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주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한 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녀.

   

“싫어... 오지 마...”

   

누구인지 얼굴을 보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지만,

돌아오는 건 울먹이는 목소리.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그 소녀뿐이었으니까.

   

나는 소녀의 말을 무시한 채,

천천히 소녀에게로 다가섰다.

   

“오지, 말라니까!”

   

아.

   

소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검은 공간에

하얗게 금이 갔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계.

   

소녀는 그 광경을 보더니,

자신이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나에게 미안한 듯, 애절하게 이야기했다.

   

“부탁이야... 제발 부탁이니까, 오지 말아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소녀의 말을 어기고 싶지는 않았다.

천천히 붕괴를 시작하는 검은 세계 속에서,

나는 멍하니 소녀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

   

   

   

여긴, 어딜까.

하얀 천장 아래, 밝은 조명 안에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어났구나!”

   

문득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한 소녀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으응... 누구, 세요?”

   

나는 끊기는 목소리로 소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뭐야~ 나 기억 못하는 거야? 참, 너무해!”

   

분위기를 보니 나랑 아는 사이인 건 확실하지만,

어째서 기억을 못한다고 하는데도 이렇게 기뻐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일어난 게 그만큼 기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랑 도대체 어떤 사이였던 거지?

   

“여자친구 얼굴도 기억 못하면 어떡해~ 아니, 이제 ‘여보~’라고 불러야지?”

   

뭐? 나한테, 아내가 있었다고?

난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에 나는 갈팡질팡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이리저리 돌아가는 내 눈을 보았는지,

소녀가 상냥한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참, 기억상실증이니까 많이 혼란스럽겠구나. 이따가 차근차근 말해줄 테니까, 어서 밥부터 먹자.”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침대 위에서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소녀가 떠먹여주는 죽을 한 숟갈씩 입에 넣으면서

이야기해준 내용을 차근차근 정리해보니 이러했다.

   

먼저 우리는 결혼한 신혼부부.

신혼여행을 하던 도중 사고가 나서,

휴양을 위해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으나,

실제 내 주민등록증과 혼인신고서,

그리고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참 너도, 사진 찍는 걸 그렇게 싫어해서 말이야. 좀 웃는 얼굴로 같이 찍어주면 어디 덧나?”

   

“아니, 그렇게 말해도...”

   

사진 속의 내 모습은 항상 뚱한 표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중학교 다닐 시절부터 오랜 기간동안 찍힌 사진들이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소녀가 싫어서 표정이 나쁘다기보단, 사진 찍히는 게 꽤나 싫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야.

   

“그것보다, 너 어른이었어?”

   

“아, 또 작다고 놀린다. 내가 그건 금지라고 몇 번이나- 아, 기억이 안 나겠구나...”

   

갑자기 말을 하던 소녀가 갑자기 서글픈 듯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당황한 나는 소녀를 달래주려고 했으나,

그것보다 소녀가 먼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뭐, 어때! 지금부터 다시 추억을 쌓으면 되지. 먼저는, 작다고 놀리지 말 것! 그리고, 사진찍을 때 항상 웃으며 찍을 것. 알았지?”

   

“어, 응... 알겠어.”

   

“자, 그럼. 말 나온 김에 한 컷!”

   

소녀는 스마트폰을 셀카모드로 변경하고는,

나를 끌어안고 갑자기 사진을 찍었다.

   

찰칵.

   

“...풉! 이게 뭐야. 웃음이 너무 어색하잖아!”

   

“아니, 갑자기 찍었잖아.”

   

“그래도 말이야.”

   

소녀는 핸드폰에 찍힌 내 웃음을 보면서 큭큭거리며 웃었다.

확실히 좀 어설픈 웃음이어서 우스꽝스럽기는 했다.

   

“줘 봐. 삭제하고 다시 찍게.”

   

“싫어! 이건 내 컬렉션이야. 네가 달라 해도 안 줘!”

   

“...내 사진인데?”

   

“그래도 안 돼.”

   

소녀는 완강하게 스마트폰을 건네주기를 거부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큭큭대고 웃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앗! 셔터찬스!”

   

찰칵.

   

“그래... 마음껏 찍어라...”

   

“아싸, 허락받았다! 이따 화장실에서도 욕실에서도 찍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건 범죄야!”

   

“삐삐-! 부부끼리는 범죄가 아닙니다.”

