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약관(弱冠)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서진은 벙어리다.

세상이 그에게 침묵할 것을 강요했기 때문에. 폭력 앞에서 힘없는 말은 그저 짓밟힐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기에 서진은 벙어리다.

장원에서 일하는 하인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서진과 함께하는 동안 그가 말하는 모습을 본 적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진이 따돌림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행동은 여유로움에서 비롯되는 사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서로 끈끈하게 모이려는 모습을 보였다. 서진도 그런 그들이 싫지 않았다.

 

다만, 서진은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그들도 다른 이들처럼 언젠가 떠나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살 수는 없소.”

 

이별의 순간은 갑작스레 다가왔다.

 

동감이오. 이건 숫제 노예와 같은 삶이라 할 수 있소.”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내게 방법이 있소.”

 

한밤중 은밀하게 시작된 하인들의 작당 모의. 그 자리에 서진은 없었다. 희생은 어른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전의 날이 떠오른다.

평소처럼 일어난 서진은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저마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인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평소와 같이 그들을 감시하는 한송백이 입을 쩍 벌리며 나타난다. 길게 하품을 끝낸 그는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하인들을 내려다본다.

 

뭐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 말을 끝으로 서진을 포함한 하인들이 저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내가 움직이라 말했을 텐데?”

처우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오.”

 

하인의 요구에 한송백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지어진다. !하는 짧은 웃음을 내뱉는다. 하인을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주제를 모르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우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

 

하인의 비명이 장원을 메운다.

 

한송백은 언제 차려둔 건지 모를 술상에 앉아 바닥을 기는 하인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한송백의 모습을 본 하인이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쪽 팔이 무언가에 의해 뜯겨나간 듯한 모습. 여전히 흐르는 핏물이 바닥을 흠뻑 적신다. 충혈된 두 눈으로 한송백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이곳에 불을 지르겠소.”

 

하인의 말에 한송백의 미간이 꿈틀댄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몇몇이 횃불을 들고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그러한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던 서진은 절하듯 바닥에 엎드린다. 서늘한 바람이 그의 귓가를 간질이고 떠난다.


………………

 

………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찾아오자 서진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다.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화려한 장포. 한송백의 옷차림이란 것을 깨달은 서진이 다시금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다른 벌레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낯이 익숙하구나.”

 

서진을 내려다보던 한송백이 이내 깨달은 듯 손뼉을 짝하고 치더니 말을 이었다.

 

그 벙어리구나.”

 

한송백의 혼잣말에 서진이 맞장구치듯 바닥에 머리를 두 번 찍었다.

 

제법 오래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참으로 아쉽군. 저런 되지도 않는 반란에 가담하다니.”

 

동시에 느껴지는 살기.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위해 도리질을 치려 해도 몸이 뻣뻣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눈동자로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이 서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던가, 신선들은 상대의 눈을 보면 거짓을 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고 했으니까.

 

억지로 고개를 든다.

 

눈동자를 어떻게든 위로 올린다.

 

그럼에도, 닿지 않는다.

 

서진의 필사적인 행동을 알아본 탓일까?

한송백이 무릎이 천천히 아래를 향한다. 이윽고 서진과 시선을 맞춘다.

 

그제야 서진은 깨달았다.

 

비틀린 입매, 광기 어린 눈동자는 이미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걸.

 

차가운 예기(銳器)가 정수리에 닿기라도 한 듯 서늘함이 온몸을 뒤덮는다.

 

살려주십시오!”

 

서진은 상상하곤 했다. 언젠가 자신이 입을 여는 날이 온다면 그곳엔 자유가 있을 것이라고. 남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희망을 입에 올리리라고.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부탁드립니다!”

 

처절한 구걸이었다.

 

서진의 필사적으로 뱉어대는 구걸에 힘이 빠졌다는 듯 한송백이 한숨을 내뱉는다.

 

송백!”

 

그때 누군가 멀리서 한송백을 불렀다. 순식간에 서진의 눈앞에서 한송백의 신형이 사라진다. 그를 찾아 시선을 돌리자 웬 노인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듯한 한송백을 발견했다.

 

이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서서는 서진에게 말했다.

 

치워라.”

 

그리 말하며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수레에 손짓만으로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상황을 눈치챈 서진은 재빨리 하인들의 시체를 수레에 실었다.

 

성휘 아저씨.’

 

이따금 이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고 말하던 사람.

기회가 된다면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라고 말해오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들이 죽어야만 했나?’

 

비참하다.

힘없는 이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자 한송백이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진은 곧바로 수레를 끌고서 그의 뒤를 따랐다.

 

장원의 거대한 문을 넘어 수레는 한적한 숲속에 다다른다.

 

이곳에 대충 묻어라.”

 

그리 말을 전한 한송백은 그늘진 곳을 찾아가 누웠다.

 

[저것들이 어딜 봐서 신선이야. 사람의 탈을 쓴 마귀 새끼들이지.]

 

먼저 간 이들의 말이 서진의 귓가에 들려온다.

 

[내가 어째서 종놈 노릇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밖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는 건가?]

[침묵하면 목숨은 유지하겠지. 다만 그뿐이다.]

 

그들은 현재 상황을 비판했고 희망을 얘기했다.

 

그리고 모조리 죽어 나갔다.

 

의문은 죽음을 부른다.’

 

그것을 알고 있는 서진이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문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적당한 돌에 그들의 이름을 새기며 정성스레 한 사람씩 묻는다. 시간이 지체된 탓일까? 저 멀리 누워있던 한송백이 어느새 서진의 옆에 서 있었다.

