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늘 사람들은 나를 다른 누군가와 겹쳐보았다.


누군가는 아버지를, 누군가는 옛 연인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온전한 나 자신으로 보아주지 않는다는게 사무치게 힘들었지만 노력하면 언젠가는 나를 봐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안!!! 눈을 떠보거라!!! 이안!!!"


 "흐...."


마침내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지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바람에 다 죽어가는 몸뚱이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30년.무려 30년이었다.


베르길트 리베론도, 이반 페트로비치도 아닌 이안 리베론 이라는 한명의 인간으로써 존재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그렇게나 길었다.


그 긴 시간동안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아쉬운 점이라 하면 이 순간을 오래 즐기지 못한다는 것 뿐.


뭐, 몸이 반토막이 나고도 이만큼을 버텼으니 크게 아깝진 않지만.


"이안...."


물기를 잔뜩 머금은 호박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평소처럼 저 먼 곳을 내다보는 시선이 아닌, 오롯이 나만을 보는 눈.


저걸 바랬고,또 바라왔지만 아쉽게도 이젠 정말 시간이 다 한듯 하다.


"전하."


"이,이안..?"


"그동안 전하와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비록 당신께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왜,왜 그러는 것이냐. 왜 유언이라도 남기는 것처럼...필요하다면 진혈이라도 내어 줄 테니..그만...."


"드라고니안 왕국 만만세. 더스크 왕가에 고룡의 가호 있으라..."


"이안? 이안..? 무,무슨 말을 하는 게냐? 이안?"

.

.

.

.

되었다.


이것으로 '이안 리베론' 의 이야기는 끝났다.


한평생 타인의 그림자에 가려져 살았던 한많은 남자의 삶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걸로 만족하느냐?


"예.위대한 고룡이시어."


-숱한 인간들을 지켜봐왔고,삶을 마친 용기사들을 직접 마주하기도 잦았으나 그대같은 인간은 처음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용들의 전당이 실제로 있는 거였군요. 북방 전사들이 그토록 찾는 발할라마냥 전설로만 전해지는 곳 인줄 알았는데."


-나를 보고도 그리 태연하다니, 더욱 기이한 아이로다.


"어차피 죽은 몸인데 놀랄거 뭐 있습니까? 한번살지 두번사나."


-......■■.■■■ ■■■ ■■ ■■■■■


.

.

.

.

*

-리베론 가문의 장자라면 분명...


-베르길트 공의 반만큼만 하여도...


-이안.너는 꼭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호부밑에 견자 없다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타고나길 개로 태어났어도 아비가 범이면 자신도 범이 되기를 강요받는다는 뜻이다.


나는 그걸 어릴적부터 톡톡히 느끼며 자랐다.


나의 아버지,베르길트 리베론 공작.


철산의 기사,동방기사단장,무패의 대전사,제국의 송곳니....등등 수많은 이명과 그에 걸맞는 위업을 쌓아올린 위대한 검사.


천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에서도 견줄 자를 찾기 어려울 만큼 뛰어났던 영웅.


그런 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주변에서는 항상 내게 막대한 기대를 걸었다.


그 기대에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바로 싸늘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베르길트 공 이었다면....' 으로 시작하는 그 수많은 질책들.


그것이 참을 수 없게 아파 기대에 부응하려 뼈를 깎는 노력을 해보았지만, 끝끝내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떤 공적을 쌓아도 '네 아비는 그 나이에...' 라며 혀를 차는 사람들 틈에서 겨우겨우 버티던 나는 15세가 되던 해에 성인식을 받자마자 집을 도망치듯 떠났다.


방랑기사가 되겠다는 명목으로 검 한자루만 들고 각지를 떠돌았기에 고생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적어도 공작저에서의 생활 보다는 행복했다.


그때의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 왜의 모든것이 어색할 정도였으니, 바깥세상의 자유를 만끽하는 여정은 더없이 만족스러웠을 수 밖에.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던 도중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다.


"흠...꽤 싹수가 있어 보이는데."


골목길에서 양아치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길래 구해줬더니 대뜸 그런 소리를 하길래,처음에는 어디가 아픈 사람인 줄 알았다.


"파벨.어떻게 생가-"


-멈칫


"폐하.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파벨.저놈 붙잡아.상처내지 말고."


"존명."


"갑자기 뭔- 크윽?!"


정확히는,그녀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거한한테 제압당하기 전까지만.


