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말을 건네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변한 만큼 그녀도 뭔가 변했을까.

우리 둘의 입장은 과연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


전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대처를 하긴 뭘 해.

나는 그녀의 이름 석 자 뒤에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뇌가 정지된 것 마냥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기능이 다운된 것인가?

모르겠다...


"너 여기 입학했구나."


내가 사냥꾼과 마주친 사슴처럼 서 있자, 후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일단 모든 것을 멈추고 눈앞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너도?"


"응, 진짜 이런 우연이 다 있네."


"근데 혹시...다른 과인데 끼어 있는 거야?"


내가 아는 후순이 애니과에 지원했을리가 없다는 의심과,

차라리 다른 과여서 학교에서 마주칠 일이 없기를 바라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후순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부정했다.


"응? 아니? 애니과 맞는...아."


중간에 내 말에 섞인 의심을 파악했는지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재차 확인하는 심정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른 데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널 볼 줄은 몰랐다."


"아니...음...여기도 엄연히 대학 학과잖아...뭐 어때서."


후순이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물론 우리가 입학한 곳은 어둠의 비밀결사도 아니고 평범한 대학이 맞다.

근데,


"다른 데면 몰라도 애니과는...솔직히 오타쿠 집합소 맞잖아?"


"으..."


후순의 말문이 막혔다.

뭐, 아무렴 어떠랴. 그녀가 여기에 왜 있는지는 사실 별 중요하지 않다.

관심도 없고 말이다.

그냥 용건이나 빨리 끝내도록 하자.


"그래서 왜 불러 세운 거야? 우리가 반갑다고 인사할 사이는 아니잖아."


"아...그게...그러니까..."


후순이 뒷짐을 지었다, 발끝을 돌리거나 하며 뜸을 들였다.

그 태도에서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게 하나 있었다.

섣불리 꺼내기 힘든 주제.

서로가 새로운 무대의 출발점에 서 있는 지금 이 타이밍.

그 두 가지를 엮는다면...대충 답이 나온다.

그녀가 내게 직접적으로 할 말이 있다면 분명 그것뿐이리라.


"후..."


나는 깊은 심호흡으로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단숨에 적진 한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걱정 마. 옛날에 네가 나 괴롭힌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어?"


후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뭘 놀라는 걸까.

혹시 모를 화근을 미리 제거하러 온 것일 테면서.

애초에 그것 말고는 그녀와 나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다.


"그니까 너가...어...학폭 가해자인거, 대학에서 소문날 일 없을 거라고."


"그게 무슨-"


"그렇게 말하려면 나도 괴롭힘 당한 찐따라고 밝혀야 되잖아. 그러고 싶진 않아서."


"김후붕 너 지금...아, 아니...그게 아니라...아..."


후순은 혼란스러운 듯 입술을 깨문 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그래, 그렇게 보일 수 있겠구나...이해했어..."


뭐지, 저 태도는.

마치 내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안부를 물을 리가 없잖는가.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은 오로지 부정적인 것 뿐이다.

그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새긴 나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왜 그게 아닌 것 같지?


"네 말 뜻 이해했어 김후붕...이해했는데...일단 그건 아니야."


"그럼 내가 소문내도 상관없다는 소리?"


후순이 숨을 삼켰다.

아니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어쨌든 그녀는 내가 입을 닫아주는 편이 대학 생활에 희망적일 테니까.

내 말을 잠자코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로 하자. 서로 남남으로 지내는 편이 너도 편하잖아?"


후순은 잠시 시선을 내리 깔았다.

짧은 침묵 후-그녀의 대답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막진 않을게."


"응?"


"내가 옛날에 한 짓으로 학교에서 나 매장시키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후순은 그렇게 말하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기싸움을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어깨와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악에 받혀서 자포자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와 싸우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너한텐 그럴 권리가 있어."


"...진심으로?"


"응."


뭐지?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잘못이라니...그럼 박후순 네가 뭐...반성...이라도 한다는 말이야?"


"그걸 내 입으로 말하면 신빙성이 너무 없을 것 같고...아무튼 너한테 내 이미지 지켜달라, 그런 이야기 하려고 불러 세운 건 아니야."


