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regrets/83024152

   

후붕이의 팔다리가 완치되기까진 2주 조금 넘게 걸렸어. 그리고 후순이는 주기적으로 병문안을 오며 그를 챙겨줬지. 과일도 가져와서 깎아주면서말이야. 

그날 이후로 불행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 후순이를 보며, '이젠 정신좀 차렸구나.' 하고 후붕이는 생각했어. 이제 불행을 떠안는것도 좀 줄어들겠다고도 생각했고.

그리고 그 생각은 퇴원하고나서 산산히 부서지게 되었어.

"있지 후붕아, 이제 몸도 다 나았으니까 다시.."
"야."

후순이의 부탁을 들은 후붕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가기 시작했지만 후순이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한거 같았어.

"어?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거야?"

"내가 분명 스스로 해결해달라고 말했던거 같은데?"

"...그랬었나?"

"그리고 넌 그 말에 응이라고 대답했어."

"...그건"

"그럼 약속을 지켜야 할거 아냐? 니 불행은 이제 알아서 해결해. 나한테 기대지 말고."

부탁을 거절당한 후순이는 살짝 화가 나기 시작했어. 분명 자기 불행을 떠넘기려고 한 후순이 잘못이 맞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후붕이의 호의를 받아온 그녀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였어. 소꿉친구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한 후붕이에 대한 불만이 있을 뿐이었지. 

후순이로선 잠깐 손좀 잡아주고 눈좀 마주봐주는 간단한 일인데, 그걸 매몰차게 거절하니 화가 났던거야.

“..내가 뭐 어려운거 부탁했어? 지금까지 계속 해줬던거 한번 더 해주는게 그리 어려워?”

“어렵진 않지. 그래서, 나보고 너 대신 좆되달라고 그러는거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내가 틀린 말 했어? 네가 좆되는건 싫으니까 나보고 대신 좆되달라고 그러는거잖아. 그걸 10년도 넘게 해줬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지. 다시 말한다. 약속을 지켜. 더 이상 네 불행을 나한테 떠넘기지 말라고.”

“10년도 넘게 해줬으면 몇 번 정도 더 해줄 수 있는거 아니야? 그리고.”

“..그리고?”

“..난 응이라 말한 적 없어. 스스로 해결한다는 그 약속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어디 증거를 갖고 와보지 그래? 그 구두계약에 동의했다는 증거를 가져와보라고.”

“..너 진짜 치사하고 뻔뻔하다? 그렇게까지 이겨먹고 싶었냐?”

“증거를 안 남겨놓은 니 잘못이지 어쩌겠어?”

어이없다는 듯이 후순이를 쳐다보던 후붕이는 양 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말했어.

“그래. 네가 그런다면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네.”

“한번 더 해줄거지?”

“앞으로 말 걸지마.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네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이제 내 알 바 아니니까.”

“..어?”

“이후순씨, 이제 서로 엮이는 일 없었으면 좋겠군요. 안녕히 계시길.”

당황하는 후순이를 뒤로 한 뒤, 후붕이는 집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다음날, 수업이 끝나 하교하는 후붕이를 누군가 불러세우는거야.

같은 반에 있긴 했지만 별로 면식은 없던 애들이 자기를 불러세우자, 후붕이는 의아해 하면서도 몸을 돌려 그 애들을 바라봤지.

“무슨 일이야? 뭐 할 말 있어?”

“네가 불행을 가져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말야.”

‘이 씨발년이 진짜..’ 후붕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 자기 ‘부탁’이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은 후순이가 후붕이의 비밀을 다른 애들에게 말해준 거였지.

“듣자 하니 양손을 잡고 눈을 마주보면 불행을 가져간다는데, 한번 해줄래?”

“..그런걸 믿어? 현실적으로 그게 진짜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치. 보통 이런건 안 믿지. 근데 그걸 후순이가 말하니까 어째선지 신빙성이 생기더라고? 걔 항상 운이 좋았었잖아? 시험 찍은 것도 다 맞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치던 후붕이는 곧바로 거칠게 붙잡혔어. 강제로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진 후붕이는 그대로 손을 잡힌 채 눈을 마주보게 됐지.

“어디어디.. 이러면 되나?”

후순이의 말해준 방법대로, 지찬이는 후붕이에게 불행을 떠넘겼어.

“야, 나 매점 좀 갔다 올거니까 그때까지 쟤좀 잘 잡고 있어.”

“알았어.”

매점으로 향하는 지찬이를 보며, 후붕이는 마음속으로 빌었어. 부디 불행을 억지로 떠넘길 수는 없기를.

“이야.. 이거 진짜 효과가 있는데?”

지찬의 손에 들린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 3개에 쓰여진 ‘한개 더’ 표시를, 후붕이는 절망하며 보고 있었어.

