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regrets/87510177 (전편링크)


*

결사대의 일원으로 지내게 된지도 어언 한달.


그동안 나는 이들을 '동료' 라고 부르는데 거부감이 없게 되었다.


선의와 선의로 이어진,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는 관계.


처음에는 이질적이었던 이 관계도 점차 기꺼워 지고, 나는 비로소 제대로 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칼 군.오늘도?"


"예.크룬드.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상념에 잠겨있던 사이, 크룬드가 이제는 일과가 되어버린 아침 대련을 위해 찾아왔다.


숙영지 근처의 공터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려니 어느새 준비를 마친 크룬드가 입을 열었다.


"선공은 양보하지."


"그럼 사양않고."


순식간에 달려든 내가 검을 찔러 들어가고 크룬드도 맞서 도끼를 휘두르며 대련이 시작되었다.

.

.

.

-챙


"또 졌군요."


"벌써 날 이겨먹으려 드는건 양심이 없는거 아닌가?"


"그렇긴 하죠."


큭큭대며 크룬드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니, 언제 와있었는지 뒤에 서있던 마리아가 힐을 걸어줬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용사님."


"감사합니다.마리아."


그나저나,한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마리아.실키는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이번에 토벌한 마물 때문에 대수림이랑 연락을 취하고 있어요. 그 마물이 세계수의 가지를 품고 있던걸 찾아서...아마 당분간은 바쁠 거 같아요."


"그놈이 확실히 세긴 했는데, 설마 그럴줄은 물랐군요."


"누가 마물이 세계수의 일부를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하겠는가."


"맞죠.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문득 생각난게 있어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 공성전 때문에 그러십니까?"


"네.교단에서 보낸 전서구가 지금쯤이면 와야하는데 이상하네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마리아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꽤 많은 수의 마물을 토벌하면서 밀고 들어왔지만,이번 전투는 다르다.


마족들의 성을 뚫어야 하는 공성전.


안그래도 소수 인원이라 공성전이 힘든데 이번에는 마물들 뿐만 아니라 마왕이 보낸 고위급 마족들도 참전한다는 첩보를 들어 우리끼리는 전투가 힘들다고 판단, 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국이든 교단이든 병력을 보내주기는 하겠지만.....답신이 너무 느리다.


지원을 요청한게 벌써 8일 전.


전서구가 오가는 시간과 인원을 꾸리는 시간을 감안해도 오늘쯤엔 답이 와야 하는데....


-끼룩!


"오.왔네요."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생각을 끝마치기 무섭게 전서구가 도착했다.


"마리아.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어디보자....병력 파견은 당연히 통과됐고....베른하르트 가문?"


.......뭐?


"베른하르트면 칼 군의 가문 아닌가?"


"....네."


"이번 지원은 베른하르트 가문에서 기사들을 보내주기로 했대요. 소가주 대리가 직접 병력을 인솔해서 온다는데....칼. 괜찮아요?"


"네?"


"안색이...."


마리아의 말을 듣고 근처 개울에 얼굴을 비쳐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제 조금 나아진줄 알았는데, 이름만 들어도 이러는 꼴 이라니.


스스로의 한심함에 감탄하던 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크룬드와 마리아가 내게 대가왔다.


"칼 군. 어디 아픈가?"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서..."


"힐이라도 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이러고 말겠죠."


"전에도 그러다가 쓰러지셨잖아요."


"그때랑은 다르지 않습니까. 저 진짜 괜찮습니다."


그때는 권능 활용법을 익힌답시고 혼자 힘쓰다가 혈맥이 꼬여서 그랬던 거고, 이번엔 정말 괜찮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들어가서 쉬세요."


별 달리 아픈것도 아니라 칼이나 조금 더 휘두르고 싶었지만, 저렇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니 뭐라 다른 말을 못하겠다.


"그럼 잠깐 눈좀 붙이겠습니다."


"푹 쉬고 오게. 전사한테 몸보다 중요한건 없어."


"새겨듣겠습니다."


"식사때 되면 깨워 드릴게요."


"예.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막사로 향했다.


침상에 몸을 뉘이자,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전신을 휘감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오랜만에 악몽을 꿀 것 같다.


*

칼이 떠난 후 제국.


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토록 바래왔던 소가주라는 자리를 손에 넣었으니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리제는 깔끔하게 소가주 자리를 양보했고, 유일한 방해물이던 칼도 전장으로 나간 상황.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더 나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칼이 돌아오더라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기반도 마련했으니 더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리에는 스스로를  '베른하르트 가문의 정당한 후계' 라 지칭하며 본격적으로 가문의 업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도 그녀는 여느때처럼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집사.결제가 필요한 서류가 더 남았나?"


