채 서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것이 나와 누나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닥 오랜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말, 나는 이 가족의 구성원이 맞았구나.

내심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에 비해, 누나의 얼굴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훼손된 듯 가려져 있었다.

누군가가 색연필, 그게 아니라면 이와 비슷한 도구로 일부러 그은 것 처럼 보였다.


책상 밑에는 커다란 쓰레기 봉지가 놓여져 있었다.

그 부피는 상당히 커다랬을 뿐더러, 속은 꽉 차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건 덤이었다.


책상 밑에 있던 점도 그렇고,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긴듯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문득 호기심이 생긴 나는 서서히 봉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 대지마."


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 아~ 그,그러니까 이건..."

"쓰레기, 쓰레기 봉지잖아? 왠지 버려야 할 것 같아서..."


"손."

"대지마."


아까전과는 다른,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순간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은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조용히 쓰레기 봉지로부터 멀어진 뒤, 나는 조심스레 누나를 불렀다.


"..."

"누나...?"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누나를 불러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누나는 자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 앉고야 말았다.

방금전의 그 눈빛. 그 어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나는 누나가 또 다시 한 번 깨는 일이 없도록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거야..."


물론, 나도 나의 상태를 알기에 되도록이면 주변인들의 말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나가 내게 보여줬던 행동들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내가 기억을 잃기 전의 우리 집은 어떤 상황이었던거지?

내가 잠들어 있던 동안 이 집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나는 이 집에 있어서 어떤 존재였던거지?


***


후회물들 보면 빌드업 하다가 정작 후회 파트, 후일담은 연중튀하거나 흐지부지 끝내는 경우가 많더라고

그래서 그럴바엔 차라리 후일담과 결과를 먼저 쓰고 빌드업을 나중에 풀면 어떨까라는 발상에서 나온 물건임

비록 미약한 활자 조합이지만 기나긴 보릿고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