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장로교 표준교리를 기반으로 쓰여진 글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는 진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부정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식과 세계관은 늘 변하기 마련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온전히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한 진리라도 유한한 인간의 인식의 문을 지나가는 순간 불완전해짐을 의미합니다.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인식론을 논할 때에 내릴 수 밖에 없던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불완전한 인간으로써는 온전한 진리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화체설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장로교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성찬에서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는 단지 떡과 포도주일 뿐입니다. 이 유한성 안에 내재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보이는 케리그마가 이를 완전하게 만들 뿐이지 물질적 본질은 그저 물질의 유한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떡과 포도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인식함은 그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보이는 케리그마로서의 우리를 위해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믿고 먹음으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임재하는 것이지 떡과 포도주의 물질성 자체에 진리의 근거를 두지는 않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역시 냉정하게 평가하면 오류가 많고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의 연설일 뿐입니다. 많은 설교자에게 과거에 자신이 썼던 설교문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많은 이들이 소위 말하는 '이불뻥'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인 친구가 이야기한 말을 빌리자면, 처음 사역했을 당시의 설교문을 보자면 참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말합니다. 문법적 오류와 그리고 당시 부족했던 자신이 저지른 신학적 오류들이 한가득이기에 자기는 다른 목사들이 어떻게 이런 부끄러움 없이 설교집을 낼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부족하고 연약한 이 친구의 연설문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그 순간에, 이는 단순한 글이 아니게 되곤 합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 안에 내재된 케리그마가 유한성 안에 내재된 말씀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서 이는 온전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다시 따져보면 그저 문자적 내용의 본질은 연약한 사람의 말입니다.

교회를 들여다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문제와 온갖 논란에 휩싸이는 것이 바로 현재 우리 교회의 자화상입니다. 교회를 보다보면 저것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가 싶을 정도로 문제투성이입니다. 교회는 빛을 잃은 듯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부정하고 싶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공교회'라 불리는 이유는 이 불완전한 교회 속에 내재된 본질은 하나님 나라의 무한성이기 때문이지 현재의 모습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상 속의 교회는 유한할 뿐입니다.

계속 남탓만 하기에는 좀 양심이 없어 보이니, 이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봅시다. 얼마나 죄악투성이입니까? 아무리 선행을 하고, 경건하게 자기 자신을 다잡고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내 가족과 형제와 여러 성도들에게 경건하게 보일 수 있더라도, 하나님과 나 자신에겐 결코 속일 수 없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욕망과 죄악으로 가득차 있음을 우리는 너무 뼈저리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것은 우리 가운데 거룩하다고 인치신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유한한 인간에 내재된 무한하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 임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악된 삶 가운데서도 거룩하다 구별될 수 있는 것이지 본질 자체는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죄인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찬과 교회와 우리 자신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우리 인식 너머의 것들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불변하다고 우리는 말하지만 우리가 그 하나님의 진리를 영원불변하다고 입으로 표현하는 순간 그 표현 자체는 영원불변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 존재가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리를 이성적으로 논할 때에 시대와 세계관에 의해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 성서 기술의 방식에 대해서는 장로교에서는 '유기적 영감설'을 정설로 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진리의 기술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완전한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고자 함은 실로 비효율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에 그 계시하는 자의 성품, 인성, 세계관, 가치관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렇게 유한성 속에 내재된 무한성으로서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한다는 인격적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신학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닌, 시대와 시대를 거듭함으로서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인식과 세계관이 변할때마다 신학은 결국 변하게 됩니다. 이는 진리가 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계속 변해왔음을 보여줍니다. 과거 중세의 신학이 스콜라 철학의 집대성이었고, 종교개혁기의 신학이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왔고 현대 신학이 실존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우리 가운데 실존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주장하고, 최근 여러 교단 가운데서 조명되고 있는 리터지 신학은 구조주의 철학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건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계와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유한성이 가져오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진리는 늘 우리 가운데에 내재하여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