   

소녀는 즐거운 듯 웃으면서 내 옆에 누워 사진을 찍기도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안일을 하기도 했다.

가끔씩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내 수발을 도와주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항상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었다.

   

“...귀찮지 않아?”

   

“귀찮아서 더 좋아!”

   

“...그래.”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대답이었지만,

자기가 좋다는 데 어쩌겠는가.

나는 그저 좋은 아내를 만났다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이제 슬슬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우리 말고 사람이 없네? 얼마나 외딴 곳인 거야?”

   

“응? 내가 말 안했었나? 여기는 무인도야. 의사 선생님이 사람이랑 접촉이 없는 게 가장 좋다고 해서 내가 데리고 왔어.”

   

“그러면 생필품은?”

   

“1년치 정도는 올 때 같이 갖고 왔으니까. 앞으로 1년 정도는 걱정 없을 걸?”

   

“...돈 많이 들지 않았어?”

   

“그게, 어떤 고마운 재단에서 지원을 해 줘서 말이야. 큰 돈 안 들이고 올 수 있었어.”

   

요즘 재단은 그런 것까지 지원해 주던가.

내 상식과는 조금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나는 기억상실증이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그런 재단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날 치료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발품을 판 것 같으니까.

   

“뭐야뭐야~ 달링 쪽에서 먼저 끌어안아주다니! 이건 무슨 신호야?”

   

“아니, 그냥 고마워서... 고생 많이 한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내에게 더 큰 포상을 요구합니다!”

   

“네네, 오늘은 뭘 해 드릴까요.”

   

“물론 생선구이! 장어 잡아다 줘!”

   

“...노력해 볼게.”

   

물론 장어를 잡는 데는 성공했고,

그날 밤 제대로 잠을 못 잔 것은 둘 만의 비밀이다.

...어차피 둘 밖에 없지만.

   

   

   

세 달째.

   

“오늘은 산에 더 깊이 들어가 볼까? 이제 몸 상태도 완전 멀쩡해!”

   

“안 돼! 산은 위험하다니까!”

   

“아니, 그래도. 근 세 달간 아무 문제 없었잖아.”

   

“원래 사고는 아차 할 때 일어나는 거야. 자칫 잘못하다가 사고나면? 달링은 연락 수단도 없잖아.”

   

“아, 그렇네... 그럼 다음으로 미루지, 뭐.”

   

“다음에도 허락 안합니다! 아내를 걱정시키는 남편은 남편 실격이에요!”

   

“그래, 그래. 알았어. 안 가면 되잖아.”

   

극구 말리는 아내의 모습에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못미더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산속 탐색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웬만해서 다른 부탁은 다 들어주지만,

어째 산에 깊게 들어가는 건 매번 말린다.

아무래도 한 번 사고 났던 경험이 있어서일까.

   

“아, 그러고 보면 말이야.”

   

“응? 뭔데, 뭔데?”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그렇게 부주의한 사람이었어? 신혼여행인 만큼 더 조심했을 것 같은데.”

   

“음... 나갈 때마다 어디 한두 군데 다쳐서 오긴 했었지. 매번 내가 다친 곳 치료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신용이 없을 만 하구나.”

   

그렇게 덜렁대며 살았었나.

글쎄,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확인할 방법은 없다.

뭐, 아내가 나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괜찮아! 지금은 잘 하고 있어!”

   

“그래. 지금은 네가 덜렁대니까, 나라도 똑바로 해야지. 안 그래?”

   

“으으... 인정하기 싫어...”

   

한 번씩 설탕과 소금을 헷갈리지 않나,

흰 빨래 안에 검은 빨래를 섞어놓지를 않나.

이런 아내한테 걱정 받았다니,

도대체 얼마나 무신경하게 살았던 걸까.

   

“하아... 일기라도 좀 써두지.”

   

“뭐야, 옛날에 어땠는지 그렇게 궁금해?”

   

“모르는 것보다야 나을 것 같아서.”

   

“뭘 또 그래. 난 지금의 달링이 더 좋은데? 사진 찍을 때도 웃으면서 찍고, 꼼꼼하고 말이야. 그거면 되지 않아?”

   

“그렇기는 해.”

   

그래, 과거는 과거. 지금은 지금이다.

내 과거의 모습이야, 앞으로도 알 기회가 있을 거고.

그것보다는, 오늘 점심밥부터 고민하는 게 더 나으려나.

