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가는 선생, 그리고 그를 파괴하고자 하는 소녀. 

비명이 귀를 울린다. 미약해져가는 저항이, 그리고 강제적으로 입 막힌 저항이 느껴진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적어도 소녀들에게는 그 날의 일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만큼은.. '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시간이었다. 
아코는 선생의 목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 목줄을 채우려 시도하며, 그녀가 겪어왔던 그 고통들과 그 지옥에서 자신을 꺼내주지 않은 선생에 대한 원망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당신은.. 날 도울 수 있었잖아.. 날 구해줄 수 있었잖아..! ' 


그는 어른이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이들과 다른 존재다. 

그에게 닥쳤던 운명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아코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코는 그럼에도 그가 소녀들을, 적어도 자신만큼은 구해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는... 너무도 힘들었단 말야.. '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녀의 과거와 미래가 모두 부서져가는 시간들이었다.

선생이란 존재는.. 그 자체로써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 아닌가?

그녀들을 구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아니던가?

그가 돌아온 이유가, 그가 구해내고자 하는 사람이

단 한명의 여자라는 것을 버틸 수가 없다. 

그녀보다 더 고통받는 자기 자신이, 다시 한 번 버려질 것이라는 그 사실을 버틸 수가 없다. 


아코의 행동은 잔혹했던 그녀의 인생을 보상받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녀의 과거는 이미 너무도 망가져버렸기에, 그녀는 버틸 수 없는 그 과거를 더욱 잔인한 현실로 덮어씌우는 것으로 그 과거를 잊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아코라면 결코 버틸 수 없었을 광경이었지만, 지금의 아코는 그것이 어쩌면 희망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그 광경을 버티지 못하는 소녀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 찰칵 '


불길한 쇳소리, 이 대피소에서 존재했던 모든 소녀들에겐 너무도 익숙했을 그 소리가 

아코의 머리 뒷쪽에서 들려왔다.

아코는 자신의 머리에 닿는 그 딱딱한 감각에 눈을 돌렸다가 자신을 겨눈 조그마한 소녀와 눈을 마주했던 것이다.


...


나츠메 이로하는 아마우 아코가 아니었다.

아코는 그녀에게 닥친 폭력과 공포에 순응하여 그녀의 주인의 개가 되는 쪽을 택했지만, 이로하는 그녀의 눈 앞에 닥친 그 권력의 폭력에 무릎 꿇을만큼 순종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겪었던 폭력의 역사가 너무 짧았기 때문일지도, 아니면 그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아코가 히나만큼의 공포를 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로하는 아코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잘 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와 그렇게 친했던 기억은 없었으나 만마전에서 여러 번 선도부와 부딪히며 아코와 설전한 적 있었던 그녀로써는 아코라는 그 소녀의 성격과 그 특성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하와 아코는 중간관리자라는 그 직책상 ( 그리고 그 직책을 특히 성가시게 생각했던 이로하의 특성상 )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있기도 했고 ...


이로하는 아코가 싫지 않았다. 항상 그녀들의 대화는 그 흐름이 맞지 않는, 갈등과 이론의 설전일뿐이었지만 그 당시에도 이로하는 그 억울했던 선도부의 상황에 ( 대부분은 마코토의 억지에 가까웠다 ) 바보같은 변명을 대어대며 그녀들의 이권을 챙기려는 그녀의 필사적인 시도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는.. 성실했다. 늘 불평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고, 세상을 혼자 억울한 것처럼 살아갔지만 아코는 그녀에게 닥친 일들을 해결해내며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여자 같았다. 

틀림없이 그녀는 스스로의 능력을 누군가에게 필요로 한다는 것,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다는 그 사실에 어떤 자기만족감을 느꼈던 것이리라. 

특히 그녀가 증명해야 하는 그 대상이 경외했던 소라사키 히나라면 더 할 나위 없었겠지. 


.. 그래, 그녀는 의존적이었지만.. 성실하고 다정했다. 


그랬기에 이로하는 그녀의 겨눠진 총구 끝에 위치한 아코의 눈동자를 읽으며, 그녀의 눈에서 원하는 대답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

'...이 사람은 선생님이잖아.. 내가.. 이 사람을 강간하려 한 건가? '

'내가.. 미쳤었나봐.. 사과해야겠어'


아코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녀에겐 옳은 선택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이로하는 아코의 눈동자에서 그녀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그녀의 본성이나 다름 없을 그 다정함과 성실함을 발휘해서 그녀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취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시도였다.

