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이라고요?"


  "말기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얀붕이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고 순간 환청을 들은 건가 의심했다.

그러나 진료가 마치고 나서도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소견서를 읽었지만

암 말기라는 글자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솔직히 수술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살 가망이 너무 낮습니다.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하나 둘씩 맴돌다 사라진다.

서서히 정신이 현실로 돌아온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수술을 받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이쪽에 한번 들러 보십시오.

    적어도 가시기 전까지는 아프지 않도록 도와줄 겁니다.


이미 다 너덜거리는 소견서. 얀붕이는 허탈하게 소견서를 놓아버리고는

의사가 전해준 명함을 꺼냈다. 심리안정 치료를 주 업무로 하는 병원의 한 의사였다.


얀붕이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의 번호를 눌렀다.

긴 듯 짧은 듯 한 착신음이 울렸다.

마치 얀붕이의 끊어질 듯 말 듯 한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착신음이 멈췄다. 얀붕이는 말라붙은 입술로 말했다.


  "xx병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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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흥~ 흥~"


얀순이는 기분이 좋았다. 

간신히 노력해서 세운 회사가 드디어 상장까지 받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급속도로 성장하는 회사를 보면 지난 날의 고생들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얀붕이가 좀 늦네."


그녀가 일생의 꿈이라고 할 수 있었던 회사를 마침내 차릴 수 있었던 건

뒤에서 항상 그녀를 든든하게 떠받쳐주던 얀붕이의 존재가 컸다.

얀순이는 그런 얀붕이가 항상 고마웠고, 또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얀붕이를 기다리면서 얀붕이와 함께했던 나날들을 회상했다.


  [사랑한다, 김얀순! 나랑 사귀어 줘!]


  [...그래♥]


풋풋했던 첫 고백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김 얀붕! 인사드립니다.]


  [...얀붕아, 여기 군대 아니야. 내가 다 부끄럽다.]


함께 대기업에 취칙한 걸 기뻐했던 나날들


  [나... 사실은 한번 창업해보는게 꿈이었어... 이제는 힘들겠지? 대기업까지 왔으니까.]


  [아니야,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시작할 수 있어.]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직은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지만... 나한테는 너무 먼 것 같아...]


  [...]


'-다음날'


  [얀붕아, 이게... 뭐야?]


  [좀 부족하겠지만 함께 조금만 더 모으면 될 것 같지 않아? 나도 '얀순이 사장님' 하고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야, 얀붕아...]


같이 회사 설립의 꿈을 키워나갔던 나날들


  [얀순이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저도 부장 자리 하나 주십니까?]


  [아니? 안 줄건데? 너한테 줄 부장 자리는 없어!]


  [아니 왜요, 사장님!]


  [그게, 부장이 되면... 나랑은 떨어져서 일해야 하잖아... 대신에 비서 자리는 안될까?]


  [채, 책임 지고 수행하겠습니다! 사장님이 가는 곳이라면 침대 안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야, 얀붕아! 여기 회사, 회사! 조금만 작게!]


첫 회사 설립 날 서로 장난을 치며 떠들었던 날들


그리고 드디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얀순이에게 있어서 얀붕이와 함께한 삶은 행복밖에는 없었다.


  -삑삑삑삑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나고 그렇게 기다리던 얀붕이가 들어왔다.

얀붕이의 손에는 비싼 한우가 들려 있었다.


  "어서 와~ 얀붕아! 어, 이건 뭐야? 한우?"


  "건강 검진이 좀 늦어져서 말이야. 미안하기도 하고 우리 얀순이 생각나기도 해서 하나 사왔어."


  "음... 혹시 뭐 잘못한 거 아니야? 나중에 들통나면 월급 깎아버린다!"


  "그, 그런거 아냐. 그리고 월급은 좀 봐주세요, 사장님... 귀여운 아내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먹여야 한단 말이에요."


  "그래? 그러면 보너스도 줘야겠는 걸? 자, 빨리 손 씻고 와. 저녁 먹어야지~"


얀순이는 의심을 거두고 얀붕이의 짐을 받아 정리했다.

사실 이건 얀붕 부부의 일상이었다.

서로 장난치고, 서로 놀려먹고 그러면서 사랑을 확인했다.


  "얀붕아, 오늘은 어때? 야근 수당 챙겨줄 수 있는데..."


식사를 하던 얀붕이는 순간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글쎄요... 저는 야근 수당보다 사장님의 웃는 얼굴이 더 보고 싶은 걸요? 먼저 씻고 준비하고 있어. 곧 들어갈게."


그렇게 얀붕이와 얀순이의 사랑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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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는 오늘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얀순이는 이미 출근하고 없다.

얀붕이도 회사의 비서 업무를 맡고는 있지만 출근이 강제된 건 아니었다.

