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그 해는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갈 한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던 해였고.


 1914년 그 해는


 청과 러시아 사이의 분쟁이 사건이 아닌 전쟁이라고 칭해야할 정도로 격화된 해였고.


 1914년 그 해는


 최후의 여행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올라 다시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게 된 해였고.


 1914년 그 해는


 대한공화국이 간신히 국가로서 기틀을 잡아 거친 세계정세에 투신을 한 해였고.


 1914년 그 해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운하가 400년 만에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 해였고.


 1914년 그 해는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이 인류의 기술로 인류의 낙관론을 깨부수기 시작한 해였다.


 1914년 그 해는


 인류의 역사에서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해였으며.


 1914년 그 해는.


 한 청년에게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해였다.


 1914년 그 해는.


 한 청년이 자신의 마음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의 열병에 시달렸던.


 그런 해였다.

 



 사랑하는 이가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흔히들 사랑이라는 감정은 불꽃같다고 표현한다. 나는 그 표현을 실감한다. 사랑의 감정은 상대를 갈구하면서 끊임없이 불타오른다. 이 불꽃은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꺼지는 것은 아니다. 이 불꽃은 상대의 사랑을 먹지 못한다면 대신에 주인의 신체와 마음을 땔감으로 하여 불타오른다. 이러한 증상이 사랑의 열병, 상사병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하지만 난 나의 사랑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내가 나의 사랑을 드러내는 순간 주위사람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워 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그 여자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그 여자는 그 누구보다도 나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감정을 숨겼다.


 이렇다보니 나는 나의 마음도 모르고 나에게 혼인을 하라고 종용하는 주위 사람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지는 노총각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빨리 결혼하라고 닦달하는 가문의 어르신들이. 내가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다가오는 저 처녀가. 그리고 그 처녀를 나와 맺어줄려고 노력하는 처녀의 어머니가. 무책임하게 농조로 결혼 안하냐고 묻는 친구들이.


 그들이 호의로, 적어도 악의 없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태도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랑의 감정으로 검게 타버린 가슴을 으스러트린다. 가끔씩 제발 그냥 내버려두라고 외치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나는 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억지로 참아내며 그 순간을 넘긴다.


 이토록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나는 고통 받고 있지만 나는 이 감정이 허무하게 사그라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비이성적인 소리인 건 알지만 감정에 억지로 이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난 이 불꽃이 이대로 사그라들지 말고 더욱더 타오르길 바란다. 내 사랑이 활활 타올라 결국 밖으로 드러내게 되었을 때. 나는 이 마음을 그녀에게 고백할 것이다. 그 결과가 파국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감내할 것이다. 아니. 그때가 되면. 나는 단지 바라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직접 움직여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이라도 말이다.


 


 “이번 맞선은 없었던 일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했던 맞선이 맞선당일, 맞선자리에서, 맞선 상대가 아닌 맞선 상대의 오라버니에게, 맞선을 없었던 일로 하자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파투났다. 뻔뻔하게도 맞선상대의 오라비는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이 죄책감이나 죄송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은 게 아니다. 내 가슴 속에서 분노라는 감정자체가 일지 않았다.


 나는 덤덤하게 물었다.


 “어째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맞선상대의 오라비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나는 기차를 타고도 세 시간은 가야하는 옆 도시 기방의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옆 도시에 기방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다. 기방이라는 장소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없는 나다. 그런데도 나는 옆 도시 기방까지 출장을 나가는 호색한이라는 헛소문이 퍼져있었고, 맞선상대의 오라비는 어디선가 헛소문을 듣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헛웃음 나오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이었지만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연을 맺지 못한 것이 안타깝군요. 추후에 다른 좋은 연을 맺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대로 맞선 자리를 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맞선이 파투나자 안도했다. 지금 당장 혼인할 생각이 없는데 가문 어르신들의 성화를 못 이겨서 보기로 했던 맞선이었기 때문이다. 맞선이 곧장 혼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 마주하며 혼인을 전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나에겐 너무나도 곤혹스러웠다. 나의 명예를 더럽히는 소문이 퍼져있다는 문제가 남아있었지만……그래, 그냥 둬서는 안 되겠지.


 노면전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집까지는 한참 남은 중간에 전차에서 내렸다. 전차에서 내리고 저잣거리를 거닐다가 난 한 가게 앞에 당도했다.


