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고전 채널에도 게시한 글임.


****


바라히르의 아들 베렌(Beren)은 첫 번째 암흑 군주 모르고스에 맞서 북부에서 끝까지 저항하였던 인간 가문, 베오르 집안의 마지막 후예였다. 그는 가족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새들과 짐승들을 벗삼아 홀로 북부의 산야를 떠돌며 모르고스의 부하들을 사냥하였으나, 결국 악의 세력이 사방에서 조여들자 고향 땅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험한 산지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던 그는 회색요정들의 왕국 도리아스의 숲에서 자신의 운명을 만났다.


("Beren and Lúthien" by Aronja)


가운데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고 전해지는 요정 공주 루시엔(Lúthien). 숲의 빈터에서 별빛을 받으며 춤추는 그녀의 모습에 베렌은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손끝에 닿을 듯 자꾸만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쫓은 끝에, 베렌은 그녀를 '나이팅게일'이라는 뜻의 '티누비엘(Tinúviel)'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고, 그 순간 베렌을 돌아본 루시엔 역시 운명적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루시엔의 아버지, 도리아스의 군주 싱골은 한낱 필멸자인 인간에게 외동딸을 시집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베렌이 모르고스의 철왕관에 박혀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들, 즉 세 개의 실마릴 중 하나를 가져와야만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고집했다. 그 누구도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베렌은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다며 모르고스의 본거지 앙그반드로 떠났다. 베렌은 결국 당시 모르고스의 부관이었던 사우론에게 붙잡혔고, 그의 위기를 직감한 루시엔은 그를 구하러 직접 길을 나섰다.


루시엔은 사우론의 손아귀에서 베렌을 구해냈고, 모험을 계속한 둘은 천신만고 끝에 모르고스의 왕관에서 실마릴 하나를 탈취했다. 그 과정에서 베렌은 한쪽 팔을 잃었고, 이후 '외팔이'라는 뜻의 '에르카미온(Erchamion)'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싱골의 인정을 받아 모두의 축복 속에 부부로 맺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렌은 그를 뒤쫓아 도리아스에 쳐들어 온 앙그반드의 수문장이자 거대한 늑대인 카르카로스로부터 싱골을 지키다가 치명상을 입었고, 루시엔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큰 슬픔에 빠진 루시엔은, 비록 불멸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요정이었지만, 이윽고 베렌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그녀의 영혼은 명계를 관장하는 발라 만도스를 찾아가, 처연한 비가로 세상에서 가장 냉정하다는 그의 마음조차도 움직였다. 만도스는 베렌과 루시엔에게 특별히 두 번째의 유한한 삶을 허락하였으니, 그리하여 두 연인은 가운데땅으로 돌아와 톨 갈렌의 푸른 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문득 같은 날 함께 세상을 떠났다.


인간과 요정이 맺어진 첫 부부였던 그들의 후예는 훗날 두 종족의 위대한 군주들과 영웅들을 배출하였으니, 깊은골의 반요정 군주 엘론드와 그의 딸 저녁별 아르웬,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여 곤도르와 아르노르의 왕좌를 재건한 아라고른은 모두 베렌과 루시엔의 후손들이다.


(0:18부터 톨킨의 <베렌과 루시엔의 노래> 낭독을 들을 수 있다.)


톨킨은 가운데땅의 모든 전설들 중에서도 베렌과 루시엔의 이야기를 가장 아름답게 여기고 사랑했음에 틀림없다. 그랬기에 그는 그 이야기를 차마 완성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아름다움의 일부를 <반지의 제왕>에 남기고자 했다. 모닥불 옆에서 호빗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라고른의 입을 빌려, 톨킨은 베렌이 루시엔을 만나 그의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을 시로 묘사했다. 이 시는 '소리'에 무척이나 민감했던 톨킨의 미적 취향을 듬뿍 반영하여, 아름다운 음운과 정교한 규칙성을 갖추고 있다. 눈여겨 볼만한 특징들은 아래와 같다.


