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체(勞瘵)요."



의원의 말에 한 남자의 낯빛이 사색이 되어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소?"


"안타깝지만, 이런 증세는 그 병이 아닌 이상 그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소."


"하하하... 웃기는 농담이오. 세상에 적수가 없는 이 내가 그런 질병에 걸릴 리가 없지 않소?"



그는 그렇게 애써 웃어 넘기려 했으나,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의원에 모습에 표정이 와락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 육시랄 것이! 뭐라도 말 좀 해보란 말이다! 사람 살리라고 준 그 천한 손은 폼으로 달고 있는 것이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의원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으나, 오히려 그 늙은이는 표정을 풀지 않고 그에게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 대협! 지금 이렇게 무리하게 힘을 쓸 때가 아니오! 부디 이 노생의 말을 들어 주시오!"


"시끄럽다! 나는... 검제라 불리는 남자다. 이딴 걸로 무너질 내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노기를 띠며 노인을 우악스럽게 쥐고 흔들었으나, 순간 다시 증세가 심해져 노인을 놓고 엎어졌다.



"쿨럭, 쿨럭! 으윽... 젠장..."


"장 대협!"



그는 바닥에 대고 각혈하며, 허망하게 의원의 부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장차 검으로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라 중인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당대 최고였던 검제의 몰락이었다.





***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 싫증을 느껴 무턱대고 집을 나간 불량아였다.


그렇게 세상 밖에 나간 악동은 매일 거리에서 쌈박질만하다 한 협객의 눈에 들어 그가 속한 문파에 들어갈 기회를 얻으니,


그곳이 바로 『곤륜파』였다.


그를 데려온 장문인, 『당월』은 굉장히 엄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공에 재능 없는 사람에게는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고, 오직 싹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그는 그 버릇 없는 아이에게 예법을 가르쳐 주었고, 재능 있는 육체에 혈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아이 역시 자유가 억압된 상황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몰라보게 강해지는 모습에 만족하며 더더욱 무공 수행에 매진했다.


그렇게 10년 후, 그는 소림사에서 개최한 비무대회에서 가공할 만한 검술 실력으로 우승하여, 무림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포혈검성(暴血劍星) 장제혁』, 그의 나이 불과 15살 때의 일이다.




***




"...당 장문인,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오?"


"말 그대로다. 너는 차기 장문인이 될 그릇이 아니다."



그리 말하며, 그는 좌중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제부턴 유천검협(流川劍俠) 주율백이 차기 장문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거다.


내가 죽으면, 이 아이가 장문인의 역할을 할 테니 장로들도 이해하고 잘 이끌어 줄 수 있도록."


"예!"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장문인의 말에 동의했다.


오직 단 한 사람, 장제혁만이 그에 대해 반발했다.



"난 인정할 수 없소! 내공도 형편없는 놈이 장문인은 무슨 장문인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말해보거라."



그는 격양된 듯 새빨개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그는 아직 내공이 형편없고 기술이 미숙하여 지난번 비무회에서도 큰 낭패를 보았소."


"내공은 심법을 통해 계속해서 성장시키면 되고, 기술은 수련을 통해 제대로 완성시키면 된다."


"그는 성격이 너무 유순하고 우유부단하여 파 내 중대한 결정을 놓칠 수 있소."


"그의 유순한 성격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위험한 사건들도 훌륭히 해결하여 『유천검협』이란 칭호를 얻었으니 그러한 평가는 옳지 않다."


"다 알 만한 사람이 왜들 그러시오. 장문인의 자리에 어울릴 만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말끝에 한기 섞인 웃음기가 서린다.



"바로 나요."



그 말을 듣자 당율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지더니, 이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것이 내가 너를 차기 장문인으로 선택하지 않은 이유다."



그에 말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기 때문에, 장제혁조차 순간 당황할 정도였다.



"지난번 비무회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너에게 어느 정도 상당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네가 비무회에 우승하면서 나는 오히려 너에게 크게 실망하게 되었지."


"가당치도 않소! 내가 거기서 어떠한 활약을 했는데...!"



제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월이 그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네 무공에는 협이 없다."



그 말이 끝나자, 제혁은 망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요?"