아니 , 오히려 얀붕이가 회사에 가는 일이 더 드물었다.

얀붕이가 회사에 함께 있으면 서로 알콩달콩하느라 일의 진척이 잘 되지 않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참을 어두운 표정으로 길을 걷던 얀붕이가 멈춰선 곳은 한 병원 앞이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병원. 얀붕이는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병원에 들어섰다.


  "들어오세요. 어제 지은 약은 괜찮던가요?"

 

  "일단 별다른 부작용은 없었습니다"


얀붕이를 맞이한 건 한 여의사였다. 

진단이나 수술을 잘 하는 건 아니지만, 고통 관련 처방만큼은 기가막히게 잘 한다고

의사들 사이에서는 꽤나 소문이 도는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일반 환자들에게는 별 특별한 게 없는 의사이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죽을 듯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되어 주는 사람이다.


그런 의사 앞에 자기가 지금 와 있다는 사실이

얀붕이에게는 굉장히 착잡하게 느껴졌다.


  "몸 상태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이쪽으로 와 주세요."


  "진통제 처방인데 상태 확인도 필요한가요?"


  "저희는 환자분들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만큼 잘못 사용하면 위험한 약을 처방해야 할 경우도 있으니 먼저는 환자분 상태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얀붕이도 최후의 수단이라는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약물을 함부로 처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의사의 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20분 뒤.


  "앞으로 3일 정도는 이 처방전의 약을 드시면 괜찮을 겁니다. 혹시라도 너무 고통스러우시면 이쪽 걸 하나 드시고 하루 내에는 우리 병원을 꼭 찾아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격렬한 운동은 삼가주세요. 어제 뭘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러시면 정말 큰일날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얀순이와 관계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얀붕이는 한번 더 땅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남은 시간만큼이라도 얀순이를 최대한 기쁘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얀순이와 조금 더 오랜 시간동안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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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순이는 최근 얀붕이의 행동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얀붕이가 이전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근들어 아침에 늦잠을 자느라 아침밥이 차려져 있지 않을 때도 있고,

집안일도 조금 소홀해진 듯 하다.

한번은 빨래가 되어있지 않은 적도 있고, 화장실 청소가 안되어 있는가 하면,

장 봐오는 걸 깜빡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집에 있는 동안 집안일 말고 뭘 하기에...'


생각해보면 한우를 사왔던 그 날부터 모습이 좀 이상했다.

그날 이후로 침대에 누웠다 하면 피곤하다고 금새 잠이 들고,

얀순이가 신호를 보내도 자꾸 말을 돌리면서 대답을 피했다.


  '그때는 그냥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혹시 진짜로 아내인 자기에게 숨기는 게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얀붕이가 자기에게 숨길 만한 일이 뭐가 있는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얀붕이는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문제 일으킬 만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돈 관련 문제일까? 애초에 이 회사는 얀붕이와 얀순이가 반반 모아 설립한 회사다.

말로는 해고한다, 월급 줄인다 농담을 하지만, 만약 얀붕이가 돈 관련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얀순이는 당장이라도 회사를 팔 생각도 있었다. 그걸 모를 얀붕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얀순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여러 사이트에 올려보았다.

혹시나 경험 많은 사람들이라면 뭔가 뾰족한 답변을 해주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사이트에 올라온 대답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바람?]


  [도박 아닐까요?]


  [또 어디서 술먹다가 사고친거. 이거 빼박임.]


  [아 한우 사먹을 돈 있으면 그걸로 라오어2 사라고 ㄹㅇ]


자신과 남편을 모르는 사람들이 써놓은 거니까 이런 답변이 나오는 거라며 한숨을 쉬려던 찰나,

하나의 댓글이 얀순이의 눈에 들어왔다.


  [궁금하시면 한번 몰래 확인해보시는 건 어때요?]


얀순이는 순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아내에게 보여주지 못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따라가서 확인해본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얀순이는 얀붕이를 따라나설 계획을 세웠다.


다음 날.


얀순이는 회사에 가는 척 하고 몰래 집 근처에 잠복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얀붕이가 집에서 나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가리는 코트를 입은 게, 꼭 뭔가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저렇게 하고 어딜 나가는 거지?'


얀순이는 몰래 얀붕이의 뒤를 밟았다

기나긴 얀붕이의 발걸음이 멈춘 건 한 병원 앞이었다.

병원 간판에는 심리치료를 주로 한다고 쓰여 있었다.


  '병원? 어디 아픈 데가 있나?'


얀순이는 얀붕이가 나올 때까지 병원 앞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얀붕이가 나오자마자 병원으로 들어갔다.


  "네, 들어오세요."


진료를 받겠다고 하고 진료실로 들어간 얀순이.