"이름이?"


"...이안.이안 리베론."


어차피 이 상태로는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겠다 순순히 묻는말에 대답을 했다.


고분고분한 척 상대를 방심시키다가 경계가 풀린 순간 도주할 생각이었다.


"이ㅂ...아니.이안. 그대 나의 기사가 되지 않겠나?"


그마저도 그녀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보아 순간 눈녹듯 사라졌지만.


흑단같은 빛깔의 장발.앵두같은 입술.백옥처럼 새하얀 피부.


거기다 무언가 애잔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 보고 있던 호박색의 눈동자까지.


.....고백하건데, 솔직히 이때 한눈에 반했다.


갓 세상에 나온 열여섯짜리 소년이 버티기에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홀린듯 고개를 끄덕였고,그녀는 손바닥을 그어 흐르는 피를 내게 먹였다.


"용혈기사단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하네.이안."


"....예?용혈기사단? 그 드라고니안 왕국의 공포?"


"맞도다.바깥에서는 우리를 그리 부르지.


소개하마. 드라고니안 왕국의 12대 여왕. 이벨리아 더스크다. 그대의 주군의 이름이니 잊지 말도록."


".......꿈인가?"


하하.아무래도 그렇겠지.


우연히 구해준 사람이 사실 적룡의 피를 이었다는 왕가의 후손이었고, 왠진 모르겠지만 나를 자기 기사로 삼으려고 하고,심지어 그 귀하다는 용혈을 거리낌없이 준다?


"...아니네...?"


급작스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던 나는 이윽고 몸속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마력에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폐하.다시한번 재고해 보심이..."


"되었다.파벨 자네가 책임지고 용혈기사단의 이름에 걸맞는 이로 만들어 놓도록. 오늘은 이만 복귀한다."


그렇게 말한 이벨리아,여왕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골목길에는 나와 파벨이라 불린 사내 둘만이 남아있었다.


"저..파벨 경?"


"음."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툭


발치에 떨어진 붉은 망토를 주워드니 그가 말을 이었다.


"입단을 환영한다.신입."


"하하하하....."


집에서 탈출한지 1년.


얼떨결에 대륙 제일 기사단에 입단해 버렸다.



*

머나먼 과거, 아직 사람들이 빌었던 소원들이 응답받던 시절.


태고의 세계를 지배하던 용족은 적룡과 흑룡 두 갈래로 나뉘었다.


온화한 심성의 적룡과 폭급한 성격의 흑룡은 사사건건 부딪히며 으르렁대기 일수였고, 그것이 정점에 이르렀던 사건이 바로 세계의 존속 여부를 두고 생긴 두 일족간의 전쟁이었다.


흑룡들은 너무나 불완전한 현 세상을 완전히 말소시키고 완벽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고, 세계와 그 피조물들을 사랑하던 적룡들은 그를 막고자 하였다.


신화적인 존재들의 결투는 결국 끝을 맺지 못하였고, 그 후손들의 세대에서까지 각자의 목표를 위해 싸우고 있다.


"후욱...후욱...후욱..."


지금 나는 그 전장의 한복판에 서있고.제기랄.


"잡았...다!!!!"


위턱과 아래턱이 분리된 후에도 한참동안 난동을 부리던 흑룡의 막내딸이 이제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후읍.....아오.시발거.분명 이번에는 둘째만 온다고 했는데 이새끼는 도대체 왜 튀어나온거야?"


입으로는 분노를 토해냈지만, 속으로는 끓어오르는 고양감을 참을 수 없었다.


태고의 악룡의 피를 가장 짙게 물려받은 흑룡의 일곱 남매들 중 하나를 오로지 나 혼자 잡아낸 것이다.


물론 상대가 그들 중 최약체인 막내였기에 가능했고,온갖 편법까지 다 써가며 거둔 승리지만 어찌되었건 이긴건 이긴 거 아닌가.


"......이안.이게 무슨....?"


"아.단장!!제가 이놈을 잡았습니다!! 그것도 단신으로! 대단하지 않-"


-뻑


"컥, 안그래도 아파 뒤질거 같은데 왜 때리십니까?!"


"이안.또 '그걸' 쓴 건가?"


파벨의 그 한마디에, 한껏 고양되어 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예.뭐."


"그건 위험하니까 다시는 쓰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그럼 뭐 어쩝니까. 대피도 못한 부상병들이 천지였고, 그놈을 제때 막을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못잡았으면 저사람들 다 죽은 목숨이었는데."