 

대충 묻어두라 하지 않았나?”

 

그 말을 들은 서진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건 오랜 시간 새겨진 공포 때문이었다.

 

…….”

 

그러나.

 

서진의 손발이 느려진다.

 

시선의 끝에는 아이의 시체가 있었다.

 

이 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길래 죽는 건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침묵하면 된다. 의문이란 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거니까.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서진은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그리고 세상은 답해야만 한다.

 

서진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벌레의 새끼라는 게 잘못인 거지.”

 

답하는 한송백의 표정에 의문이 깃든다.

 

고작 그런 이유로? 네놈들이 무슨 권리로?”

우리에겐 지상을 다스릴 권리가 있지. 그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하다.”

 

다시금 대답을 마친 한송백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간다.

대답할 가치도 없었기에 그대로 죽여버리려 했는데 자신이 순순히 답을 했다.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

 

돌아오는 건 침묵뿐.

 

한송백의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오른다. 동시에 주변에 돌풍이 불어닥치며 서늘한 소음을 동반했다.

 

대답해라 버러지. 안 그러면 찢어 죽이겠다.”

 

그러나 서진의 시야에 한송백은 들어오지 않았다.

 

서진의 두 눈이 세상을 직관한다.

 

무수한 법칙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오롯이 그를 위한 법칙을 발견한다.

 

이윽고 서진이 실현했다.

 

너의 권리를 박탈하겠다.”

 

그만의 법칙을.


거짓말처럼 돌풍이 멈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조차 못 한 한송백의 귓가에 다시금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을 때까지 이들에게 사과해라.”

 

한송백의 신형이 실타래 풀린 인형처럼 자리에 주저앉는다.

 

 

오체투지의 자세로 바닥에 머리를 박는 한송백. 고개를 숙인 채로 일어나는 한송백의 신형은

 

!

 

다시금 바닥으로 고꾸라져 머리를 처박는다.

 

끄으아아아!”

 

이따금 들려오는 비명은 머리가 깨지는 소리에 묻힐 뿐이었다.

 

………………

 

………

 

 

미래를 고민하던 서진은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눈을 떴다.

 

어느덧 저물어가는 해.

 

한송백의 시체를 무덤으로부터 멀리서 불태우고 길을 나섰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발걸음. 그 끝에는 서진이 머물던 장원이 있었다.

 

함께 나갔던 한송백은 어디 갔냐는 물음에 거짓을 고해 그것을 믿게 하였다.

 

자신의 힘이 통한다는 것을 확인한 서진은 조금씩 거대한 장원을 삼키기 시작했다.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어 끊임없이 내전을 일으켜 세력을 약화했다.

 

무인이라 불리는 각종 외부세력 또한 끌어들였다. 누군가는 협을 행하기 위함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서 힘을 합쳤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도원경이라는 오만한 이름으로 불리던 장원은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거리에는 축제가 열렸다.

 

저마다 승리를 자축하고 다가올 황금빛 미래를 노래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줄로만 알았다.

 

끄으윽.”

 

사내의 손이 서진의 목을 잡아다 들어 올리고 있다.

 

꿈은 달콤했나?”

 

도원경의 신선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니, 그들은 속세에 대한 미련으로 등선에 오르지도 못하는 실패자일 뿐이었다.

 

인간의 탈을 쓴 마귀로구나.’

 

서진의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핏물이 강을 이룬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이들의 사지가 핏물을 떠돈다.

 

꼭 그래야만 했나.’

 

계속해서 조여오는 사내의 손 탓에 서진은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을 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내에게는 서진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까.

 

역천(逆天)을 행하는 자.’

 

눈앞의 사내가 걷는 길이자, 거의 모든 신선이 걷는 길.

 

서진은 그들과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 하늘을 거스른다면, 눈앞의 사내는 어찌할 수 있겠지만.’

 

다음은?

 

서진은 아득히도 먼 곳에 있을 적들을 보며 미래를 그려나갔다.

 

유언이라도 남기겠나?”

 

사내의 손에서 힘이 풀린다.

얼마든지 서진을 압도할 자신이 있는 그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내세(來世)가 존재한다면.”

 

서진의 말이 세상에 퍼져나간다.

 

나는, 순리에 순응하겠다.”

가장 멍청한 선택을 하겠다는 거구나.”

 

그의 옆에 선 사내가 한껏 조롱한다.

 

순리를 거스르는 자를 심판하겠다.”

들어줄 가치도 없군.”

 

사내의 손이 움직인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그때 서진의 선언이 이어졌다.

 

비로소, 하늘을 부수겠다.”

 

어디서 나타났을지 모를 푸른색의 사슬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그것들은 모두 의지를 가진 것처럼 서진을 휘감아 온다.

 

이후, 거짓말처럼 사슬이 사라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내가 다가온다.

 

정말이지, 더러운 기분이군. 그래, 스스로 죽을 순간을 정한 기분은 어떤가?”

 

서진이 입가를 비틀어 웃어보인다.

 

순리대로 하지 그러나?”

 

듣기 싫다는 듯 사내가 손을 가볍게 털어낸다.

 

방안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였고.

 

한 사람의 신형이 무너졌다.

 

그 후로.

 

강산의 위치가 바뀌고.

 

왕의 자리가 다섯 번을 바뀔 즈음.

 

세상은 서진의 맹세를 이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