   

그 후로 후붕이의 삶은 더욱 고달퍼졌지. 반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알게 되었던거야.

그대로 등교거부를 해도 집까지 찾아와서 강제로 불행을 떠넘기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어. 눈을 감은 채 버티면 반항한다고 뜰 때까지 구타를 멈추지 않았지. 후붕이가 떠맡는 불행은 점점 늘어갔고, 그 불행으로 인해 다치는 것도 점점 심해졌지.

부모님께 말씀드렸지만 두분의 직업 사정상 이사는 어려웠고 도어락을 바꾸는 정도밖엔 별다른 조치를 해주지 못했고.

신호를 무시한 덤프트럭에 치여 중환자실 신세를 지다 나와도, 그를 기다리는건 불행을 떠넘기러 온 사람들이었어.

그들은 후붕이가 뭐라 말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그저 붙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구타를 동원하여 불행을 떠넘기고 갔지.

겨우겨우 전학을 갔지만 이미 소문은 퍼질대로 퍼져 후붕이에게 불행을 떠넘기려는 사람들은 그곳에도 있었고, 후붕이의 몸과 마음은 이미 썩을대로 썩어있었어.

.

.

.

“아이씨.. 이번에도 안 떴네...”

“..너 때문에 안 떴잖아 이 씨발새끼야!”

“으윽..”

시간이 흘렀지만 후붕이의 상황은 별로 변한게 없었어. 하지만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후붕이는 몸으로 눈치채고 있었지.

강제로 떠맡은 불행으로 겪는 사고의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어.

하루가 멀다 하고 겪던 사고들은 1주일에 서너번으로 줄어들었고, 달에 한번, 반년에 한번 정도로 팍 줄어있던거지.

모바일 게임에서 원하는게 뜨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붕이를 때리던 같은 반 아이와 그 광경을 실실 웃으며 보던 그의 친구 지찬은 다시 후붕이에게 손을 내밀게 했어. 그리고 언제나처럼 불행을 떠넘겼지.

자신을 불행 받는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눈앞의 애들을 보며, 후붕이는 강한 살의를 품었어. '고통스럽게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라고 말이지.

자신에게 불행을 떠넘기고 개운해진 표정으로 걸어가는 두 명의 뒷모습을, 후붕이는 적의를 담아 노려보고 있었지.


그때였어. 무단횡단을 하던 그 둘이 대형 트럭에 치인 것은.

주변의 시민도 놀라고, 트럭기사도 놀랐지만. 그곳에서 제일 놀랐던 것은 후붕이였지. 분명 저놈들은 자신에게 불행을 떠넘겼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건지 알지 못했으니까.

중상을 입은 채 겨우 숨만 붙어 고통에 신음하는 둘을 뒤로 한 채, 후붕이는 집을 돌아와 방에 틀어박혔어.


그리고 다음날. 후붕이는 한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어. 대문을 부서질듯이 두드리는 또래 애들에게 문을 열어준 뒤, 순순히 불행을 떠맡았지. 평소와는 다르게 순순히 손을 내미는 후붕이에게 불행을 떠넘긴 채 돌아가던 애들을, 후붕이는 창문 너머로 그때처럼 적의를 남아 바라보았어.


"아아아아악!!!"

"야! 괜찮아? 피.. 피가..?!"

"거기 119죠? 지금 여기 사람이 떨어지는 간판에 맞고.."

그 광경을 보며 후붕이는 답을 찾았어.


어째서 자신에게 불행을 옮긴 애들이 사고를 당한걸까? 후붕이는 이 의문에 대한 가설을 여러가지 생각해봤지.

1. 능력이 사라졌다.

2. 받을 수 있는 불행에는 한계치가 있다.

그리고 3. 불행을 다른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중에서 3번째 가설이 맞았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된거야.

이제 더 이상 불행과 함께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후붕이는 오랫만에 진심으로 소리내어 웃고 있었어.

하지만 아직 실험해보려는 것은 많았어. 자신에게 쌓인 불행을 사람이 아니어도 떠넘길 수 있나, 얼마 만큼의 불행을 떠넘기면 즉사할 정도의 사고가 나오나, 얼마나 불행을 모아놓을 수 있나.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었지.

후붕이는 이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불행을 받아가기 시작했지.

.

.

.

그로부터 한 달 후. 후순이와 그녀의 아버지는 옆집. 그러니까 후붕이네 대문을 하염엾이 두드리고 있었어. 잘 되가던 사업이 한순간에 기울다 못해 완전히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거든.

망하기 직전이었던 후순이 아버지 사업에 투자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고, 이대로 가면 빚더미에 나앉게 된거야.

최후의 실낱같은 희망을 잡아 후붕이를 찾아 노크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어.