   

“맞다, 오늘 점심은 뭐야?”

   

“오늘 점심? 후후후, 기대하시라! 오늘 점심은 무려, 주먹밥입니다!”

   

“또 소금이랑 설탕 헷갈리지 않았지?”

   

“아, 또 그런다. 그때 딱 한 번 실수한 거라니까!”

   

“그러면 오늘이 두 번째가 되겠네?”

   

“아, 진짜~ 오늘 점심밥 안 준다?”

   

나는 아내랑 장난스럽게 티격태격 하면서,

산 속을 내려갔다.

   

   

여섯 달 째 되는 날.

   

나는 하늘을 보면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내는 빨래를 널다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나한테 다가왔다.

   

“왜, 달링?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내일은 비가 오지 않을까?”

   

그 말에 아내는 깜짝 놀라서 나한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

   

“아,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거야. 비 오기 전에 나는 냄새가 있잖아. 그런 냄새가 좀 난다고 해야 하나? 기분 탓일지도 몰라.”

   

“에이, 뭐야. 놀라게 하지 마. 빨래 널었던 거 다시 걷어야 되나 생각했잖아.”

   

아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날이 이렇게 맑은데, 비가 온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요즘 일을 열심히 했더니, 게으름을 좀 피우고 싶어졌나 보다.

그야, 비가 오면 그날은 거의 쉬는 날이니까.

   

...쓸데없는 하늘 감상은 관두고, 아내의 일이나 도와야겠다. 

   

   

다음 날 새벽.

   

투둑투둑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밖에서 활동하기 그른 모양이다.

오래간만의 휴일에, 나는 느긋하게 빈둥거리기로 했다.

   

“여보, 일어나 봐. 밖에 비 온다.”

   

“으응... 비...?”

   

아내는 졸린 눈으로 바깥을 보더니,

내가 한 말을 뒤늦게 이해한 듯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비... 오고 있는 거야?”

   

“그래. 내가 어제 비 올 것 같다고 했잖아. 오늘은 좀 더 쉬자. 어차피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왜 그리 축 처진 표정이야?”

   

“...빨래, 널어뒀었잖아.”

   

“...맞다! 내가 금방 가서 걷어올게, 기다리고 있어!”

   

“...아냐, 내가 갔다 올게. 달링은 쉬고 있어.”

   

아내는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은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

   

하기사, 했던 일을 또 해야 한다니, 그만큼 지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방금 전에는 아내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타이밍을 놓쳤지만,

빨래를 가져오면, 적어도 세탁은 내가 해 줘야겠다.

   

   

“자, 다 걷어 왔습니다!”

   

“흠뻑 젖었잖아! 빨리 옷부터 갈아입어!”

   

귀찮았던 모양인지 우산도 안 쓰고 나갔다 왔나 보다.

아내는 아침에 약간 저혈압이니까.

아무래도 터덜터덜 걸어나갔다가 비를 맞고 잠이 깬 듯하다.

   

“아, 빨래 늘어났어...”

   

“빨래는 내가 해줄 테니까. 목욕부터 하고 나와.”

   

“정말? 신난다! 오늘은 같이 들어가자!”

   

“꼭 언제는 같이 안 들어간 것처럼 말한다? 알았으니까 빨리 욕실부터 가자.”

   

예정에는 없었지만, 아침부터 느긋하게 목욕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물론 오늘은 아내가 평소보다 더욱 들러붙겠지만,

그래도 뭐. 행복하니까.

   

그렇게 또 우리들의 평범하고도 행복한 하루가 지나간다.

   

아홉 달 째.

   

그날 이후. 다음 날 비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 맞추는 건,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물론 매일 하는 건 아니고, 이렇다 할 촉이 올 때만 하는 거지만.

   

처음 몇 번은 아내가 전혀 내 말을 듣지 않고,

무턱대고 빨래를 널어버리는 통에, 빨래를 다시 해야 하는 일이 몇 번 생겼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아내한테 제안을 했다.

   

“우리, 게임 하나 하지 않을래?”

   

“게임? 무슨 게임?”

   

“내가 다음 날 비가 온다고 말하면, 빨래를 널지 않는 거야. 만약 말 그대로 비가 오면 다음 날 저녁은 네가 차리는 거고, 아니라면 내가 차리는 거지.”

   

“...지더라도 맛없는 거 요리해서 주기 없기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에게 맛없는 요리를 해 줄 수는 없지.”

