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눈 앞에선 중년 사내가, 자신을 품평하듯이 흝어보곤, 마음에 든 것인지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나는 사천당가의 당대 가주, 당자룡이라 한다, 니 장인될 사람이니, 기억하는 것이 좋을게다."


대단한 직위와, 그 직위에서 오는 누구나 들어 보았을 무거운 이름.


허나,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지언정, 나의 신경은 정작 그의 뒷 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당자룡이, 표정을 이죽이며 자신을 비꼬았다.


"이 놈 보게, 소개도 하기 전부터 제 부인에게 푹 빠져버린게냐?"


여전히 담담한 자신에게서 반응이 나오기도 전, 그의 뒷 편에 서 있던 작은 생물에게서 작고 확실한 반응이 튀어 나왔다.


꽈아악-!


"아악! 알았다 알았어. 장난은 안치면 될 것 아니냐!"


"요 맹랑한 꼬맹이는 당예화, 니 부인될 사람임과 동시에, 본가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며 후계자이기도 하지."


그 아이는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지, 제 아비의 다리를 꼭 붙들어메고 뒤편에 숨어있었다.


"······."


그럼에도, 얼굴만은 빼꼼 내밀어 자신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는 모양새란, 예화(叡花:밝은 꽃)라는 이름이 이리 어울릴 수가 없을 정도로.


밝고, 아름다웠다.




*** 




'······또.'


또, 꿈인가.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


툭, 툭툭.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면, 가장 먼저하는 유일한 일과.


'그 날' 이후로 자신에게 남겨진 저주의 흔적이자, 이 비참하고도 자조적인 현실을 일깨워줄 오직 나만의 표식.


그 날 떼어낸 기괴했던 가면이 남기고 간 흔적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까끌까끌한 것이 매번 자신의 현실감을 제대로 일깨워주고 있었다.


"···기침하셨사옵니까."


···또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이 구축했던, 이젠 저주를 흡수하고 더욱 드높아진 압도적인 경지는,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물샐틈 하나 없이 막아버린 문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조차 충분히 들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이럴때면 얼굴보다도 고막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럴때마다 얼굴을 매만지면 마음이 고요해지곤 한다.


"그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이것은, 저주의 흔적이자, 그 날을 되새겨주는 기억의 편린.


"벌써 계절이 열 세번은 바뀌었습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을, 벌써 세 번은 낭비 하였단 말이옵니다."


"···그 이상 다가올시엔, 저항할 틈도 없이, 사살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흉악한 얼굴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매년, 이 맘때쯤엔 저와 꽃구경을 가실 것이라, 그리 약조를 해주셨지 않았습니까···!"


"···제압하고, 가문 내 지하감옥까지 압송해라."


아름다웠던, 이제는 쉬어버린.


저 울먹이는 목소리에, 반응해 버릴 것만 같으니까.




***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 아이, 천살성을 타고났군."


소림사의 전대 장문이자, 천하제일인이었던 스승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잠시 암울했을지언정.


"내가 좀 맡아봐도 되겠나? 아이를 망치진 않을 것이라, 내 약조하지."


전화위복으로, 그의 제자가 된 것은 모두가 축복해줄 정도의 행운이었으니까.


조금은 걱정했던, 사천당가의 데릴사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그것 하나로 충족되었으니.


분명, 자신의 미래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터였다.


···천마신교가, 준동하기 전까진.




*** 




쾅-!


끼기기기기긱-


칼과 내공을 두른 손이 맞붙은채로, 기괴한 소음을 자아낸다.


자신의 눈 앞엔, 압도적인 병력차에 밀리고 있는 전선을 지키기 위해, 혼자서 제 일(一) 전선으로 향하여 대군과 함께 산화했다는 장인이, 시체와 같은 몰골로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안방 좀 내어주었다고, 늙은이는 이제 집에서 내쫒겠다 이건가?"


광기에 물든 당자룡의 눈이 번들거리며, 그가 자신에게 독수를 내뿜었다.


이미 '저주'에 의해 잠식당한 머리엔, 광기와 함께 번들거리는 마기가 잠식하고 있었다.


