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수업은 오 분 늦게 끝났다. 그래도 아침 1교시라 조금은 일찍 끝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역시나 그 백발 수학 선생에게 그런 유도리 있는 수업은 존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지개를 켜고 창 밖을 슬쩍 쳐다봤다. 창가 쪽에 앉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여름에는 열기가, 겨울에는 한기가 창문 틈 사이로 솔솔 새어들어와서 이것저것 불만이기는 한데, 그래도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볼 수 있는 건 굉장한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바깥을 보면서 멍 때리는 게 습관인 나한테는 이보다 더 좋은 자리가 없었다.



 가방을 뒤적거려 빼빼로 한 박스를 꺼내 들었다. 수능 날에는 아침을 먹고 나가는 게 좋다는 말에 오늘부터라도 아침을 먹어보려 했었지만, 아침과 나는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오늘도 다시 한 번 깨달을 뿐이었다. 



 아니, 아니지. 생각해보면 빼빼로도 일종의 아침 식사가 아닐까? 무슨 액체를 마시는 것도 아니고, 나름 당분도 들어있는 탄수화물 덩어리다. 그러니 지금 나는 아침을 먹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대로 봉지를 뜯어 빼빼로 하나를 입 안으로 쏙 집어 넣었다.




 "그렇게 매일 먹으면 질리지도 않냐?"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수호가 두 눈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러는 너는 그렇게 매일 똑같이 질문하면 질리지도 않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러기도 귀찮아서 그냥 늘 하던 대답을 건성으로 내뱉었다.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요~"


 "내가 보기에 유정이 너는 어디 오지에 던져놔도 빼빼로만 챙겨주면 문제 없겠다. 오히려 행복해 할 듯?"


 "그런 말 할 거면 일단 사주고 말하셔."




 귀찮으니 저리 좀 가달라고 휘휘 손을 내저어봤지만 수호는 자리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호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책상 위에 무언가 익숙한 물건 하나를 내려놓았다. 빼빼로였다. 그것도 내가 제일 자주 먹는 아몬드 빼빼로.




 "자, 이러면 문제 없지?" 수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야, 빼빼로데이라고 꼴에 빼빼로 사온 거야?"


 "생각나길래 사왔다. 왜, 안돼?"




 안 될 리가. 의도야 뭐가 됐던 공짜 빼빼로 하나가 생긴 건 좋은 일이다. 우선은 고맙다고 말한 다음 빼빼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방금 뜯은 빼빼로를 하나 더 베어 물면서 이 빼빼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11월 11일. 빼빼로데이에 느닷없이 찾아온 이성 친구의 빼빼로 선물.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뭐야, 이거 플러팅이야?"


 "플러팅은 무슨. 이렇게 건성으로 하는 플러팅 본 적 있어?"


 "다른 사람이라면 통했을 텐데, 하필이면 이수호라서 아쉽네."




 그렇게 말하고는 팔을 앞으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장난으로 하는 이야기였지만 반 쯤은 진심이기도 했다. 솔직히, 십 년 넘게 봐온 친구가 갑자기 이성으로 느껴진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어쨌거나 나는 수호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고, 그건 아마 수호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기를 바란다. 난데없이 갑자기 돌연 찾아와서 '사실은 오래 전부터 너를 좋아했어'라는 시덥잖은 고백이나 하고 있으면 그거야말로 제일 소름 끼치는 일일 테니까.




 "혹시 이거, 선물 받은 거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나한테 짬처리 시키는 건 아니지?"




 장난 섞인 가벼운 말투로 물어봤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수호의 사물함과 책상에 빼빼로가 가득 쌓여있는 걸 몇 번이고 봐왔으니까.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호는 이상하리만치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몇 번은 내 친구들에게 '넌 수호와 친하게 지내서 좋겠다'라는 진심 어린 질투도 받아봤지만, 나는 그때마다 애써 웃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줄 뿐이었다. 아니, 저 키만 무식하게 큰 놈이 대체 뭐가 좋다고.




 "음, 으으음..."




 그나저나, 저 녀석은 갑자기 또 왜 저런대. 한 손을 턱에 괴고서 수호는 이리저리 동공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온 대답은,




 "그렇게 티 났어?"




 저 녀석이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나. 방금 선물받은 빼빼로를 한 손에 집고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솔직히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한 대는 때려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너 진짜 죽을래?" 


 "에이, 야야 당연히 농담이지. 너한테 주는 소중한 선물인데 그런 걸 갖다 주겠냐."