   

그리고, 지금껏 스무 번 정도 게임을 진행했었다.

초반에는 내가 지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승률은 점차 늘어났다.

역시 무슨 일이든 경험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한두 번 실수가 있기는 했다.

그래도 패배할 때마다 아내가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면,

패배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든다.

...몰래 일부러 패배한 적이 있다는 건 아내한테 비밀이다.

   

“나,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응? 뭐야, 달링?”

   

나는 요리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슬쩍 이야기했다.

   

“처음에, 여기 올 때 생필품을 1년치만 가져왔다고 했잖아. 그러면 슬슬 사회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남은 기간 3개월.

요양을 위해 온 거니까,

요양기간이 끝나면 이제 돌아가야 한다.

   

물론 기억을 잃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곰곰 떠올린 내용으로 보자면, 사회 일반적인 지식도 남아 있고,

몸도 멀쩡하니, 적어도 복귀에 큰 어려움은 없을 듯 했다.

   

아내는 요리를 멈추고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이야기했다.

   

“달링은,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요양할 필요도 없고, 생필품도 떨어져가고, 또 너도 먹여 살리려면 일도 해야 하니까. 슬슬 준비를 해야 할까 해서.”

   

“나는 달링이랑 쭉 여기서 살고 싶은데, 그건 안 될까?”

   

“안될 건 없지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내의 말은 절대 여기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생필품이라면 걱정 마. 아직 여유는 남아 있어. 복귀는 천천히 생각해봐도 괜찮잖아, 응?”

   

아내는 상냥하게 나를 설득하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어딘가 애절한 분위기가 실려,

간곡한 부탁과도 같이 들렸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여보, 뭐 숨기는 거 있지?”

   

“...없어.”

   

“정말로?”

   

“...정말이야, 믿어 줘.”

   

수상했다.

아내가 뭔가 숨기고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나한테 해가 되는 일 같지도 않았다.

어째서 숨기고 있는 걸까.

   

“...저기, 부부란 건 힘든 일을 같이 이겨내는 사이잖아?”

   

나의 말에 아내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굳이 물어보진 않겠지만, 힘들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줘.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아내는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을 봐서는 절대 이야기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좀 더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서,

아내가 말해줄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딱 1년이 지났을 때.

   

우리 가정은 이전만큼 화목한 분위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내는 애써 밝게 지내려 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는지 어딘가 한 켠에는

어두운 모습이 서려 있었다.

   

날씨 맞추기 게임도 그만둔 지 오래다.

아내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그 덕에, 매번 아내는 비오는 날 빨래를 널어놓고,

다 젖은 빨래를 새로 세탁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내는 항상 내 품에 안겨서

나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훌쩍거렸다.

물론 나는 들리지 않는 척, 잠꼬대인 척,

아내를 더 강하게 끌어안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 속으로 나물을 캐러 나가던 도중

발을 헛디뎌서 그만 비탈길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가파른 비탈길이었던 터라,

나는 기세를 죽이지 못하고, 산 너머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어휴, 이래서는 아내한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이야기도 못하겠네.”

   

오늘 일을 이야기하면, 내가 뭐랬느냐고 또 잔소리를 하겠지.

산에서 나는 사고만큼은 위험하다고 신신당부를 했었으니까.

아무튼 미끄러진 비탈길의 높이를 보아하니,

아마 돌아서 올라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천천히 올라갈 길을 찾던 도중, 내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게 보였다.

   

“에잉? 젊은 청년이 여긴 웬일인가?”

   

한 할머니가 바위에 앉아서 느긋이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인도에 왜 할머니가...?

   

“어르신, 혹시 어디서 오셨나요?”

   

그 말에 할머니는 별 생뚱맞은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대답했다.

   

“어디서 오기는. 요 근처에 마을이라고는 저쪽에 있는 마을 말고 더 있나?”

   

“마을... 이요?”

   

무인도에 마을도 있었었나?

   

“머시? 마을도 안 들리고 그럼 여기 어떻게 온 건가?”

   

“저쪽 산 너머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무인도인줄로만...”

   

“아, 설마하니 배에서 조난당한 모양이구만? 거, 참. 하필 떠내려와도 저런 곳에... 살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할머니는 안타깝다는 듯이 나를 보고는 혀를 찼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저, 어르신. 저기가 어떤 곳인데요?”

