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모음


***


"전체 차렷! 선생님께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쉴틈없던 일과가 지나가고.

가방을 싸며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내게 불쑥, 소영이가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윤지원! 여기서 뭐하냐? 집에 안가?"


"응? 안 그래도 가방 싸고 있었는데..."


"아, 그래? 난 또... 모르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기초적인 상식은 다 알거든..."


시덥잖은 농담을 나누며 교실 밖으로 나선 그때.

문득 소영이가 나를 불러새우며 말했다.


"...아. 그나저나 너 집이 어디라고 했더라?"


"집? 그게 왜 궁금한데?"


"왜 궁금하냐니? 궁금한데 이유가 필요해?"


"너 나랑 친한 친구였다면서 그것도 몰라?"


"....뭐?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잠시 까먹은거 뿐이거든?!"

"아, 아무튼 가방 다 쌌으면 나와! 오랜만에 집에 같이 가자."


"굳이...?"


"뭐? 내 친구가 기억을 잃었다는데, 걱정이 안되는게 이상한거 아니겠어?"

"됐으니까 빨리 나와! 언제까지 친구를 걱정시킬 심산이야?"


기억상실증이라는 병명이 꽤나 쇼킹하게 다가온걸까.

오늘 하루 내내 소영이는 왠지 모르게 나를 과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무슨 어린 아이인줄 아나. 과보호할 건덕지가 어디있다고...


하지만 내게 별 다른 선택지가 있나.

기억을 잃은 바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주변인에게 의지하는 것 뿐일텐데 말이다.


잠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옛말에 머리로는 모를지언정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있던가.

꼭 그 말 처럼 나는 분명 처음가는 길임에도 척척박사마냥 방향을 찾아갈 수 있었다.

또한 익숙한 길을 걷다보니 이와 관련된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늘상 밟던 보도블럭, 한여름엔 덩이줄기가 가득했던 울타리.

1년 365일 내내 울창한 가로수와 여전히 고장난 채로 깜빡거리는 신호등까지.

기억속에 남아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이 차츰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읍... 하아... 신기하네."

"정말 효과가 있어. 역시 학교에 오길 잘했다니까."


"응? 방금 뭐라고 했어? 나한테 한 말이야?"


"어잉? 아, 아니...! 그냥 혼잣말 한거야... 혼잣말."

"뭐랄까, 새로운 버릇이 들었다고 해야하나... 헤헤..."


"후훗, 예전부터 넌 늘 그런 아이였지."

"어딘가 항상 특이하고 신기한... 너만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곤 했어."


"그, 그래...?"


애수에 젖은 소영이의 눈빛을 보니 가슴이 아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몹시 흥분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처음으로 나 이외의 타인에게 나의 과거에 대한 언급을 듣는 순간이 아니던가!


내가 모르는 나 자신의 모습, 나 자신의 과거.

기억상실이라는 콤플렉스가 주는 이면의 두려움에서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순간.

그렇기에 내가 다름에 올 소영이의 말에 몹시 큰 기대를 품은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너무 티를 내고만 것일까.

소영이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대화의 주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오늘 학교 생활은 어땠어? 할만하든?"


"응? 아... 꽤 괜찮았던것 같아."


솔직히 말해서 아쉬운건 사실이었다만.

그래도 뭐, 기회는 언젠가 또 다시 올테니까.


"괜찮아 보이긴 하더라~ 수업시간에 졸기도 하고."


"그, 그건 잠을 잘 못자서 그런거야...!"


"잠을 못 잤다고? 글쎄... 왜 일까?"

"밤에 무슨 짓을 하면 잠을 못잘까~? 후훗."


"무, 무슨 말을 하는거야...! 놀리지 마!"


"아잇, 장난이야 장난! 너는 어떻게 반응하는 모습이 예전이랑 똑같구나!"

"하아... 이러니까 또 옛날 생각이 나네.안 그래?"


"음..."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비록 소영이 말처럼 예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건 아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보니 없던 추억도 생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러니까 아까 괜히 내 기억 생각만 하며 캐물으려던게 괜히 미안해지네...'


뭐, 그건 그만큼 소영이와의 만담이 내겐 한없이 편안하게 느껴졌다는 의미겠지.

나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래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친구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팔자 좋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누가 괴롭히거나 그런 애는 없었고?"


"응. 다행히도 없었어."

"주변에서 다들 잘 해주니까 오히려 안심이었다고 해야하나?"


"다행이네... 난 솔직히 걱정했어."

"너가 기억상실증이라는 말을 듣고 처음엔 그랬었는데... 지금와서 보니 기우가 아니었나 싶다 야."


"음... 솔직히 문제가 아예 없던건 아니었어. 다만..."


"다만?"