"너의 오만함도, 너의 무례함도 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협을 깨닫고 고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저번 비무회를 보고 깨달았다. 너는 그저 남의 위에 올라가고 싶어 무공을 배울 뿐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게 뭐가 잘못된 거란 말이오? 재능있는 자는 언제나 정점에 서야 하는 법 아니겠소!"



그러나 당월은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그저 한 마디 덧붙였을 뿐이었다.



"더 이상 네게 해줄 말은 없다. 본 파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네가 떠나거라."


그 말이 당월이 그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이보시오. 당 장문인!"


"....."


"대답해 보시오! 알량한 예의보다 압도적인 무력이야말로 무림의 법도가 아니오!"


"....."


"뭐라도 말해 보시오! 벙어리처럼 있지 말고!"


"....."


"...크흐흐흐... 하하하하하!"



자신이 파문당했음을 깨달은 그는, 소름끼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좋소. 당문인께서 바라는 대로, 이 몸은 조용히 사라져 주겠소.


남은 여생동안 그 어리석은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지!"



시간이 술시(戌時)를 지나고 있을 때, 그렇게 그는 방에서 나와 떠났다.


곤륜파에서 배웠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의 보법을 통해서.



"난 반드시 정점에 올라가 서주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확실하게!"



그것이 그가 곤륜파를 떠나면서 남긴 한 가지의 다짐이었다.




***




"끄으으..."



그는 눈을 떴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과거를 떠올린 것은 맹세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일까, 불귀의 객이 될 혼령의 주마등일까.


분명한 건, 그의 꿈은 이대로면 한바탕의 호접지몽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끄, 크흐흐흐흐....."



그의 다짐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훌륭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곤륜파를 떠난 직후, 그 다양한 고수들을 꺾으며 배우지 못한 곤륜파의 무공들을 스스로 알아가기 시작했다.


실전을 통해 자신이 사용하던 무공의 단점들을 보완하고, 다른 문파들의 기술들을 응용해 자신만의 무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그는 당 장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공의 천재였다.


그가 창시한 『혈제참멸검식(血帝斬滅劍式)』의 초식은 날카로우면서도 잔혹해 무림인들에게도 화자될 정도였다.


그의 나이 25세 때, 그는 다시 비무회에서 일부 곤륜파의 고수들조차 무너뜨린 후 승리하여 『포검혈제(怖劍血帝)』란 별호를 얻게 되었다.


이후 소림집회 때마다 수시로 참석하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마교 인물들조차 도살하며 나름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물론 악명이며, 돌아오는 눈빛은 동경이 아닌 두려움이었으나, 그는 그런 건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정점에 있다는 우월감, 강자를 밟고 올라갔다는 성취감만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자신의 사부였던 당 장문인이 별세하시고 주율백이 장문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만 해도 그의 승리감은 잦아들지를 않았다.


그랬었다. 어느 순간 몸이 이상함을 느끼고 이를 무시했다 각혈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크, 하하하하하..."



그러한 우월감은 자신이 노체에 걸렸음을 알게 되면서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노체란, 주로 폐에 발생하여 신체 내부의 조직과 장기를 파괴하는 병으로, 운기조식을 불가능하게 하고 사람을 서서히 말라죽이는 불치병이다.


심지어 단전과 기맥을 망가뜨려 내상을 입히고 각혈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림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병이었다.



"흐흐, 흐흐윽... 빌어먹을..."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하북팽가에 있는 의료원에서 요양하면서 비속어를 내뱉는 것 뿐이었다.




***




"이 망할 시비가! 음식조차 제대로 못하는 거냐!"



이제 막 아침해가 동터오는 시기에, 때 아닌 호통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고함을 들은 시비는 벌벌 떨며 말을 이었다.



"하, 하오나 나리... 음식을 먹지 않으면 병을 이길 기운조차 없어 나을 것도 낫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좀 드시지요."



그러나 『이긴다』는 말을 듣자,



-쨍그랑!



제혁은 그릇을 던진 후, 더더욱 눈을 부라리며 성질내기 시작했다.

 


"됐고 썩 꺼져라! 이따구로 만두를 쪄 올 거면 두 번 다시 내 앞으로 가져오지 마라!"


"으, 예...!"



결국 시비는 그 그릇에 든 음식을 들고 방문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듣고 보는 점소이와 농민들은 혀를 내두르며 제혁을 헐뜯기 시작했다.