   

“응? 저긴 말이야, 산도 높고, 다른 곳은 다 꽉 막힌 해변이라, 무인도로 오해하기 딱 좋거든. 아마 한참 전에는 조난영화도 찍는다 뭐다 푸닥거리를 했었지?”

   

“네? 그럼 여기는 어디죠?”

   

“여기? 전라도 어디께쯤이라 해야겠지? 요즘은 주소가 워낙 휙휙 바뀌어서, 나도 잘은 몰러. 그것보다, 청년. 낯이 익은데, 나 어디서 본 적 있는가?”

   

“네? 아뇨, 저는 한 번도...”

   

“그려? 음... 잠깐만...”

   

할머니는 허리춤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이리저리 검색했다. 

그러더니, 뉴스 한 페이지를 열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래, 이 사진! 이거 청년 아닌가?”

   

뉴스에는 떡하니, 정장을 입은 내 모습이 찍혀 있었다.

나는 멍하니 할머니가 보여준 뉴스를 보았다.

   

“네... 저 맞는데... 어째서...?”

   

“봐봐, 내 말이 맞지 그려? 나이를 먹었어도 기억력은 여전하다니께. 이래뵈도 내가 노인 중에는 신세대거든? 벌써 스마트폰도 쓰고 말이야...”

   

할머니가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내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가득한 건, 지금 뉴스에 적힌 하나의 단어였다.

   

[나눔회 설립한 김 회장, 실종]

   

할머니한테 인사는 제대로 했는지,

나물을 제대로 캐기는 했는지,

어떻게 산을 올랐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다.

   

간신히 집에 도착할 때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날 사랑하고 있다.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령 좀 속았더라면 어떤가. 분명 나를 위해 숨기고 있었을 거다.

   

물론 다른 방면으로 알게 되었으니 조금 씁쓸하기도 하고,

배신감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1년간 옆에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아내를

나는 전혀 미워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에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아내가 위험하다.

   

불현 듯 떠오른 생각.

나는 여타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꺄앗!”

   

곧바로 들리는 아내의 비명과

우당탕탕 시끄럽게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

정신이 들고 보니, 내 아래에는 귀엽게 움츠러든 모습으로

눈을 꼭 감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있었다.

   

“이제 괜찮아. 눈 떠.”

   

“...어? 달링...?”

   

“다녀왔어. 그리고 좀 비켜줄래?”

   

내 상황을 보자마자 아내는 황급하게 내 밑에서 빠져나왔다.

그제서야 나는 팔로 막고 있던 옷장을,

천천히 바닥에 쓰러뜨려놓을 수 있었다.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옷장 다리가 부러져서 넘어진 듯 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응? 갑자기 네가 위험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안 다쳐서 다행이야.”

   

“...팔에 상처 났잖아.”

   

“아, 이거? 금방 나아. 대충 밴드나 하나 붙여놓으면 돼.”

   

“...이리 와.”

   

아내는 속상한 듯이 내 팔을 보고는,

나를 잡아끌고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구급상자를 꺼내서, 정성껏 내 팔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마. 달링이 다치는 건 보고싶지 않아.”

   

“그래서 네가 다치면 본말전도잖아.”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아내를 의심할 수는 없다.

...내가 과연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중, 아내가 내 표정을 보았는지

살며시 질문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본 탓인지,

아내의 말이 조금 더 강해졌다.

   

“뭔가 큰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니지? 어디 다쳤다던가-”

   

“오늘, 산 위에서 미끄러졌어.”

   

그 말에 아내의 손이 멈췄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이야기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어. 하지만, 미끄러져 내려간 산 너머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어.”

   

그 말에 아내는 놀란 표정으로 나랑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고 다시 내 팔로 시선을 돌리고는 치료를 이어나갔다.

   

“...그래? 내가 깊은 곳에 들어가면 안 된다 했잖아.”

   

“아직도 이야기해 줄 수 없어?”

   

다시 아내의 손이 멈췄다.

아니, 정확하게는 미묘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걸까.

   

“여보, 나는 너를 절대 의심하지 않아. 설령 내 기억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나랑 네가 원수 사이였다 하더라도, 난 지금까지 네가 보여준 1년간을 믿고, 너의 사랑을 믿어.”

   

“알고 있어, 그런 건...”

   

“그러면, 이야기해 줄 수 없어? 더 이상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아.”

아내는 내 말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떨리는 손으로 치료를 계속했다.

