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순이의 어머니는 어릴 적 돌아가셨다고 했다.


"저는 왜 엄마가 없어요?"


천진난만하게 묻는 후순이에게

후순이의 유모는 답하곤 했다.


"헤라께서, 후순 님의 어머니를 벌하셨다고 했습니다. 감히 제우스 님과 같이 거짓을 고했다고요."



후순이의 아버지는 후순이를 소중히 키웠다.

하지만, 소중한 것은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

소중한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소중한 석상,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정성은 다 하지만 생명을 대하는 태도는 없는, 그런, 소중함.



"유모님. 우리 어머님은 무슨 말을 남겼나요?"


후순이는 자라면서 어머니에 대해 묻고는 했고


"후순 님께 미안하다고 하셨답니다. 어머니를 원망하고, 그 이외에 그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유모의 말은 늘 한결같았다.



아버지가 싫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었지 않나. 주신을 어찌 감히 어머니가 반대할 수 있었겠나.

아버지가 싫었다. 어머니를 왜 사랑해주지 않았나, 왜 자신도 사랑해주지 않나.


자기 오빠들, 언니들은 사랑해주면서

왜 제우스의 손길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자기 어머니는 그렇게까지 증오했을까.


제우스가 싫었다. 왜 우리 어머니에게 손을 대어서.

헤라가 싫었다. 왜 죄 없는 우리 어머니에게 벌을.



제우스의 딸이라는 명성 덕분일까

후순이는 그 누구보다 빛났다. 보석이 빛나기보다, 태양이 빛나기보다, 번개가 빛나는 것처럼, 그렇게 빛났다.


가만히 있다가 문득 번뜩이는 것이 있으면 늘 후순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어서 늘 구석에 있다가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했어서 인정을 갈구하고


타인의 시선으로 보기에, 후순이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여자였다.




그런 후순이에게 혼처가 들어왔다.


저 건너, 키프로스 땅에 있는 남자라고 했다.

얼굴도 본 적 없고, 성격도 모르지만, 그냥, 재산이 많다고 했다.



아버지가 미웠다. 이제껏 자신을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자기를 대놓고 눈 앞에서 내치려는 그 태도가 너무 싫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멍하니 마을 밖 숲에서, 바쿠스의 축제를 보던 중

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한 잔 할래요? 외로워 보이셔서..."


빛나는 외모. 번뜩이는 재치.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새로운 만남.



그 날의 포도주는 넥타르만큼 감미로웠다.



검은 피부의 남편은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성실하고, 조용하고. 자신에게 최선을 다 하는 남자.

그래, 그래도, 이제껏 힘들었다 보니 이제야 광명이 오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노력은 했다. 빛나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번뜩이는 재치도 없는 남편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하려고는 했다. 그러려고는 했다.

하려고는 했지만, 그 날, 바쿠스 축제, 그 남자. 밝은 달 밤.




아이가 둘, 셋, 생기고서도, 그 날의 빛남은 꿈 속에 어리었다.

꿈 속의 일처럼 멀게 느껴져도, 꿈 속에서는 다시 그 빛남을 맛볼 수 있었다.



남편이 에트루리아 땅으로 잠깐 떠난 사이

멍하니 집을 지키기가 지루해서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던 도중


또 취한 사람들을 보았다.

문득, 심장이 뛰었다. 왠지 모르게.


"얘야, 잠깐 먼저 집에 가 있겠니? 엄마가 잠깐 갈 데가 있어서 그래."


아이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자기도 모르게, 술이 취한 사람들 쪽으로, 바쿠스 축제로 향했다.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술을 마시며 정신없이 몸을 섞는 그 축제의 한가운데에서

후순이는 꿈 속에서 보던 그 남자를 보았다.


"오랜만이네? 같이, 또, 그 때처럼, 즐길래?"


잔뜩 취한 채로

그러면서도 자기를 잊지 않은 그 남자에게


후순이는 달려가 안겼다.


마셔도 마셔도 바닥나지 않는 술

즐겨도 즐겨도 끝이 없는 남자와 여자의 물결


서로 몸을 섞고 다른 사람과 몸을 섞으면서 서로를 보고

취기에 미치고, 분위기에 미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집 안이었다.