 붉은 벽돌로 쌓은 2층짜리 가게였다. 가게의 정문은 미닫이 띠살문과 널빤지로 만든 여닫이덧문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게 정문의 바로 위에는 검은 바탕에 금빛으로 호호(好狐)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판이 붙어있었다. 호호는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다양한 차와 독특하면서 맛있는 주전부리를 팔아 손님이 많은 찻집이었다.


 나는 호호로 들어갔다. 호호는 역시나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나는 호호 안을 둘러보다가 빈자리를 발견하고 거기에 앉았다. 잠시 기다리니 한 여자가 주문을 받기 위해 나에게 다가왔다.


 “어서오세……선생님!”


  그 여자는 주문을 받기 위해 꽃봉오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오다가 나를 알아보곤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나에게 달라붙었다. 커다란 눈에 기대와 호의를 가득 실어서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이 절로 강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여자였다. 만약 갯과 동물의 꼬리가 나 있다면 돌개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꼬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호호의 종업원인 ‘채예호’다.


 나 역시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예호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예호의 얼굴은 기쁨과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오랜만에 오시네요. 그리고 오늘 멋지게 차려입으셨네요. 헤헤. 멋져요.”


 “고맙다.”


 이렇게 차려입은 이유가 맞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저 기쁨 가득한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가학심 섞인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리고 변한 얼굴에 맞선이 파투났다고 말한다면 또 어떻게 변할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난 내 호기심을 해소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이다.


 “내가 평소 마시던 것과 먹을 걸로 다오.”


 “네.”


 예호는 활기차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기다리니 예호는 콩가루와 검은깨로 만든 다식과 숭늉과 잡지를 가져왔다. 내 앞에 그것들을 놔두고 예호는 다시 헤헤 웃은 뒤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나는 잠시 예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잡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한참 잡지에 정신이 팔려 있던 와중에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예호가 내 맞은편에 앉아 탁자에 엎드려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예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해죽 웃었다.


 “헤헤헤. 오늘 일 다 끝났어요!”


 아아. 예호의 감정이 이쪽까지 전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빛과 열기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감정이 나를 엄습한다. 먹물을 눈 위에 떨어트린 것처럼 기쁨의 감정이 나의 가슴을 물들인다. 이대로 그 감정을 계속해서 받아들였다간 태양을 계속 바라본 사람이 눈이 멀어버리는 것처럼 내 심장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마주 웃어주곤 예호에게서 억지로 눈을 떼고 가게를 둘러보았다. 그 많던 손님들은 전부 사라지고 나만 남아 있었다. 밖도 어느새 해가 져 어둠으로 덮여있었다.


 “아직 청소가 남았잖니.”


 가게 안쪽 주방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꿀처럼 끈적끈적하고 달콤하게 내 귀에 스며든다.


 “선생님 오셨잖아요.”


 “선생님이 오신 게 청소를 빼먹어도 되는 이유가 되니?”


 예호는 할 말이 곤궁해져 쩔쩔 맨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여자가 좋더구나.”


 예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청소를 위해 가게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뻔히 보고만 있자니 나의 양심이 계속 핀잔을 주었기에 나는 일어나 예호를 도왔다. 내가 돕자 예호는 기겁하며 내가 들고 있던 쟁반을 뺏는다.


 “아뇨아뇨아뇨아뇨. 선생님은 안 하셔도 되요. 선생님은 그냥 자리에 앉아 쉬어주세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안 되는 거냐?”


 “선생님께서 천한 일을 하시면 제가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래요.”


 나는 예호의 허점을 찔렀다.


 “그러면 너는 천한 일을 하는 여자라는 거냐?”


 “읏! 그, 그건 아, 아닌데요.”


 나의 지적에 예호는 당황했다. 차라리 이럴 때는 긍정을 하는 게 더 나았을텐데. 착하고 나를 잘 따르기는 하지만 어수룩한 처녀다. 하지만 그것이 귀여웠다. 채찍으로 때렸으니 이제는 당근을 주자. 나는 예호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고 말했다.


 “빨리 끝내고 같이 쉬자꾸나.”


 예호의 볼이 붉어지더니 열기가 솟구친다. 예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예호의 입가가 헤벌쭉 벌려진다. 그리고…… 


 “꼬리 나왔구나.”


