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때문이라고!"


후순의 외침에 행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로 향했다.

술집 앞에서 남녀 한 쌍 사이에 오간 고성.

어떤 상황으로 보일 지는 너무 뻔했다.

나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후순에게 당황한 눈빛을 보냈다.


"왜,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아..."


내 물음에 후순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화를 낸 건지 뭔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때문이라고?

그녀가 애니과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게?

대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아니, 그, 미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더듬는 후순.


"하..."


나는 우선 붙잡힌 소매를 당겨 그녀의 손가락에서 빼냈다.

그리고 반대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일단 자리 좀 피하자."


"..."


손가락 두 마디는 남을 정도로 가녀린 손목을 잡아끌자, 그녀는 군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

향한 곳은 주점에서 조금 떨어진 으슥한 골목이었다.

여기라면 행인들의 시선도 없고, 같은 과 학생들에게 발각될 일도 없겠지.

손목을 놓아준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뭔 개소리야 그게?"


"..."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 박후순 네가 애니과에 들어온 게, 나 때문이라고?"


"응..."


"허, 대체 왜?"


"사실은 네가..."


"뭐, 대학교까지 따라와서 괴롭히시려고? 중학교 3년으로는 만족 못했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뭔데? 막상 만나보니까 사이즈 안 나와서 발뺌하는 거 아니고?"


"내 말 좀 들어..."


"하..."


후순의 비통한 시선에 나는 일단 감정을 추스르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너랑 같은 학교 같은 과인 건 진짜 그냥 우연이야. 나도 얼마나 놀랐는데."


"그래."


"그리고 애니과가 오타쿠 집합소인 건 나도 알아. 알고서 지원한 거야. 인서울 하려고 아무 과나 찌른 것도 아니고, 애니과를 가고 싶으니까 여기에 지원했어. 전적으로 내 의지야."


"...왜?"


결국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이유였다.

내가 아는 후순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인데, 어째서.


"나도 오타쿠니까."


"뭐?"


"나도 이제 너랑 똑같은 오타쿠라고. 아니, 지금 너는 아닐지도 모르지만...어쨌든."


머릿속이 조금씩 하얗게 물들었다.

이유를 들었지만 전혀 들은 기분이 아니다.

미안하지만 전혀 납득할 수 없다.


"...네가 왜, 오타쿠인데."


"어...일본 애니랑 만화, 게임, 버튜버를 좋아하니까?"


"아니, 그거 말고."


"뭐가?"


팍!

나는 후순의 얼굴 옆으로 손을 내질러, 뒤쪽의 벽을 후려쳤다.


"읏."


그녀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로맨스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지만 지금 내게는 그럴 의도 따위 전혀 없다.

그냥 화가 나서 벽을 때린 거다.


"아니..."


나는 후순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으르렁대듯 물었다.


"오타쿠 싫다고 그렇게 괴롭혀 대신 분이,"


후순이 불쑥 다가온 나를 겁먹은 시선으로 올려다 봤다.


"갑자기 자기도 오타쿠 됐습니다-하면 내가 대체 뭐라고 해야 되냐?"


그렇다.

후순이 중학교 시절 날 괴롭힌 이유는, 내가 그녀가 싫어할 만한 요소를 골고루 갖춰서였다.

키는 작고 살은 쪘고 노트에 미소녀나 그리고 있는 오타쿠였으니까.

그러니까 날 싫어했잖아.

너는 오타쿠를 싫어하잖아.

그런데...이제 와서 뭐라고?


"네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해."


후순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당연히 내가 화를 낼 줄 알고서 말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사실이니까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조금씩 서브컬쳐에 빠져들었고...지금은 이렇게 애니과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할 만큼 오타쿠야. 물론 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겠지만...미안해."


"후..."


나는 벽에서 손을 떼고 몸을 물렸다.

이 상황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지만, 화를 내는 것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숨을 진정시킨 나는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근데 그게 왜 나 때문이라는 건데."


"혹시 기억나? 후붕이 네가 나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줬던 선물."


"...여기서 그게 나온다고?"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는가.

내 인생의 원수에게 직접 손으로 건넨 선물이었으니까.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장 먼저 수정해야 할 어리석은 흑역사니까.

후순은 이어서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후붕이 네가 나한테 고백했을 때 줬던 만화책...그게 시작이었어."


"아."


나는 순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고백.

고백! 고백! 고백!

이런 씨발!

그 기억을 끄집어내다니, 무슨 정신고문이냐 이게.

싫어도 머릿속에서 그날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

방과 후,

빈 교실에 서 있는 두 사람.

허리를 90도 굽힌 채 만화책을 건네는 최악의 고백 퍼포먼스.

으아아아아아악!


"..."


내가 미간을 주무르며 침묵하자 후순이 걱정스레 물었다.


"미안...괜찮아?"


"나한테 왜 그러는데 진짜..."


그래, 놀랍게도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시절, 박후순에게 진심고백공격을 시도한 적이 있다.