아코의 눈동자에서 이로하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증오와 원망, 현재 자신을 겨눈 이로하에 대한 분노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미친년이.. 무슨 짓을 하는거야..? ' 


아코는 생각하고 있었다. 죽여버리겠다고, 여왕인 그녀에게 저항한 이로하를 죽이겠다고. 

고통을 주리라, 내가 겪었고 참아왔던 그 이상의 고통을 주리라. 

나는 소라사키 히나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 무엇에도 기대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정을 주지 않으리라. 

내게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고통을 주겠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잔인한 수단을 동원해서 그녀의 몸과 마음을 부수겠다. 


'.. 상냥함과 애정 따위는.. 내 목을 조일 뿐이야 '


그것은 이 대피소에서 아코가 배운 유일한 것이었다.


...


그렇기에 이로하는 총을 쏘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더 견딜 수 없었던, 비틀리고 광기에 차 버린 그녀의 가엾은 운명을 구해내기 위해 이로하는 너무도 무겁게 느껴지는 그녀의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총을 발사했다. 

이로하의 총은 그다지 위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근거리에서 발사되었기에 그 총알은 아코의 머리를 통째로 날려버렸고 터져나간 아코의 머리통에서 튄 끈적거리는 피와 내장이, 아래에 깔린 선생에게 흘러내렸다. 

이로하 역시 피에 젖었다. 온 몸을 적신 아코의 혈흔에 붉게 젖은 이로하는 그녀의 몸을 적신 그녀의 생명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녀의 안식을 바랬다. 


"..선생님.."


선생은 이 상황에 어떤 감상도 없어보였다. 옷이 찢어지고, 다리가 부러진 채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안면엔 공허와 절망만이 느껴진다. 

이로하는 이 모든 상황에 답답함을 느꼈다. 


이로하는 몸을 돌려 바닥에 떨어진 그의 물건을 주웠다. 

그리고 지금도 절망을 곱씹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그녀가 결코하고 싶지 않지만 마땅히 해야만 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 선생님.. 돌아가세요.. "


그녀는 선생의 손에 어른의 카드를 쥐어주려 하였지만, 선생은 이로하의 말에 반응하고 있지 않아서 이로하는 그의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그의 앞에 조용히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이다.


" 죄송합니다 "


90도의 깍듯한 인사였다. 모두가 선생에게 하길 원했고, 진작에 했어야 했을 - 어쩌면 더 이상은 선생에겐 아무 의미도 없을 말이었다.


".. 아코가.. 치나츠를 죽일 줄은 몰랐어요. "


...


"..모든것에.. 정말 죄송합니다. "


선생은 그녀의 사과에 눈을 돌려 이로하를 바라보았다. 아직 선생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이로하는 선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다. 

어찌됐던 그녀의 사과는 너무도 뒤늦은 것이었기에 이로하는 선생에게 고통스러운 그 말을 끝마쳐야만 했다. 


".. 이 곳을 떠나서.. 이 곳을... 저희를 .. 잊어버리세요.. 저희는.. "


...


"..저희는.. 한 겨울밤의 악몽이었던 거에요. 선생님의 인생에 있어서.. 있어서는 안됐을.. 비극이고.. 고통이었던 거에요.. "


이로하는 중간중간 여러번 말을 끊었는데, 이는 이로하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이 북받쳤다. 알고 있었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힘들었다. 한 때는 사랑했던 그와의 모든 추억이, 그에게는 잊어야만 하는 악몽이며, 끔찍할뿐인 비극이 되어버렸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저희를 .. 잊어버리세요.. 저희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 끔찍한... 더러운... 그런 존재였던 거에요.. 선생님은.. 저희를 잊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주세요.. "


이로하의 말은 사과이면서 동시에 부탁이기도 했다. 이 키보토스에 남아있는 선생의 흔적은, 선생과 소녀 서로를 힘들게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비극의 상흔 일뿐이다. 

고통받아야 하는 것은.. 남아있는 소녀들이면 충분했다. 피해자인 선생은, 보상받지 못하는 이 운명을 잊어버리고 소녀들과의 추억을 "끔찍한 나날이었어" 라며 털어버리면 모든 것이 마무리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그녀의 부탁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선생은 그녀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이로하와 눈을 마주했다. 

이로하는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그 증오와 분노에 눈을 마주하기 힘들다 느꼈다. 

선생이 몸을 일으킨 것은,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키보토스의 모든 소녀들의 대변자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저 소녀에게 그의 진심을, 아주 오래전부터 말했어야만 하는 그의 마음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녀들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녀들에게 어떤 원망도, 어떤 분노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이 키보토스에서 그의 소녀인 치나츠를 구해내기 위해, 치나츠만큼을 데려나오기 위해 소녀들에게 마지 못해 한 맹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치나츠가 죽어버린 지금은, 그는 소녀들에 대한 그의 본심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이로하는 실제로는 이 키보토스의 소녀들의 대변자가 될 수는 없었겠으나 지금의 선생에게 그런 사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적어도 선생은, 그의 말을 토해내며 이 키보토스의 소녀들이 모두 그의 말을 들었으면 하고 바랬던 것이었다. 