(1) 모든 연은 여덟 개의 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체로 약한 음절(보통 글씨체)-강한 음절(볼드체)이 한 음보(foot)를 이루며 행마다 네 번 반복되는 약강4음보격(iambic tetrameter) 리듬을 지킨다. 단, 각 연에서 4행과 8행만은 마지막 음보에 전혀 강세를 주지 않으며, 또한 마지막 연을 제외하면 이 행들의 마지막 음절은 항상 -ing으로 끝나도록 되어 있다.


(2) 1, 3, 6행과 2, 5, 7행, 그리고 4, 8행의 각운을 서로 맞추는 ABAC BABC의 독특한 각운 체계를 지키고 있다.


(3) 서로 연속되는 강한 음절에 같은 첫 자음을 쓰는 두운(aliteration) 또한 빈번하게 활용하고 있다. 두운이 가장 강조되는 것은 4연과 9연인데, 각각 루시엔이 잠시 떠나가고 겨울이 찾아오는 모습과 두 연인이 파란만장한 모험 끝에 함께 숨을 거두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어, 가장 상실감이 짙게 느껴지는 부분들이기도 하다.


(4) 약강격 음보를 기계적으로 반복하지는 않고, 약음절-약음절-강음절 음보나 강음절-약음절 음보 등 일부 예외도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예외가 두드러지는 부분은 7연의 6, 7행인데, 거의 일정하게 반복되어 오던 약강격 율격이 여기서 급격하게 흐트러진다. 바로 이 대목에서 루시엔이 베렌을 돌아보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결고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라고른이 호빗들에게 소개한 "베렌과 루시엔의 노래"의 전문을 자작 번역과 함께 아래 옮겨 적는다. 주요 운율적 특징들은 위에 적어 둔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했다. 또한 자작 번역은 아르테 번역판을 참고하되 약강4음보격을 우리말의 민요조 리듬으로 근사하여 옮겨 보았다. 위에 링크한 톨킨의 낭독, 또는 아래 링크한 Ancient Literature Dude의 낭독을 들으며 따라 읽어볼 것을 권한다.





The leaves were long, the grass was green,

The hemlock-umbels tall and fair,

And in the glade a light was seen

Of stars in shadow shimmering.

Tiviel was dancing there

To music of a pipe unseen,

And light of stars was in her hair,

And in her raiment glimmering.


나뭇잎은 길고 풀잎은 푸른

전호꽃잎 드높고 곱게 피어난

숲속 빈터에는 빛이 비쳤네,

어둠 속에 아른한 별빛이.

티누비엘이 거기서 춤을 추었지,

보이지 않는 피리 소리에 맞춰.

그녀의 머리에도 옷자락에도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네.




There Beren came from mountains cold,

And lost he wandered under leaves,

And where the Elven-river rolled

He walked alone and sorrowing.

He peered between the hemlock-leaves

And saw in wonder flowers of gold

Upon her mantle and her sleeves,

And her hair like shadow following.


추운 산맥에서 내려온 베렌

길을 잃고 숲 속을 헤매 다녔지.

흘러가는 요정의 강물가에서

외로이 슬퍼하며 걸었네.

전호꽃잎 사이로 그는 보았지,

그녀의 망토와 소매에 달린

금빛으로 빛나는 꽃송이들과

그늘처럼 드리운 머리채를.




Enchantment healed his weary feet

That over hills were doomed to roam;

And forth he hastened, strong and fleet,

And grasped at moonbeams glistening.

Through woven woods in Elvenhome

She lightly fled on dancing feet,

And left him lonely still to roam

In the silent forest listening.


산속을 헤매 다닐 운명에 지친

그의 다리 마법처럼 치유되었지.

날듯이 힘차게 달려간 그는

반짝이는 달빛을 잡았네.

요정 땅의 우거진 나무 사이로

그녀는 춤추듯이 멀어져 갔지,

적막한 숲속에서 귀 기울이며

헤매는 그를 홀로 남겨두고.