얀순이의 눈 앞에는 상당히 예쁘장하게 생긴 여의사가 보였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그, 회사 때문에 고민이 좀 있어서요..."


이 병원은 집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병원이다.

근처 병원에 가지 않고 굳이 여기까지 오는 이유는

뭔가 진료의 차별성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한 얀순이었지만

정작 진료가 끝날 때까지 특별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감사해요. 누구랑 상담하니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것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음에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죠. 아, 그런데요... 여기서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나가는 걸 봤는데 혹시 그 사람도 무슨 고민이 있었나요?"


얀순이는 지나가는 말이라는 듯이 은근슬쩍 얀붕이에 대해 물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환자에 대한 개인 정보는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네요, 실례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오도록 할게요."


  "안녕히 가세요."


여의사는 얀순이의 질문에도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얀순이는 여의사에게 얀붕이에 관해 물었을 때,

여의사의 얼굴에 아주 잠깐 곤란한 표정이 스쳐지나간 걸 놓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얀순이는 퇴근한 척 귀가를 했다.


  "얀순아, 어서와~. 밥은 다 차려 놨어. 오늘은 얀순이가 좋아하는 초밥이야!"


뭔가 조금 이상했다. 요며칠 집안일도 대충 하던 사람이 갑자기 손이 많이 가는 초밥을 했다고?

물론 초밥은 얀순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이긴 하지만,

집안일까지 하는 얀붕이에게 더 짐을 실어주기 싫어서 차라리 사먹자고 했던 음식이었다.


  "왜 그래, 얀순아. 회사에서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얀붕아, 너 요즘 숨기는 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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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붕아, 너 요즘 숨기는 거 있지?"


얀순이의 한마디에 얀붕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혹시나 들킨 건 아닐까? 벌써 알아차린 건 아닐까?

얀붕이는 최대한 태연하게 얀순이에게 대답했다.


  "아, 아냐. 숨기는 거 없어. 내가 얀순이한테 숨길 게 뭐가 있겠어~"


 "그래? 어디 아픈 건 아니고?"


한번 더 가슴이 내려앉았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그래도 여기서 인정할 수는 없었다.

얀순이가 이 사실을 알면 당장에 울고불고 난리를 칠 테니까.


그것 뿐이라면 다행이지만, 당장에 회사를 팔아버리고

비싼 수술비를 내 가면서 얀붕이를 암 치료실에 강제로 보내버릴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안된다. 이 회사가 어떻게 세운 회사인데.

얀순이의 평생의 꿈이자 노력의 산물이나 다름없는데.

가망도 없는 자신한테 모두 허비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괜찮아, 멀쩡해. 봐봐, 튼튼하다니까?"


얀붕이는 팔을 굽혀서 알통을 과시하듯 내밀었다.

한동안 운동은 못했지만, 그래도 이전에 운동한 게 있어서인지 볼만한 수준은 되었다.

얀붕이의 말을 들은 얀순이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말하고 얀순이는 식사를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얀붕이는 얀순이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얀붕 부부의 저녁은 이렇게 침묵 속에 흘러갔다.



3일 뒤.


  "환자분. 아무래도 환자 분 아내분이 이곳을 아신 것 같아요."


  "네? 얀순이가요?"


여의사는 얀붕이에게 3일 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여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얀붕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그때 얀순이가 그렇게 집요하게 물어봤구나. 그래도 아직 들키진 않았으니 다행이다.'


  "그러면, 검사를 시작할까요? 아직 비상약은 남아 있죠?"


  "다행히도 아직 써야 되는 상황은 없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처방한대로 잘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아내랑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요. 이쪽으로 가면 되죠?"


검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복잡해졌지만 30분 내로 나올 수 있었다.

얀순이한테 들킬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들어가는 것도, 나서는 것도 굉장히 조심을 하고 있다.

약이 잘 듣는지 아직 아픔은 느껴본 적이 없다. 그것만큼은 얀붕이에게 있어 매우 다행이었다.


  '얀순아, 내가 어떻게든 조금만이라도 더 버텨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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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순이의 의혹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아픈 데가 없다고?

그러면 도대체 왜 그 의사를 만나러 가는 거지?


얀순이가 봐도 얀붕이의 정신은 매우 정상이었다.

심리상담 같은 게 필요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고민거리가 있다면 먼저는 아내인 자신에게 말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으니 얀순이에게는 점점 더 얀붕이에 관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러고보면 그 의사가 좀 예쁘기는 했어. ...그래도 얀붕이가 설마. 눈 딱 감고 물어봐? 하지만 물어봐도 아니라고 할 테고...'


고민과 의심은 늘어갔지만, 의혹을 풀 데는 어디에도 없는 상황 속에서,

얀붕이에 관한 굳은 신념은 점점 흔들려 갔다.