그리고는 치료를 마친 뒤 딱 한 마디 이야기했다.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줘.”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망연하게 떠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문을 나서기 전,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나에게 물어 왔다.

   

“그러고보니 우리, 날씨 맞히기 게임 한동안 안 했잖아.”

   

“...으응, 그렇지.”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내온 아내에게

나는 즉각 반응하지 못하고 늦게 대답했다.

   

“그러면 내일 날씨는 어떨 거 같아? 비 오는 날이야?”

   

내일? 내일 날씨는...

   

“...눈. ...아니, 비! 비 올 거 같아.”

   

“...그렇구나.”

   

그 말만 하고 아내는 방을 나갔다.

설마 진지하지 못한 대답으로 받아들였으려나.

봄이 된지가 언제인데, 눈이라고 대답한 걸 보면

지금 생각이 많은 탓에 말이 헛나오는 모양이었다.

   

아내가 떠난 방문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진짜로 눈이 내리네. 그냥 헛나온 말이었는데.”

   

봄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날카로운 추위와 함께 눈이 찾아왔다.

그래봐야 쌓이지도 않는 싸라기눈이 잠깐 내리는 수준이었지만.

   

아내는 벌써 일어났는지 침대 옆에 없다.

나도 침대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방을 나갔다.

   

방을 나가보니, 아내는 이미 의자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 모습을 보고, 말없이 의자에 가서 앉았다.

   

밤새 많이 울었는지, 아내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아내는 나를 천천히 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번번이 그만두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아내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아내가 말을 꺼냈다.

   

“...일주일.”

   

“응...?”

   

“일주일만 시간을 줘. 그 뒤에는 알려 줄게.”

   

“...일주일이면 돼?”

   

“대신에, 이번 일주일만큼은 다른 건 다 잊고 나랑 즐겁게 지내 줘.”

   

“너랑 있어서 즐겁지 않았던 적은 없었어.”

   

“그게 아니야.”

   

아내는 딱 잘라서 내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일주일만큼은, 어떤 이상한 점이 있어도 신경쓰지 말고 나랑 시간을 보내 줬으면 해.”

   

생각보다는 쉬운 부탁이었다.

원래라면 이야기해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숨기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면 너도.”

   

“...응?”

   

“너도 이번 일주일만큼은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즐겁게 지내 줘.”

   

아내는 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

   

마치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내는 티없이 맑은 얼굴로

아무런 짐도 지지 않은 듯 즐겁게 웃음지었다.

   

   

“우와, 이건 랍스터에, 캐비어까지 있잖아? 어디서 이런 걸 가져온 거야?”

   

“후훗, 신경쓰기 금지~ 그냥 맛있게 먹으면 돼.”

   

일주일의 첫날부터, 신나게 즐길 거리는 넘쳐났다.

음식부터 시작해서 각종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둘이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즐길 수 있었다.

   

“무슨 닌텐도 스위치가 다 있네? 해봤어?”

   

“물론, 달링이랑 하려고 안 해봤지~”

   

“좋아, 그럼 어디 방해부터 해 볼까?”

   

“꺅?!”

   

나는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아내를 뒤로부터 꾸욱 끌어안았다.

아내는 놀라서 갑자기 내 얼굴을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게임은 시작했다.

   

“자, 그럼 난 먼저 간다!”

   

“뭐, 잠깐! 아앗, 비겁해~”

   

   

집안일도 아무것도 신경쓸 필요 없었다.

이번 일주일은, 정말로 즐기기 위한 일주일이었으니까.

   

“아, 내일 비 온다.”

   

“그래? 그러면 내일은 오붓하게 집 데이트를 할까?”

   

“그것도 좋지.”

   

떨어지는 빗방울을 창문 너머로 구경하면서

같이 파전을 나눠 먹기도 하고.

   

   

“오늘은 멀리까지 수영해 볼까?”

   

“아, 나는 수영 잘 못해~”

   

“어쩔 수 없지. 목에 매달려!”

   

“와아~”

   

함께 하루종일 수영도 하고 모래장난도 하고.

   

   

“봐봐, 봐봐! 벌레다, 벌레.”

   

“산에 몇 번이고 왔었는데 호들갑은~”

   

“그러면 이거는?”

   

“응? 꺄악-! 뱀!”

   

“땡, 밧줄이야.”

   

“노, 놀래키지 말라니까!”

   

“아, 방금 놀란 표정, 사진에 잘 찍혔는데. 볼래?”