 예호의 치마 밑으로 검은 기가 도는 붉고 풍성한 꼬리가 튀어나와 바닥의 먼지를 쓸어버릴 것처럼 파닥거렸다.


 나의 지적에 예호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눌렀다. 그러자 밖으로 튀어나왔던 꼬리가 쏙하고 다시 치마 속으로 사라졌다. 


 “더욱 도야해야겠구나.”


 이번엔 다른 원인으로 예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도 사내다. 아름다운 여자와 알몸이 되어 밤새 부대끼는 것을 바라는 그런 평범한 사내 말이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소녀에서 처녀로 막 개화한 예호는 예뻤다. 또한 몸은 성숙하였으나 짓는 표정과, 몸가짐,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아직 소녀였다. 커다란 눈에 기쁨과 사랑을 가득 담아 나와 눈을 마주치고, 가리거나 숨기는 것 없이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웃으며, 나와의 가벼운 접촉에도 양 볼을 발그레 물들인다. 사랑스러운 처녀다. 솔직하고, 활발하고 나를 잘 따르는. 아니 따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와 혼인을 하고 싶어하는. 


 “아직도 청소 다 못 끝냈니?”


 우리가 청소를 하다 말고 아옹다옹하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주방에서 나왔다. 젊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난 여자는 아니었다. 아니 못나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맛과 향이 진해지는 귀한 술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정이 깊어지는 친한 친구처럼,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아름다움이 깊어지는 그런 여자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한 비단치마와 비단저고리를 입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를 틀어올려 비녀로 고정한 그 모습은 양가집 안주인으로 보이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예호의 어머니이자 호호의 주인인 ‘이호련’이다.


 “얘는 청소 하다 말구 뭘 하니?”


 호련의 말투는 책망하는 듯 하였으나 그 두 눈은 웃고 있었다. 나는 호련의 그 눈은 보고 있다가 조금 늦게 눈을 돌렸다.


 “천한 일이든 귀한 일이든 자신이 하겠다는데 뭘 그리 만류하니? 자, 얼른 끝내자.”


 호련이 먼저 움직이고 다음으로 예호가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움직였다. 세 사람이 움직이자 청소는 순식간에 끝났다.


 청소가 끝나자 호련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예호는 나의 맞은편에 앉고 배시시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조금 기다리니 호련이 주전자와 찻잔을 가지고 주방에서 나왔다. 


 “이번에 새로 가게에서 나보려고 하는 차에요. 한 번 마셔보시고 감상을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호련은 내 앞에 찻잔을 두고 차를 따랐다. 짙은 갈색의, 거의 검정색으로 보이는 차였다. 나는 찻잔을 들어 차 향기를 맡았다. 꽃향기? 아니 과일인가? 아니 그런 것치곤 곡물을 우린 것 같기도 한, 기름기가 섞인 향기가 났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나는 조심스럽게 혀끝만 적실정도로 후루룩 차를 마셔보았다. ……쓰고 시다. 텁텁한 맛이 적은 묽은 한약 같았다.


 “어떤가요?”


 “향은 좋은 반면에 맛은 썩 좋지는 않군요. 묽은 탕약을 먹는 것 같다고 할까.”


 내가 정제된 표현을 썼다면, 예호는 날 것으로 차 맛을 표현했다.


 “웩!”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이던 예호는 차 맛에 오만상을 찡그리고 혀를 내밀었다.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혀있다. 호련은 빙그레 웃으며 옷소매로 예호의 눈물을 닦아주고 차와 함께 가져온 달콤한 다과를 먹여주었다.  


 예호와 호련이 나란히 앉아있으니 확실히 핏줄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예호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풋풋한 성품이 성숙해져 그것이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나면 호련과 비슷해질 것이다. 물론 지금의 겉모습으로도 충분히 핏줄의 힘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연배가 별로 차이 나지 않는 자매라는 말은 과장일 것이고, 호련이 예호를 업어 키운 연배차이가 많이 나는 자매로 보였다. 물론 실상은 호련이 예호를 업어 키운 모녀 사이지만 말이다. 


 보기만 해도 가슴 훈훈해지는 모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 입가를 숨기기 위해 향은 좋지만 맛은 고약한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이 차 이름이 뭡니까?”


 “양국탕 혹은 가배라고 불러요. 물 건너에선 커피라고 부르고요. 수입회사를 하는 지인이 팔릴 것 같냐며 보내주더라고요. 하지만 반응을 보니 팔릴 거 같지는 않네요. 서양에서는 대중적이라고 하던데.”