  '언젠가, 언젠가 한번 확실하게 확인해야 돼. 하지만 진짜로... 얀붕이가 배신했을 리는...'


그러던 어느 날 밤, 얀순이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얀붕이 때문에 잠에서 깼다.


  "으음... 무슨 일이야, 얀붕아?"


  "어? 어어, 아무것도 아냐. 잠깐 목이 말라서 말이야."


  "뭐 먹었어? 아까 입을 좀 우물우물 하던데."


  "아... 오늘 좀 피곤한 것 같아서 일어난 김에 비타민 좀 먹었어. 빨리 자자. 내일 또 일해야 하잖아."


  "일...? 그래, 얀붕아. 혹시 내일 하루는 회사에 같이 좀 나와줄 수 있어? 오랜만에 얀붕이랑 같이 회사에 하루종일 있고 싶다."


  "...내일?"


  "응, 내일."


  "어... 얀순아, 정말 미안해. 내일은 내가 거래처 사장님이랑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대신에 오후부터는 회사에 갈게. 그래도 돼?"


  "...약속을 조금 미루면 안돼?"


  "미안해... 대신에 모레는 하루 종일 회사에 같이 있어 줄게."


  "...그래, 알았어. 피곤할 텐데 어서 자자."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던 얀순이가

문득 얀붕이가 뭔가를 먹고 있는 걸 보았다.


  "얀붕아, 나 몰래 뭐 먹어?"


  "응? 아, 오랜만에 사탕이 땡겨서 말이야."


  "그거 진짜 사탕 맞아? 어디 한번 보자."


  "아이, 진짜. 사탕이래두."


얀순이는 얀붕이와 약간의 실갱이를 한 끝에,

결국 사탕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고 출근 길에 올라야 했다.


스마트폰을 꺼내려고 잠바 주머니를 뒤지는 순간,

얀순이는 뭔가 따끔한 게 자기 손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얀붕이와 다투던 중, 뭔가 주머니에 들어간 듯 했다.


  "아얏! ...이게 뭐야?"


얀순이가 손에 든 건, '실데나필'이라고 적혀 있는 약의 포장지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약인가 해서 얀순이는 인터넷에 실데나필을 검색했다.

그리고, 손에 힘이 풀려서 맥없이 스마트폰을 놓쳤다.



  [실데나필: 1998년 화이자 제약에서 개발하여 비아그라라는 상표명으로 출시된 남성의 발기부전 치료제... ]


설마, 믿었던 얀붕이가...

아니,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 요즘 정력이 달려서 하나 먹은 것일수도 있지 않은가.

최근에 관게를 갖지 않는 것도 그게 원인이고.

얀순이는 그렇게 자기를 다독이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회사에 도착한 얀순이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켰다.

어제 몰래 코트에 달아놓은 위치추적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집에서 움직임이 없었다. 

얀순이는 이대로 그 병원 위치만큼은 스마트폰에서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1시간 즈음 지났을까. 코트의 위치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직 의심하기는 이르다. 혹시 그 코트를 입고 거래처에 가는 걸지도 모르니까.

너무도 이상하고, 패션 센스도 구리다고 소리를 들을 만한 코트이지만,

얀붕이에게는 너무도 마음에 드는 코트였을지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또 30분 뒤.

얀순이는 병원 위치에 정확히 멈춘 빨간 점을 보았다. 보고야 말았다.

현실을 보고 나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뇌가 생각을 멈춰버린 걸까.


얀순이는 좀비같이 스마트폰 버튼을 눌러 위치추적 화면을 나갔다.

그리고 이어폰을 꽂고, 코트에 설치해놓은 도청기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아무래도 코트를 벗고 있을 테니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얀순이는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


  [지직... 엉덩이... 지지직... 넣을까요? 지직... 아파요.]


그 여의사의 목소리다. 

이쁘장하게 생겼다 했더니 그 모습으로 남의 남편에게 꼬리친 게 분명하다.

얀순이는 멍한 표정으로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지직... 잠깐... 지지직... 가도 괜찮겠습니까? 지직... 버티기 힘드네... ]


이번에는 얀붕이의 목소리였다. 얀붕이는 뭐가 그리 힘든지 다급한 목소리였다.

거기까지 들은 얀순이는 스마트폰을 사장실 바닥에 던졌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스마트폰은 깨지는 일 없이 멀쩡히 바닥을 휘둥글었다.

그게 더 얀순이의 화를 돋구었다.


  "얀붕아... 네가 나한테 이런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얀순이는 남은 시간동안 얀붕이에게로의 처절한 복수를 계획했다.

얀순이는 사내 인터폰을 들고 버튼을 몇개 눌렀다.


  "어, 금 실장. 난데. 잠깐 이야기할 게 있으니 사장실로 좀 와줘. 그래."