He heard there oft the flying sound

Of feet as light as linden-leaves,

Or music welling underground,

In hidden hollows quavering.

Now withered lay the hemlock-sheaves,

And one by one with sighing sound

Whispering fell the beechen leaves

In the wintry woodland wavering.


그는 종종 스쳐가는 소릴 들었지,

보리수 잎새처럼 사뿐한 걸음,

감추어진 동굴에 울려 퍼지는

땅속에서 울리는 음률을.

어느덧 전호꽃잎 시들어 지고,

이파리 한점 한점 한숨을 쉬며

숨죽여 속삭이던 너도밤나무

겨울 숲에 낙엽을 떨궜네.




He sought her ever, wandering far

Where leaves of years were thickly strewn,

By light of moon and ray of star

In frosty heavens shivering.

Her mantle glinted in the moon,

As on a hilltop high and far

She danced, and at her feet was strewn

A mist of silver quivering.


그는 항상 그녀를 찾아 다녔지.

시린 하늘 달빛과 별빛 아래서

기나긴 세월 속에 두텁게 쌓인

낙엽 위로 먼 길을 걸었네.

달빛으로 빛나는 그녀 망토는

드높은 산마루에 아스라하고

발치에 흩뿌려진 은빛 안개 속

그녀는 춤을 추고 있었네.




When winter passed, she came again,

And her song released the sudden spring,

Like rising lark, and falling rain,

And melting water bubbling.

He saw the elven-flowers spring

About her feet, and healed again

He longed by her to dance and sing

Upon the grass untroubling.


겨울이 다 지나자 그녀가 왔지,

솟구치는 종달새, 빗방울처럼

졸졸 녹아드는 시냇물처럼

노래 불러 봄을 불쑥 깨웠네.

그녀의 자취마다 요정의 꽃이

피어나매 그는 다시 힘을 얻었고

평화로운 풀밭 위에 그녀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싶었네.




Again she fled, but swift he came.

Tiviel! Tiviel!

He called her by her elvish name,

And there she halted listening.

One moment stood she, and a spell

His voice laid on her: Beren came,

And doom fell on Tiviel

That in his arms lay glistening.


이번엔 그녀보다 그가 빨랐지.

티누비엘! 티누비엘!

요정의 이름으로 그녈 부르니

그 자리에 귀 기울여 멈췄네.

그 순간 들려왔던 그의 음성이

마법을 걸었지. 베렌이 다가오자

반짝이며 그의 두 팔에 안긴

티누비엘에게 운명이 찾아왔지.




As Beren looked into her eyes

Within the shadows of her hair,

The trembling starlight of the skies

He saw there mirrored shimmering.

Tiviel the elven-fair,

Immortal maiden elven-wise,

About him cast her shadowy hair

And arms like silver glimmering.


새까만 그늘같은 머리칼 사이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매

베렌은 밤하늘의 시린 별빛이

아른아른 비치는 걸 보았지.

아름다운 요정 티누비엘은

영원히 죽지 않는 요정 처녀는

그를 명멸하는 은빛의 팔로

그늘같은 머리채로 감쌌네.




Long was the way that fate them bore,

O'er stony mountains cold and grey,

Through halls of iron and darkling door,

And woods of nightshade morrowless.

The Sundering Seas between them lay,

And yet at last they met once more,

And long ago they passed away

In the forest singing sorrowless.


운명이 이끈 길은 멀고 멀었지.

차가운 회색 바위 산맥을 넘어

무쇠 방과 어둠 속에 잠긴 문 지나

아침 없는 가지꽃 숲으로.

갈라놓는 바다가 가로막아도

마침내 그들은 다시 만났고

먼 옛날 숲속에서 함께 떠났네,

설움 없는 노래를 부르며.




(영국 옥스퍼드에 있는 톨킨 부부의 묘지. 아내 이디스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톨킨은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

    But now she has gone before Beren, leaving him indeed one-handed.

    하지만 이제 그녀는 베렌을 두고 가 버렸지. 그를 진정 외팔이로 남겨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