"....."


"자자.단장님도 좀 진정하시고. 어찌됐든 이겼잖아요? 저놈이 큰 공을 세운것도 사실이고요."


급속도로 냉랭해지던 나와 파벨 사이에 용혈기사단의 부단장,주퀘도가 끼어들었다.


"이안 너도 앞으로는 조심 좀 해. 아무리 제어에 성공했다고 해도 용혈폭주는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힘이 아니야."


"예."


용혈폭주.


말 그대로 몸속의 용혈을 폭주시켜 그 대가로 진정한 용의 힘을 일부분 빌려오는 기술.


다만 폭주시킨 용혈은 통제가 불가능해 한번 사용하고 나면 대부분 즉사,운이 좋으면 전신불구 일 정도로 그 대가가 막심한 기술이다.


"안그래도 슬슬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오늘 이후로는 죽기 싫어서라도 안쓸겁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튼튼한 육체와 왠진 모르겠으나 아무튼 높았던 용혈과의 동조율 덕분에 남들은 한번 쓰면 죽는 걸 여러번 써대면서도 멀쩡히 살아 있었지만, 이제는 몸이 본능적으로 경고를 날렸다.


한번 더 용혈폭주를 쓰면 죽는다고.


"암.그래야지. 국서가 전쟁터에서 죽으면 우리 체면이 뭐가되냐?"


"쿠헤읍?!?!?!"


주퀘도의 갑작스런 일격에 순간 사레가 들렸다.


"국서라니,그게 뭔...."


"에이.폐하랑 너랑 그렇고 그런 관계인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이 미친인간이 진짜.


그걸 꼭 듣는 귀도 많은데서 떠벌려야 적성이 풀리나?


"아 시발...."


수많은 병사들의 시선들이 일제히 나에게 꽂히고, 그 모습 앞에서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솔직히 말하자면,저도 가끔 어떻게 이...페하랑 그런 관계로 발전한 건지 궁금하다니까요?"


나는 파벨과 주퀘도,나 셋이서 모인 조촐한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꺼냈다.


"단장.이새끼 오늘 싸우다가 머리 다쳤답니까?"


"글쎄다.확인은 안 해봤는데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니.진짜라니깐?! 와나 미치겠네."


물론 둘은 들은 척도 안하고 술만 퍼마셨지만.


"분명 저는 이...아이씹.진짜."


"그냥 편히 불러라.우리 셋밖에 없는데 누가 듣는다고."


"그럼 그렇게 하죠. 하여간 저는 이브를 사랑하고 있습니다.그건 확실해요. 이브도 저를 사랑해주고 있고."


"그럼 뭐가 문젠데?"


"그 중간과정에 묘하게 기억이 안난다 이거죠. 왜 그런거 있지 않습니까.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고, 이런저런 계기도 생기고, 고백도 하고 그런게 있어야 하는데 딱 그런 부분만 기억이 이상하게 흐릿해요."


그 말을 듣고 묘한 표정이 된 파벨과 달리, 주퀘도는 씩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계기는 지랄.폐하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고래고래 떠들고 다니던 새끼가 누군데 얘가 배부른 소리를 한다?"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잖아요."


"그냥 고맙습니다~ 해. 짝사랑이 성공했으면 좋은거지 뭘 꼬치꼬치 따지고 있어."


"뭐,그렇긴 한데....아참. 저 물어볼 게 하나 있습니다. 쉰소리 하다가 까먹을 뻔 했네."


"뭔데?"


"이반이 누굽니까?"


그 말을 한 순간, 방의 온도가 내려갔다 착각할 정도로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던 파벨은 두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주퀘도도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반 페트로비치?"


"예.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둘 다 아는 사람이에요?"


성큼성큼 다가온 파벨이 내 어깨를 잡아채고 물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지?"


"그게 중요-"


"대답해!!!!"


-움찔


단장의 서슬퍼런 기세에 눌린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이브가 잠꼬대로 부르던데요.이반.이반 하고."


"........."


"...뭡니까? 뭐 돌아가신 선왕 폐하 본명이라도 되는 거 였어요? 분위기 왜이래?"


"....단장.얘 정말로...그..."


"...맞다.사실 아니라고 하는게 더 이상한 상황이긴 했어."


"...짐작 하기는 했었는데...진짜..."