전화를 끊은 얀순이의 표정은 그 무엇보다 차가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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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엉덩이에 먼저 놓을까요? 이건 좀 아파요."


  "그 전에 잠깐 화장실 좀 가도 괜찮겠습니까? 슬슬 버티기 힘드네요."


  "물론이죠, 갔다 오세요."


얀붕이는 한동안 참고 있던 화장실에 간신히 갈 수 있었다.

그만큼 오늘 검사는 더 정밀했고, 더 오래 걸렸다.


검사가 끝나고.


  "얀붕 씨. 이번 약은 저번보다 좀 많아요."


  "선생님. 그, 혹시 이번에도 비아그라가 들어가 있습니까?"


  "비아그라가 아니라 실데나필이라니까요! 물론 발기부전 치료제로 쓰이는 건 맞지만, 원래는 심장병 치료제라고요! 얀붕 씨에게 꼭 필요한 약이니까 반드시 드셔야 해요."


여의사는 그렇게 못을 박고는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껏 봐온 환자분들 중에서 얀붕 씨만큼 처방을 잘 따라 주시는 분은 잘 없었어요. 그럼에도 그 약을 먹어야 했다는 건..."


  "선생님, 굳이 말 안 흐리셔도 됩니다. 저도 제 몸 상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니까요."


  "얀붕 씨는 오래 버틴 편이에요. 거기에 그런 몸 상태라면 누워서 하루종일 잠만 자고 있어도 모자랄 판인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으시니."


  "가기 전에 아내에게 뭐 하나라도 더 남겨주고 가고 싶으니까요. 사실 저보다는 혼자 남게 될 아내가 더 걱정입니다."


  "참, 얀붕 씨와 같은 남편을 둔 아내분은 정말 행복했겠어요..."


  "얀순이는 강인한 여자니까요. 분명 제가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얀붕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진료를 이어나갔다.


  "이제는 진짜, 약을 빠짐없이 챙겨 드셔야 해요. 원래라면 링겔까지 꽂고 정확한 시간에 약을 투여하는 게 좋지만..."


  "선생님,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닙니까. 저는 가더라도 집 안에 누워 아내 곁에서 가고 싶습니다. 가기 전에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고 가야죠. 혼수상태로 살아있어 봐야 아내에게 고통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렇네요. 꼭 약 챙겨드세요. 다음 예약일까지 건강하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얀붕이는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급하게 거래처 사장과의 만남을 위해 움직였다.

차마 얀순이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에,

얀붕이는 어제 비상약을 먹고 나서 곧바로 거래처 사장님과 약속을 잡은 것이다.


얀붕이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거래처 사장님과의 인사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오후 2시


거래처와의 계약을 성공적으로 따낸 뒤, 얀붕이는 또 급하게 회사로 향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회사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치 달까지조차 한 걸음에 달려갈 것 같은 기분으로 회사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사장님. 이거 한번 드셔보시죠."


  "으음~ 맛있네. 역시 금 실장은 안목이 있다니깐~"


  "하하하, 그런 저를 뽑으신 사장님 안목이 더 대단한걸요."


얀붕이는 순간 눈앞에 들어온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은 자기 아내인 얀순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건, 회계부 금태양 실장.


둘은 얀붕이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는,

나란히 회사를 향해 들어갔다.

얀붕이는 영문을 모른 채 둘을 따라 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느때처럼 사장실로 들어갔다.


  "왔어? 대충 여기 일좀 정리해 줘. 난 잠깐 다른 일이 있어서."


얀순이는 오늘따라 더 차가웠다. 오자마자 일부터 시키고,

얀붕이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싫다는 듯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마치 과시하듯 금 실장의 자리로 향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얀붕이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얀순이가 배신한건가. 그냥 나의 착각인가.

내가 뭔가 잘못했나. 화가 날 만한 일이 있던 건가...


그리고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내가 못해줬구나..."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얀붕이로써는 역부족이었던 거다.

암과 싸워 가며 최선을 다했지만,

얀순이에게는 평소보다 부족한 자신에게 서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금껏 방치한 자신의 잘못이 제일 크다.


  "내가, 미안해..."


얀붕이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얀붕이는 묵묵히 얀순이가 넘겨주고 간 일을 처리했다.


퇴근 시간이 될 무렵.


  "저, 얀순 사장님. 이제 집에 가셔야죠."


  "먼저 가서 밥 차려놓고 있어. 난 아직 마무리할 게 남았으니까."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매몰차게 쏘아붙이고는 다시 자기 작업에 열중했다.

얀붕이는 어쩔 수 없이 밥을 차리기 위해 먼저 귀가했다.

이번 저녁은 특히나 얀순이가 좋아하는 잡채와 사골국을 요리해야 했기에, 먼저 올 수밖에 없었다.