"허..."


아무래도 저 말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는 당장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했다.


"알았어...그래서 하려던 말이 뭔데?"


"아-그러니까, 일단은, 음..."


후순의 시선이 내 발끝에서 몸을 지나 얼굴까지 올라왔다.

과거와는 달리, 내 쪽이 머리 하나 반 정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중학생 시절에서 전혀 자라지 않은 후순.

그에 비해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 콩나물처럼 키가 자랐다.

힘든 시기를 겪고 운동에 열중하기 시작해서였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키에 후순의 지분이 꽤나 큰 셈이다.


"마, 많이 달라졌다, 너."


"그렇긴 하지."


"내 기억으론 나보다 작았었는데...키도 엄청 커졌고...살도 다 빠졌네."


"..."


"몸도 엄청 좋아진 것 같은데, 졸업하고 운동 시작했어?"


"어, 맞아."


그야 그 시절에 땅딸보 돼지라서 괴롭힘 당했으니까.

내가 어떤 심정으로 나 자신을 바꾸려고 했는지, 그녀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못 알아볼 뻔했어. 눈을 의심했다니까."


후순이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썩 유쾌하진 않은 태도였지만 속에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지금의 내 모습에서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놀라움? 아니면 약간의 두려움?

적어도 이제 날 깔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 한 사람을 지정해서 바뀐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면 그 대상은 박후순이 맞을 터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봐라, 난 다 이겨냈다고.


"예전이랑 많이 다르긴 하지. 너도 그런 것 같은데."


"내가?"


"옛날엔 양아치 같았는데...화장도 이상하게 하고...근데 지금은 그런 게 별로 없다고 해야 하나."


그 말에 후순은 옆 머리를 쓸어 넘기며 멋쩍게 웃었다.


"아...하하...좀 수수해졌나? 물론 그때 화장을 드럽게 못하긴 했는데.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취향이 좀-"


"관심 없으니까 그런 얘기는 됐고, 할 말은 그게 다야?"


"아, 아니! 큼, 그러니까."


후순이 목을 가다듬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잘...지내나 봐?"


"그럭저럭."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되게 보기 좋아졌다. 다행이야."


"왜, 내가 자살이라도 한 줄 알았어?"


뻔뻔스러운 말에 가시 돋친 반응을 하자 후순이 두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진심으로!"


"..."


"그리고...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뭐지 이 흐름은.

익숙한 클리셰적인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건 설마...


"후붕아."


후순이 머리를 숙이는 순간, 기시감은 현실이 되었다.


"옛날 일은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진짜냐...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일이 현실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박후순의 정중한 사과라니.

취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박후순이 내게 정수리를 내비치고 있다니.


"이런다고 내가 한 짓과 네가 입은 상처가 사라질 일은 없겠지만,"


그녀가 고개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어."


-

짧은 침묵이 흐르고,


"...고개 들어."


내 대답에 후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해왔던 상황이기에, 의외로 대답은 쉬웠다.

나는 반드시 이렇게 할 거라고 다짐했으니까.


"박후순...네 말은 잘 알았어."


후순이 침을 꼴깍 삼켰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기억할게. 근데 사과라는 게 꼭 상대가 받아줘야 되는 건 아니잖아?"


"응..."


"난 널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까, 네가 사과했다고 그냥 알고만 있을게. 그래도 참 다행이네, 잘못을 깨달아서."


"응..."


후순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졌다.


"용건은 그게 다지? 간다."


주저없이 몸을 돌려 지하철역으로 향하려던 찰나에,

턱-

손목이 뭔가에 걸렸다.

아니, 소매가 뒤에서 당겨진 거였다.


"...아직 뭐 남았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상기된 후순의 얼굴이 보였다.

취기인지, 분노인지, 뭣인지 모를 이상한 표정이었다.


"이, 있잖아, 아까 내가 왜 애니과에 있냐고 물었지?"


"엉? 그게 뭐?"


"사, 사실...그거......때문이..."


후순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서 알아듣지 못한 탓에,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라고? 똑바로 말해줄래?"


습-

후순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너 때문이라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



던파하느라 많이 못씀...다음화에 끗내겟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