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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지상 어딘가]



"당신까지 따라와야 할 일인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네요."


"이미 사전에 전부 합의 본 일이지 않나 도로시? 아니면 뭐, '그 별명'이라도 꺼내야 하나 보지?"


"...!"



광활한 대지 위에 조그마히 울려 퍼지는 이 가는 소리.


그 당사자인 분홍빛 천사는, 청순한 외모와 대비되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표독하게 상대를 노려본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단신으로 헬레틱도 반으로 접어버리는, 눈 앞의 이 근육덩어리 중년 남자 앞에서 말이다.



[평소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도 한가하시군요, 도로시. 거듭 말씀드리지만, 지상에 소풍 나온 게 아닙니다.]


"아아, 알고 있네 세실 양. 치매오기엔 아직 이른 나이라고? 하하하."


[그러시겠죠. 애초에 '계획'이라고 처음 제시한 게 당신인데, 당사자가 잊으면 말도 안 되니까요.]



그리고 이 모든 한심한 콩트를 그저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는, 투영된 디지털 화면 너머의 백은발의 미녀.


요한과 함께 에덴의 좌뇌 우뇌를 맡고 있는 여자, 세기의 천재 세실.


현재 에덴이 운영하는 광학미채 기술부터 온갖 무기와 보조기의 개발,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지의 영역 그 자체인 NIMPH에 대한 연구.


제아무리 호전적인 암스트롱이라 할지라도, 그녀 앞에선 마치 과자 훔쳐먹다 걸린 아이마냥 조용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요한과 아직 회복중인 이사벨, 노아. 그리고 제가 에덴에 남아 혹시 모를 랩쳐의 추후 침공을 대비.]


[그리고 암스트롱...당신, 도로시, 하란. 이 셋이서 현재 헬레틱, 리버렐리오와 니힐리스타의 행방을 추적.]


[그녀의 힘 자체만을 고려하면, 그 자리에서 에덴은 전원 물고기밥이 되었어도 할 말이 없었겠죠.]



이번에는 암스트롱의 이마에 혈관이 돋으며, 이가 부서질 듯 갈리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차례.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먼 거리를 달려 왔다지만, 말 그대로 쌩쌩했던 그를 말빨로 구워 삶으며 교묘하게 자기 목적만 챙긴 채 도망간 능구렁이.


심지어 무력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세실의 말대로 그 자리에 나타났던 오징어 세 마리 이외에도, 그녀의 시그널에 포착되었던 고철덩어리의 대군.


과거의 그였다면 에덴의 안전이고 나발이고 분노한 짐승처럼 모조리 찢어발겼겠지만, 몇 달의 시간은 남자를 바꿔 놓기에 충분했고.


정치인답게 한때 잊어버렸던 냉정함을 다시 되찾게 해주는, 귀중한 '경험'으로 작용한 '패배'기도 했었던 것이다.



[경험, 지략, 무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완전체. 그야말로 최고 최강의 헬레틱이라고 불려도 무방한 존재겠지요, 리버렐리오.]


"적을 칭찬하는 게 자네 취미는 아녔던 걸로 기억하네만, 세실 양."


[사실만을 직시하는 거에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어떻게든 실낱같은 가능성을 찾고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그녀의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지 않나요?]



다른 헬레틱, '인디빌리아'가 봉인된 곳.



인류 최후의 성지. '방주'로.



방주. 그 단어 한 마디에 움직이던 인원 전원의 반응이 드러난다.


분노로 일그러지는 도로시. 혐오감을 내뿜는 하란. 


그리고 그저 석상처럼 표정이 굳어지는 암스트롱.


제각각의 반응을 흘끗 쳐다보고, 이내 말을 이어나가는 세실이었다.



[사전에 브리핑으로 전달 드렸겠지만, 지금 방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에요.]


[사회 전체를 떠받드는 3대 기업 중 하나의 CEO가, 자신의 스쿼드 명성을 살리겠다고 랩쳐를 방주 안에 들이려는 자살 행위를 시도한 게 불과 얼마 전입니다.]



정치인인 자신이 봐도 지능이 의심가는 작전. 


그래, 의도는 좋다 치자.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날 불확실성을 고려조차 안 한 채, 니케 몇 기의 성능을 믿고 집단 전체의 생존을 도박에 건다?


스스로도 악인임을 인지하는 암스트롱이 봐도, 참 면상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로 미친 새끼의 발상이었다.



[당연히 사태가 이러니, 기존 방주의 계급제는 존폐를 논할 정도로 흔들릴 수 밖에 없었죠. 외곽의 아우터 림과 내부 쉘터만 봐도---]


"---마치 터지기 직전의 둑이라 봐도 된다 이거군."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이 있을까.


절대적인 카리스마? 온갖 물질적인 유혹? 아니면 강제적인 협박?


그것도 좋지만, 암스트롱이 보았을 때 정답은 바로 '생존'이었다.


돈? 명예? 여자?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스로와 주변의 안위가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인간이란 생물의 행위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그 모든 걸 몸소 지켜본 바가 있었던 그로써,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한 번 랩쳐의 침입을 직전까지 허용했었던 방주에요. 당연히 우리가 아는 정보를, 그쪽이라고 모를 리가 없겠죠.]


"이미 서두르고 있어요 세실, 너무 재촉하는 것도 효율이 나오진 않는답니다?"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오퍼레이터로써, 이것 한 마디만 남기겠습니다.]



부디, 한시도 긴장을 놓지 마시길.



암스트롱, 도로시, 하란. 그 자리의 전원이 산전수전 전부 겪은 노련한 전사들이다.


그런 그들인 만큼, 홀로그램 너머 여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었으니.