"..너희들을... 너희들을... "


선생은 그 짧은 말을 하느라, 여러 번 혀를 삼켰다. 너무도 답답하고 가슴 깊은 곳에 묻혀있던 그 감정을 입 밖으로 토해내는것은 선생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막아버린 몸통안의 그 거대한 감정이, 그의 너무도 작은 성대를 타고나오는 것을 힘겨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너희를 증오한다.. 너희를... 원망해.. "


이 키보토스의 소녀들을 대신해 그의 증오를 받아야 하는 이로하는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그 고통을 받아들이면서도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이었다. 


".. 알고 있습니다. "


선생은 그의 마음에 묻혀있던 그 감정을 어렵게 쏟아낸 이 후,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이로하를 노려보았다. 아직 그의 증오가 다 쏟아내지지 못한 것처럼, 이 공간을 차지한 그 무거운 증오가 계속되길 원하는것처럼. 


"..선생님은.. 그러셔도 괜찮아요.. "


이로하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자신들은..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으니까. 


"... 그러니.. 탈출하세요... 저희를.. 잊어버려 주세요... "


이로하는 카드를 바라보았고 다시 한 번 대답없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리가 부러져 여기서 움직일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카드가 있다면 탈출하는것은 자유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로하는 선생님이 그녀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증오밖에 없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던 그녀는 더 이상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 즈음에서야 고개를 들고, 그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이로하는 아코의 뒤에서 그 카세트를 들으면서, 그 카세트에서 선생과 치나츠가 나눈 그 대화가 거짓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키보토스에 남아 있는 그녀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로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기다리는 그 멸망을 향해 이로하는 본인이 소녀들에게 '마지막 구원'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구원은 비록 거짓이고 남아있는 한 소녀에게는 절망으로 다가오겠지만.. 꽤 많은 수의 소녀들에게는 따뜻한 끝을 맞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힘겹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로하는 보물이라도 되는것처럼, 아코가 남기고 간 그 카세트와 테이프들을 챙겼다. 

선생님과 치나츠의 대화가 녹음 된, 아코의 그 녹음기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그 지하실을 빠져나가기 전 이로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은 스스로의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선생은 여전히 붉게 핏발 선 그 눈으로 이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로하는 그것이 선생님과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게 될 모습임을 알았고, 그 사실에 고통을 느끼며 몸을 돌려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


".. 누가 그런거야..? "


대피소의 외곽에 위치한 '전' 만마전의 인원들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 이로하가 오랫동안 지냈던 보금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마코토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그것이었다. 

명목상이긴 했지만, 이 곳에서 어머니와 같은 포지션 ( 웃긴 일이었다. 아무 의미도 없기도 했고 )을 가진 마코토였기에 이로하의 눈가에 깊게 난 그 멍 자국들은 마코토의 걱정을 자아내기엔 충분했으리라. 


"..넘어져서 그런거라니까요.. 넘어져서.. "


누가봐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어떻게 넘어졌길래 눈가에 멍이 들어? 그것도 저렇게 얻어맞은 흔적으로?


"..."


마코토는 바보였지만 그 정도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끝까지 이로하에게 추궁하지 않은 것은 이로하가 진실을 그다지 말하고 싶어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밥이나 먹어. 어딜 다녀온거야? "


마코토가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리킨다. 방에서 자고 있었던 것 같은 노란 머리의 소녀, 이부키가 음식 냄새에 조그맣게 얼굴을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이로하는 그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에 조금의 따뜻함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다. 소라사키 히나가 선생을 담당하는 당번 학생, 혹은 집행부의 인원들에게만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 그들을 특별 우대한다고.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선생을 담당하는 당번 학생은 딱히 우대받지 못했고, 그 자리가 편한 자리도 아니었을 뿐더러 집행부의 인원들의 편의를 봐주는 것은 소라사키 히나가 딱히 자비롭기 때문이 아닌, 그녀의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소녀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소녀들이 잘 모르는 가장 큰 사실은.. 

특별대우 받는 것은 그녀들이 아닌 '만마전'의 학생들이었는 점일 것이다. 


.. 이상한 일이었다. 이 대피소의 모든것을 차지한 히나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이 다른 인물이 아닌 그녀의 오랜 적수였던 '하누마 마코토'였다는 사실은. 