얀붕이가 언제 갈지 모르니, 최대한 길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해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저녁.


얀순이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집에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얀붕이는 약을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가지 않는 저녁밥을 억지로 밀어넣었다.

얀순이가 없으니 훨씬 빠르게 저녁 시간이 끝났지만,

얀붕이에게는 지금껏 살아왔던 그 어느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침대 안에 혼자 누워서, 얀붕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곰곰히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난 더 이상 얀순이 곁에 있어주지 못해. 차라리 이렇게 금 실장과 같이 있는 게 얀순이한테도 더 좋을 거야. 나 때문에 크게 상처받을 일도 없으니까 말이야.'


금 실장은 외모는 저렇게 보여도 꽤나 성실하고 일 잘하는 청년이다. 

얀붕이도 금 실장이라면 안심하고 얀순이를 맡길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이 걱정해야 할 일들은 없다.


얀붕이는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긴 잠을 자게 된다.

이제 와서 한두 시간 덜 잔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얀붕이는 종이를 한장 꺼내어 얀순이에게 편지를 썼다.


사실 얀순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컴퓨터에 다 적어 두었지만,

마지막으로 근 한달간 자기로 인해 마음고생 했을 얀순이에게

손 편지 한장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추웠다. 얀순이가 없는 방이 이렇게 추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머지않아 가게 될 그곳도, 얀순이가 없으니 춥지는 않을까.

그래도 괜찮다. 얀순이만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면. 나 하나정도 추워도.


다음 날이 되었지만, 얀순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얀붕이는 옷을 깔끔하게 입고 회사로 향했다.

오늘만큼은 얀순이와 하루종일 회사에 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얀붕 씨 왔어요?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것 좀 해 놓으세요."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자리를 비운 채, 어딘가로 나섰다.

그럼에도 얀붕이는 열심히 얀순이가 시킨 일을 진행했다.

그게 자신이 마지막으로 얀순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몇 시간이 지나도, 얀순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얀붕이는 쉬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 하루는 회사에 남아서 얀순이의 일을 도와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못해준 만큼, 더 해주고 싶었다.


얀붕이는 화장실 갈 때와 식사 때, 그리고 약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사장실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끔 얀순이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흘끔흘끔 보러 오기도 했지만,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하면 휭하고 가버렸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얀붕이는 과연 얀순이에게 같이 돌아가자고 말을 해도 될지 망설였다.

그러나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얀순이었다.


  "반성했어?"


얀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당해보니까 어때? 고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


얀순이가 없는 하루는 힘들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얀붕이가 얀순이와 함께 있어줄 수는 없었다.

얀붕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니다,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얀순이는 그 말만 남기고 차에 탔다. 얀붕이도 함께 차에 탔다.

물론 운전은 얀붕이의 몫이었다.


얀붕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운전했다.

눈 앞은 자꾸 흐려져 왔고, 악셀을 밟는 것 조차 힘이 들었지만,

뒤에는 얀순이가 타고 있다. 어떤 실수 하나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얀붕이의 차가 집에 도착했다.

둘은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당연히 집에는 어떤 음식도 차려져 있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휑한 저녁이었다.


둘은 음식도 없는 식탁에 서로 마주 앉았다.

얀붕이는 힘없는 눈으로 얀순이를 쳐다보았다.

얀순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새기기 위해서다.


  "어제... 금 실장이랑... 재미있었어?"


  "그래. 엄청나게 재미있었어. 어찌나 재미있는지 밤이 새는지도 모르겠더라고?"


얀순이는 비꼬듯 대답했다.

이쯤 되면 얀붕이가 화를 내든지, 반성을 하든지, 뭔가 반응을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얀붕이의 반응은 얀순이의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 다행이네, 그거..."


얀순이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했다. 얀붕이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황한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화를 냈다.


  "뭐야, 너는! 바람을 피워놓고, 바람을 맞아놓고 드는 생각이 고작 그거야? 넌 내 기분을 알기나 해?"


그러나 얀붕이는 별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지나, 얀붕이는 느릿하게 말했다.


  "바람...? 바람, 좋지... 나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얀순이는 더욱 어이가 없어서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얀붕이는 그런 얀순이를 신경쓰지도 않은 채, 밖으로 향했다.

얀순이는 혼자 주방에 앉아 화를 식혔다.


  "아니, 무슨 대답이 저래? 진짜 정신이라도 나간 거... 어?"


땅만 쳐다보면서 분을 삭이던 얀순이는 문득 얀붕이가 앉았던 의자 밑에서 뭔가를 하나 발견했다.


  "이건, 약봉지? 무슨 약이 이렇게 많이 들었지?"


그건 족히 열개는 되어 보이는 약이 들어 있는, '저녁'이라고 쓰여진 약봉지였다.


