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오랜 친구인 미진이가 잠시 시간이 되냐며 만나자는 연락을 전해왔다.

늦은 밤이긴 했지만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겠다, 나는 녀석이 기다리는 자그마한 포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수현아! 왔어?"


"오랜만이네."


그건 그렇고, 이 녀석 꽤 많이 야위었잖아?

뭐 최근 들려오는 말을 들어보니까 만화가인가? 뭔가로 데뷔했다던데.

역시 만화 작업이 고되긴 하나보다~ 하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응... 나도 오랜만이야."


"그나저나 너 왤케 말에 힘이 없냐?"

"이 기집애가... 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어? 그, 그게... 그냥 별 일은 아니고..."


"얘는... 내가 니랑 알고 지낸지가 몇년인데."

"어디보자, 초등학교부터해서 여중... 여고... 얀마 최소 12년인데!"

"무슨 일 있으면 말을 해! 애초에 그러려고 나 부른거 아니었어?"


"으... 으으.... 그러니까..."


녀석, 정곡을 찔렸나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녀석은 쭈볏쭈볏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지내는지는 알고 있지?"


"당연하지. 만화가 아니었나?"


"마, 맞아... 그럼 그... 봤어? 내 만화..."


"어... 그게... 아직 안 봤어."
"너도 알잖아? 내 성격. 괜히 알면 더 참견하고 싶어진다고 해야하나... 하하..."


"그, 그럼 다행이고..."


녀석은 마음이 심란했는지 괜스레 깡소주를 까서 냅다 한 잔 들이켰다.

물론 그 다음 바로 구역질을 했지만, 이건 별개의 이야기.


"그래서? 네 만화가 어떻게 됐는데?"


"아, 그러니까 그게... 내가 만화를 연재하는데..."
"그... 전개를 조금... 망쳤다고 해야하나."


"전개를 망쳤다고?"


"으응... 그래서 지금 평점도 떨어지고 독자 수도 줄어들었어..."

"뭐랄까 내 잘못이긴 한데... 괜히 심란해서..."


"뭘 어떻게 망쳤길래 그래?"
"누구 최애 죽이거나 뭐 그랬어? 그런게 아니고서야 왜..."


"남주 여친을 다른 남자와 이어줬어..."


"...뭐?"


순간 흐르는 정적.

이년이 지금 뭐라고 말하는지,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자, 잠깐... 잠깐잠깐잠깐.... 뭐라고?"


"들은 그대로야... 남주 여친을 다른 남자랑 이어줬는데 그게..."


"아니... 하.... 너 바보야? 그러니까 당연히 독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아, 아니 내 말도 한 번 들어봐...!! 나도 당연히 알지...!"
"하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단 말이야..."


"생각... 어떤 생각인데?"


"그... 너무 평범하게 순애 일직선이면 재미가 없으니까..."
"중간에 적당히 위기감을 주었다가 결말부에 다시 이어주려고 했달까..."


아이고 두야.

내가 지금 뭘 들은거람?


녀석, 꽤나 인기작가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 전개를 했다간 당연히 불판이 벌어질걸 예상하지 못한건가?

아니, 일반인인 나도 열받는 소리인데 하물며 독자들은...


"어... 어때...? 꽤 괜찮지 않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게!"
"NTR이잖아! 중간에 여주 빼앗기는거! 그걸 대체 누가 좋아한다고..."


"있, 있던데...?? 꽤 많았어 그리고..."

"픽시브나 만화 갤러리 같은데 댓글에서도 NTR 좋아한다는 말 많이 나왔고... 반응도 좋아서..."


"으이구... 넌 거기 말을 믿냐..."
"네가 연재하는 플랫폼을 생각해봐! 양지에 음지 취향을 섞으면 어떡하냐??"


"그, 그런가....?"


"그리고! 엔딩에서 이어진다니... 그건 픽시브인가 만화 갤러리인가 하는 그 사람들도 극혐할걸?"
"보통 그렇게 해어졌으면 다른 히로인을 붙여주거나 하지, 결말에서 그렇게 하면... 어우, 상상도 하기 싫네..."


"그 정도야...?"


"그 정도지."


"그... 그렇구나..."


녀석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야, 야... 그렇다고 울 필요까진 없지 않냐..."