"어라? 이후순씨, 어째서 저희집 대문을 마구 두드리고 계시나요?"

"어? 아? 후.. 후붕아아!!'

마치 지옥에 내려온 한줄기 거미줄을 본 칸다타처럼, 후순이와 그녀의 아버지는 후붕이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부탁했어.

"후붕아, 내가 잘못했어. 진짜 내가 해선 안되는 짓을 했어! 미안해. 정말로.."

"후붕아, 그때 한번만이라고 말하긴 했는데, 이번 딱 한번만 더 아저씨좀 살려주라..!"

"살려달라니.. 어떻게요?"

"그러니까 그때처럼.."

"그때처럼 병원 신세 한번 더 지라고요?"

"그.."

"조금 힘들어지는 정도의 불행을 받고 병원신세 질 정도였는데, 이 정도 불행을 받으라는건 저 보고 대신 죽어달라는 소리로밖에 안들리는데요?"

"저기 후붕아.. 내가 진짜 잘못했으니까 우리 아빠 좀..."

"이후순씨, 당신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지금 저한테 도와달라는거예요? 진짜 뻔뻔하시다."

"후순아, 그게 무슨 말이니? 후붕이한테 무슨 짓을.."

"아빠, 그게 그러니까.."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리는 후순이에게서 후순이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후붕이는 말하였어.

"댁의 따님 이후순씨는 말이죠. 자기 불행은 이제 스스로 좀 해결해달라는 제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는데도 뻔뻔하게 다시 부탁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거절했더니, 제 비밀을 싹다 퍼트려놨더라구요?"

"아.. 아냐! 내가 그런게 아냐!!"

"그럼 아저씨, 혹시 아저씨가 퍼트리셨나요?"

고개를 젓는 후순이 아버지에게서 후순이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붕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어.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나랑 우리 부모님이랑 너랑 너희 아버지밖에 없었거든? 그리고 맨 먼저 찾아온 놈이 널 언급하더라. 이래놓고. 계속. 발뺌하려는거야? 이 썩을년이."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후순이를 무시하며, 후붕이는 말했어.

"전 그 덕분에 인생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거든요? 매일매일 불행을 떠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그 불행을 겪어야 했어요. 차에 치이고 집단구타도 당하고.. 아, 가스라이팅도 당했었다. 넌 이거 아님 쓸모 없는 놈이라고 막 그랬는데."

말이 없어진 후순이 아버지를 내려보며, 후붕이는 마지막으로 말했지.

"아저씨, 전 아저씨랑 아저씨 가족을 위해 죽고 싶은 마음이 안드네요? 제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려놓은 아저씨 따님 덕분에 더더욱 도와드리고 싶지 않네요. 지금 아저씨가 뭐라고 하시든, 전 아저씨를 도와줄 마음이 없으니 알아서 해결하ㅅ.."

"아빠, 후붕이 잡아!"

"ㅇ.. 어?"

"잡아서 억지로 손 잡고 눈 마주봐봐! 강제로 떠넘기는 것도 분명 될거야!"

"후붕아.. 미안하다!"

후붕이는 의외로 달려드는 아저씨에게 순순히 밀려넘어졌어. 양손을 반강제로 맞잡은 채 눈을 마주보는 동안, 후붕이는 조금의 저항도 하지 않았어.

그렇게 1시간이 흐르고, 후순이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소리를 들었어. 불행을 떠넘기는 동안 양손을 쓰지 못하니 후순이에게 대신 받아달라고 말하였지.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대신 받은 후순이는 잠시 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했어.

"아빠.. 아빠 직장 동료.. 그 김.."

"아, 어떻게 됐대? 사업은 이제.."

"...이미 망한 사업에 더 이상 동참하기 싫다고.."

"어? 잠깐..!"

딸에게서 자신의 폰을 거의 빼앗듯이 받아간 그는 이미 끊긴 전화를 다시 걸기 시작했어. 하지만 수신차단이 되었다는 음성만 들려올 뿐이었지.

잘 아는 투자자, 같이 사업하던 사람들 모두.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어.

망연자실해하는 두 부녀를 뒤로 한 채 집에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그며, 후붕이는 중얼거렸어.

"그러게 스스로 해결하시라니까.."

사람이 아닌 대상에게도 불행을 옮길 수 있는지 확인한 후붕이는 두 부녀의 흐느끼는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행복해하고 있었어.



빌드업 끝. 

원래 제목을 불행을 받는 사람, 불행을 받은 사람, 불행을 주는 사람으로 하려다 그냥 제목 통일함.

다른거 쓰느라 너무 오랫만에 쓰게 된거 같긴 한데, 그런 만큼 좀 길게 썼음.

다음화는 되도록 빨리 쓰도록 노력..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