-따르르르릉


얀순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얀순이의 집전화가 울렸다.

얀순이는 급하게 수화기를 들고 물었다.


  "여보세요?"


  [아, 얀붕 씨. 전화를 안 받아서 무슨 일 난 줄 알았어요. 약은 제때 드셨죠?]


수화기 너머에서는 저번에 상담했던 여의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얀순이는 약이라는 말에 놀라서 수화기에 대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얀붕이가 약이라니요!"


 [어... 여자목소리...? 혹시 얀순 씨이신가요?]


  "네, 제가 얀순이에요. 얀붕이가 약을 먹는다니 그게 무슨소리죠?"


얀순이는 다급하게 질문했다.


  [아... 얀붕 씨가 결국 이야기하지 않으셨나 보네요... 제가 말씀드려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얀붕 씨, 암 말기에요. 벌써 시한부 판정 받은지 한달 되었고, 약을 제때 안 드시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에요. 괜찮으시면 아내분이 좀 챙겨주실 수 있나요?]


털컥


[어? 얀순 씨? 얀순 씨! 무슨 일이에요! 얀순...]


수화기가 힘없이 떨어졌다.

얀순이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깨달아보니 얀순이는 한손에 약봉지를 꾹 잡은 채, 하염없이 밖을 달리고 있었다.

방향도, 목적지도 모른 채 말이다.


하염없이 달리던 얀순이는, 어느새 근처 공원에 도착했다.

얀붕이와 함께 자주 데이트를 하던 공원이었다.

거기에는 얀붕이가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얀붕아, 암 말기라며? 왜 이야기 안 했어?"


  "..."


  "얀붕아, 약 안먹으면 위험한 상태라며. 약 먹고 삘리 집에 가자"


  "..."


  "얀붕아, 오해해서 미안했어. 나는 네가 바람핀 줄로만 알고... 내가 다 미안해..."


  "..."


  "얀붕아, 사실은 거짓말이지...? 괜찮은, 거지...?"


  "..."


  "얀붕아아... 뭐라도 대답 좀 해봐아...."


얀순이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얀붕이는 항상 얀순이가 우는 걸 그냥 놔두지 않았다.

언제나 와서 위로해주고, 언제나 와서 달래주었다.

항상. 언제나. 그런데, 지금은...


얀순이는 이미 심장이 멈춰버린 얀붕이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눈물이 말라버릴 때까지 울었지만, 얀붕이가 얀순이를 달래주는 일은 없었다.

한참을 울던 얀순이는, 문득 얀붕이의 손에 잡힌 종이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버킷리스트'라고 적힌 글씨와 함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얀순이에게 한우 선물해주기 O]

[얀순이에게 옷 한벌 선물해주기 O]

[얀순이에게 초밥 만들어주기 O]


그리고 목록 제일 마지막 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루종일 얀순이화 함께 회사에 있어 주기 O]

[얀순이와 함께 드라이브 하기 O]

[얀순이의 새로운 사랑 앞에서 슬며시 빠져 주기 O]

[얀순이에게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기 X]

[얀순아, 미안해. 사랑해.]


마지막으로 갈 수록 동그라미의 모양은 이상해졌다.

그리고 남은 힘을 모두 들여 마지막 문장을 썼는지,

글씨는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삐뚤빼뚤했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얀붕아아아아아!"


그 이후 얀순이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는 모른다.

아마 웬 여자가 공원에서 흐느끼고 있다는 민원을 받은 경찰이 도와줬겠지.

얀붕이의 시신은 장례를 위해 구급차가 실어갔다.


그날 이후 3일간, 얀순이는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밥도 먹기 싫었고, 물조차도 마시기 싫었다.

그저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나날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얀붕이가 남긴 손편지를 읽고 나니 더 그랬다.

그렇게 잔소리를 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아 세웠는데도,

얀붕이가 남긴 말은 그동안의 사과와 응원 뿐이었다.

앞으로 금 실장이랑 행복하게 살라는 말과 함께.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뭘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가서 얀붕이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얀붕이는 천국에 있을 거고, 난 지옥에 갈 거니까.


그렇게 3일 째 되던 날. 울릴 리 없는 얀순이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띵동


그러나 얀순이는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은 계속 울렸다.

얀순이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현관 문을 열었다.

웬 배달원이 자신의 집 초인종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배달원은 집에서 나온 얀순이를 보고 밝게 웃었다.


  "아 역시 계시네요. 김얀순 씨 맞으시죠? 죽 배달왔습니다."


  "...시킨 적 없는데요."


  "네, 그래요? 김얀붕이라는 분이 여기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시던데... 이봐요, 여기 김얀순 씨 이름이 쓰여진 편지도 있잖아요."