머리로 숙지하면서, 몸은 최대한 루트를 실시간으로 조정하며 최단거리를 찾는다.


어떻게라도 설욕하지 않으면, 억울해서 버틸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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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시각. 방주 인근 지상]



{@#$!#@}


"...수고했어. 이제 돌아가봐."


{!@#!#$!#%}



원래 랩쳐들은 지성이 없는, 본능에 충실한 동물에 가까운 존재들.


허나 앞의 참새 정도 크기의 소형 랩쳐는, 마치 명령을 따르는 듯 눈 앞의 소녀에게 빈틈없이 보고한다.


하이브 마인드 (hive mind). 


문자 그대로 거미줄, 벌집처럼. 무수한 개체가 서로의 신경을 연결한 상태.


원래라면 굳이 시도하지 않을 편법을 그녀가 나름 펼쳐둔 것도, 이런 때를 대비해서였던 것이다.



"에덴이라 했던가, 집념 하나는 알아줘야겠어. 벌써 추격이 붙었네."


"쯧! 빌어먹을 날파리들 같으니. 숫자는?"


"단 셋. 그 모두가 니힐리스타, 너한테는 익숙한 얼굴일 거야. 특히나...우리와 '동류'인, 중년의 남자는 말이지."



마지막 문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딛고 있던 바닥이 문자 그대로 녹아내리며 움푹 파인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퀸에 의해 '만들어지고', 단 '한 번'을 제외하면 겪어본 적도 없었는데.


거의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대굴욕.


지금도 매 순간 상상할 수 있는 오만가지 복수를 떠올리는 그녀에게, 그 남자는 입에 담기도 싫은 '존재'로 변해있었다.



"...방주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남았어."


"호오? 안 뛰쳐나가는 거야?"


"미친년, 허락하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아니, 허락한다 해도 무의미한 패배밖에 더 안되겠지."



머리는 냉정하게, 가슴은 뜨겁게.


비록 전투를 갈구하며 다시 태어난 그녀지만, 암스트롱이 그러했듯 패배 또한 그녀에게 무언가를 남겼으니.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느끼며, 현실에 수긍하면서도 최선의 수를 갈구하는 니힐리스타.



"어차피 '지금'의 내가 가봤자 결과에 차이는 없을 터. 듣자 하니, 방주엔 널리고 널린 게 니케라지?"


"그것들을 잡아먹으면서 회복하고, 겸사겸사 인디빌리아도 회수하고, 수로 밀어붙이면 그 빌어먹을 인간 하나는 조질 수 있겠지."


"...드디어, 어깨 위의 그걸 조금이나마 쓰기 시작했구나."



눈 앞의 이 꼬마가 자신의 까마득한 대선배만 아니었다면, 바로 불살라 버렸을 텐데.


이렇게 늘어진 상태에서도 격의 차이를 아낌없이 내뿜는 리버렐리오.


두둥실 떠다니는 본체 위에서, 고양이가 기지개를 하듯 팔다리를 뻗으며 그녀 나름대로 추가 설명을 붙여나갔다. 



"도착한 것 같으니, 미리 몸 좀 풀어둬. 직접 나노머신까지 먹여줬는데, 어느 정도 활용은 해야지."


"...이 정도 숫자만 들어간다고? 뭔 꿍꿍이인 거냐...!"


"누가 우리만 들어간다 했나? 쓸만한 지원군을 불러놨어. 마침 저기 오네."



키오오오----!!!



순식간에 검어지는 하늘. 몰아치는 태풍. 내리치는 벼락.


거대한 그림자가 지상을 뒤덮으며, 살을 찢고 뼈를 가르는 날개짓이 몰아친다.


스톰브링어. 그 이름 그대로, 태풍을 몰고 오는 자.


불과 얼마 전, 방주 인근에 출몰해 인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구세대의 악몽 중 하나.



그런 고대의 악마가, 다시 한 번 방주의 입구에 출현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코어가 기존의 파란빛이 아닌, 섬뜩한 분위기의 초록빛을 풍기고 있었다는 거였겠지. 







"제공권 장악 이외에도, 전파 차단 및 시야 확보로 데려온 애인데...어떨지 모르겠네."



확실한 게 좋다. 리버렐리오, 그녀 스스로가 세워둔 신조 중 하나.


기록상에 따르면, 최근에 격추되었다고? 아무렴 어떠한가.


어차피 다시 온다 한들, 지금의 방주가 막을 수 있을리도 만무하지 않았던가.



"방문인사치곤 좀 거칠지만...안녕, 작금의 인간들."


"마땅히 우리 것을, 되돌려 받으러 왔어."



쾅----!!!!



괴조의 날개짓 한 번에, 엘리베이터를 포함한 입구의 모든 기기가 박살난다.


그 충격파에 천지가 요동치며, 대기조차 울리니.


여전히 거대한 해파리 위에 앉아서 모든 걸 내려다보며, 소녀는 싸늘하게 선포할 뿐이다.



"바라는 건 지속되는 안식. 거슬리는 것은 모조리 제거할 뿐."



"모든 것은...절대불변의 퀸(Queen)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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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좀 많이 짧긴 한데, 시간도 조금 비고 해서 짬 좀 내서 다시 써왔어. 


시리즈물이라 원본 사이트 가서 보는 게 제일 편하긴 한데, 어차피 거기나 여기나 보는 사람 얼마 없어서...ㅠㅠ


지략가 리버렐리오 (해파리)가 다들 마음에 들련지 모르겠네.


재밌게 읽으면 콘말고 댓글도 좀 부탁해...패러디 작품은 댓글이 ㄹㅇ 원동력이라고 ㅠㅠ


시간되는대로 다음화도 써옴. ㄳ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