"세상에, 뭔 저런 놈이 있다냐?"


"그니까, 저러다 치료도 안해주면 지만 손해지, 다른 사람이 손해냐?"


"그나저나 저 의원님은 왜 저런 불한당 놈을 치료하고 있는 게요? 나같으면 벌써 쫓아냈겠는디."


"쉿, 저래 봬도 옛날에 그 무서운 검객이랬잖냐. 누가 기회 삼아 시비걸다 목이 떨어져 나갔다는데, 의원들도 무서워서 못하는 게지."



중인들이 이런 저런 비난을 하고 있는 사이, 한 거지만이 그런 상황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2개의 매듭을 묶은 새끼줄을 차고 있었다.




***




시간이 어느덧 해시(亥時)를 넘어가고 있을 때, 제혁은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간에 잠은 이젠 들지도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수도 없이 깨기 일쑤고, 어쩌다 잠들어도 그때 그 일이 꿈 속에서 또 벌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또 이렇게 뒤척이다 어느 좀 졸다 눈을 뜰 것이라고, 그는 이미 그렇게 확신했다.



"하! 버러지 같은..."



그는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있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헛웃음을 흘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진시초(辰時初)에 고작 시비에게 화낸 일이 생각난 것이다.


딱히 그 계집에게 욕을 한 것이 미안했던 것은 아니다.


오만하고 자만심 넘치는 그였기에, 그런 천한 존재에게 욕지거리를 날린 것이 쪽팔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서민들을 너그러이 이해해주면 될 것을, 사소한 것도 참지 못하고 화내는 소인배가 된 것이 창피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간에, 그가 시비에게 화를 낸 것은 우발적인 일이었다.


지금의 그는 진수성찬을 차려놔도 그것을 맛있게 먹을 만큼의 식욕도 남아있지 않았다.


허기를 느끼면서도, 음식에 입에 넣을 의욕조차 나지 않는 것이 벌써 병 따위에게 진 느낌이었던 것이다.


별 것 아닌 시비의 말에도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일은 한심했다고 생각하며 허공을 응시하던 와중, 그의 눈빛이 한 차례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안방의 공기가 변한 것을 느낀 순간, 주변에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제혁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옆에 놔둔 검을 들며 말했다.



"어떤 버러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이 아까운지를 알면 돌아가라."



그 말을 들은 한 인영이 우뚝 멈춰 서더니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에 답했다.



"크크크...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렇지 않소? 장제혁 나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군."


"크핫하... 애석하게도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요. 당신이 거절 못할 만한 제안을 전하러 온 것이지."


"거절한다면?"


"수락하면 제안이고, 거절하면 제압해서라도 그 분께 끌고 가지."


"그게 바로 협박이라는 거다, 머저리."



곧 주변이 서늘하게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유형의 살기가 제혁이 홀로 있는 안방에 가득 차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의료원의 방비는 형편없군. 이딴 놈팽이들이 잠입하는 것도 제때 알지도 못하고.'



제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일행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 남자가 좌중들을 향해 명령했다.



"야들아, 실력 좀 보여봐라."


-츠츳!



그 순간 몇 명의 신형이 순식간에 제혁의 앞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기세를 보아하니 그들 모두 『검기상인(劒氣傷人)』 이상의 고수들로, 그 기만으로 능히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들과는 달리 제혁이 가진 격의 차이가 현저히 드러남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미 단전이 크게 망가졌지만, 그런 그가 검강을 발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검을 뽑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위력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력을 본 제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작 이 따위 실력으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버러지가!"


-콰앙!


"끄아악!"



그가 검강을 더욱 강하게 전개하자 일부 살수들이 막대한 내상을 입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제혁은 이를 놓치지 않고 전방에 있는 당황한 두 살수를 향해 검초를 펼쳤다.


자신의 『혈제참멸검식』이 아닌, 곤륜파 기본 검술인 『한매검법(寒梅劍法)』의 초식으로.



-촤아악!



기본 검초였을 뿐인데도, 살수 두 명의 목이 잘려 나갔다.


이어서 좌측에 있는 살수들의 균형을 무너뜨린 후 『낙안권(落雁拳)』의 초식을 펼치려는 그 순간,



"...끄윽!"