"대부분은 다 처리했고....아. 대회의에서 온 공문이 있는데 공작님께서 소가주님이 알아서 처리하시라고 하셔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대회의.


전 대륙의 수뇌부들이 모여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장이자 이 대륙의 최고결정기관.


그런 대회의와 관련된 일을 자신에거 맡기다니, 괜시리 뿌듯한 마음이 든 리에는 재빨리 공문을 확인했다.


-결사대 지원군 파견 안건에 대해.


그렇게 시작하는 문서를 찬찬히 읽어내린 그녀가 이내 긴 한숨을 쉬었다.


"이거 나보고 직접 가라는 말이잖아...."


결사대가 지원을 요청한 이유도, 그걸 베른하르트 가문이 보내기로 한 이유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공문.


그 밑에 공작의 필체로 기록된 세부사항들을 보면 이미 인선까지 정리된 일 이었는데 이걸 굳이 그녀에게 맡긴 이유가 뭐겠는가.


이번 지원군을 그녀가 직접 이끌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이정도의 일을,그것도 은밀하게 치뤄져야 하는 일을 가신에게 맡길 순 없고, 결사대에 참가한 칼과 북부로 파병을 떠난 리제를 제외하면 적합한 사람이 그녀밖에 남지 않으니 공작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결정이지만......


"걔를 어떻게 보냐고."


결사대에 있는 칼이 문제였다.


그녀는 그를 미워했다.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칼을 미워할 이유들이 점점 희미해지며,그녀의 입장이 애매해졌다.


이미 리에가 소가주로써 입지를 공고히 한 이상 그는 더이상 그녀의 방해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살아있으면 제국을 구한 구국의 영웅이오,죽는다 하더라도 전 대륙의 평화를 위해 희생한 영웅으로 기억될 칼을 적대해봤자 그녀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아직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과 손익을 따졌을 때 이득인 쪽을 택하려는 이성이 충돌하며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소가주님?"


"어,어."


집사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리제가 고개를 든다.


"당장 이번주까지는 출정 준비를 마쳐야하니 시간이 빠듯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준비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렇긴 하지....일단 필요한 서류들만 골라놔줘. 난 기사단장이랑 잠시 얘기 좀 하고올게."


"알겠습니다."


결국 그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한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이번 출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꿈에도 모른채로.



*

"좋은 아침입니다.마리아.크룬드."


".....칼.오늘도?"


"네.하하하...."


"몸 상태는 괜찮은가?"


"권능이 수면 부족도 상해로 인정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전보다 더 쌩쌩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누적된 피로까지 낫지는 않네."


며칠간 잠을 설친 나를 걱정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다 문득 의문이 들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크룬드는 그런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권능과 관련된 일은 아무리 노련한 전사라도 쉽게 알 수 있는게 아닌데, 어떻게 저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내 권능에 대해 말하주지 않았나보군."


크룬드의 권능.


그 말에 눈이 확 뜨였다.


지난 몇달간 같이 전장을 헤치며 동료들에 대한 것을 꽤 많이 알게 되었지만 크룬드는 한번도 자신의 권능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실키의 통찰의 권능이나 마리아의 치유의 권능처럼 눈에 띄는 힘이 아니라서 궁금해도 알아낼 방도가 없었는데 그걸 직접 말해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내 권능은 수호의 권능 일세. 내가 지켜낸 사람의 수와 비례해서 힘이 강해지지."


"그래서 전장에서도 티가 잘 안났던 거군요. 저랑 비슷한 경우라서."


"그래. 나도 자네와 비슷한 힘을 지녔으니 다른 이보다 자넬 더 잘 알 수 있는게지. 참고로 나도 7일인가를 안 자고 싸워본적이 있었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뭐.결과가 안좋았으니 나보고 그러지 말라는 것이긴 하겠지만.


"전쟁터에서 기절했네. 그때 동료들이 날 챙겨주지 않았으면 자다가 칼맞고 죽었을거야."


....크룬드 정도 되는 전사가 전쟁터에서 잠들다니.


나 정도는 그냥 훅 가버릴수도 있겠다.


그렇게 크룬드와 몇마디 대화를 더 나누던 사이, 마리아와 실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거 같군요.실키."


"아마 진짜 오랜만이 맞을걸요? 여튼 반가워요.칼."


