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을 초창기 페미니스트인 보부아르라면 어떻게 보았을까.

 보부아르는 지금 현재의 페미니즘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긍정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답한다.

 "보부아르라면 당연히 긍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부아르가 쓴 제2의 성을 읽어보면 그 생각은 바뀌게 된다.

 페미니스트들은 보부아르가 제2의 성 1부의 첫 챕터를 주로 얘기한다.


 제2의 성 1부 초반 챕터는 역사책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일종의 대체 역사물이다.


 '여성이 멸시당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이런 느낌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이 무시당하고 존재가 얕잡힌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부아르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써내려간 대체역사이며 문학적 비유다.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완전히 허구라고 무시할 수 없는 진실미 있는 스토리다.


 제2의 성의 초반부는 그렇게 상상력과 과장, 비유가 잔뜩 들어가 있기에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말한다. 


 "제2의 성은 초반 챕터만 볼만하고 뒷부분은 볼 내용이 없다."


 그건 여성멸시의 역사를 과장스럽게 써둔 초반 챕터가 너무나도 '재미'있기 때문이리라. 대체역사물은 늘 재미있는 법이고, 심지어 그 대체역사의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존재라면 더더욱 재미있는 법이다.


 하지만 대체역사물로 보부아르를 즐기고 치울 것이면 뭣하러 제2의 성을 읽는단 말인가.

 

 페미니스트 모두가 제2의 성을 페미니즘 이론서이며, 오래된 페미니즘 사상이 담겨있을 뿐인 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보부아르에게는 페미니스트의 면모만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보부아르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실존주의 철학자로써의 얼굴 또한 보부아르는 갖고 있다.


 보부아르는 독자들이 자신의 글에 완전히 몰입할 때까지 과장스럽고 호들갑스러운 페미니스트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중간 챕터쯤 가서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철학자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2의 성에서 보부아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건, 여성의 권리가 아니다.

 보부아르가 말하려고 한 건 바로 여성의 '실존'이다.


 내가 이걸 느낀 건 초반 파트에서 보부아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쓴 한 문장 때문이었다.



 '여성은 정성스럽게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자신이 그 음식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한다.

 하지만, 배로 들어가고 곧 사라져버릴 음식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문장이 내 눈길을 끌었다.



 음식은 배로 들어가고 사라져버렸을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음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인스타에 올리기 좋게 화려하게 플레이팅된 접시가 아니다.

 식사가 끝난 후의 빈 그릇이다.


 그런데 어째서 보부아르는 요리가 사라지기에 의미없는 것이라 말한건가.


 이 문장은 제2의 성에 관해 얘기할 때 거의 언급되지 않는 문장이다.

 하지만 제2의 성의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보부아르가 음식은 먹어서 없애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는걸 몰라서 저런 문장을 쓴 것은 아니리라.

 보부아르가 비판한 것은 '자신이 대단한 음식을 만든다고 자랑하는 여성'일 것이다.



 훌륭한 요리를 만드는 여자니까 나는 훌륭한 여성이다.


 이것을 인생 최대 업적으로 삼는 여성을 바라보며 보부아르는 '요리에 집착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요리에 집착하는 여자는 매우 많다. 한국만 봐도 종갓집 어머님들께서 복잡한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밑반찬에 집착한다고 비꼬는 풍자가 많지 않은가.


 요리에 집착하는 것. 이것은 가정 안에서 여성이 부여된 역할. 그것에 과하게 충실해져서 나온 것이다.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따라 형성되는 여성의 특징. 이것이 바로 여성성이라고 보부아르는 생각했다.


 보부아르가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인물로 거론되는 건 '여성성'이 생물학적인 이유가 아닌, 사회적인 이유로 형성된다고 본격적으로 주장한 학자이기 때문이다. 요리에 집착하는 성질, 이 또한 사회적으로 형성된 여성성이다. 


 중반챕터로 가면 비슷한 어조의 표현이 나온다.



 '아름다운 옷, 화장 등으로 아름다움을 가꾸려 노력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는 여성들은 많으며 부정하더라도 실제로 존재한다.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그러나 그러한 만족감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대충 이런 식으로 여성성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는 문장이 나온다.

 보부아르는 항상 여성성에 대하여 '여기 집착하고 이것을 손에 넣어 기뻐할 수도 있겠지만 의미없고 부질 없는 것이다. 집착을 버려라'라고 말할 뿐이다.


 그럼 슬슬 궁금해진다.

 보부아르는 대체 무엇을 의미있다고 여기는지.


 여성성 비판을 하고 난 뒤, 제2의 성 후반부에서 보부아르는 본격적으로 여성의 실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이쯤가면 보부아르의 얼굴은 사르트르의 얼굴과 다를게 없다. 여성들에게 실존주의 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제2의 성을 쓴 것이다.


 여성성에 집착하고 매달려봤자 실존은 불가능하다.

 여성이여, 주체적인 삶을 살라. 


 보부아르가 말하는 주체적인 삶은 아이돌처럼 어디서든 주인공이 되려 하는 삶이 아니다.



 아이돌은 무대에 속박되어 있고 카메라에 속박되어 있고 관중의 시선에 속박되어 있다. 퍼포먼스는 수많은 속박 속에서 이루어진다. 주인공처럼 보이는 삶은 수많은 속박 속에 놓여있고 거기에는 아무런 선택의 자유가 없다.


 보부아르는 이런 것은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보았다.

 오히려 그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삶이다.


 꽤 난해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을 상상해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석가모니는 말했지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나는 제2의 성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거라고 이해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을 보부아르는 어떻게 볼까.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겠다며 숏컷을 권장하고 치마를 내다버리는 탈코 운동.


 '이기야!'로 대표되는 여성의 언어를 새롭게 획득하고자 하는 메갈어 운동.


 서프러제트,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허구의 창작물을 감상하고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역사야!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역사를 알아야해'라며 존재하지도 않는 대체역사에 집착하고, 근거없는 가짜역사책이 사실이라 믿으며 헛돈을 날리는 페미역사알기 운동.


  외모에 집착하고, 언어에 집착하고, 역사에 집착한다.



 그것이 대체 여성성에 집착하던 기존의 여성과 무엇과 다르단 말인가.


 그런 덧없는 것에 집착하는 삶에 무슨 주체성이 있단 말인가.

 보부아르라면 그렇게 말할거같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