제혁은 갑작스러운 구토감을 느끼며 바닥에 고꾸라질 수 밖에 없었다.



"쿨럭, 쿨럭... 콜록!"



객혈이었다.


겨우 균형을 잡은 살수들이 기회를 잡아 제혁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제혁이 선택한 수는, 살수들의 표정을 황당함으로 물들이게 했다.



-팍!

-턱, 부스스...



그가 나려타곤의 수를 펼쳐 위기를 넘긴 것이다.


그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 남자가 폭소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푸흐, 하하하하하! 설마 그대 같은 고수가 나려타곤 같은 하찮은 신법을 쓰다니!


과연 병이 당신의 몸을 제대로 갉아먹었군!"


"다... 닥쳐라!"



그는 이립(而立) 중반 쯤 되어보이는 흑의인으로, 그의 눈빛은 한 줄기 조소를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제혁은 그들이 누군지를 깨달았다.



"하하하... 이제 보니, 마교 놈들의 떨거지들이였군. 이제와서 내 목이라도 딸 생각이냐?"


"당신의 무공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그랬겠지. 하지만 역시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군. 난 그대에게 거래 제안을 전하러 왔소."



겨우 안정을 되찾은 제혁이 일어나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재능이 안 되어서 마교의 길로 빠진 새끼들에게 줄 도움 따윈 없다!"



그렇게 말하고, 보법을 통해 흑의인의 목에 칼을 대려 할 때였다.



"그대의 병을 고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오?"


"뭐...?"


"무공을 보아하니 당신이 좀 더 무리하면 우리들을 다 죽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오. 마교의 인물들은 셀 수 없이 많고, 당신의 수명은 유한하여 곧 꺼질 거요.


기왕 서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인데, 쓸데 없이 내력을 낭비하지 마시오. 우리도 당신의 힘은 필요하니."



흑의인은 가까운 거리임에도 제혁에게 전음을 쓰고 있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기 바라오. 재능이 아까우면 뭐라도 해 봐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창문을 통해 살아남은 몇몇 살수들과 함께 밖으로 도망쳤다.


그의 발 밑에는, 한 편지가 놓여 있었다.




-

포검혈제 장제혁,


그대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으니 의향이 있다면 명일 자시정(子時正)에 하북성 뒷쪽에 있는 허름한 객점으로 오시오.


2대 마교주

자귀홍

-




"..."


"나리! 방금 무슨 소란이었습니까? 이 시체들은?!"


"마교 놈들이 살수를 보내왔다. 쳐 죽였을 뿐이니 빨리 시체나 수습하고 꺼져라."


"어... 예!"




***




음산한 바람이 하북성의 주위를 매만졌다.


모두가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한 인영이 『운룡대팔식』을 통해 한 객점 안으로 들어갔다.


객점은 몇 달 전에 문을 닫아 이젠 다 무너져갔지만, 그 속에 몇 명의 신형이 보였다.


면류관을 쓴 한 복면인이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귀하라면 현명한 선택을 할 줄 알았소."


"시끄럽다. 어서 본론이나 말해라."



그의 말은 무례한 것이었으나, 그는 아랑곳 않고 자신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역시 장 대협은 소문대로 성격이 급하시군요. 그래도 한 배를 탄 사이니, 우리에 대해 소개해 주겠소.


나는 2대 마교주인 자귀홍이오, 옆에 있는 이 흑의인은 내 오른팔인 탁필정이라 하오."



귀홍의 소개에 필정만이 잠깐 고개만 끄덕였을 뿐 제혁은 별 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귀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여기 있는 음식이라도 조금 드시겠소? 우리 쪽 요리사가 만든 거라 아마 먹을 만 할 거요. 술 한 잔도 따라드릴 테니 사양하지 않아도 되오."


제혁이 힐끗 바라보니 과연 진수성찬 못지 않은 여러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술 또한 『대국주(大麯酒)』로, 상당히 좋은 술임은 틀림 없었다.


그럼에도 제혁은 별 다른 식욕이 들지 않았다.



"됐소. 쓸데없는 아첨은 필요없으니 그대가 바라는 거나 이야기하시오."



결국 듣다 못한 필정이 노발대발하여 소리질렀다.



"이 불구 자식이! 마교주님이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이는데 그따구로 오만하게 서 있을 거냐?