자기들만 아는 얘기 하면서 수군대는게 불만스러워 뭐라 하려던 찰나, 파벨이 몸을 일으켰다.


"너도 알고 있긴 해야겠지.따라와라."


*

기사단 본부가 위치한 드라고니안 왕성의 심처에서도 한참을 더 내려간 곳에 존재하던 거대한 공동.


그 압도적인 크기에 놀란 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앞서가던 파벨이 주의를 줬다.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와라. 곳곳에 트랩이 걸려 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파벨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반은 과거, 초대 용혈 기사단에 속해있었던 기사다. 그리고....폐하의 옛 연인이기도 하지."


"........ㅇ,에?"


무언가 머리를 강타한 듯한 충격이 지나갔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대던 이반이, 옛 연인이었다고?


그렇단 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게 빠르겠지."


파벨의 말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거대한 보물고에 도착해 있었다.


보물고의 중앙으로 나아간 파벨은 그곳에 있던 액자에 덮혀있던 천을 걷어냈다.


".........."


그리고 그 액자 속에는 환히 웃고있는 이브와....마찬가지로 환하게 웃고있는, 나와 소름돋을 정도로 똑 닮은 사내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반과 폐하가 함께 있을 적 그린 초상화다. 아마 폐하께서는....."


-나를 이반이라는 자의 대신으로 삼았다.


파벨이 삼킨 말이 너무나 뻔하게 보였다.


세살짜리도 이해할 정도로 인과관계과 명확했으므로.


왜 처음 본 나에게 용혈까지 주며 날 자신의 기사로 삼았는가?-> 나를 이반과 겹쳐보아서.


왜 관계가 발전하기까지의 기억이 모호한가?-> 애초에 정상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그럼, 그 모든건 가짜였던 것인가.


네가 사랑을 속삭이고, 미소지어 주던 대상은 내가 아니었나.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자신이 기억하는 이를 떠올리고, 나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그를 생각했던 건가.


네게있어 나는 모조품.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나.


-사실 알고있었잖아?


'....아냐.'


복잡해진 머리 속으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벨리아가 너를 보던 눈, 어딘가 익숙하지 않았어?


'아니라고.'


-너를 통해 다른이를 바라보던 눈. 어릴 때 지독하게 많이 겪었던 거잖아. 저 먼곳을 내다보는 듯한 기분나쁜 눈동자. 넌 그냥 알면서도 부정하고 있었던 거야. 너는 그녀에게 유일한 사람는 커녕 정붙일 이 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닥쳐.난.나는....'


-아.불쌍한 이안. 겨우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나 싶었더만,또 다른 그림자에 가려져 버리다니. 넌 언제쯤 빛을 볼 수 있는 걸까?




"...안...이안!!!! 괜찮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파벨."


"그래.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여주지 않는건데...네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깊었나 보군.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맞다.파벨이랑 주퀘도는 내가 어쩌다 집을 나왔는지 알고 있었지.


그럼 좀 추해져도 되지 않을까.


"..끕...끄으으윽....나,나는...나는...또....이젠...어떻게...끄으으읍...."


일어나자마자 끅끅대며 말도 제대로 못하던 나를, 둘은 이해한다는 듯이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겨우 마음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들었다.


"파벨.주퀘도.둘 다 고마워요."


"우리야 뭐. 너는 좀 괜찮냐?"


"네 뭐,익숙하니까요. 조금 이러다 말거에요 아마."


이런건 안 익숙해도 되는건데.진짜로.


"저 이제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에 약속있었는데 말도 없이 너무 늦어버렸네."


"...폐하랑?"


"글쎼요.누굴까?"


힘없이 웃어보이고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짚어 왕성으로 돌아왔다.



"늦었잖느냐.말도 없이."


자기가 삐졌다는 걸 강조하듯 한껏 부풀린 볼과 부루퉁한 목소리.


평소같으면 귀엽다며 웃어보였을 그 모습도, 진실을 알고 나니 다르게만 보였다.


'정말, 당신은 날 바라보지 않고 있구나.'


"죄송해요.이벨리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만."


억지로 빚어낸 미소를 입에 걸고, 어느샌가 다가온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감히 일국의 여왕을 바람맞힌 죄는 그 몸으로 갚거라."


"..기꺼이.나의 여왕님."



집에서 탈출한지 6년.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을 배웠다.



*

그로부터 9년 후.지금.


그 긴 동안 이벨리아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었다.