"······제발."


울음을 머금은 사내, 백리현이 그의 공격을 묵묵히 막아내고 있었다.


비록, 전 사천당가의 가주였을지언정.


절반은 부패해 버린 신체로,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저 이야기 속 괴력난신(怪力亂神)과도 같은 괴력으로 지르는 발악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지 자신의 장인을 베어 넘길 수 있었다.


'내가해야한다, 내가, 내가 끝을내야···.'


이곳은, 무림맹 제 이(二) 전선이자, 사천의 최전방 전선.


자신을 제외하곤, 이 자리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자신의 부인밖에 남지 않는다.


'······.'


그럴 순 없다, 그래선 안된다.


마음을 다잡고, 검을 쥔 손에 자연스레 힘을 넣는다.


기왕이면 제압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 정도로 넉넉한 몸 상태가 되진 못했다.


눈물따윈, 집어 삼키고, 잡스런 감정은, 잠시 가슴 한켠에 눌러 놓는다.


살릴 수 없다면, 자신이 가진 최고의 일격으-


푹-!


일 수를 내지르기도 전에, 장인의 미간에 암기가 꽂히며, 머리를 시작으로 그 시체가 저 멀리 날아간다.


'···결국.'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암기의 주인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차마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더라도, 목표물의 생사를 알 수 있었을테니.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소나기 한 번 내리지 않은 땅에, 한 줄기 빗물이 웅덩이를 자아냈다.


그 웅덩이엔, 아비를 잃은 딸의 절규가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 




그 뒤로, 우리 부부의 관계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볼 순 없었다.


"······."


"······."


···정확히는, 당가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완전히 파탄나 있었다.


장인이 떠난 것을 그녀에게 가장 먼저 알린 것도, 공식적인 발표를 진행한것도 자신이 담당했다보니, 내가 장인이 떠날 것을 알고도 묵인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 이 상황처럼, 오랜만에 우연히 잠시 마주치곤 하면, 그녀는 못 볼 것을 봤다는 것처럼 경멸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곤 말 한마디 조차 섞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일상이었다.


"······."


"······."


평소에 자신과 일상적으로 대련을 하며 친해졌던 당가의 가주 근위대인 독룡대는, 그런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마치 투명인간처럼, 오직 정면으로만 시선을 고정하고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며 복도를 지나갔다.


말이 독룡대지, 현재 자신은 당가의 모든 가솔들에게 이런 식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끼익-


그가 따로 구비 되어 있는 귀빈용 숙소에 들어왔다.


···이 분위기에, 같은 침실을 쓸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후우."


해명이야, 하라면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예화가 됐든, 독룡대가 됐든.


어딘가에는, 감정을 쏟아낼 곳이 필요해 보였다.


···이런 것조차 없다면, 이 당가 전체가, 언제든지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가 몇번이고 읽은 덕에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바라 보았다.


굳이 여러번 읽을 것도 없이, 그 안에는 충분히 예상가능했던, 그리고 알기 쉬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전선에 돌발상황이 생겼다는 내용, 당장 전선이 무너질수도 있으니, 급히 자신이 가야하니 이해해달라는 내용.


···사이사이 들어있는, 장인 특유의 주접.


'예화가 워낙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이지 않느냐.'


'절대! 저얼대 그럴 일이야 없겠다만, 혹시라도 내게 변고가 생긴다면, 니가 예화를 잘 챙겨줬음 좋겠다.'


'흐흐, 니놈, 지금 또 쓸때없이 주접이 길다고 불평이나 하고 있겠지?'


'이만 줄일테니, 그놈의 잔소리는 좀 넣어 두거라.'


"···썩을 늙은이."


끝까지 내겐 거지같은 뻥이나 치다 가면서, 잔소리는 하지 말라고?


그리고 댁 딸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아? 지금 며칠 째 대화 한 번 못해보고 있다고.


대화만 못하면 다행이지, 자다가 암기가 미간에 꽃힌다던가, 저녁 식사에 극독을 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원망하던데, 이게 얼마나 상처받는지 알아?


아니, 애초에 나도 아무것도 몰랐단 말야, 이게 내 잘못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아내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버리고.