모든 권력자를 찾아 처형하고 있었던 히나의 행보를 보았을 때, 히나가 마코토를 찾는것은 만마전에게 있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밀레니엄의 멸망, 그리고 만마전이 중심이 되어 괴물들을 피해 달아났던 게헨나 대탈주. 그녀들을 받아주지 않으려고 국경을 봉쇄했던 트리니티와의 끔찍했던 그 국경전을 펼치며 그 당시 이미 충분히 약화되었던 만마전의 전력으로는 히나가 이끄는 군대를 결코 막아낼 수 없었음은 명확했고 당시의 이로하 역시 히나의 방문이 마코토에 대한 어떤 '처형'에 가까운 행위일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녀는 마코토를 따라 함께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마코토를 방문한 히나는 오히려 마코토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히누마 마코토. 뭘 원해? "


소라사키 히나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조그맣게 커피를 홀짝이는 그녀는 눈동자 깊은 곳부터 핏빛으로 빛나고 있어서, 그리고 온 몸에서 지워지지 않을 피 냄새를 흩뿌리고 있어서 그녀들이 기억하고 있을 정 많던 소라사키 히나가 아님을 알게 했다. 


그녀가 만마전, 그리고 그 수장인 히누마 마코토에게 자비를 베푼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선생을 사냥하던 그 당시, 마지막까지 선생을 사냥하라던 총학생회의 그 명령을 마지막까지 막아주려던것이 만마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마코토는 소라사키 히나의 그 질문에 꽤나 오래 고민했다. 그녀의 눈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그녀가 그 커피를 비워낼만한 시간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마코토가 낸 그 바보같은 부탁에, 만마전은 오늘까지 이 대피소에서 특별대우 받으며 이 곳에서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하는 식탁에 앉아 조그마한 빵 조각을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소라사키 히나가 죽어버린 지금, 그리고 선생님조차 떠나고 멸망만이 기다리는 지금 - 그러한 특별대우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겠지.. 

그렇기에 이로하는 식사하는 도중 뜬금없이 마코토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마코토, 혹시 만마전의 학생들을 모두 모은다면 이제 몇명이나 될까요? "


품 속에서 반찬을 투정하던 이부키를 달래가며 음식을 먹이고 있던 마코토는 그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이 이로하를 바라본다.


"... 뭐야.. 갑자기..? "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궁금해서"


마코토는 잠깐이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린다.


"....어.. 개는.. 죽었고.. 음.. 24명 정도 되려나..?"


피식 


이로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린다. 한 때는 게헨나에서 가장 큰 집단이었던 만마전이, 이제 고작 50명도 남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우습게 느껴졌다. 

대부분 만마전을 떠났다. 살기 위해서. 어쩌면 그녀들의 이익을 위하여.


마코토가 소라사키 히나의 배려에 요구한것은 단 한가지였다. 


자율권을 달라고. 우리는 구석에 처 박혀 대피소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싶다고, 결코 대피소에 참견하지 않고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을테니 조그마한 먹거리와 살기 위한 최소한의 편의, 그리고 서로가 간섭하지 않는 정도의 최소한의 자율권을 달라고. 

그 부탁은 모든 전권을 휘두르길 원했던 히나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음에도 히나는 마코토의 부탁을 들어주는 쪽을 택했다. 대피소의 외곽 중에서도 외곽, 낡고 썩어가는 창고와 같은 건물과 섹터를 나누어주며 그 곳에 만마전의 인원들이 대피할 수 있게, 그리고 그 곳에서 대피소와는 별개로 자립할 수 있게 히나는 마코토를 배려해주었던 것이었다. 


스스로 원한 유배나 다름없었을 마코토의 그 부탁은 효율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곳에서는 자립한다고 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없다. 

모든 자원은 히나와 그녀의 군대가 독점하고 있고, 그녀의 아래에서 일하는 것이 조그마한 콩고물이라도 더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만마전 소속의 대부분은 마코토의 만마전을 떠났다. 

그녀들은 모두 히나의 군대에서 일하면서 더 많은 기회와 더 많은 편의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마코토는 여전히 바보였다. 자신의 손에 있는 옵션의 기초적인 손익계산조차 해내지 못하는 바보.

남아 있는 만마전의 조그마한 인원들은 빛조차 잘 들지 않는 그 축축한 구석에 박혀서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나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로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이 마음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만마전이라는 그 소속에서 최소한의 따뜻함이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 

그녀들이 대피소의 일상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면서, 그 공간에서 흘러넘치는 핏빛 증오를 함께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마코토는 과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걸까? 대피소라는 그 가라앉은 공간에 희망이 아닌 절망과 냉정으로 함께 가라앉아 갈 것임을 알고 있었던 걸까?