네 놈의 목에 철근이라도 있으면 그 목이라도 꺾어주마!"



"필정. 그만해라."



그런 그를 말린 건 마교주, 자귀홍이었다.



"하오나...!"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말아라. 우리 역시 그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의 제지에 필정은 더 이상 뭐라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하하... 부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그럼 본론을 말하도록 하겠소.


우리는 한 소녀를 찾고 있소."


"...그 소녀가 누구요?"



그의 물음에 귀홍이 답했다.



"『모산파』를 이끄는 선 장문인의 여식, 선아율이오."



그 말을 들은 제혁의 눈살이 점차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모산파』란, 무공보단 술법을 통해 발전한 문파로, 무공에 재능이 없는 이들이 부적술을 배운 것이 본 파의 발단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기에 이들은 도교 문파임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에게 사파 취급을 받게 되었으며, 후일 정파에서 퇴출되기까지에 이르었다.


제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흘겨보며, 더더욱 강하게 쏘아붙혔다.



"그딴 사파라 하기도 창피한 찌끄래기들을 찾아 뭘 하겠단 거지?


마교 부흥 위한 술법이라도 써달라고 절이라도 할 건가?"



제혁의 말에 귀홍이 절소(絶笑)한 후, 이에 화답했다.



"푸흐하하하하하! 장 대협께서는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장 대협 말씀대로 우리는 그딴 버러지들에게 큰 관심은 없소.


우리가 관심있는 대상은 선 장문인의 막내딸 『선아율』, 그 낭자 뿐이오."


"선아율... 그 낭자가 뭐 하는 작자인데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거냐.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이 거래는 없는 걸로 알아라."



귀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대해 입을 열었다.



"모산파는 옛날부터 다시 정파로 승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사실은 귀하께서도 잘 알고 있지 않소?"


"....."



"그러던 도중, 드디어 한 딸이 태어나면서 그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 것이오. 그 딸이 바로...!"



그리 말하고 그는 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반응해달라는 무언의 표시임을 안 제혁은 마지못해 그에 대답했다.



"...선아율이다?"


"바로 그것이오!"



귀홍이 들뜬 모습을 보이며 차가운 눈웃음을 지었다.



"그의 딸이 선천적으로 음의 기를 보통의 아녀자보다 더욱 강하게 타고 났던 것이오.


음의 기란, 본디 홀로 있으면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지만 양의 기와 함께면 오히려 더욱 강인한 힘을 낼 수 있는 법.


가능성을 본 그 노부는 그녀를 극진히 보살피고 네 살 때부터 점혈과 술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들었소.


이대로면 장차 멀지 않는 미래에 모산파에서 뛰어난 여고수 한 명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래서? 그 낭자가 너네한테 왜 필요한 거냐?"



제혁이 여전히 흥미 없다는 든 반문하자, 귀홍의 얼굴이 매섭게 변하며 일소(一笑)한 후 말했다.



"우리에겐 『활인제살환식(活人祭殺換式)』이란 술법이 있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그가 가진 내공을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술식이지."



그제서야 제혁은 이들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부부의 연을 맺지 않는 이상, 남성은 음의 기를 취하는 데 한계가 있소. 부부조차 양과 음을 온전히 취하지는 못하지.


하지만 누구보다 음의 기가 더 강하게 타고난 그녀를 제물로 바치면!"


"...음양이 완전한 천마가 탄생한다."


"역시 장 대협은 눈치가 빠르군요!"



귀홍이 제혁의 말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기뻐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마귀의 광소를 보는 듯 했다.


천마란, 마교를 뛰어넘어 무림의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 군림하는 것으로,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려 하는 마교주의 이상향이었다.


1대 마교주가 이를 시도했다 무림인들에게 의해 처참히 실패하여, 중인들의 머리 속에 천마라는 이름이 각인되는 계기가 생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인들은 마교주랑 천마를 혼용하여 부르고 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천마란 더더욱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임을 의미했다.



"하지만 모산파가 워낙 폐쇄적인 집단이라, 그들의 본산을 아무리 뒤져도 그들을 찾을 수 없었소."


"..."


"그 소녀를 데려오시오. 질병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겠소."



