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 역사에 있어 화약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대적 무연화약뿐 아니라 고전적인 흑색화약도 병법과 무기의 역사를 완전히 뒤엎었다


그만큼 화약은 긴 시간 동안 전략물자였다

그리고 재수없게도 한반도는 화약을 생산하기에 좋은 편이 아니었다

화약의 3대 재료 중 초석은 광산이 없어서 최무선 선생의 오도짜세스러운 방법으로 만들어내야 했고, 

유황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한동안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다


여기서 조선이 유황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고려 말 최무선이 초석 제조법을 개발한 이후 조선에서도 초기부터 화약무기를 열심히 써 댔는데, 

거기 필요한 유황은 어딘가에서 구해 왔다는 이야기겠다


한국사에서 '어딘가'라고 하면 90%는 중국 아니면 일본이고

이번엔 일본이다


원나라는 고려를 의도적으로 불구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에 화약 재료 같은 걸 수출해 줄 턱이 없었고

명나라 또한 전략물자인 화약 재료를 조선에게 공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명에는 초석 광산도 있지만, 같은 이유로 조선에 공급하지 않아서 최무선 선생이 갖은 노력을 했다


반면 일본은 전역이 화산지대라 황이 많이 생산되었고, 이 시기 일본은 화약 생산 능력이 없었다

일본은 이 냄새나는 카레가루를 조선과의 교역품으로 적극 제시하였다

이 교역은 세종 1년에 대마도 왜구 골통을 부순 이후로 전성기에 달해서, 

그 후 10년 동안 공적으로만 20만 근의 유황이 (주로 대마도나 큐슈 등) 일본에서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성종 대에 조선의 화약 보유량은 23만 7천 근이 되어, 화약 500만 근을 만들 수 있는 양이 되었다

이후로도 유황은 무지막지하게 유입되어, 중종 20년(1525)에는 유황 그만 사자고 호조와 예조가 한판 붙기도 했고 

중종 37년(1542)에는 조선이 노재팬 노유황을 외치기도 했다


다만 국가 간의 교역이라는 게 꼭 필요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도 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교역은 종종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명종 12년(1557)년에는 조선의 각종 제한에 일본인들이 항의했고, 조선은 유황을 구입하는 것으로 쇼부를 봤다



시대를 보면 슬슬 임진왜란이 다가오는 시기다

일본은 1543년에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입수한다

특히나 이때 일본은 전국시대로, 서로가 서로를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면서 자연스럽게 화약에 손을 대게 된다

국외로의 유황 생산이 통제되었고, 조선은 아직 유황이 많았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전쟁으로 조선은 좆빠지게 고생을 했고 화약도 좆빠지게 소모됐다

임진왜란을 치른 후 조선의 유황은 오링난다

명나라에 요청하고, 일본에도 무역을 요청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화약의 중요성은 전쟁과 역사가 증명했고, 각국 정부는 당연히 유황 수출을 통제했다


통제한다고 해서 안 하는 건 하수다

고수는 몰래 한다

조선도 그리했고, 개인, 관료, 심지어는 정부 차원에서 밀무역이 시작되었다

다만 쉽지는 않았고, 대마도 태수가 극태유황을 휘두르면서 꺼드락대고 조선 관료가 그걸 어쩔 수 없이 받아먹는 상황도 연출된다

감히 일본과 유황을 밀무역한 자에게 벌로 관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제 개편과 북벌을 추진하던 조선의 유황 수요를 충족하기는 어려웠다

청과 일본의 단속이 더더욱 심해진 것도 한 요인

조선의 싱글벙글 유황긴빠이도 결국 쫑나고, 현종 대에 이르러서는 국내에서 유황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게 된다


조선이 실용적인 유황 채취법을 획득하게 된 것은 효종 말년대, 연도로 보면 1650년대이다

채취법은 일본 혹은 청, 아마 일본에서 긴빠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같은 17세기에 염초 제조법이 확립된 것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증가한 화약 수요를 따라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다만 문제는 돈이었다

