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고전 채널에 게시했던 글인데, 여기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올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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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은 명실상부한 판타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였던 저자 J. R. R. 톨킨이 자신의 미적 취향을 반영한 가공의 언어들을 만들고, 그 터전이 될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반지의 제왕>을 비롯한 가운데땅의 수많은 전설들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톨킨이 만든 언어들, 특히 요정들이 사용하는 퀘냐(Quenya)와 신다린(Sindarin)은 원작의 대중화에 기여한 영화를 통해서도 충실히 구현되었다. 좀더 제한적이긴 하지만, 난쟁이들의 언어인 크후즈둘(Khuzdul)과 모르도르의 언어인 암흑어(Black Speech), 그리고 로한인들이 사용하는 고대 영어도 영화에 분명히 등장한다. 이렇게 톨킨이 자신의 전문성과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구현해 낸 가운데땅의 언어적 다양성과 깊이는, 수많은 종족들과 민족들이 뒤얽힌 서사에 현실감과 무게감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톨킨이 소설 속에 삽입된 시에서도 각 종족 또는 민족의 개성을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것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는 네 편의 시를 발췌해서 톨킨이 어떤 방식으로 문화권들 사이의 차이를 표현하는지 살펴보겠다.


1. 반지의 시

사우론의 절대반지를 불길로 뜨겁게 달구면, 요정 문자로 적힌 다음과 같은 암흑어 시가가 나타난다.


Ash nazg durbatulûk, ash nazg gimbatul,

Ash nazg thrakatulûkagh burzum-ishi krimpatul


강세를 주어야 하는 음절을 볼드체로 표시해 보았다. 실제로 어떻게 읽는지는 <반지원정대>에서 간달프가 반지의 유혹에 이끌리는 보로미르에게 경고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1분 26초부터 간달프가 반지의 시를 읊는다.)


위 시는 암흑 군주의 사악함에 걸맞게 거친 파열음과 치찰음이 난무해 사뭇 야만적인 느낌이 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음절-약음절-약음절이 반복되는 엄격한 강약약격(dactylic) 율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의 율격이기도 하다. 또한 색깔로 표시한 것처럼 ABAB 형태의 각운 구조도 온전하게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 음운의 야만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나름 고전적인 규칙성을 잘 갖추고 있다. 기실 암흑 군주 사우론 자체가 그런 존재다. 그는 비록 권력욕에 눈이 멀어 타락했지만, 머나먼 옛날부터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추구해 온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톨킨은 암흑어 원본과 정확히 같은 구조적 특징을 갖춘 영어 번역본을 함께 제시한다.


One Ring to rule them all, One Ring to find them,

One Ring to bring them all, and in the darkness bind them.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모든 반지를 불러모아, 암흑에 가두는 절대반지

(<반지의 제왕 1: 반지원정대> 아르테 번역본 중에서, 일부 수정)


두 시의 구조가 어떻게 거의 정확히 대응되는지 보이는가? 톨킨은 <반지의 제왕>이 본래 중간계의 언어로 쓰인 원전의 영역본이라고 설정했는데, 따라서 영어로 적혀 있는 시의 특징들은 그 시가 본래 쓰여진 언어의 특징과 어떤 형태로든 대응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2. 세오덴 왕의 독전 연설

적들에게 포위된 동맹 곤도르 왕국의 수도 미나스 티리스를 앞두고, 로한의 왕 세오덴은 그를 따르는 기마병들에게 아래와 같이 외친다.



(1분 15초부터. 영화는 세오덴의 연설을 원작에서 나중에 등장하는 에오메르의 대사와 결합해서 더욱 강렬하게 바꾸었다.)


Arise, arise, Riders of Théoden!

Fell deeds awake: fire and slaughter!

Spear shall be shaken, shield be splintered,

a sword-day, a red day, ere the sun rises!

Ride now, ride now! Ride to Gondor!


일어나라, 일어나라, 세오덴의 기수들이여!
사악한 일들이 깨어나리, 화염과 살육이!

창은 흔들리고, 방패는 부서지니,

검의 날이요 붉은 날이라, 해가 뜨기 전까지!