"...다만 나도 모르게 몸이 막 움직이더라고."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이 다 끝나가거나 이미 끝난 뒤였어. 신기하지?"


"헤에... 그런 경우도 있나."


소영이는 나의 말을 못 믿는 눈치인지 어색한 웃음만을 터트릴 뿐이었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황급히 대화의 주제를 바꾸어보기로 했다.


"맞다, 의사선생님께서 그러시는데 내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대."


"...."

"...오, 진짜? 그거 다행이네."


"그치? 그래서 나도 기대중이야."

"정말이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안 그래?"


"..."


"...듣고 있어?"


"어? 으, 으응! 무... 물론."

"기억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런 나를 바라보는 소영이는 조금 미묘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두 눈과 입가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함? 이 느껴진다고나 해야할까.

뭐랄까, 방금까지의 소영이와는 조금은 다른 궤의 인식에 보다 더 가까웠다.


"그, 그런데 말이야 지원아.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


"응? 물론이지."


긴장탓에 한껏 마른 목구멍을 침을 삼켜 달래고.

나는 천천히 옴짝달싹하는 소영이의 입술에 보다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기억을 되찾고 싶은 이유가 있어...?"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게까지 서두를 이유가 있냐고..."


"이유... 라고 묻는다면 엄청 많은데."

"그래도 그중에서 한 가지만 고른다면..."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긴장한듯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 살짝 깨문 입술.

누가 뭐래도 이후 튀어나올 나의 대답에 잔뜩 집중한 듯한 모습이었다.


"...끄응."


이럴 떄 고민하면 할수록 대답하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하던가.

나는 그냥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예전으로 돌아가서 다시금 모두와 행복하게 지내고 싶어."

"모두가 나를 위해서 걱정해주고 있으니까. 소영이 너처럼 말이야."


"...뭐?"


"아니,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고...!"

"그냥 내 주변에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들을 위해서라도..."

"아무래도 내가 분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응, 단지 그 뿐이야!"


"오우... 야, 너 약간 의외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알고... 하여간..."


"응? 그야 내 곁에서 나를 가장 많이 도와주는 친구가 너니까?"

"그리고 너가 말했잖아. 그... 부... 뭐시기 친구라며."


"그랬... 었지...?"

"하지만 뭐랄까, 조금 당황스럽다? 하하... 하하하!"


소영이는 불현듯 고개를 돌린 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한 말 때문에 부끄러운 듯한 뉘앙스였다.


'이렇게까지 당황할 정도인가... 괜히 미안해지네...'


젠장. 저런 반응을 보이면 나도 괜스레 무안하단 말이야.

거리낌없이 먼저 다가오던 모습은 어디가고 저렇게 당황을 하니...

부랄친구라 공표한 것 치고는 아직은 거리감이 꽤나 남아있는 느낌?


'아니면 오히려 정말 가까운 친구라서 어색하게 느껴진걸까?'

'하... 모르겠다. 괜히 생각하면 할 수록 머리만 더 아파져...'


내가 의심병에 걸린것인지는 몰라도 은연중에 미심쩍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내가 봐도 과민반응 같긴 하다만, 내 주변 인물들이 인물이다보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저기, 소영아."


"으음? 왜?"


"그... 뭐랄까, 조금 세삼스러울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럴바엔 차라리 확실하게 물어보는게 나을수도 있다.

불신을 어줍잖게 해소하고 의심을 이어나갈 바에는 차라리...


"이상하게 들어주지는 않았으면 하는데, 저기..."

"우리... 친구 맞지?"


"...뭐?"


비록 순간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나와 그녀 사이에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감각을.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한, 그래서 더욱 두려운 정적을 말이다.


"...꿀꺽."


그 정적을 깬것은 누군가가 침을 넘기는 소리.

그것은 나의 목으로부터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너... 너도 참...!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친구지!! 내가 말한거 못들었어? 부ㄹ..."


"아니, 알지. 아는데 말이야..."

"그냥 뭐랄까...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어색... 한 기분이라니...?"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지원아..."


아차, 말이 너무 심했나?

속절없이 흔들리며 빛을 잃은 소영이의 눈동자를 보니 나의 실언이 더욱 절절하게 와닿았다.

무언가 잘못된걸 깨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준 인사불성, 짐작컨데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듯 싶었다.


"나, 나는 너를... 그러니까 나는..."


"미, 미안해 소영아!! 내가 말을 너무 생각없이 했...!"


"친구... 친구라니... 우린 친구... 친구가 아니었나...?"

"하... 하하하... 친구... 하하하...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거네...?"


"그, 그런게 아니라...!"


젠장, 어째서 또 이렇게 되어버리는건데.

어째서 누나에게 그랬던 것 처럼, 엄마에게 그랬던 것 처럼.