"으엑..! "


입 안에 자신이 만든 국물 음식을 떠넣던 마코토가 음식을 뱉어낸다.


"..에....어? 이로하.. 하얀 가루는 다 설탕 아니었어..? "


" .. 바본가요... ? 마코토는..? "


이로하는 만담 같은 그녀의 일상에 감사했다. 


그 날 저녁. 모두가 잠든 시간. 이로하는 혼자 깨어 있었다.

몇 번을 그녀의 낡아 헤진 이불을 뒤척거리며 서성이던 이로하는 참지 못한 듯 일어나 다른 방으로 향한다. 


끼이익 - 


낡아 소리가 나는 문을 조용히 열고 그 곳에 잠든 소녀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이부키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인형을 안은 채였다. 

이로하는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조그마한 미소를 흘리면서 그녀의 노란빛 머리를 여러번 쓰다듬었다.


..죄 없는 그녀는.. 앞으로 있을 일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다.


하지만 이로하는 그녀가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정한 일조차 아니었다. 

심판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기를 원할 것이다. 


증오도.. 원망도 없는.. 모두가 원하는 공정한 심판. 


"..우웅..."


쓰다듬을 받던 이부키가 몸을 들썩인다.


"...이로하.. "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인형을 강하게 끌어안는다.


이로하는 마음이 아팠다.



///


선생은 눈을 떴다. 

자신이 얼마나 의식을 잃었었는지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부러진 자신의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온 몸을 적신 아코의 피가 그의 몸과 바닥따위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하실이고, 기본적으로 빛조차 잘 들지 않는곳이라 선생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할 수가 없어 선생은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 나는.. 또 실패했구나.. 


선생이 알 수 있었던것은, 부러져 덜렁거리며 붙어있는 그의 다리에서 -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던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온 그 모든 이유였던 소녀를 다시 한 번 잃었다.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막지 못했다. 

망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의 감정이 이번에도 그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그의 마음을 타들어가게 만드는 그 현실에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사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본인을 발견했다. 

그는 너무도 깊은 절망을 해보았기에, 두 번째의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눈 앞에 떨어진 그의 카드를 주워들었다. 


'.. 떠날까.. '


이로하의 말을 헛소리라도 되는것처럼 들었지만, 그녀의 말 중에 하나는 사실이었다. 

이 키보토스의 추억은 그에게 한 겨울밤의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치나츠가 없는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 그가 더 이상 머물 필요 따위는 없을 것이었다. 


선생은 눈을 감고 아직 흔들리는 그의 마음에 여러 번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디에서 실수한걸까..'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발걸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생은 눈을 감고 그에게 있었던 끔찍했던 핏빛 여정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중이었다.


선생은 조용한 곳에서 그의 생각을 정리하고 길었던 키보토스의 여정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을테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그의 생각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소음이었다. 그의 생각을 방해하는 머리 위를 울리는 시끄러운 저음이었다.  

지하실임에도 소리가 들려온다. 무엇인가 폭발하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뭔가를 치는 것 같은 소리.. 

선생은 본인의 몸이 뜨거운 것이, 다리가 부러져 본인의 몸에 발생한 잠깐의 이상현상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실제로 덥다. 주변의 온도가 이상할 정도로 높고 어느 새 끈적이는 땀이 흘러내려 몸을 적신 피를 녹이고 있었다. 


'... 무슨 일이... 일어난건가..? ' 


대피소는 원래 이토록 시끄러운 곳이 아니었다. 

죽음과 가까운 고요가 착 깔린 이 곳은 소녀들의 웃음도, 일상적인 대화도 냉정하고 날카로운 공기가 항상 막아버리고 있는 곳이었기에 아닌 때의 소음은 ( 이 곳을 꽤 익숙하다고 느꼈을 ) 선생에게도 어색한 것이었다. 

그리고 위쪽에서 벽을 타고 낮게 울리는 그 소리 사이에서 선생은 유난히 또렷한 그 소리를 선생은 들을 수 있었다.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였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는 선생이 위치한 그 불 켜진 지하실을 향해 바르게 커져오고 있었다.  

선생은 그 발자국 소리에 이상할 정도로 긴장이 되어 손에 든 그의 카드를 움켜쥐었다. 


발자국 소리가 선생이 위치한 그 방 앞에서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대기 후에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나는 소리, 그리고 선생을 발견한 그 인물이 숨이 막힌 듯 잠깐 멈춰서는 그 움직임. 

그 모든 과정의 끝에서 선생은 결코 잊지 못할 오랫만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으헤.. 정말 선생이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