빠른 중2병이 온 탓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최애 만화를 선물하는 고백은 당연하게도 실패했고, 그 대가는 끔찍했다.

박후순과, 그녀와 어울리는 남자 무리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으니까.

살찐 여드름 돼지 주제에 감히 일진 여자를 넘본 죄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렇게 내 중학교 3년은 시궁창이 되었다.


"후붕아..."


나는 다시 눈을 뜨고 후순에게 따지듯 물었다.


"혹시 우리가 다른 세계선에 살았나? 내가 알기로 그 책은 내 인생이 조져지는 도화선이었을 텐데?"


후순 역시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솔직히 그땐 그랬지...내 잘못의 시작이기도 하고."


"너 그때 만화책에 아무 관심도 없었잖아."


"맞아. 근데 후붕이 네가 다시 가져가지 않았던 것도 기억하니?"


"그럼 고백 거절했으니까 다시 토해내라고 하겠냐? 그 정도 찌질이는 아니었거든?"


"으, 응...아무튼 그래서 만화책은 내가 가지고 있었어."


"진작에 갖다 버린 줄 알았는데."


"당시엔 버려야지 하고 가방에 넣어뒀다가 깜빡해서, 집까지 그대로 들고 가버렸거든. 근데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이 아니어서 우선 책장에 꽂아뒀었어. 그리고 금세 잊혀져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 자리에 놔뒀던 거야."


"뭔...금붕어냐?"


"지금 농담한 거야?"


"욕 싫어서 순화해준 거니까 얘기나 계속해."


"그래..."


후순은 이제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한다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다시 그 책을 발견한 건 중학교를 졸업하고 책장을 바꾸면서였어. 그리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냥 심심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펼쳐봤어."


"봤다고...그걸?"


후순이 약간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빠져들었어."


"..."


의외로 취향에 맞았던 건가.

아니...그 책은 지금도 내 기준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명작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중2병이었지만, 좋아하는 여자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만은 진짜였으니까.

결코 허투루 고른 선물은 아니었다.


"그 책을 계기로 만화에 점점 더 빠져들고...취향이 넓어지면서 진로까지 결정할 정도로 진심이 되어버린 거야."


"...그랬냐."


여기까지 들으니 개연성 자체는 납득이 되었다.

3년이라는 시간. 내 손 밖에서 벌어진 일.

적어도 그녀가 오타쿠라는 사실과 원인 제공을 내가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물론 내 안의 원한과 증오심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리고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어."


후순이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듯.


"그 선물에 담겨 있던 마음."


"..."


"그 만화를 좋아하는 마음...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


"겨우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


"..."


후순의 목소리에 떨림이 섞였다.


"근데 그 소중한 마음에 나는...내가 저지른 짓은..."


"그만."


나는 후순의 말을 멈췄다.

더는 들어주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훌륭한 일이다.

스스로의 과오를 깨닫고 반성하는 일은 그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축복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런다고 내 잃어버린 중학교 시절이 돌아오는 건 아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역겨우니까, 내 앞에서 그러지 마라."


"...미안."


후순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야기는 끝났다.

나는 그녀에게서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네가 여기에 왜 있고, 어떤 마음인지는 알았어."


"응..."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닿지 않고 살아가는 것 뿐이야. 너도 나한테 마찬가지고."


"응..."


"어차피 군대 가면 2년은 없는 사람이야. 4년 중에 2년만 남처럼 살자. 어려운 거 아니잖아."


"..."


"알아들은 걸로 알고 가볼게."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더 이상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는가.

흑역사를 제 손으로 들춰봐야 멘탈만 갉아먹힐 뿐이다.

몸도 정신도 피곤하니 집 가서 잠이나 자자.



-



주말이 지나고 다시금 월요일이 찾아왔다.

좋든 싫든 학교는 가야 하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응?"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길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메세지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강의 전에 잠깐 볼 수 있을까? 나 후순이야.]


"..."


아침부터 기분 잡치게 만드는군.

나는 엄지를 꾹꾹 눌러 답장을 작성했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띠링!

띠링!

메세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돌아왔다.


[나 학생회라서 명부에서 확인했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


일진 출신이 특별전형에 학생회라니, 그것 참 아이러니한 포지션이다.

학생회가 누군지 전혀 몰랐던 나도 꽤 둔감하지만.


[서로 아는 체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냐?]


띠링!


[오늘 하루만. 부탁할게. 빈 강의실이 있으니까 남들 눈에 띄지도 않을 거야.]


[할 말 있으면 그냥 이걸로 얘기해]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래!]


"아니 대체 뭔...하..."


나는 미간을 주무르며 [알았다] 라는 답장을 보낸 뒤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버렸다.

시작부터 약속을 어기면 곤란한데...



-



1교시 강의 시작 30분 전.

학교에 도착한 나는 후순이 말한 강의실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 꺼진 강의실 안에 후순이 홀로 앉아 있었다.


"안녕, 왔구나."