'이, 무책임한 늙은이야···.'


뚝- 뚝-


백리현의 얼굴을 타고 흐른 물이, 바닥에 떨어져 널판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그가 수십번을 읽고, 또 읽은 꼬깃꼬깃한 편지에 적힌 필체는,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떨림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한평생 동안 암기를 다룬 무인의 손에 존재할 리 없는 떨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서웠을 것이다, 두려웠을 것이다.


무인으로서의 그는 두려움을 모를지언정, 휘하에 수백의 가솔을 둔 아버지로서의 그는, 그 누구보다도 겁이 많은 겁쟁이였을 것이다.


그와중에도 자신이 최대한 심려치 않도록, 어울리지도 않는 허세를 꾹꾹 눌러 담아 이 편지를 쓴 것이겠지.


"···진짜, 끝까지."


제멋대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생각나는 문장은 많았지만, 그는 무엇 하나 입으로 뱉지 않았다.


대신.


"···보고 싶소."


장인어른.




***




사천당가(四川唐家) 내원(內院) 대회의실(大會議室).


이곳에서는 지금, 한창 마교와의 전선 유지에 대한 보고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래서, 당장에는 전선을 유지하는 것에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내용 자체는 희망적이나, 어째서인지 회의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비관적이었다.


···스윽-


결국 보다 못한 후방 지원을 도맡은 장로 하나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 진실을 꺼내 들었다.


"···허나 가주께서도 알고 계시듯-"


사천당가의 현 가주, 당예화가 그의 말을 날카롭게 끊고 들어왔다.


"지원은 오지 않겠지."


당장에라도 뚫릴 것 같던 전선은, 전대 가주, 당자룡의 희생으로 상당히 안정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 당장에는 급하지 않은 후방의 무림맹의 여러 세가 측에선, 오히려 전쟁 전까지 드높은 성장세를 보이던 사천당가를 견제하려고 일부러 지원을 최대한 늦추고 있었다.


"더이상 지원을 늦출 명분이 없어지거나, 혹은 전선이 뚫린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후방에서의 빠른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겠지."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마교 측에서 현재 내세우고 있는 전력은, 주술이 걸린 시체와, 별 의미 없는 잡졸 정도.


한 번 주요 전력이 더러 몰려왔었을 땐, 당자룡의 희생으로 막아냈었으나···.


"'저번' 같은 돌발 상황, 최악의 경우, 교주가 직접 나선다면···."


적어도, 사천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저기."


내내 꿀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히 있던 백리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 했다.


척-


"가주께서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제 앞을 막아선 독룡대만 아니었다면.


"······."


조용히 예화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이쪽에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로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독룡대의 행동 자체가, 그녀 자체의 의지나 다름 없다는 뜻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한 장로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며 소리쳤다.


"···급한 일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고-!"


그의 말은 거기서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현 천하제일인, 소림사의 전대 장문인.


···이곳에서는, 백리현의 스승으로 가장 유명한 초로의 노인이, 회의실 중앙에 아무도 모르는 새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가주."


상대방의 지위를 존중해 주듯, 노인은 손녀뻘인 그녀에게 조차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해서, 무슨 용건으로 오신겁니까."


다른 가솔들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노인에게 용건을 물었다.


"···여기계신 여러분들부터, 저 아래에 있는 민초 한 분까지 전부."


"너무나도, 고통받는 분들께서 많으시지 않습니까."


노인은 담담하게, 허나 절대로 가볍지는 않은 주제를 꺼내 들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빠르게 끝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뿐입니다."


"···그건-!"


 당자룡의 희생으로 그나마의 병력이나마 약화된 지금.


그가,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말의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당예화가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 늙은 목숨 하나로 사천에 있는 수많은 생명을 지킨다면, 꽤나 가성비 있는 거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걱정이 될지언정, 말리진 않는다.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 구석으로 몰려있었으니까.


"···저도."


돌연, 또 다시 백리현이 손을 들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허나, 이번에는 누구 하나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


"······."


다양하지만, 어느 정도 일관된 반응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하···!"


조소를 흘리는 쪽.