"아니야... 결국엔 내 잘못인거잖아..."
"내가 바보같은 짓을 해서 그만... 독자들을 떠나가게 만들고..."


"뭐... 네 잘못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자책할 필요까진 없잖아?"

"기운 내 임마. 다 배우면서 크는거지.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이 어딨어?"


"그래도... 훌쩍...."


"뭐, 이참에 '소수 의견만이 의견은 아니다' 라는 교훈을 얻었으니, 쌤쌤이로 쳐!"


나는 조용히 녀석을 위로했다.

엄밀히 말하면 녀석의 잘못이 맞긴 하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문제를 굳이 더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달까.


"훌쩍... 아니, 다른 것 보다 그게 가장 신경쓰여..."


"양? '그게' 라니... 또 뭐가 있어?"


"그게... 내가 아직 무명일 시절부터 나를 응원해주던 팬이 있었는데... '리자' 라고..."
"그... NTR 전개를 한 이후로 그 사람이 좀처럼 보이질 않아... 댓글에서도... 하물며 트위터에서도..."
"만화 올렸다는 트윗에도 꼬박꼬박 댓글 달아주며 응원한다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보니까..."


"보니까?"


"훌쩍... 차단했더라 나를...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 사람 평소에 순애나 헤테로 관련 글 많이 올리고 좋아요 누른걸로 봐서..."


"...아마 그 전개 때문이겠네."

"그래도 뭐 어쩌겠냐. 떠나간 인연은 그만 잊어야지."


나는 나름대로 위로를 한다고 건낸 말이었는데.

그 녀석에게는 영 와닿지 않았나보다.


"흑.... 흐으윽....!"


"야, 야... 갑자기 또 왜 울고 그래...!"


"아, 아니... 훌쩍, 그러니까 뭔가 상황이 확 와닿아서..."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내 만화를 좋아하고 응원해주던 사람을 실망시킨거잖아... 작가 실격이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자책하지 말래두??"

"뭐, 까짓거 한 번 실수한거 다음부터 안 하면 되는거잖아! 뭐가 걱정이라고 그래!"


"아... 아니야... 훌쩍, 이미 다 퍼졌어... 온갖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 하고 있다고..."
"이젠 내 필명을 NTR의 대명사로 쓰더라... 앞으로 내 만화 다시는 안 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흐윽... 나 진짜 어떡해... 앞으로의 커리어도 망친거잖아... 내가 바보같은 짓을 해서..."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위로하는게 힘에 부쳐서도 있지만, 이 이상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앞으로 잘하면 되겠지... 잊고 철면피 깐 채 행동하면 되겠지... 정도.

하지만 녀석은 그 정도로 멘탈이 강한게 아니라서 문제였다.


"망했어... 훌쩍, 망했다고...."
"선작수도 줄어들고... 별점은 갈수록 나락이고..."
"처음이라 잘 해보고 싶었는데... 훌쩍... 모두를 만족시킬만할 만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여기서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고.

나는 녀석이 울다 지쳐 잠에 들 때 까지 조용히 옆을 지켰다.

이후 잠에 든 녀석을 자취방으로 대려와 눕혔다.


"...ZzZzzZzzZZ"


"...자나보네."


"...해요."


"...?"


"미안... 미안해요... 리자님..."

"제가 잘못했어요... 돌아와주세요 리자님..."


"..."


녀석도 참...

뭐랄까. 괜스레 마음이 심란하다고 해야하나.

나는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하아...."

"역시 내가 너무 심했나?'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트위터에 로그인 했다.

@LizaLiza0276... 녀석이 말하는 '리자 님' 의 아이디이자.


동시에 나의 아이디기도 한, 나의 부계정.


"조금 골려준다는게 그만 역린을 건드렸나보네..."

"그렇게 상처였나? 난 그냥 소소한 복수로 한 일인데 말이야. 푸훗..."


그래도, 꽤나 상처였다고? 나도.

특히나 남주... 내가 많이 응원했었는데 말이야.

뭐, 이번 기회에 제대로 깨달았기를 바래야지.


"...정답은 순애야. 미진아."


잠든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트위터의 차단을 해제하였다.


***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적어봄

'그 장르' 드리프트 하는 놈들은 다 팬을 꺾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