나는 대답 없이 적당한 책상으로 향해 걸터앉았다.

강의실 안에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말해."


운을 떼자, 후순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저번에는 진심을 다 말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야, 너, 그거..."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뚜벅, 뚜벅, 뚜벅,

후순이 가방에서 꺼낸 것을 품에 안은 채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이거...돌려주고 싶어서."


앞에 선 그녀가 두 손으로 내민 것은-


"재밌었어. 후붕아."


만화책.

중학교 1학년 때 내가 고백하며 건넸던 그 책이 분명했다.

왜 알아보냐면, 책 모퉁이에 내가 직접 쓴 멘트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후순에게.'


"..."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 들자 후순이 미소를 띠었다.


"그동안 네 생각을 많이 했어."


"..."


"내 잘못을 깨닫기도 했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잖아."


어이...


"어떻게 하면 너에게 사죄할 수 있을까..."


야...


"어떻게 하면 속죄할 수 있을까..."


지금 무슨 소릴 하려는 거야.


"깨달았을 땐 이미 네 핸드폰 번호도 바뀌어 있었고, sns도 없어서 찾을 길이 없더라구."


그야 고등학교 때부터 완전한 새 출발을 위해서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냈으니까.

그런데 가장 끊어내고 싶었던 사람이 날 찾았다니, 웃기는 이야기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우연인지 신이 내려주신 기회인지 널 이렇게 다시 만났어."


"...그래서?"


"넌 우리가 서로 남처럼 지내자고 했지만...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무슨 기회?"


"이대로 평행선처럼 살아간다면 내가 너한테 준 상처를 아무것도 고칠 수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속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 안될까?"


"그러니까...뭘 어쩌라고."


"네 옆에 있게 해줘. 좀 더 가까이서...그러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후순은, 곧 내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90도.

데자뷰가 떠오르는 자세로.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친구가 될 수 없을까?"


-

시야가 멀어졌다.

소리가 멀어졌다.

현실감이 아득해졌다.


'친구'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자는 한때 좋아했던 사람.

사춘기의 첫사랑.

옆에 있고 싶었고, 같은 것을 나누고 싶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지금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나쁘지 않을 지도.'


이 손을 맞잡는다면,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시간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부터 잃어버린 만큼 더 쌓아나갈 수 있는 거겠지.

얼어붙었던 마음 한 구석에서 작은 온기가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어차피 잊고 싶었던 과거.

그것을 잊기만 한다면-


-잊어?-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잊어?-


그리고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기억들.

책상에 낙서를 당했던-

의자가 사라졌었던-

우유를 맞았던-

화장실에 갖혔던-

양동이로 물을 맞았던-

뒤뜰에서 구타를 당했던-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웃고 있었던-


짜악!


후순의 손을 쳐내며, 모든 감각이 돌아왔다.


"지랄 마."


"후붕아...?!"


후순이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 불꽃이 튀었다.

잊고 살았던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내가 사람이 아닌, 벌레처럼 느껴지는 그 감각.


"왜 이 개같은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하는 거야."


팍!

후순의 어깨를 밀쳤다.


"후, 후붕아...!"


"제발 꺼져달라니까, 왜 들러붙냐고!"


팍!


"꺄...!"


"속죄? 지랄하네!"


팍!

쿵!

밀쳐진 후순이 벽에 부딪혔다.


"왜 내가 네 기분이 나아지는데 협조해야 하는데?"


"후붕아, 이러지 마...!"


"피해자인 나는 혼자서 다 잊었는데! 왜 가해자인 네가 감상에 젖어서 개소리를 지껄이냐고!"


"흣...!"


겁에 질린 그녀를 윽박지르며, 얼굴 앞에 만화책을 들이댔다.


"씨발, 이딴 거 보여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 이거야말로 내가 제일 꼴도 보기 싫은 물건이야!"


그리고 그것을 펼쳐 두 손으로 잡았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 지 눈치챈 후순이 입가를 가렸다.


"이딴 거...!"


부욱-!

나는 펼친 만화책을 반으로 찢어버렸다.


"안돼...!"


후순이 나를 말리려 달려들었지만, 힘으로 날 어쩔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욱-! 부욱-! 부욱-!

나는 만화책을 알아볼 수 없는 종이 쪼가리가 될 때까지 찢어발겼다.


"아...! 아...!"


후순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마치 자신의 마음이 찢겨나가는 것처럼.


"이게 내 대답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잘게 찢겨진 종이 뭉치를 후순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촤-

그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흩날리는 종잇조각들을 바라봤다.


"하아...하아..."


털썩!

다리가 풀린 후순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윽고, 그녀의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종이 위로 떨어졌다.


"..."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후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에게 할 말이 없으니 이곳에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발걸음을 돌려 강의실을 나가려던 찰나,


"...해."


등 뒤에서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들려 왔다.


"미...미안해요...미안해요..."


"..."


쾅!

나는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 문을 닫았다.



***



원래 여기서 끗인데, 투표를 할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