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매트릭스 받침대에서 굴러떨어져 잠에서 깼다. 놀이공원에서 대충 둘러대고 나와 잠으로 도망쳤다. 머리가 어지러운 탓에 금방 의식이 끊겼다. 꽤나 이른 시간에 숙면한 덕분에 오전 6시였다.
‘산책 정도는 할 수 있겠군.’
나는 고된 행군과도 같던 그 고문들 속에서 소소한 행복 하나하나에 감사할 수 있는 미덕을 얻었다. 딱히 감사하진 않았다. 언젠가 갖춰야 할 미덕이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갖추고 싶진 않았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머리를 감기 위해 샴푸를 짜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욕실 밖으로 나가자 몸에 묻어있던 물이 빠르게 식었다. 아직 3월이라 그런지 겨울바람은 여전했다. 머리카락에 남아있는 물방울들이 성에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산책을 나섰다.
그렇게 집 앞을 나서는데, 마침 후드티를 입고 산책중인 사람이 있었다. 유연이었다.
“아.”
“엄.”
바야흐로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만남이었다.
내 생각에 저 여자는 새로운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공원에서 바람을 쐬면 저 먼 곳에서 앉아서 나를 힐끔거렸고, 편의점에 가서 캔음료를 사 마시고 있으면 창 밖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미친, 사레 들리는 줄 알았네.’
눈을 미친년처럼 뜨고는 나를 보는데, 그 꼴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낮에 귀신이라도 보면 이런 기분일까.
그리고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도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따라 다니기만 했는데, 심히 두려웠다.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걸음을 급히 하였다. 내가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큰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잡귀라도 쫓는 것처럼. 다시 몸을 씻고 교복차림으로 나오니 여전히 문 앞에서 서 있었다. 이번에는 내게 직접 인사를 해왔다.
“안녕?”
“시발.”
문 앞에 딱 붙어서 웃으면서 내게 인사하는데, 그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미친년처럼 이러지? 물론 언제는 미친년처럼 안굴었냐 만은 방향성이 다르지 않나. 그리고 이 집 문 앞에 저 년이 있는게 개인적으로 좋은 광경도 아니었다. 창관, 썩은 우유..
“왜 왔어?”
더는 생각하기 싫어 입을 열었다. 입 속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몸 속을 식혔다. 그 전까지는 혈관을 따라 부정적인 생각이 피와 함께 내 몸을 뜨겁게 뎁히고 있었는데 조금 나아졌다.
“같이 학교 가자고, 같은 반이라고 말하진 않을거라 생각해. 알잖아. 내가 너 싫어하는거. 근데 왜 자꾸 달라붙지?”
대놓고 쌍욕도 했다. 싫다고도 말했다. 달라붙지 말라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다가오는 사람은 십중팔구 정신병자다.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거나. 물론 저 년이 정신병자 기질이 없잖아 있었지만 대놓고 싫다는 사람 귀찮게 하지는...
‘아니지 시발, 그랬으면 나한테는 왜 그랬대?’
...아무튼. 무슨 생각이 있어서 나한테 끈질기게 달라붙는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유는 잘 모르겠다. 저런 성격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말을 걸기 전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듯 너는 조용했고...
그러니 네가 내게 먼저 다가올 리가 없었다. 너는 이제 나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우리 앞으로 일 년동안 같은 반에서 지낼건데, 계속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지내면 그렇잖아... 우리 사이 좋게 지내면 안될까? 내가 잘할게..”
“헛소리 –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긴 왜 없어! 응? 말 붙일 사람 한 명 없는게 얼마나 서러운데. 응?”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굴었나? 서럽지 말라고 나한테 더러운 말을 내뱉고, 그렇게 모독적으로 굴었나? 웃긴 말이지. 수십 사람 사이에서 장난감 인형으로 사느니, 독수공방 하는게 낫지 싶다.
“꺼져.”
“...싫어, 한세월. 절대 못꺼져 - ... 아, 아니야. 세월아, 그러지 말고..”
한순간 독기 서린 표정으로 투정 부리듯 말한 그녀는, 스스로에게 놀란 듯 말을 멈추고는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상했다. 뭔데, 뭐가 그리 찔리길래 죄인이라도 되는 양 구는걸까. ‘너’는 ‘나’한테 아무 짓도 안했는데. 미안할 짓 따윈 아무것도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렇게 싫으면 화내도 괜찮아. 귀찮으면 때리고 밀어내도 괜찮으니까 - ”
“미안하다.”
아무것도 못들은 걸로 하고 싶었다.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갔다. 얇은 이어폰 하나를 귀에 꽂고 옆이나 뒤 따위 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매점에서 파는 우유는 맛있었다. 색소와 조미료를 한계까지 들이부은 듯 한 맛은 혓바닥을 저릿하게 했지만, 그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우유 좋아하잖아? 많이 마셔.’
상념에 픽 웃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렇게나 유쾌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갖은 고난을 겪고 난 뒤에는 자신에게 행복한 것 밖에 남지 않았다고, 앞날이 창창하리라 착각하는 습성이 있는 듯 했다. 갖은 악마계약자들이 그러했고, 또 많은 인간이 그러했다.
전자에 가까웠던 나는 이제 그것이 허무맹랑한 망상, 또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인간 깊숙한 DNA에 새겨진 본능은 이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괴감에 더 웃음이 나왔다.
앞에서는 교생 한 명이 떠들고 있었다. 시침과 초침이 겹쳐지기 잠깐 전, 11시의 끝이 오고 있었다. 조금씩 날씨가 풀리는지 바람이 기분좋았다. 28명중 몇 명은 자고 있었고, 몇 명은 교과서에 낙서를 하고 있었고, 몇 명은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 – 그 중 유연은 아무것도 상관 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바람은 파도처럼 교실을 한 번 휩쓸고는 다시 창문으로 나갔다. 내 잡념을 떨궈 함께 내보내고 눈을 감는다. 다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좋은 날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