힘을 기르고, 흑룡의 주구들을 베어 그 목을 바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까 밤낮으로 고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는 나를 보아주지 않았다.


가끔 나를 바라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동안 호박색의 용안은 언제나 과거를 곱씹을 뿐 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처도 벗어날 수 없는 짙은 그림자.


점점 깎여나가는 마음.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과거와 흡사하다.


진짜 이런건 안 익숙해도 될 텐데.


살풋 미소를 흘리고는 투구의 바이저를 눌러썼다.


오늘, 적룡과 흑룡의 기나긴 싸움은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준비는?"


"만전입니다.단장."


"...계속 말했지만, 힘들면 빠져도 된다."


투박한 사내인 그 나름대로의 걱정과 배려.


어울리지 않게 간질거리는 기분에 고개를 턴 나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싸움에 저만 빠지라니 무슨 섭한 말 이십니까. 저 멀쩡합니다."


"네가 각오했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파벨이 손을 뻗었다.


"꼭 살아 돌아와라.명령이다."


"...존명."


내밀어진 손을 마주잡고는 이윽고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준비는 끝났느냐."


"예.전하. 신 파벨 알레드리히 휘하 용혈 기사단 500인 전원,출정 준비를 마쳤나이다."


기사단을 둘러보던 이벨리아가 오연한 목소리로 명한다.


"저 사악한 흑룡들에게 적룡의 위엄을 보이겠다. 전군 발진하라."


"발진!!!!"



지난 세월동안 꺾여나간 탓에 흑룡의 자식들 중 남은것은 하나 뿐.


이벨리아가 직접 이끄는 용혈기사단이라면 그를 베고도 남을것이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오판이었다.


[오라!!! 내가 바로 진흑룡 플라키두삭스 이니라!!!]


죽은 형제들의 시신을 먹어치우며 그들의 힘까지 모두 흡수한 흑룡의 맏이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힘을 선보였다.


1대 500이라는 수의 차이에도 우리와 대등하게 싸울 정도였으니까.



"진열을 유지하라!!!"


[크아아아아!!!]


한합을 주고 받을 때마다 천지가 뒤흔들린다.


플라키두삭스의 거체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용혈 기사단 또한 반절이 넘는 인원이 산화하였다.


그 길고도 처절한 혈투 끝에, 마침내 승자가 가려졌다.


[커허어어억...]


파벨의 창이 목줄기를 꿰었다.


내 검이 눈을 베었다.


끝끝내 이벨리아의 최후의 일격이 놈의 목을 베었다.


"됐다...!!! 우리가 이겼어!!!!"


이름모를 기사의 외침에, 긴장이 풀린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건 이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앞에서 싸우며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니, 지금까지 서 있는게 용할 정도였다.


"끝이 났구나. 수없는 선조들이 스러져가며 지탱해온 싸움이, 드디어 끝이 났어..."


-찌릿


어디선가 느껴지는 꺼림칙함에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올렸다.


'........뭐지? 뭘 놓치고 있는.....'


순간,막대한 마력이 몰려든다 싶더니 곧 불길의 형상으로 화했다.


[내가 이렇게 쉬이 죽을 성 싶더냐!!!! 더스크!!!! 네놈만은 길동무로 데려가겠다!!]


목이 잘렸는데도 완전히 죽지 않았던 플리키두삭스가 마지막 발악으로 브레스를 뿜은 것이었다.


목표는 이벨리아.


앞선 전투에서 힘이 다한 이벨리아는 저걸 피할 수도,막아낼 수도 없다.


그걸 인지한 순간 이미 앞으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우드드드득


몸안의 용혈이 날뛰며 비늘이 전신을 뒤덮고, 등에서는 거대한 피막 날개가 자라났다.


과거에 이미 한계에 다다랐던 몸이 폭주하는 용혈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지만, 그런건 상관 없다.


전력으로 달려 이벨리아의 앞을 막아서며 자세를 취한다.

-까드드드득

리베른 가문의 비전검법이 극한까지 펼쳐지며 브레스를 흘려내고, 미처 막아내지 못한 충격은 펼쳐진 날개가 흡수한다.

"커흡."


억겹같았던 충돌이 끝나고, 자욱해진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어찌저찌 막긴 했는데, 그 한 합의 대가로 하반신이 통째로 날아가버렸다.

흘려내지 못한 힘의 일부를 몸으로 받았을 뿐인데 이 정도라면, 온전한 브레스를 맨몸으로 받아냈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싫다.