꽤 오래 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만난 실키와 반가움을 담은 악수를 마치고 옆에 서있던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마리아.혹시 부탁한 물건은 도착했습니까?"


"다행히 제시간에 맞춰서 왔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마리아가 투구와 작은 유리병 몇개를 내밀었다.


"부탁하신 투구랑 마법 카트리지에요. 칼의 부탁대로 성법도 저장할 수 있게 개조된 물건이라고 하니까 쓰는덴 지장이 없을거에요."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애초에  교단은 권능을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더 흥분해서 구해다 주던데요."


"그 정도 일줄은 몰랐네요."


얼마 전,크룬드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가 수인족 광전사들의 전투법을 듣고 내 권능이랑 시너지가 좋을 것 같아서 써먹어 보려던 것 뿐인데 그렇게 반응하다니, 교단도 정상은 아닌것 같다.


"그나저나 칼.투구는 갑자기 왜 쓰려는 거에요? 권능 쓴다고 갑옷도 경갑옷만 입으면서."


실키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다 대답하려는 찰나, 낮고 긴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지원군이 왔나 보군요."


"...그러게요.맞이하러 가봐야 할 거 같은데."


엄습하는 불안감을 억누르려 투구를 쓰곤 말했다.


"다들 준비는 필요없어 보이니 바로 가도록 하지."


"네."


앞정선 크룬드를 뒤따라 도착한 곳에는 익숙한 문양의 깃발을 든 기사들이 대열에 맞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서있는 익숙한 여인.


......제발 아니길 바랬던 일이 일어났다.


"베른하르트 가문의 리에 베른하르트라고 합니다. 결사대 여러분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크룬드라고 하오. 이번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맨 앞에 선 크룬드와 대화를 나누던 리에 누님의 시선이 문득 나에게로 향했다.


고작 그 시선 한번에 몸이 천천히 굳는다.


아무리 누님이라도 결사대의 일원인 나에게 해코지를 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몸에 새겨진 본능이 내게 경고를 보내온다.


-저벅 저벅


이윽고 다가온 누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칼.잘 지냈니?"


따스한 목소리에 굳어가던 몸이 현실감을 되찾는다.


지금 누님은 나보고 사이좋은 남매 연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게 우리의 대외적인 모습이었으니까.


여기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는 건 적어도 당장은 내게 적의를 드러낼 생각이 없다는 뜻 이니까.


잠시 숨을 고르고, 내밀어진 손을 마주잡았다.


"오랜만입니다.누님."


"그래. 건강한 것 같아보여 다행이다."


.....투구를 쓰길 잘했다.


지금 내 맨얼굴을 본다면 누구든 이상함을 느끼겠지.


일그러진 표정을 천천히 갈무리하고 누님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먼길을 달려와 피곤하실 텐데 푹 쉬시죠. 병영 터를 잡아놨습니다."


"배려해줘서 고맙다. 전군은 숙영을 준비해라!!!"


"그럼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시죠."


"그래."



기사들을 이끌고 멀어져가는 누님의 뒷모습을 보던 중 문득 다리에 힘이 풀렸다.


"칼!!"


다행이도 옆에 있던 실키가 잡아줘서 넘어지는건 면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누님을 뵈니 긴장했었나 봐요."


비틀거리던 몸의 중심을 잡고 일어나 말을 이었다.


"우리도 이제 쉬러 가죠. 당장 며칠 후에 전투가 있을건데 푹 쉬어 놔야죠."


"칼 군 말이 맞네. 쉴 수 있을 때 쉬어놔야 전장에서 만전의 상태로 싸울 수 있지."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교단이랑 얘기할 게 남아서..."


"저도 대수림에 연락을 보내야 해서 먼저 들어갈게요."


"난 가서 무구 손질이나 해야겠네."


이내 각자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간 대원들을 바라보다 근처 냇가로 향했다.


"후....."


투구를 벗고, 식은땀으로 엉망이 된 머리칼과 투구 내부를 정리한다.


물에 얼굴을 비춰보니 안색도 말이 아니다.


"이 한심한 새끼...."


이 꼬라지로 동료들한테 걱정만 끼쳤다고 생각하니 한숨만 푹푹 나왔다.


"다들 눈치만 빨라서는."


내 상태를 파악하고 별 말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 준 그들을 생각하니 이번에는 나도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혼자 이렇게 궁상떨고 있어봤자 사람들 걱정시키는 거 밖에 더 되겠나.


정리하고 들어가야지.


.......


부디, 별 일 없기를.