이제 달려라, 달려! 곤도르로 달려라!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 아르테 번역본 중에서, 일부 수정)


톨킨은 로한의 언어가 앵글로색슨 시절의 고대 영어와 유사하다고 설정하였다. 따라서 세오덴 왕의 연설도 고대 영어 시가의 전형적인 특성들을 오롯이 갖추고 있다. 위에 소개한 반지의 시와 비교하면, 이 시의 음절 수는 그리 엄격한 규칙을 따르고 있지 않다. 단지 모든 행이 4개의 강한 음절을 포함해야 한다는 보다 약한 규칙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또한 행의 끄트머리에 비슷한 발음을 반복하는 각운 대신에, 강세가 주어진 음절마다 비슷한 자음을 반복하는 두운(alliteration)을 적극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반복되는 자음들을 색깔로 표시하였다). 이러한 특색들은 고대 영어를 비롯한 고대 게르만 어 문화권의 시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베오울프>를 최초로 문학적으로 분석했던 고대 영문학의 대가답게 톨킨이 자신의 전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골목쟁이네 빌보의 노래

고향에서의 마지막 생일 잔치를 마치고 오랫동안 아끼던 (절대)반지를 겨우 품에서 내려놓은 후, 비로소 홀가분해진 빌보는 홀로 길을 나서며 흥얼거린다.



(노래는 4분 3초부터 잠시 스쳐지나간다.)


The Road goes ever on and on,

Down from the door where it began.

Now far ahead the Road has gone,

And I must follow, if I can,

Pursuing it with eager feet,

Until it joins some larger way

Where many paths and errands meet.

And whither then? I cannot say.


길은 끝없이 이어지네.

문을 나서면 내리막길

길은 저 멀리 아득히 끝 간 데 없고

이제 나는 힘닿는 데까지 걸어야 하리.

팍팍한 두 다리를 끌고,

더 큰 길이 보일 때까지

많은 길과 많은 일을 만나는 곳으로

그다음엔 어디? 알 수 없다네.

(<반지의 제왕 1: 반지원정대> 아르테 번역본 중에서)


주인공 종족인 호빗답게, 현대 영어에서는 가장 전형적이고 편안한 리듬인 약음절-강음절 율격, 즉 약강격(iambic)으로 쓰인 시다. 모든 행마다 약음절-강음절 조합이 정확히 네 번 반복되므로, 이 시의 율격은 약강 4음보(iambic tetrameter)다. 로망스 언어권, 특히 프랑스 어와 이태리 문학의 영향으로 음절 수 제한 규칙을 받아들인 이후의 영어 시들은 이러한 약강 4음보 또는 약강 5음보(iambic pentameter)로 쓰인 경우가 많다. 독자들이 호빗을 가장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톨킨이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


4. 베렌과 루시엔의 노래

인간 남성 베렌과 요정 여성 루시엔의 사랑 이야기는, 비록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톨킨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던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 이야기에 종교의 차이와 가족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자신과 결혼해 주었던 아내 이디스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을 듬뿍 투영하였고(실제 그들의 묘비에는 베렌과 루시엔의 이름이 적혀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아라고른과 아르웬의 사랑 이야기 속에 그 줄거리의 뼈대를 다시 한번 활용했다.



(아라고른이 부르는 요정어 원본 노래가 40초 부근에 스쳐지나가듯이 나온다.)


베렌과 루시엔의 이야기는 신다린 노래로 만들어져 가운데땅의 인물들에게 널리 불리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그 노래의 일부를 아라고른이 번역해 호빗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상당히 길기 때문에 첫 번째 연만 발췌했다.


The leaves were long, the grass was green,

The hemlock-umbels tall and fair,

And in the glade a light was seen

Of stars in shadow shimmering.

Tiviel was dancing there

To music of a pipe unseen,

And light of stars was in her hair,

And in her raiment glimmering.


나뭇잎은 길고, 풀잎은 초록

헴록꽃잎은 크고 아름답고,

숲속 빈터에는 빛이 비쳤네,

어둠 속에서 아물거리는 별빛이.

티누비엘은 거기서 춤을 추고 있었지,

보이지 않는 피리 소리에 맞춰,

그녀의 머리에도, 그녀의 옷자락에도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네.

(<반지의 제왕 1: 반지원정대> 아르테 번역본 중에서)


강하게 읽히는 음절은 볼드체로, 반복되는 각운은 색깔별로 구분해서 표시했다. 시어가 고운 소리들로 정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약강4음보의 율격을 지키고 있고, ABAC BABC의 독특하면서도 정교한 각운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톨킨이 요정들의 문학에 자신의 미적 취향을 듬뿍 반영했음을 느낄 수 있다.


<반지의 제왕> 영화는 최고 수준의 각색이지만, 매체의 한계상 위에서 소개한 원작의 매력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었다. 영화에서 톨킨이 창조한 세계의 깊이에 매력을 느꼈다면, 원작을 가만히 읽어보면서 작가의 풍부한 상상이 그의 전문성에 힘입어 어디까지 정교하게, 미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 음미해 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