왜란 이후 조선 정부는 거지가 되었고, 유황과 염초를 생산할 비용을 다 대 줄 수가 없었다

정부는 각 도의 군아문에게 화약 생산을 짬때렸고, 

군아문이 각 읍의 화약 생산을 관리하는 형태로 화약 생산 조직이 형성된다


유황이 문제였다

초기 유황 생산은 왜인지 모르게 지지부진했다


유황 광산이 발견되면 당연히 농사짓던 사람들이 유황업에 동원되는데,

정부에서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조세를 면제했고 

지방관들은 수입이 줄어 좆같아했다

유황광산 발견을 지방관들이 숨기거나, 채굴장 개설에 사보타주를 놓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돈 앞에서는 나랏님도 눈에안뵈지


정부에서는 유황광산 발견자에게 큰 상을 내리고 해당 광산의 CEO로 임명하는 제도를 실시한다

전국의 유황 마스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광산을 뒤지기 시작했고, 

1669년에는 좌의정이 "유황은 생산처가 많아서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유황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유황 채굴장, 이하 '유황점'의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감관 - CEO, 대개는 유황광산을 발견한 유황마스터, 모가지당하고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음

황장 - 기술자, 장인, 유황점의 매출에 비례해서 월급을 받음

모군 - 동원된 아쎄이, 대개 황장의 10배 비율로 편성됨


다만 동원된 아쎄이라고 해서 좆같은 대우를 받는 건 아니었다

유황 채굴은 어디까지나 군사상 목적이기 때문에, 유황점에 종사하는 모군들은 군역과 호역이 면제되었다

또한 유황점이 논밭을 보유했을 때에는 그걸 경작하고 자기 몫을 가져갈 수도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지방관에게 내는 여러 조세가 면제되기도 했고

조선 중후기에 일반 농민한테 꼽힌 빨대가 몇 개인지 생각해 보면 카레광산이 그렇게 나쁜 직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황점 근처 농민들은 유황점에 모군으로 모집되는 걸 선망하기도 했다

감관과 황장은 유황점이 잘나갈수록 돈을 많이 버는 구조고, 감관은 벼슬자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유황점의 모군 수와 생산량을 '통제'했다


당연히 무언가를 '몰래' 하는 놈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런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 위에서 내려온 운영비를 빼돌린다

 - 모군을 부려서 광산 주변의 산림을 무단 벌채한다

 - 장부에 없는 그림자 황장, 그림자 모군을 모집하여 유황 생산량을 늘린다. 늘어난 수량은 당연히 암시장에 팔아먹는다

 - 모군을 동원해 민간을 수탈, 이것저것을 모으고 그걸 위에 바쳐서 벼슬자리를 받는다


아! 달콤쌉싸름한 유황긴빠이의 추억이여!



이런 골아픈 대유황시대도 시대의 변화와 맞물려 끝을 맞게 된다

먼저 1700년대부터 대전이 없는 평화기가 찾아왔다

또한 군역 대신 베를 납부하는 납포군의 증가, 군제 개편으로 군인의 수 자체가 확 줄었고, 마찬가지로 화약 사용도 줄었다

상품경제도 활성화되면서 군아문이 독점하고 있던 유황 생산권을 민간 업자들이 채 가게 되었다

거기에 정부에서는 화약 매입 가격을 삭감하는 등, 이제 군아문은 유황점을 유지할 이유를 상실했다

이렇게 유황 생산은 민간 기반으로 스르륵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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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는 유황을 저렇게 골아프게 수급할 필요가 없다

석유에 함유된 황은 연소되면서 황산화물을 생산하는데,

황산화물은 지구를 지옥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일등공신이다

국내 여러 정유사는 열심히 석유에서 황을 빼내고 있고(탈황), 

석유 정제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산된 황은 다른 기업들이 받아서 써먹기 좋은 형태로 정제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황을 수출하고 있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유황광의 개발과 유황점의 운영, 정경준, 2017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조선시대 광업사연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