*

가문의 기사들을 이끌고 집결지에 도착한 리에를 처음 맞이한 것은 한 수인족 사내였다.


전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백.


한명의 기사로써 호승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나 지금 그녀는 한 병력을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사적인 감정은 거두고 대표로 보이는 사내에게 예를 표했다.


"베른하르트 가문의 리에 베른하르트라고 합니다. 결사대 여러분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그녀가 보낸 인사에 사내도 마주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상투적인 대화가 오갔다.


그러던 와중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이 있었다.


'.....칼.'


투구로 가린 얼굴과 거구의 몸.


새어나오는 막대한 기운까지.


그녀가 알던 칼 과는 다른 모습이었으나, 분명히 칼이 맞았다.


솔직히 말하면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가문 내의 불화설이 돌 것이 자명했기에, 그녀는 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잘 지냈니?"


항상 그들이 밖에서 연기하던  모습으로.


그러자 잠시 멈칫한 칼이 손을 마주잡는다.


"오랜만입니다.누님."


그녀와 칼의 생각이 통한것을 확인하고는 칼의 안내에 따라 숙영지에 짐을 풀었다.


"며칠뒤면 전투가 시작될 것이니 기사들을 쉬게 하고 준비가 미흡한 부분은 없었는지 다시 확인하라."


"알겠습니다."


멀어져가는 기사단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아까 칼과 만났을때 떠오른 의문이 그녀의 머리속에 다시금 떠올랐다.


'그건 뭐였지?'


칼에게서 느껴지던 강대한 기운.


최악의 재능을 타고났다던 칼이 단시간에 얻어내기엔 무리가 있는 힘 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용사니까 그렇겠지 라며 넘겨버릴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분명 뭐가 있는데...'


"소가주님.계십니까?"


그녀가 고민하고 있던 순간, 점검을 마친 기사단장이 돌아오며 그녀의 상념은 맥없이 끊겼다.


"보고할 사항은?"


"~~~~"

.

.

.

.

"알았다.이만 들어가 보도록."


처리할 업무를 모두 마친 그녀는 곧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불현듯, 끊겼던 상념이 다시 이어졌다.


평소였으면 그냥 무시하고 말았겠으나, 그녀의 직감이 뭔가 위험하다고 경종을 울려대고 있으니 쉬이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


멀지않은 미래, 자신의 직감이 그토록 경고해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나서는 꽤 오래동안 있을 일 이었다.



*

도착한 지원군이 휴식을 취하고, 작전을 짜고, 인원을 배치하고.....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시간은 순삭간에 흘러 벌써 출정일 아침이 되었다.


"자.다들 전장에 나가기 전에 하고싶은 말이 있나?"


전투가 있기 전, 분위기를 풀기위한 크룬드의 질문에 나는 곧바로 답했다.


"이번 전투에서 제가 무슨 짓을 해도 놀라시면 안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새 전투법을 이번 전투에서 써보려는데 그게 평범이랑은 거리가 있다보니."


"껄껄.한평생을 전장에서 구른 내가 놀랄게 무에 있겠나? 호들갑 떨지 말게."


"그런지 아닌지는 곧 확인할 수 있겠죠."


"칼. 또 위험한 일을 하려는건 아니죠?"


-움찔.


의표를 찌르는 마리아의 말에 잠시 몸이 굳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답했다.


"전장에 나가는 데 언제는 안 위험했습니까?"


"제가 말하는게 그런 거 아닌거 아시잖아요."


"마리아.칼이 다 생각이 있겠죠."


나이스.실키.


실키의 지원사격에 그제서야 마리아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여튼 최대한 조심하세요."


"네."


"자. 이제는 갈 시간일세."


대화를 끝내고 집결지로 향하자 도열해있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전투도 성공적으로 끝내보죠."


"발목을 잡지는 않을겁니다."


크룬드와 누님이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고 갈라지자, 이윽고 진격의 시작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우우우


"전군 진격하라!!!!"


결사대 대원들과 기사단의 정예로 이루어진 선봉대가 적진을 향해 돌진을 시작하자, 그들의 후미에 서있던 나도 자세를 잡았다.


"후....."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전신의 마나를 폭주시킨다.


-쿠구구구구구


...이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사위를 짓누르는 압력에 놀란 선봉대가 뒤를 돌아보자, 괜히 머쓱해져 발걸음을 재촉했다.


"음."


폭주한 마나가 불안정한 상태로 날뛰며 전신의 혈맥을 헤집어 놓는다.


동시에 권능의 힘으로 더욱 강해진 육체가 재생을 시작한다.