···뿌드득-


말없이 손아귀에 힘을 넣으며, 분노를 삭히는 쪽.


"진즉에나 저럴 것이지···."


조용히 험담을 나누는 쪽.


순식간에 가시방석이 된 회의실의 분위기에, 만류하려던 노인조차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길진 않을 것이나, 목숨을 잃을수도 있을 것이다,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노인이 조용히 시선을 당예화 쪽으로 옮겼다.


"왜그러십니까."


"남의 집 가족을 데려가는 것인데, 집주인의 허락은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무덤덤하게-


···아니, 정확하게는.


조금의 분노가 담긴 눈으로.


"다음부터는, 딱히 그의 거처에 대해서는 물어보시지 말고,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백리현을 직시한채로, 노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우선은, 알겠습니다."


노인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거라, 한시가 급하니, 당장 출발할 것이다."




*** 




천마신교(天魔神敎), 교주전(敎主殿).


온갖 사치스러운 장식품으로 도배 되어 화려했던 대궐이, 피로 얼룩져 그 빛을 바라고 있었다.


벽에는 드문드문 구멍이 파여있고, 앞, 뒤, 양옆부터 천장과 바닥까지, 어느 곳 하나 멀쩡히 그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쿨럭···!"


사방에 피를 흩뿌린 곳, 그 피가 가장 웅덩이진 정중앙에, 두 노인이 마주보고 있었다.


"···우습군, 다 지쳐버린 늙은이 하나랑 애송이 하나에게 허망하게 끝날 줄이야."


가슴에 구멍이 뚫린, 대궐의 주인이었던 노인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실로 우습지 아니한가, 천리(天理)를 거스르고, 역천(逆天)을 꿈꾼다던 자의 최후가, 이다지도 허망할 수가."


노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자조하면서도, 그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얼굴에 있는 웃음을 더욱 더 짙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도, 삼도천(三途川)을 건널 때 외롭지는 않겠군."


노인이 바라보고 있는 광경엔, 손가락 한 마디조차 성한 곳 없는 노인 하나와, 기괴한 가면을 쓴 채로 쓰러져 있는 애송이 하나가 보였다.


정확하게는, 노인 인생의 최후의 걸작이겠지만.


"크흐흐···, 저거 하나로 도대체 몇 명이나 길동무가 생길련지, 삼도천이 미어터질 지경이겠군."


"자아···, 천하제일권. 너와 나의 역작이 도대체 얼마만큼의 성능을 뽐낼지, 먼저 가서 지켜 보자고."


그 조소를 끝으로, 한 시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최악의 마인은 숨을 거두었다.


"······."


담담히 그 최후를 관망하던 노인이, 쓰러져 있는 백리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터벅, 터벅.


아직은, 쓰러져 있는 제자는, 남은 한줌의 공력으로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


이제 쓰러져 있는 저 아이가 일어나는 순간은, 중원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앙이 발생하는 순간이겠지.


텁-


노인이 가면에 손을 얹고, 잠시 명상에 잠겼다.


'···후우.'


노인이 가면에 얹은 손이 빛을 뿜어냈다.


"···마기가 담긴 몸이라도, 극락에서 받아줄지 모르겠군."


···뭐, 가서 확인해보면 되는 문제지 아니겠는가.




*** 




터엉-!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한 백리현이, 발돋움을 할 때마다 파공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마기가 전부 빠져나가 저주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천리를 어긴 힘에서 나온 불가해(不可解)한 괴력밖에 없었다.


"······."


스승님의 시신은, 들고오는 것이 아닌, 그대로 화장하는 것을 택했다.


스승께서는, 전신에 마기를 담은 채로, 그대로 기혈을 터트려 자결하셨으니까.


생전 누구에게나 곱고, 다정하게 기억되었던 스승님을, 그 누구에게도 그런 처참한 몰골로 기억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애써 울음을 참던 백리현이, 스승님이 남긴 염주를 두 손으로 쥐며 기도했다.


부디, 부처님께서도 스승님을 곱게 봐주시기를.


탁-!


기도가 끝났을 때쯤엔, 어느새 당가의 외성 성벽에 도달한 뒤였다.