그는 여전히 귀홍을 노려보았다. 이는 남의 여식을 천마가 되기 위한 도구로 쓴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저 녀석들이 천마가 되든 말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과연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 들었던 것이다.


이어서 제혁은 입을 열었다.



"내가 모산파를 찾을 수 있을 거란 건 어떻게 확신하지?"


"귀하는 평이 안 좋다 해도 정파의 무인이고, 마도의 인물이 아니오. 의심도 덜 받을 거고, 수색에도 제한이 없을 것이오.


어쩌면, 병에 걸렸다는 점이 그들에게 있어 더욱 방심을 불러 일으킬 지도 모르지.


우리가 모산파를 못 찾은 건 적을 경계한 모산파의 무림인이 결계를 친 걸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오."



귀홍이 냉큼 이에 답했다.



"그럼 병은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냐?"


"만일 탐색 도중 약이 떨어졌으면, 전령을 통해 이쪽 객점 위에 있는 건물로 서신을 보내주시오.


평범한 객잔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마교의 은거지니 서신을 발견한 즉시 어떻게든 약을 찾아와 주겠소."



귀홍은 냉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내가 천마가 되면, 당신의 수명 문제도 해결될 터이니 말이오."



제혁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것이, 내 수명과 무슨 상관이지?"



"천마가 된다면 그 무엇도 다룰 수 있다고 들었소. 공간도, 시간도, 심지어... 수명도..."


"...!"


"내가 천마가 된다면, 그대의 공을 치하하고 영생의 능력을 그대에게 드리겠소.


그러기 위해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귀홍의 마지막 말은 마치 제혁을 유혹하듯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혁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객점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이 수락의 뜻임을 느낀 귀홍이 함소(含笑)하며 말했다.



"부디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라오."




***




"나... 나리 대체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요?"


"그저 마음이 적적하여 길게 외출을 할 생각일 뿐이다. 네 놈들은 신경 꺼라."


"그... 그치만 그렇게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곤..."


"그딴 말할 시간이 있으면 남아 있는 약이나 챙겨 와라! 더 이상 방해하지 말고!"


"예!"



의원의 명령이 있어 안절부절 못하던 노예들이 결국 그의 말을 따라 짐을 챙기고 흩어졌다.


그런 그들은 잠시 바라보다, 이내 의료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짐을 다 챙긴 그가 발을 떼려 할 때, 한 중년인이 그를 뒤에서 불렀다.



"그대가 포검혈제라 불렸던 장 대협이오?"



순간, 그의 목에 칼이 닿았다.



"누구냐. 용건만 말해라."


"벼, 별 건 아니고... 고, 곤륜파의 주 장문인께서 이걸 전해주라고 해서 왔소! 허튼 짓 할 생각은 일절 없었소! 정말이오!"



전령은 그렇게 말하며, 제혁의 눈빛이 말하는 대로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



'...그 자식이?'



주 장문인이 보낸 것은, 마교주와는 또 다른 편지였다.




-

장 사형께,


재작일, 개방의 개목인『박숭』으로부터 사형이 노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소.


사형이 어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여전히 사형을 곤륜파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소.


지금이라도 좋으니 곤륜파로 돌아와 주시오.


남은 여생만이라도, 누군가를 핍박하는 삶이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을 뿐이오.


영약도 함께 드릴 테니, 돌아오는 길에 몸이 안 좋으면 드시기 바라오.


난 언제든 기다려 주겠소.


당신의 사제,

주율백

-




...그리고 보따리 속에는 그가 직접 캐내온 듯한 영약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제혁은 그저, 영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것을 소매에 넣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흥 그래, 뭐든 이용해서 앞으로 나아가주마. 정파든, 사파든, 마교든!"



이것이 장제혁의 5차 강호행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 강호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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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대 선협 대회 열린다고 하는 거 보고 재미있어 보여서 써왔음


글 겁나 못 쓰는 편이긴 한데, 재미있게 잘 읽어주면 고맙겠음


그렇게 안 보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주제는 마도가 될 것인가 정신 차리고 다시 대협이 될 것인가임


이 부분은 장붕이들의 취향에 따라 개인적인 상상에 맡아두겠음


누가 이 글 보고 더 기깔난 작품 만들어주면 더 좋고

남은 기간 동안 니네 대회 잘 됐으면 좋겠음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