무한대의 성장을 보장하는 힘을 쥐고 달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어느샌가 나는 선두를 넘어 가장 앞에서 전진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미안한데."


작전이고 나발이고 다 팽겨치고 혼자 돌진을 하고 있으니 지휘부 입장에서는 골이 아플 것이다.


동료들은 걱정할 테고.


....나중에 설명하면 들어는 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적군의 성 앞으로 치닫자 마물 무리가 튀어나와 공격을 시도했다.


"끼에에에엑!!!!"


괴성과 함께 내질러진 창을 응시하다 곧 창날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끼에에엑?!?!?!?"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놀랐는지 마물도 의문을 한껏 담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퍽


그럼에도 내질러진 창은 멈추지 않았고, 공격에 적중한 팔이 터져나갔다.


-파앗


그리고, 순식간에 다시 자라났다.


눈앞에서 일어난 괴이한 일에 놀란 마물들이 잠시 멈췄고, 그틈을 타 휘둘러진 검이 그것들을 전부 목없는 시체로 만들었다.


"꽤 괜찮네."


새로 돋아난 팔을 보며 나는 만족감을 느꼈다.


이론상으로 구현만 했던거라 실제로 될 지가 의문이었는데 다행히도 별 문제는 없었다.


"칼!!!!!"


그순간, 선봉대의 인원들이 도달했다.


"방금 그게 무슨 짓-!!!"


무어라 성을 내는 마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적군의 증원입니다!!!!"

그 사이에 성에서 물밀듯 밀고 나오는 마물의 무리를 바라보며 검을 고쳐쥐곤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번에는 굳이 공격에 몸을 날리진 않았지만, 날아드는 공격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에 검 한번 더 휘두르는게 이득이니까.


순식간에 피칠갑이 된 몸을 이끌고 마물들을 도륙하던 도중, 성벽 위에서 꽤 강해보이는 마족이 나타났다.


"저놈이 그때 말했던 고위 마족인가?"


저걸 생포하면 꽤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의 마물들을 정리하고 성벽으로 뛰어올랐다.


"넌 뭐냐?"

-캉


놀란 눈으로 묻는 마족에게 칼질로 화답해줬다.


"널 포로로 삼아야겠다."


그 말에 분노한 마족이 덤벼들었다.


"죽어라!!!"


"음."


날아드는 공격이 꽤나 묵직하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빨리 끝나진 않을 것 같다.


*

"저게....뭐야?"


리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다짜고짜 적진으로 돌진해 공격을 전부 몸으로 받아내며 적을 도륙하는 칼의 모습이 그녀에겐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같은 검법과 같은 마나 심법을 사사받은 그녀였기에 칼의 행동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건지가 더욱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마나를 폭주시키고 전투한다는 발상 자체가 미친것에 가까웠다.


마나 폭주의 부작용은 권능으로 무마한다 쳐도, 폭주한 마나가 전신을 헤집는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평범한 사람이면 진작 기절하고도 남았을 몸 상태로 저만한 신위를 보여주는 것도 놀라운데, 그가 보여준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폭주한 마나를 통해 상처 부위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동시에 회복 성법과 강화된 재생력을 통해 신체를 수복한다.


저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하며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칼!!!!!!"


그순간 크룬드가 내지른 사자후가 리에의 정신이 돌아오게 했다.



크룬드를 중심으로 뭉친 결사대는 필사적으로 칼을 뒤쫓아 적 성의 성문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고, 그 길을 따라 돌진한 기사단이 성문을 돌파했다.


이미 칼의 기행으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던 마왕군은 별 저항도 하지 못한채 성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은


"어떻게든 생포해 보려고 했었는데 저항이 워낙 거세서 실패했습니다."

태연하게 적 지휘관의 시체를 들고 돌아왔다.


이제는 어디가 잘못됐는지 지적하기도 힘든 상황 이었지만 모두가 한가지 생각을 공유했다.


'칼은 어딘가 고장났다' 고.


그 생각은 리에도 마찬가지 였고, 전투의 여파를 정리하자 마자 칼에게 달려가 물었다.


"너,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


혼자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다고 동료들에게 혼이 나고 있었을 무렵, 누님이 나를 찾아왔다.


"혹시 칼 여기 있습니까?"


"누님?"


"얘기할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만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아직 한기가 도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동료들 틈을 빠져나와 누님의 뒤를 따랐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숲 한 가운데까지 온 누님은 이내 발을 멈추고 물었다.


"너,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네?"


"아까 전투 때,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 거냐고."