"···결국."


···집이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혐오하는 가솔이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원망하는 아내가 있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증오하는, 집이다.


······착!


점점 비관적으로 변하는 생각을 멈추고, 두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래, 지금까지의 이야기일 뿐이지 않은가.


마교도 없는 이 시점에서, 굳이 더 숨겨야 할 이야기도 없었다.


멀리서 자신을 발견한 아내의 얼굴이 점점 차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계속 저렇게 나와보라지, 나중에 미안해가지고 울지나 말라 그래.'




*** 




"······."


그녀가 자신을 얼음장 보다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상 다가올시엔, 사살할 것입니다."


"···문좀, 열어주실 수 있소?"


"혼자서 오신 겁니까?"


보자마자 아픈 곳을 찌르는 군.


"···그렇게, 되었소."


"하······!"


"무려 천마신교의 교주와 싸우러 갔는데, 천하제일인도 목숨을 잃은 곳에서, 고작 그의 제자가 살아돌아왔다?"


그녀가 흉터가 남은 그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누가봐도 수상한 흔적을 남기고서?"


"더 들을 것도 없군."


푸슛-!


"그런 말을 믿어주기엔, 밑에 딸린 가솔이 너무 많아."


암기 하나가, 백리현의 뺨을 소리보다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쾅-!


그저 가늘고 작은 바늘 하나가, 굉음을 내며 땅에 거대한 흔적을 새기고 박혔다.


그 직후.


콰과과과과과광-!!!


수십개의 암기가, 후발주자로 앞다투어 그 뒤를 따랐다.


치이이이이이이익-!


어느새 주위를 에워싼 독룡대가, 일대 전부를 독으로 물들였다.


"잠깐···! 우선 얘기를-!"


"어차피 그 끔찍한 재생력으로 인해 죽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무공 수위가 높을수록 그 재생력 또한 높았으니, 사살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 터."


"어떻게든 마비 시키고, 가문 내 지하감옥까지 이송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존명."


사방에 암기가 비산하고, 독은 이미 치사량 이상으로 흡입한지 오래다.


그저, 저주로 인해 아무 효과도 못보고 있을 뿐.


"······."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아니, 정확히는, 왜.


'······."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전방에선 제 아내가 암기를 쏘아대고


성벽에선 당가의 모든 무력부대가 끊임없이 튀어 나와 저 자신을 제압하려 애쓰고 있었다.


자신이 매번 환대 받으며 열고 들어갔던 문은, 굳게 닫힌 채 독연기 한 모금 조차 가문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엄중히 틀어막고 있었다.


"그런 말을 믿어주기엔, 밑에 딸린 가솔이 너무 많아."


···아아, 그런가.


저 문 안에는, 누구보다도 친했던 가솔들이 있고,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아내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없었다.


사지로 달려들어가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고,


아내 없인 의견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저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고,


저들은 자신의 가족이 아니었다.


자신은, 행복이라는 신기루가 보여준 환상 속에서 헤엄치고 있던, 굴러들어온, 한낱 외부인이었다.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외부인에겐, 문은 열리지 않는다.




*** 




···생각보다, 저주에 걸린 그를 제압하는 것은 쉽게 끝났다.


의외로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 생각했던 마비 독이 성능이 좋았던 것인지, 그는 암기를 빠르게 피하던 와중 급작스럽게 맥 없이 쓰러지며 혈도를 제압당했다.


'근래 들어 저주 받은 자들의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니, 이런 부작용을 동반하는건가···?'


"···뭐, 그럼 다행인 거지."


스륵-


그녀가 침대 밑에서 하나의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와의 추억이 생길 때마다, 나중에 기억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를 적어놓은 일기를 보관하는 상자.


전에는 그저 증오했다면, 이제는 완전히 잊을 수 있도록.


이 상자는, 이제는 완전히 불태워야만 했다.


"······?"


분명히 흰색 종이만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할 상자에, 무언가 익숙한 보라색 편지가 한 장 올려져 있었다.


'이걸 보고 있다면, 아마도 내가 멀쩡히 살아있진 않은 것이겠지.'