  꼴에 또 말은 잘한다니까. 한숨을 푹 쉬고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걸로 한 달 친구비는 입금했다며 또다시 헛소리를 하길래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응징하려 했지만, 자기 반으로 잽싸게 도망쳐버린 수호를 쫓아가기는 귀찮아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뭐, 어차피 점심 시간에 같이 밥 먹자면서 다시 찾아올 게 뻔하니 응징은 그때 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짓고 샤프를 잡았다. 교탁에는 어느새 2교시 담당 선생님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변수가 생겼다. 수호가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어디 있냐며 연락을 보내봐도 도통 답장이 오지를 않았다. 어디 있나 싶어 수호의 반을 찾아가니, 마침 수호 옆 자리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수호의 행방을 알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려 다가갔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사람 앞에서 말을 걸 용기는 없었기에 그냥 관두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대체 어디로 사라졌으려나. 혹시나 싶어 카톡을 열어보지만 여전히 메시지 옆에 새겨져있는 숫자 1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평소에는 늦어도 5분 안에 째깍째깍 답장하더니만,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엥, 유정! 여기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길래 고개를 돌아봤다. 어쩌다보니 최근에 친해진 친구 소희다. 갑자기 복도는 왜 서성이냐며 묻길래 있는 그대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음, 뭐 여친이라도 생긴 거 아냐?"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을 하던 소희가 대답을 내놓았다. 뭐 그럴 수야 있다만은, 그렇다고 단정짓기에는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았다.




 "무슨 여친이 하루아침에 생겨?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안 그랬는데."


 "그렇고 그런 날이잖아. 취향인 애한테 갑자기 고백이라도 받았나보지."




 그렇게 말하고 소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그럴 듯하게 들리긴 했다. 어쨌거나 이유는 몰라도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니까. 




 "근데, 예전에 듣기로는 학교에 좋아하는 애는 딱히 없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헐, 뭐야뭐야. 너희 그런 대화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사이야?" 소희가 잔뜩 높아진 어조로 말했다.


 "또 그러네.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강한 부정을 표현하기 위해 양손을 흔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이것저것 다 좋은 친군데, 가끔은 이렇게 조짐만 보이면 어떻게든 사람을 엮어볼 생각만 하니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다. 




 "뭐, 그래.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말하는 건데, 이번엔 진짜 여친 맞을걸? 저번에 한 번 봤거든. 주말에 어떤 여자애랑 단둘이 걷고 있는 거."




 ...뭐? 머릿속에서 외마디 반문이 튀어나왔지만 말하지 못했다. 머리가 굳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는 잘 돌아가는데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고장나버렸다. 




 "에? 그...진짜로?"


 "맞다니까. 내가 직접 보고 확인도 했어. 눈가 밑에 점 있는 거 이수호 아냐?"




 맞다. 수호는 눈가 밑에 점이 있어 다른 사람과 분간이 쉽다. 다르게 말하자면, 헷갈릴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주말에 단둘이 여자와 걷고 있다니. 이거, 아무리 못해도 썸이잖아. 




 "의외네...그 키만 큰 멀대 같은 녀석이 여친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당연한 결과 아냐? 슬퍼하는 애들은 많아도 다들 고개는 끄덕일걸. 걔가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알고 있다. 수호가 인기가 많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줄곧 누군가와 사귀지 않아왔기에 솔로로 지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오고 있었다. 가끔은 너 이성애자가 맞긴 하냐면서 장난을 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좀 많이 놀랐다. 수호에게 여자친구라니. 도저히 매칭되지 않는 두 가지 단어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그런 멍한 기분으로 소희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내용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애써 생각을 잊어보려 자리에 돌아와 샤프를 잡았지만, 문제를 풀어보려 해봐도 글씨가 흐릿하게 보여 도통 문제를 풀 수가 없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곰곰이 생각을 다듬어봤다.



 친구로서 생각하면 기쁜 일이다. 어쨌거나 친구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건 충분히 축하해줄 일이니까. 그러니까, 친구로서 지금 내 기분은 기뻐야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까. 애인이 생겼으니 이제 친구와 시간을 보내기 힘들 거라는, 그런 실망감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의 감정이 아니다. 답답하다. 가슴이 먹먹해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책상 구석에 치워놨던 빼빼로가 문득 시선에 잡혔다. 너한테 주는 선물인데 어떻게 남의 것을 주겠냐며 수호가 선물해주었던 아몬드 빼빼로.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빼빼로를 집어 들었다. 쌀쌀한 겨울 공기 탓에 빼빼로가 차갑게만 느껴졌다.




 "어...?"




 일순간, 두 눈에서 뜨거운 열기가 부풀어오르는 걸 느꼈다. 눈 앞이 흐리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심장이 무겁다. 따갑게만 느껴지는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왜지.



 왜.



 도대체 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