  "얀붕...이요? 언제요? 언제 부탁한거죠?"


  "아따, 성질 급하시네~ 5일 전쯤인가? 부탁하고 가셨어요. 밥도 안먹을 것 같은데, 꼭 좀 5일 후에 배달 부탁한다고. 자기가 책임질 테니 초인종 마구 누르라고 하던데요."


얀순이는 잽싸게 배달원의 손에서 얀붕이가 보낸 죽과 편지를 낚아챘다.

배달원은 그걸 보면서 너털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부부끼리는 닮는다고 하더니만, 그런 막무가내인 점도 닮나 보네요? 남편분도 그런 배달은 안받는다고 거절을 해도 끝까지 부탁하더니만. 아무튼 전 배달했으니 이만 갑니다요."


배달원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얀순이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얀붕이가 보낸 편지를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다는 사과

자신이 없더라도 힘내서 이겨낼 수 있다는 격려

밥은 꼭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걱정

그리고 수 차례 반복한 사랑한다는 말.


얀순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어디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문득 배달원의 말이 생각났다.

부부는 닮는다고? 그러면 나와 얀붕이는 부부가 아닐 거다.

사실 천생연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얀붕이가 나에게 맞춰주고 살았던 거다.


얀순이는 그날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얀순이는 옷을 차려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건강검진을 꼭 받아보라는 얀붕이의 편지 내용 때문이었다.


  "임신... 이요?"


  "벌써 한달은 된 걸로 보이는데요? 짚이는 게 없으신가요?"


얀순이는 얀붕이와의 마지막 하룻밤을 생각했다.

그 날은 얀붕이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날이었다.

아마 마지막에 얀순이에게 뭐라도 하나 더 남겨주고 싶어서였겠지.


얀순이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틀어 얀붕이가 남겨놓은 사랑의 말들을 쉼없이 읽었다.

편지에 나와 있는 폴더명 덕에, 얀순이는 얀붕이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랐는지 넘치게 알 수 있었다.


  "바보야... 왜 나 같은 여자를 만나가지고..."


얀순이의 혼잣말은 공기에 녹아 소리없이 사라졌다.


5일째 되는 날.


얀순이는 얀붕이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회사에 나갔다.

얀붕이를 잃은 슬픔을 일로써 잊으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4일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일거리가 쌓여 있는 것은 당연했다.


  "어어... 생각보다 일이 적은데...?"


얀순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사원이 대답했다.


  "그... 5일 전쯤 얀붕 비서님이 다 하고 가셨습니다... 이왕 할 거 3일 치 정도는 미리 해두고 좀 길게 휴가를 내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 바보."


얀붕이를 잊기 위해서 회사에 왔는데, 얀붕이를 전혀 잊을 수가 없었다.

얀순이가 가는 어느 곳마다 얀붕이가 미리 도와주고 있었다.


얀순이가 얀붕이를 추억하는 사이, 부장 한 명이 얀순이를 찾았다.


  "사장님, 6일 전에 딴 거래처 계약 서류를 들고 왔습니다."


  "6일 전에... 계약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얀붕이가 거래처에 다녀와야 한다 했었다.

그때는 그냥 불륜을 위한 변명인 줄 알았는데...

멍청했던 자신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지금까지도 삶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 것은,

얀붕이가 남긴 한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얀순이 네가 대신 해 줘.]

  [얀순이를 아껴주고, 얀순이를 지켜주고, 얀순이를 돌봐 줘.]

  [나는 항상 얀순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날 이후 얀순이는 모든 일에 열심히 살았다.

세계적인 수준으로 회사를 성장시키고,

아들 얀돌이도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녀의 회사는 특히나 깨끗한 기업으로 유명했다.

얀붕이가 세워 준 회사인 만큼 항상 깨끗하게 운영하고 싶다는

얀순이의 소원이자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살아가면서 많은 굴곡을 만났고,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때마다 얀붕이를 생각하면서 이겨냈다.


이윽고, 그녀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그녀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얀붕아, 이제는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니?'


그러자 마치 대답이 들려오는 듯 했다.


  [아니, 나는 절대 너를 용서할 수 없어.]


  '역시 그렇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당연한 거 아니야? 난 한 번도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

  [뭐해? 빨리 따라와. 오랜만에 데이트하러 가야지!]


...그래, 얀붕이는 이런 사람이었지.

...항상 내 모든걸 받아주던 사람.

...언제나 나만 걱정해주던 사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기다려, 지금 갈게!'


얀순이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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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해보니 라이브 제외라는 기능이 있는 걸 발견하고 긁어왔습니다.

이건 제가 쓴 글중에서도 아끼는 글이라서 남겨놓고 싶었습니다.

완장 처음해봐서 사실 잘 모릅니다. 많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