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말이 많은 영화인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고 왔는데, 나는 생각보다 괜찮아서 쓰게 됨.



우선, 이순신 3부작으로 시작해보자.

개인적으로 나는 시간 순서가 아닌, 명량-한산-노량 순으로 제작, 개봉한게 좋은 전략이 되었다고 본다.


1. 이순신 개인->수군 및 해전, 백성으로 점차 커져가는 포커싱과 스케일.

명량은 다들 알다시피 겨우 13척, 사실상 개전 전반부 내내 대장선 혼자 싸운 스케일을 보여준다. 당연히 딱히 전략이랄게 많지 않고, 그런 전략안을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역덕에게는 통하더라도 관객들은 외면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명량은 이순신 개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순신의 백의종군과 부자간의 식사장면 등등. 한편으로는, 백성들로부터 얼마나 큰 지지를 한몸에 받는 성웅이었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본격적으로 '어떻게 단 한척의 전선으로 함대를 막아냈는가'에 대해 일반인들에게 판옥선의 튼튼함과 당시 시대를 앞서간 함포술로써 하나의 해석을 보여준다.


다음, 한산. 본격적으로 조-왜 두 함대가 전력으로 맞붙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해상전의 전략·전술에 대한 묘사이다.

시작부터 양쪽은 끊임없이 세작을 보내고, 포로를 고문·회유하고, 심지어 전투상황에서도 나팔과 북, 깃발, 연, 연락선 등등 명령전달을 위한 발버둥과 휘하 장수들의 순간판단까지 정말 해전 그 자체를 그리려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진영적으로도, 날랜 세키부네 중심의 기동성이 뛰어나지만, 내구성이 빈약한 왜 vs. 느리지만 튼튼하고 제자리 선회가 뛰어나고 강력한 아웃레인지 능력을 보여주는 조선이라는 단순한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켜, 볼 거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다만, 이 때문에 정작 이순신 본인에 대한 포커스가 흐려졌다는 비판도 있었는데, 오히려 나대용을 믿고 거북선을 맡기거나, 준사를 회유하거나, 통제사로서 휘하 장수들을 규합하거나 등등 전략·전술 지휘관으로서의 풍모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작 노량. 이제는 심지어 종전 후까지 계산하고 통제사에게 전력의 온존이라는 국가 단위의 전략적 안배를 요청하기까지 한다. 전술 단위 역시, 밤에서 동 튼 후까지, 이번에는 조명연합함대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 이를 위해 반강제적으로 서로의 군영을 드나들며 협조를 요청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략의 규모를 키우는 것으로 무대를 옮겨갔다.

비록 실패해버렸지만, 감독이 의도했던 점은 통역에서도 드러난다. 굳이 노량에서는 이전까지 통역 묘사의 관례를 깨고, 각 인물들이 자국어로 한번, 외국어로 한번 더 두번 줄줄줄 말하고, 심지어 자막까지 친절히 달아놨다. 이 점이 전개가 늘어진다는 비판점으로 이어지고 말았는데, 사실 이것 역시 외교적 전략, 조명연합함대라는 전략을 강조하고 싶었던 점으로 보인다. 해당 장면들을 잘 보면, 나는 이미 말을 다 했지만, 통역이 다 끝난 뒤에서야 겨우 상대방이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이라는 묘사를 보여주고, 이순신의 경우는 아예 말을 관두고 필담으로 직접소통하기까지한다. 사실, 임란 직전 대마도주의 통역 장난질을 고려하면, 역관의 농간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매우 큰 불안요소인 만큼, 조선과 명나라의 필담을 통한 직접소통이 더욱 안전한 방책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수도 있다. 이 묘사의 압권은, 일본군 포로를 보러 온 이순신이 떠나갈때 그 등에다가 진린이 소리치는 장면인데, 분명 통역묘사가 없이 중국어로 소리침에도 이순신은 정말 문자 그대로 '듣지도 않고' 떠나버린다. 이러한 묘사들로 이어지는 것을 볼때, 감독의 의도는 나름대로 고려한 끝에 나온 결정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결과물은 군데군데 헛점이 보이는 아쉬움을 남겼다.


종합하자면, 명량에서는 이순신 개인의 인덕 + 조선 수군의 우월한 기술력을 각인시키고, 한산에서 명백히 조선이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으면서도 중세 해전이라는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도 감출 수 없는 이순신의 전술능력을 보여주고, 노량에서 전략 규모로 범위를 키웠음에도 이전 두 작품을 보고 온 관객들은 전술·기술적 우위를 여전히 연상할 수 있어 본 작이 보여주는 묘사의 디테일을 알아서 채워나가도록 안배했다고 볼 수 있다.



2. 그럼에도 디테일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개전과 동시에 관객들은 뒤집어질 수 밖에 없는 디테일들을 보여주는데, 


※ 이하부터 노량: 죽음의 바다 디테일한 스포가 있음 ※





한 밤중에, 대도에서 포위진을 완성하고, 협선을 내보내서 단순 초탐선인가 싶었지만, 적 함대가 적당히 다가오자 배를 완전히 불태운다. 물론 시마즈 함대는 탐지됐다고 알아차리기도 하지만, 갑자기 불타오르는 배에 벙찌는데, 그 표정이 불길에 환하게 드러난다. 즉, 이 협선은 적 함대가 여기 있다는 경고신호이다. 이내, 조선함대에서 신호탄(불화살? 신기전?)이 올라가고, 한산에서 보여줬던 조선함대의 일제포격이 시마즈 선봉대를 갈아버린다. 이어서 보여주는 접근하여 기름뿌려 화공, 해상에서 운용하는 화차 등등 해전 디테일은 과연 우리나라 영화사 역대급이라고 충분히 볼 만 하다.