   

“...흥이다!”

   

산으로 산책을 다니기도 하고.

   

   

“오늘은, 나가기 귀찮아...”

   

“그러면 오늘은 집에서 뒹굴거릴까?”

   

“설마, 뒹굴거리기만 할 건 아니지?”

   

“물론...인데 오늘 아침밥이 뭔가 좀 그런데?”

   

“남편의 건강은 아내가 챙기는 거니까! 장어랑 홍삼이랑 굴이랑 많이많이 요리해 봤어!”

   

“그거, 정말 내 건강을 위한 거 맞지? 그지?”

   

“후훗~”

   

하루종일 집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즐거운 일주일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아내는 조용히 나에게 종이 한 장과 지갑, 핸드폰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이건, 무슨 주소야?”

   

“달링의 부모님네 집 주소.”

   

“...너는 같이 안 가?”

   

“집을 지키는 사람은 있어야지. 그리고, 달링이 돌아올 거라 믿으니까.”

   

“...핸드폰을 주면 연락은 어떻게 하려고.”

   

“사실 말은 안했지만, 여분의 폰은 있어. 이런 곳에서 망가지면 큰일이니까. 내 걱정은 말고, 느긋하게 갔다 와.”

   

“...그래, 그렇다면 가져갈게.”

   

“먼 길이니까, 서두르다 다치지 말고, 천천히 와. 행여 부모님께 무슨 소리 들어도 너무 슬퍼하지는 말고.”

   

“그래, 걱정하지 마. 꼭 돌아올 테니까.”

   

부모님께 소리를 들어도 슬퍼하지 말라니.

혹시나 정말로 나랑 원수지간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의 걱정도 이해가 갔다.

   

그녀를 증오했던 내 기억이 돌아온다면

평범한 부부생활로 돌아오기는 매우 힘들 테니까.

   

그렇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다시 사랑하는 나로 돌아올 거라 믿는다.

내가 1년간 지켜본 그녀의 모습은,

그만큼 사랑스러웠으니까.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발걸음을 뗐다.

그 순간, 그녀가 뭔가 잊었다는 듯이 외쳤다.

   

“아, 맞다!”

   

“...뭔가 잊어버렸어?”

   

“작별의 키스, 아직 받지 못했어.”

   

그녀는 응석을 부리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서

살며시 입을 맞추어 주었다.

   

영원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서 얼굴을 멀리 하고는

행복한 듯이 배시시 웃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고 그 얼굴을 찍었다.

   

“아, 뭐야! 언제 사진 찍을 준비했던 거야!”

   

“아니, 그냥 무의식적으로...”

   

“이거 도촬이야, 도촬! 돌아오면 꼭 나한테 벌 받아야 해!”

   

“...네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정말이지? 약속 한 거다?”

   

나는 장난스럽게 화내는 아내를 달래고는

천천히 산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는 아내가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 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야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내의 소리는 끊겼다.

   

   

처음 보는 도시의 풍경.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비록 꺼낼 수는 없어도, 내 머릿속 한 켠에는

어디선가 이 광경이 잠들어 있다는 거겠지.

익숙한 장소에 온 덕인지, 기억이 날듯말듯 하다.

   

“여기구나...”

   

나는 몇 번이고 주소를 확인한 뒤,

문 앞에서 잠깐 심호흡을 하고,

각오를 다진 채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네, 나가요-]

   

여성의 소리가 들린 후,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열고 나온 사람은, 어딘가 자주 본 듯한 아주머니...

   

“엄...마?”

   

“너...? 여긴, 어떻게...?”

   

치잉-!

   

머릿속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소녀, 죽음, 교통사고, 예지, 꿈, 횡단보도, 책, 회장, 기금, 잠, 삶, 제물, 행운...

   

갑자기 수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녔다.

주변의 소리와 광경이 아득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얘야아, 정신차려어어! 무슨 일이니이이!”

   

새까만 공간이 깨지고, 빛이 새어들어온다.

모두가,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결국, 오고 말았구나... 그동안, 미안했어...”

   

머릿속 소녀가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는, 어둠과 함께 휩싸여 빛 속으로 사라져 간다.

혼란스러운 광경 가운데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원래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적다보니 길어져서 중간에 좀 잘랐습니다.


다음 편도 이정도 길이일 거 같아서

오늘내로 못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편: 세계는 상냥하지 않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