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이 없는 이가 용서를 비는 두 손이 검에 의해 잘려 나간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배에 검이 박혀 눈 감지 못한 이들의 무릎이 조금씩 꿇린다.


공포에 젖어 도망치는 이들의 등에 수많은 철의 가시가 박힌다.


잘린 목을 들고 우렁차게 소리를 치는 이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서려 있다.


집이 불탄다. 세상이 불탄다. 그리고 사람이 불타 비명을 지른다.


미치광이들의 시대다.


남자는 그 광경들을 보며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正)이었다. 바름을 향해 나아가고 올곧음을 향해 검을 내딛는 이였다. 그런데 지금 이들을 정(正)이라 부를 수 있는가?


사(邪)의 찬미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앞세워 패악질을 일삼는 이들을 과연 바름을 구가할 수 있는가?


남자는 구역질이나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게워내지 못해 헛구역질하는 도중에도 여러 이들의 피가 서서히 그의 발치에 매달려 살려달라는 듯이 매달려 꿈틀거렸다. 


아. 이곳은 무간지옥이다. 나는 이들을 막지 못한 죄로 벌을 받고 있다. 나는 죄인이다. 이제 세상에 협과 의는 없다. 그것들은 저들과 함께 죽어 나간다.


그는 고여 꿈틀거리는 피를 피해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수많은 이들은 이미 그들만의 무(武)와 명분에 심취해 고작 남자 하나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나 정도는 없어도 될 만큼의 살육이었으니.


그러다가 낡은 창고의 그늘진 모퉁이에서 모래가 무언가에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작은 발이 보였다.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였고,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곳으로 걸어가 모퉁이에 몸을 들이밀었다.


히끅거리지도 못하는 소녀 한 명이 무언가를 꼭 쥐고 눈을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불에 의해 진 그림자 안에 있었기에 그는 그것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나비 모양의 무언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소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밖을 향해 내 달렸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충동적인 행위였고 그다음의 일 또한 그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는 그를 바라보다가 흥미를 잃어 제 앞에 놓은 이를 처리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남자는 남은 이들에게서 도망쳤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달이 지고 해가 산 중턱 언저리에서 빛을 서서히 내고 있을 때였다.


그제야 그는 품 안에 있던 소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망치렴. 어디로든.”


소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자신을 살려주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이유라도 있는지. 바들거리는 손과 다리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것을 보며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과는 기만이요 속죄는 능멸일테니. 그렇기에 그는 소녀를 놔두고서 뒤돌며 말했다.


“언젠가, 네가 나를 찾아오게 된다면…그때는 네 마음대로 날...”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소녀를 놔둔 채 걸어 나갔다.


소녀가 커서 복수를 바란다면 그는 응당 분노에 찬 칼날을 몸에 쑤셔 박힐 것이고 손을 더럽히지 않는 죽음을 바란다면 혀를 잘라 입에 피를 머금고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막지 못한 이의 마지막 약속이었으니.


ㅡㅡㅡ


힘으로 남을 구하는 것을 ‘협(俠)’이라 하고, 재물로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고(顧)’라고 한다. 협과 고를 겸하는 것은 ‘의(義)’라고 한다.


남자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무엇이 협(俠)이고 무엇이 고(顧)이며 무엇이 의(義)인가. 정도(正道)가 뒤틀려버린 이 세상에 그러한 낭만적인 말들의 나열은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 자신이 검을 놓을 일 없이 이렇게 낚싯대나 붙잡고 있지는 않지 않았겠는가?


그런 자조적인 말들을 입 안에서 곱씹는 남자는 제 스스로를 무용(無用)으로 불렀다. 그대로의 의미처럼 그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저 온종일 집 앞의 연못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내는 범부(凡夫). 혹은 그 이하. 뭐 그런 존재로.


“무용하구나.”


그는 미끼가 빠져버린 낚싯대의 끝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얌체 같기도 하지. 무용은 그렇게 되뇌며 다음 미끼를 걸기 위해 다른 한 손을 휘적거리며 미끼통을 찾아대었다.


그러다 문득 쓱 하고 미끼통이 그의 시선으로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왔을 때, 그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조금 더 옆을 힐긋거리며 말했다.


“오늘은, 또 왜 왔니.”


“왜요? 난 오면 안 되나요?”


목소리의 주인은 당찬 소녀 혹은 조금 앳된 티를 벗어난 스무살 남짓 먹은 여인의 것이었다. 그리고 무용은 그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마을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살아가는, 행색에 맞지 않게 색이 바랜 옥이 박힌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을 땋아놓은 밤빛 머리끝에 달고 다니는 동그란 눈의 여자.


그녀는 자신을 해월(海越)이라고 소개했었다.


바다의 넓음을 알기에 그 웅장함을 넘으려는 여인. 이라고는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였지만 무용은 그것을 굳이 귀담아듣지 않았다.


넓음을 아는 자가 어찌 경외심보다 겁을 먼저 먹지 않는가. 깊음을 아는 자가 어찌 그 어두움에 잡아 먹히지 않는가. 어찌, 한 발자국을 내딛으려 하는가. 그것에는 어두움만이 가득한 것을.


무용은 건네준 미끼통에서 작은 지렁이 한 마리를 꺼내 꿰어내며 말했다.


“…아직 낚은 것이 없어 나눠줄 것이 없다.”


“아니. 저기요. 누가 보면 매일 물고기 얻으러 온 줄 알겠어요.”


“…오늘은 아닌가?”


“아니라곤 할 수 없죠.”


자. 빨리 낚아봐요. 해월은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가져온 작은 나무 의자를 무용의 옆에 놓으며 앉고서는 싱글거렸다. 