나란 인간은 어째서 항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건데.


무언가 이상하잖아?

어째서 매번 이런 결과가 나오는건지.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겐 한시라도 빨리 스스로 저지른 참극을 수습할 의무가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전심을 다해 외쳤다.


"자, 자자잠깐만 진정해봐...!! 내가 말 실수를 했어!!"

"소영아, 미안해!!! 실언을 한 내 탓이야!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한거야!!"


"..."


"내 잘못이야... 내가 말을 괜히 이상하게 하는 바람에..."

"난 별 다른 의도가 아니었어!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랬던 것 뿐이야... 널 의심하거나 그러려던 의도는 절대 아니었어...!!"


"..."

"...진짜?"


"무, 물론 진짜지!! 진짜고 말고...!"


충혈된 흰자위 사이로 그녀의 짙은 흑갈빛 눈동자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에 터질것만 같던 나의 가슴도 어느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나 안심은 아직 일렀다.


"...알았어."

"믿을게. 대신..."


"대신...?"


"내가 너를 믿은 것 처럼 너도 나를 믿어줘."

"우린 친구잖아... 부랄친구.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소영이의 목소리는 차분하였으나 그녀의 눈빛은 그러지 못했다.

속을 꿰뜷는 듯한, 다분히 잘 벼려진 칼날과도 같은 인상의 눈빛이.

익숙하기 짝이 없는 귀기 가득한 그 특유의 소름끼치는 눈빛이.

나는 그저 한 없이 두려울 뿐이었다.


"..."

"응, 믿을게. 믿고 말고."


"...고마워."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확신 없는 대답 뿐이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후로 소영이가 내게 이전과도 같은 눈빛을 보여준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 받은 인상이 사라지는 것은 또 아니었다.


"..."


"..."


나와 소영이는 이후 한참 동안을 말 없이 걸었다.

물론 그녀가 싫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만 아무래도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소영이도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더 이상 내게 불필요한 대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걷다보니 익숙한 2층집이 골목길 너머로부터 모습을 드러었다.


"어라, 저기 너네 집 아니야?"


"응? 어... 그, 그런 것 같네."

"그, 그럼 이만 가볼게. 바래다줘서 고마웠어."


"그래,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 내일 보자.


정말이지,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리기라도 한걸까.

이제는 소영이의 저 실없는 웃음마저도 미심쩍게 느껴진다.


"으응..."


아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아무리 의심스럽고 어색하다고 할지언정.

지금 내가 누리는 일상에는 문제가 없으니말이다.


내겐 나를 늘 생각하고 염려해주시는 어머니가 있고.

누구보다 날 아끼고 사랑해주는 예쁜 누나가 있을 뿐더러.

내 일을 마치 제 일인 것 마냥 도와주는 친구도 있지 않은가.


그리 특출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모난데도 하나 없는.

아마도 이 세상의 어느 누군가는 간절히 바랬을지도 모르는 삶.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위로했건만...


"아, 저기... 지원아."


"어... 어어? 방금 불렀어?"


"그게... 다른건 아니고 있잖아..."
"방금 전 일은... 그... 잊어줘. 부탁이야?"


"..."


어째서일까.

이토록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느껴지는 것은.


***


원래 이렇게까지 늦을 생각은 없었는데 면목 없다...

이번 화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미 1월 초에 집필이 다 끝난 부분임

그럼 어째서 올리지 않았느냐 하면 내용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본래 1만자, 적어도 8천자는 넘어야 1화로 보는 내 입장에서 6천자 따리는 너무나도 적은 수치였음

그래서 뒤에 민지 관련해서 한 편을 더 쓰려고 했는데 슬럼프라도 왔는지 도통 써지지가 않더라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던 노릇인지라 지난 2달 동안 쓰고 지우고 또 쓰고를 무한히 반복했었음

그럼에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던 와중 시간이 벌써 2월 말이라는걸 꺠달아버림


생각해보니 마지막 연재가 작년 12월이더라고;; 그래도 작가란 놈이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음

그나마 짜임새 맞게 쓰인 일부라도 올려야 겠다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가 이것... 5-1편이라는 애매한 숫자;;

결국엔 글의 퀄리티를 위한 내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이에 대해선 지탄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함...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중... 은 아님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한 이상 끝은 맺어야 하기 때문에, 스토리를 봐주는 독자들 때문에라도 이 시리즈를 버릴 생각은 없음

다만 말도 없이 무한정 기다리게 만든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함... 다음화는 어떻게든 짜내어서 써올게


아무튼 지금까지 기다려준 독자가 있다면 정말 미안하고, 또 고마울 따름임

그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다음화로 돌아오겠음...


+분량 추가해서 5화로 다시 올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