'와 씨, 나도 이런 뻔한 대사 쳐 보고 싶었는데.'


"······!!!"


익숙한 글씨체에, 익숙한 말투.


허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평소에 무감정했던 그녀의 눈을 부릅뜨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우리 딸래미한테 편지를 바로 보여줬다가, 별 일이 없으면 꽤나 부끄러울 때가 많을 것 같단 말이지.'


'설마, 전쟁통에 추억 보관 상자 같은거나 열어볼 정도로 한가하진 않을거라 믿는다, 딸.'


그렇게 시작된 편지엔, 백리현이 본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흐흐, 그 망할 꼬맹이도 아직 내겐 멀었더구나.'


'잠귀가 얼마나 어두운지, 나무 판자가 귀곡성을 내도 지 코골이가 더 커서, 못 듣고 잘만 자고 있는게 얼마나 웃기던지!'


'덕분에 식겁했던 마음이 무안할 정도로 아무 일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지, 그래도 다음엔 베개를 더 좋은 걸로 바꿔주든가 해야겠어.'


여러 장난스런 내용.


'···역시, 꼬맹이라 그런지, 강해 보여도 여전히 모자란 부분이 많아.'


'알겠느냐? 현이가 매번 아무리 강하고 야무진 면만 보여주니 간혹 잊을 수도 있으나, 그 아이 또한 아직 부족한 면이 많은, 너가 챙겨야할 가솔 중 하나이니라.'


'···가솔이라 하니 어감이 좀 정 없어 보이는군, 그래, 너한테는 가족이란 단어가 더욱 어울리겠구나.'


풀썩-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편지가, 바닥에 힘 없이 내리 앉았다.


'잊지 말아라, 현이는 너의 가족이란 것을.'


"가주님!"


그때, 복도에서 당가의 정보 수집원 하나가 급하게 그녀를 찾아 보고했다.


"마교의 움직임이 무언가 이상합니다! 갑자기, 전 전선에 있던 모든 병력이 급히 퇴각을···!"


팟-!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신형이 불빛처럼 사라졌다.




*** 




다다다다다다-


"가, 가주님!?"


만년한철의 성능을 믿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간수가, 그녀의 기습 방문에 급히 침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문 열어."


"예··· 예?"


"문 열라고-!!!"


내공이 담긴 그녀의 노성에, 정신이 바짝 든 간수가 부랴부랴 문의 잠금 해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개··· 개문!"


찰나의 시간 뒤, 잠금 해제가 완료된 문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지하감옥에 배당된 무인 여럿이 잡고 밀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이, 이게, 왜···."


"왜! 왜 못 여는데 왜!"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당예화가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이, 이게 이상합니다. 분명, 잠금 장치는 전부 풀린 것이 분명한데···."


무언가 하나 예상되는 게 있다는 듯, 다른 무인이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말했다.


"아, 아마도. 내부에서 저희가 예상 못할만한 무슨 수로 막은 것이 아닌지···."


"······."


당예화가, 허망한 표정으로 힘 없이 문을 두드렸다.


"···어, 주세요."


"열어, 주세요."


"열어, 주십시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 시작하는 턱에, 순식간에 분위기를 파악한 무인들이 간수들을 들쳐메고 자리를 비웠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그녀는 문을 두드리다 못해, 내공을 써서 밀기도 하고, 문을 아예 박박 긁기까지 시작했다.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굳은 살이 다 벗겨지고, 손톱도 전부 망가질 때까지, 문에는 단 하나의 생채기 조차 생기지 않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히끅! 하, 한번만, 제발 한번만 대화만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제, 제가 평소에도 많이 모자란 실수 자주 할때 자주 있지 않습니까, 그냥, 그냥 이번에도 그랬던 것입니다."


"제발, 그저 평소처럼, 그저 그럴 수 있다고, 안아주시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위로해주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그녀는 그렇게, 들릴지 안 들릴지도 모르는, 육중하고, 매정하며 거대한 문을 향해 계속 소리쳤다.


"······."


당연히, 문으로부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음에도.


"···기침하셨사옵니까."


매정한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