'이벨리아는....괜찮네.'

다행히도 충돌의 여파는 내가 다 받아낸 듯 했다.

그럼 됐다.이브만 안전하다면 나는 괜찮다.

죽기 직전까지 이러니까 좀 호구같아 보일 순 있어도, 뭐 어쩌겠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거지.

설령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이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봐 주었으니까.

이거면 만족한다.



집을 떠난지 15년.
내 삶과 함께,기나긴 외사랑이 끝을 맺었다.


*

전쟁이 끝난지 일주일 후.

대를 이어 거듭해온 숙명이 드디어 끝을 맺었건만, 이벨리아는 방 안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로지 않고 있었다.


-비록 당신께서는 어땠을 지 몰라도......

이안의 끝이, 그녀에게 너무 크게 남은 탓이다.

너무나 방대했던 그의 감정은 날뛰던 용혈의 힘에 실려 바깥을 떠돌았고, 이안이 품은 용혈의 원 주인이었던 이벨리아는 그가 품고있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우우욱..."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다시금 구토감이 올라왔다.

'나' 라는 하나의 객체로써 실존하는게 아닌, 타인이 덧씌워진 채로 움직이는 감각.

마치 스스로의 자아를 부정하는 듯한 역겨운 기분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이런 기분을..내가 이안에게..."

분명 처음 이안을 데려올 적에는 그에게 별 관심도 없었다.

그저 사별한 옛 정인과 판박이처럼 닮은 모습에 홀려 그를 기사로 삼았던 것이니.

그와 몸을 섞었던 것도, 사랑을 속삭였던 것도 그녀가 이반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이 멍청한 것...제 마음도 모르는 것이 어찌 일국의 군주를 자처하느냐..."

아니었다.

시작은 그러했을 지 몰라도,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점점 이안이라는 사람 자체에게 빠져들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던 밝은 모습이, 항상 그녀를 배려해주던 상냥함이,  올곧은 성품이, 그 모두가 이벨리아를 서서히 이안에게로 끌어들였다.

허나,용이 시간을 다루는 잣대는 일반적인 이들과 다르다.

이미 한번 마음을 준 사내를 그 차이 때문에 떠나보낸 적이 있는 그녀였기에 다시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것이 두려워 수없이 고뇌했고, 그 시간은 한명의 인간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결국, 그녀는 이번에도 그 시간 때문에 마음에 둔 이를 떠나보냈다.

-정말로?

"우으으읍...."

아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이기심이 이안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에게 옛 정인을 투영하며 거짓 사랑을 속삭여 고통을 주었고,

다시한번 사랑하는 이를 잃는 고통을 느끼기 싫다는 이유로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어영부영 시간만 끌다, 끝끝내 이안이 죽고 나서야 온전히 자기 마음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기 힘들어 애써 무시하던 사실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무너져 내렸다.

"이안....이안....."

헛되이 부른 이름이 흩어지고, 뻗어낸 손은 허공을 쥘 뿐이다.

"내,내가 잘못했다.내가 잘못했어.그러니....."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이루어질 리 없는 소원을 빌며 고개를 든 그녀의 눈 앞으로 무언가 떨어진다.

동시에, 이젠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친다.

-정식으로 고백을 하거나 하진 못했지만....그래도 연인 사이에 반지 하나쯤은 있어야 할 듯 하여.


그리 말하며 얼굴을 붉힌 그가 내밀었던 커플링.


마음을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번도 끼지 않아 방 한구석에 잡동사니처럼 놓여있던 그것을, 그녀는 천고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품에 끌어안는다.

-달칵

떨리는 손으로 연 반지함에는 반지와 함께 쪽지 한장이 들어있었다.
 
For you. my Queen

"아으으으윽......."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빛바랜 편지지의 모습이 마치 그녀를 질책하는 듯 해, 그녀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들어줄 이 없는 사과와 닿을 리 없는 손길을 끊임없이 뻗어대며.


미련한 용은 오늘도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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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쓰고싶은거 다 때려박다 보니 글이 좀 많이 난잡해졌음.ㅈㅅ


요즘엔 글 쓰다보면 항상 적절한 후회파트 비율을 놓치는 기분이 들어서 쓰는데 고민이 좀 많았음.


그러다 보니까 글이 더 지랄난 거 같기도 하고....


여튼 항상 못난 글 읽어줘 진심으로 고마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