나아가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시퀀스는, 선상전투의 롱테이크였다.

명군 일개 병사의 등 뒤에서 시작해서 처절하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일개 병사들의 싸움은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상륙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장병들의 고통을 담아내고자는 듯 하다.

명 병사가 정말 살기위해 적병사을 베어나가면서도, 단순이 칼로 등을 내려쳐봤자 갑옷때문에 별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중량으로 내려쳐서 충격으로 자세가 무너지면 갑옷사이나 목과 같이 취약부위에 칼을 쑤셔넣어 살해하는 일관된 묘사, 명군-조선군-일본군으로 이어지는 액션배우들의 처절한 발버둥, 그 끝에 이순신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장면전환. 한편으로는 이런 개싸움에는 적도 아군도 선도 악도 구분없이 공평한 고통과 처절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3. 한국영화의 고질적 신파와 테이크들.

초반에 이순신 개인적인 면모, 아들의 죽음은 영화를 다 보고나니, 꼭 필요한 장면들이라고는 알겠다. 그러나, 감독은 삽입된 위치가 너무 초반이라는 점을 망각한 듯 하다. 한산에서 받은 좋은 평 중 하나에는 상당히 절제된 신파요소도 분명 한 점을 차지할 것이다. 노량에서도 나름 한국영화평균에 비하면 절제하려는 듯 하나, 너무 길게, 반복적으로 조명되는 신파적 장면은 아쉬운 점으로 남겠다. 중반의 진린이 이순신을 불러 왜 포로를 보여주는 장면, 이순신이 이들을 뒤로 하는 장면, 후반 대장선의 환상을 보면, 아들의 죽음을 표현하는 것은 틀린 선택은 아니고, 의미적으로도 적절했다 보지만, 조금 아쉽기는 했다.


그러나, 단 하나. 이순신의 죽음. 본 작품의 의미가 될 수 밖에 없는 그 장면.


그 누가 뭐라해도, 나는 노량의 클라이막스인 해당 신파극은, 한국영화의 단점이 아닌, 한국영화가 그동안 갈고닦아 정점에 이른 신파연출의 좋은 정수를 보여준다고 말하겠다.


신파는 결코 악수만 있지 않다. 적절하게, 확실하게 연출되면 보여주는 감정은 절제하면서도, 관객의 감정은 끌어올려주다 다 함께 터뜨려버리는 하나의 좋은 수이다.

대장선의 죽은 전우들의 환영은 이 자리가 죽을 자리임을 표현하는 복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북소리에 북돋워지는 병사들의 사기, 결국 넘을 수 없는 장애물에 절망하는 일본 함대, 그리고 얼굴없는 이순신.

또 한편으로는 이순신은 그 자리에서 북을 두드릴 용기를 갖췄다면, 누구라도 그 의지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말하려는 듯 하다. 우리 모두 불의에 항거하고, 스스로 옳다는 길을 갈 수 있지만, 그 의지를 펼치기에는 세상이 녹록치 않은데, 이 자리에 용기를 갖춘다면 그 의지를 실현하는것이 가능하는 메세지가 있는듯도 하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나온 것은 참 오랫만이었다.



4. 그러나 비슷한 시기 개봉한 경쟁 작품을 잘못 만났다.

사실, 신파를 절제하지 못한 점을 따지면, 조금 비판은 받을지언정 그냥 한국영화가 한국영화했다는 한탄만 나오고 무난하게 천만관객 달성을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직전 '서울의 봄'이라는 괴물작품이 개봉해서 본의아니게 노량이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통역 디테일 역시, 평상시라면 조금 아쉬운 정도였겠지만, '서울의 봄'이라는 연출괴물때문에 더욱 부족한 점이 돋보여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조심해야 하는게, 절대 '서울의 봄'을 탓해서는 안된다. 너무 잘했다고 비난받는다면, 그것은 비난하는 사람을 탓해야지 잘 한 사람을 탓해서 쓰겠나.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서울의 봄'이라는 선례가 남아버려서 이제 한국영화는 신파없으면 안된다는 기존 고정관념에 반박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만하면' 마인드 또한 경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노량을 포함해서, 이순신 3부작 정도의 블록버스터라면, 끝없이 완벽을 추구하고 개선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스텦 자신의 최고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서울의 봄은 그것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노량은 안일했던 점에 대한 비판들을 감수해야 하며, 운명과도 같은 서울의 봄과의 대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해전에 대한 놀라운 연출성과, 감독의 여러 시도들, 그리고 현대의 좋은 신파 클라이막스 달성까지. 노량이 지금까지 받는 부정적 시선들을 인정하기에는 다소의 억울한 점 또한 받아들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명량, 한산 둘 모두를 즐겁게 본 관객이라면 노량 또한 기꺼이 볼 만 하다고 본다.

그러나 명량에서의 비판점을 중시한다면, 나는 그 관객에게는 실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하고 싶다.

반면, 한산의 전투신을 한번 더 느껴보고 싶다면, 노량 역시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