......무모,하다라.


"그저 가진 힘으로 아군의 피해를 줄이려 했을 뿐 입니다."


"그게 그렇게 넘어갈 일 인줄 알아? 까딱 잘못했으면 죽는 거였다고!!"

내가 죽는걸 가장 바란게 누님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제와서.


가슴 한켠에 꾹꾹 눌러놓았던 내 목표와,그와 함께하는 음습한 감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시위하는거야? 뭐 불만이라도 있어? 아님 원하는 거라도-"


귀가 울린다.


누님의 말이 더이상 들리지 않고, 기이한 소음이 그 자리를 채운다.


-더 숨기지 마.


-너를 보여줘.


-그녀가 만든 결과물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해주는 거야.


날 현혹하는 듯한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귓전을 때렸다.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쥐며 불쑥 튀어나오는 본심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게 가장 큰 상처을 남긴 사람중 하나인 누님의 존재.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전장의 열기.


동료들이 내게 준 따스함의 편린까지.


세 요소가 뒤섞이며, 평소 같았으면 끝까지 숨겼을 본심이 빗장을 풀고 나왔다.


"죽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ㅁ,뭐?"



"그런데 제가 죽으면 마왕을 잡을 사람이 없어지니까,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해져서 하루라도 빨리 죽음으로 안식을 찾으려 그랬습니다."


"너,지금 무슨 소릴-"


본심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내 안의 무언가가 점차 무너지며, 나는 더이상 누님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누님도 그걸 바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냥 질렀다.


"...어?"

"누님에게서 어머니를 앗아간 놈이, 재능도 없이 소가주의 자리를 차지한 놈이, 살아만 있으면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이 누님의 길을 방해할 놈이 죽는걸 바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분명 그랬을 터인데.


"아..아니,나는...."


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저는 죽음으로 모든 죗값을 치루고 평온을 찾을 것이고, 누님은 원하던 자리를 차지하고, 그 밖에도 제가 죽으면 행복할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제가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야 합니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지만 한번 열린 입은 내 통제를 벗어난지 오래였다.


그리고 딱히 틀린말이 아니기도 하고.


"저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평온을 원할 뿐 입니다."


"........"


"...여튼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는 거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 쉬시지요."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누님의 손이 나를 붙잡았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내가 물어도 그녀는 고개만 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 들어가 봐야 합니다. 아직 잔당 정리 일도 남았고 해야할 일이 많아요."


그럼에도 날 붙잡은 손을 놓지 않던 그녀는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으나,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으로 내 심장께를 가리키기만 했다.


......


"혹시 제가 죽고싶다고 한 것 때문입니까?"


끄덕여지는 고개.


그와 동시에 내 마지막 이성도 끊어졌다.


나를 그렇게 괴롭혀놓고,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게 한다고?


"제가,그렇게 미우십니까?"


"....?"

"이미 고통과 죄업으로 뒤덮인 삶을 끝내고, 내세에서 평온함을 누리겠다는게, 그렇게 싫으십니까?


제가 누님과 아버지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순간, 시야가 기울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느낀 탓일까, 뇌가 더이상 버티지 못한 거 같다.




-칼!!


-칼군.장신 차리게!

익숙한 목소리들이 어지러히 퍼져나간다.


-정신 분열의 증세가 보여요.


-...실키,정말로요?


알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과 이해하지 못하겠는 말들이 엮여 귓가에 내려앉는다.


-네.그래도 다행히 그 정도가 심하진 않아요.트리거가 된 일,또는 사람에게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긴 하겠ㅈ......

.

.

.

들려오던 목소리가 끊기고, 어느샌가 눈이 떠졌다.


"칼!!몸은 괜찮아요?"


"칼군.정신이 드나?"


"쓰러지고 3일이 넘게 안 깨어나서 걱정했어요."


"괜찮아요.이젠 멀쩡합니다."

동료들의 과분한 걱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자, 익숙한 내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별로 보고싶지 않던 얼굴까지도.


"...칼."


나를 부르며 손을 뻗는 누님을 보자 자연스레 입이 열렸고

"누님이,왜 여기에 있습니까?"


내 입에서 나왔다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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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3편 썼던걸 다시 보는데 너무 처참하게 못썼어서 그냥 틀만 남기고 새로 쓸려고 했는데 그거 하나 띡 올리는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4편 분량까지 끌어다 합쳤는데 그거 어쩌다 보니까 12000자가 넘었음....


여튼 오늘도 늦어서 미안하고 항상 부족한 글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