그는 이 상황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이제는 체념의 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미끼를 던져놓고는 한 팔을 쭉 뻗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잘 훈련된 검사가 칼을 뻗어 겨누는 듯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월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무용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오히려 관찰에 가까웠다. 낚시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절제된 행동과 은연중에 나타나는 무림인 특유의 버릇과 말투.


그녀는 무용이 무림의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림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나쁜 무림인이에요?”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군.”


“말에 따라 싫어질 수도 있잖아요?”


“… 난 검을 잡지 못한다. 잡을 생각조차 없지.”


협과 의가 없을 따름이라. 무용은 그렇게 말하며 흔들거리는 낚싯대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팔을 들어 올렸다.


찌에 걸려 퍼덕거리는 생선의 힘찬 몸짓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물이 담긴 통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죠?”


“나는 무용(無用)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선악을 구별 지을 수 없지. 판단은 네가 하는 거다. 내가 아니라.”


“그래요. 뭐... 물고기 주는 거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네요. 게다가 덥수룩한 수염 좀 잘랐으면 더 선해 보일 텐데.”


무용은 오늘따라 틱틱거리는, 정확히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검증하려는 해월의 말에 위화감을 느끼다가도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도 다시 묻지 않으면 이 천방지축인 여자는 분명히 끈질기게 티를 낼 것이기에 그는 넌지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나.”


“음. 또 찝쩍대는 무뢰한들이 있어서요. 좀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죠.”


“아. 그 치(癡)들인가.”


“네. 저는 가족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라느니 여자 혼자서 살기엔 팍팍한 세상이라느니. 뭐 그런 낭만 없는 말로 저를 꼬시는데...”


“살기 힘든 세상은 맞지 않나?”


“아잇! 아저씨! 공감!”


“…여하튼.”


“그래요. 뭐... 아저씨가 무림인이면 좀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죠.”


무용은 이 말에 어느 정도 거짓 혹은 속내가 있다고 확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사람을 떠볼 때 혹은 거짓을 섞을 때 머리끝의 옥 장식을 매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선을 돌리고 옥 장식을 매만지는 그녀에게 그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또 결론은 무용한 일이었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왜요? 내가 아저씨 꼬시려고 이런 말 하는 거 같아요?”


“그렇게까지 말은 안 했다.”


“흐음… 수염 좀 깎고 와요. 앞머리도 조금 올려보고. 그럼 생각해볼게요. 잘생긴 얼굴 아깝게 왜 가리고 다니는 건지?”


“…수염이 그렇게 안 어울리나.”


“네. 엄청.”


해월은 그렇게 말하며 무용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후줄근하게 해진 앞섶 사이사이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과 수염만 깎는다면 드러나는 턱선.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불그스름한 두 눈.


그렇기에 그녀는 그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가 만약 자신이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 즉, 무림인이라면.


만약 무림인이어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런 자가당착들이 머리에서 휘저어진다.


해월은 그런 상념들을 치우기 위해 가벼운 한숨을 쉬어대었다. 물론 무용에게는 단순한 한숨 혹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어쨌든 도와줄 거죠?”


해월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그에게 다가갔다.


“그 치들이 너에게 위해만 가한다면…생각해보지.”


무용은 다가오는 해월에게서 조금 멀어지며 말했다.


“좀! 도와줘요!”


이번에는 해월이 좀 더 달려들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의자에서 균형을 잃으며 넘어진 해월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울렸다. 무용은 반사적으로 뒤로 넘어지며 그녀를 안았다.


털썩거리는 소리는 한 사람분의 몫밖에 울리지 않았다. 등과 바닥을 맞댄 무용과 그의 위에서 엎드린 해월. 그녀는 가벼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도와. 줄 거죠?”


무용은 해를 등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슬픈 얼굴을 본 것도 같았지만 그는 그녀의 얼굴이 그림자로 가려졌기에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에 확실히 답을 주지 않았다. 말(言)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무겁고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의 평보다 조금 더 신중해야 하는 법이었기에.


해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대답해줘요.”


무용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가 위험하다면.”


“또 그 소리야.”


“확답이라는 것은, 위험하다.”


“에휴. 내가 뭘 바라고 말하는 건지.”


해월은 자신의 손을 지지대 삼아 일어난 무용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신보다 머리 한개 반은 더 큰 그를 올려다볼 때에, 그녀는 속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것이 무슨 감정이라거나 심정인지는 몰랐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을 지나쳐 통 속에 담긴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제 처지도 모른 채 안에서 껌뻒거리며 숨만 쉬고 있는 물고기. 그녀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저씨 찜 좋아하죠? 밥 해줄 테니까 같이 먹어요.”


무용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묘한 직감이 그의 등골을 스쳐 지나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는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위화감. 그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싶었지만, 이런 직감들은 꽤 잘 들어맞는 것이 세상살이였다.


“아저씨?”


해월은 순간적으로 심각해진 그의 표정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그저 길 하나와 그 옆으로 무질서하게 자라난 풀들 뿐이었다.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어야 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오늘은 바래다주지.”


“웬일이래요? 평소 같았으면 ‘그냥 가라.’ 라고 했을 텐데.”


“…말 들어.”


“농담이에요. 농담. 자. 쉬고 있어요. 기가 막히게 만들어줄 테니까.”


해월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앞섶을 털며 그들의 뒤에 있는 낡은 오두막으로 물고기를 껴 안아 걸어갔다. 통에 담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은 아주 사소할 정도였다.


“그래. 기우야. 모든 것이 기우여야 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낚싯대를 연못에 던져대었다.


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