한 순간 꿈인가, 했지만, 몸에 남은 나른하고도 기분 좋은 감각은 이게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처음엔 그냥 꿈으로 남기려 했지만

피로한 몸, 서서히 생기는 구토감, 불러오는 배가 점점 현실을 일깨워 왔고



"미안해, 무역 일정 때문에 몇 달이나 걸렸어. 대신 선물을 좀 사 왔는데..." 라고 수줍게 중얼거리던 남편의 말은 이윽고 분노의 외침으로 변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남편의 말에, 후순이는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었다.


"설명 하라니까!"


남편의 외침에도 후순이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옆에 있는, 다른 여인이 말했다.


"신이 여기로 강림했었어요... 거기에 사람들이 휘말려서..."


그 여인은 분명 바쿠스를 얘기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순간 후순이의 머리 속에 무엇인가가 다시 빛났다.


"죄송해요. 당신이 없는 사이, 제우스가, 당신의 모습을 하고서..."


그러고서는, 뒤에 더 지어낼 말이 없어서, 그저 통곡을 할 뿐이었다.




남편은 당연히도 후순이를 믿지 않았지만, 후순이의 통곡에 긴가민가 하며 제우스의 신전을 찾았고


'이 세상은 나의 것이며, 그러므로 여자와 아이들 역시 모두 나의 아이들이다.'


라는 신탁을 받았다.




"... 당신... 하... 일단 알았어."


제우스의 신탁 때문에 남편은 후순이를 내치지 못 했지만

제우스의 신탁 때문에 남편은 후순이를 믿지 못 하게 되었다.




후순이는 그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이제껏, 자신이 제우스에게 고통받아 온 세월이 있으니, 제우스에게 이 정도의 앙갚음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옆에서 변명을 같이 해 준 여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던 순간, 뒤에서 또 다른 여인들의 우악스러운 손짓이 후순이를 덮쳤다.





"뭐야, 당신들, 뭐야!"


"신탁이다. 닥치고 들어."


세 명인지, 네 명인지, 그 정도의 여인들에게 강제로 납치당한 후순이는, 그녀들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네 아이는 무사할 거야. 하지만 넌 아니지. 감히, 헤라 님의 뜻을 무시하고, 가정을 배신해? 네 죄는 죽음으로 갚아라."


멍하니, 후순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헤라 여신님의 무녀로서, 네게 마지막 자비를 남기는 것이다. 남길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다."


손에 쥐어진 몽둥이, 칼, 그리고 도끼. 멍하니 바라보다가,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억울해! 억울하다고! 난, 나는..."


"억울하다고 하지 마라. 넌 가정을 파괴했으니까. 닥치고 유언이나 남겨."


그제서야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생겼고, 다른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생겼지만, 제일 큰 죄책감이 드는 것은 자기 배 안에 든 아이였다. 이 아이는 엄마의 손길조차 닿지 못하고 자라겠지. 자신처럼. 자신의 죄 때문에.


"그냥, 엄마가 다 잘못했다고 해주세요. 다른 이를 원망하지 말라고, 그냥... 제 잘못이라고..."


말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 이거, 엄마가 나한테 남겼던...



툭, 목이 떨어졌다. 배가 갈라지고, 채 자라지 못한 미숙한 태아가 세상 바깥으로 나왔다.


"응애! 응애!"


헤라의 가호로, 목숨은 붙이고 나서.




후진이의 어머니는 어릴 적 돌아가셨다고 했다.


"저는 왜 엄마가 없어요?"


천진난만하게 묻는 후진이에게

후진이의 유모는 답하곤 했다.


"헤라께서, 후진 님의 어머니를 벌하셨다고 했습니다. 감히 제우스 님과 같이 거짓을 고했다고요."




p.s. 

https://arca.live/b/singbung/71965359

여기서 소재 얻음. 실제로 고아원은 대부분 제우스 신전에서 관리했다고 하더라. 가족 후회물 대회 있길래 하나 써봄.



과거글 모음 : https://arca.live/b/regrets/25502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