 그렇게 말하고 호련은 양국탕을 음미했다. 찻잔을 들어 차의 향기를 들이켜 가슴을 부풀리고, 조심스럽게 차를 홀짝여 혓바닥을 굴려 그 맛을 느낀 후.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다. 호련도 지금 처음 마셔보는 것 같았다.


 “향만 좋지 맛은 선생님 말씀대로 묽은 탕약같네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죠. 아니면 제가 우리는 것을 잘못했을 수도 있고요.”


 호련은 차와 함께 가져온 설탕을 듬뿍 퍼서 양국탕에 넣은 후 다시 그것을 홀짝였다.


 “설탕을 넣으니 한결 낫네요. 그나저나 선생님은 오늘 무슨 용무로 오신건가요?”


 나는 입꼬리가 충분히 내려간 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용무가 있으니까 가게가 끝날 때까지 계셨던 거 아닌가요? 평소엔 마실 것만 마시고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호련을 바라보며 용무를 말했다.


 “오늘 맞선을 봤습니다.”


 “읏!”


 나의 말에 예호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나는 곁눈질로 예호를 살폈다. 발그랬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기쁨 가득한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리고 불안한 듯 손끝을 꼼지락 거리는 것이 내 예상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예호와는 달리 호련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요? 그래서 그렇게 서양식으로 개량한 검은 두루마기와 중절모로 멋들어지게 차려입으신 거군요. 맞선은 어떻게 되었나요?”


 “파투났습니다.”


 나의 짧은 대답에 예호는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시시각각변하는 것이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예호의 태도가 아니다.


 “안타깝네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보는 눈이 없다니까요.”


 반면에 호련은 여전히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상투적인 위로의 말을 건넬 뿐.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소문의 근원이 호련이라는 것을. 


 “제가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옆 도시 기방에 자주 간다는 소문이 그 쪽 집안에 파다하더군요.”


 “사실인가요?”


 호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그쪽 생각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저는 처음 듣는 소문인지라.”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한숨에 실어 내쉬었다.


 “고백하자면 저도 달가워하지 않았던 맞선이라 파투가 나자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오해를 받으며 파투가 나니 저로선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더군요.”


 호련은 설탕을 잔뜩 탄 양국탕으로 입가를 축였다.


 “이해합니다. 저도 근거 없는 소문으로 오해를 받아 곤란을 겪어보았으니까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없이 호련을 바라보았다. 호련은 뻔뻔하게도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금색으로 변하여 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 호련은 남자를 홀리는 눈웃음을 지었다.


 함정에 빠진 짐승이 되어버렸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땅이 꺼져 그 안으로 떨어진. 함정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폴짝폴짝 뛰어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런 짐승이 되어버렸다. 나는 호련의 눈동자에서 벗어나보려 하였으나 나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호련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내 혼을 끌어당긴다. 갑각류의 껍질에서 살을 빼내듯이 나의 혼과 육이 분리된다. 나의 혼은 나의 육을 떠나 저 금빛 구덩이 안으로 빨려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저기. 선생님.”


 나의 혼을 붙들어 낸 것은 예호의 목소리였다. 나는 강제로 나의 혼을 육속으로 우겨넣은 후에 예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눈 아래를 긁는 척하며 손끝으로 내 표정을 살폈다. 나의 얼굴은 다행히 딱딱하게 굳어있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예호는 허벅지 사이에 두 손을 집어넣고 꿈지럭 거리다가 말을 골라가며 한 마디씩 끊어 말했다.


 “전. 저는. 선생님께서. 그. 기방에 가셔도. 선생님이. 좋아요.”


 그렇게 말하고 얼굴을 홍옥처럼 붉게 물들이고 푹 숙이는 것이다. 행동으로는 내가 너무 좋다고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말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부끄러워한다. 몸은 성인이나 정신은 아직 앳된 소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녀. 내가 옷을 벗으라고 말을 하면 얼굴을 붉히고, 나에게 되물어보고, 주저주저하다가, 결국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미소를 지으며 옷을 벗을 그럴 처녀다. 이런 처녀에게 사랑을 받아 불행하다 느낄 남자가 어디 있을까? 


 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예호. 너는 나를 사랑하겠지. 아직은 미성숙한 영혼은 나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그것을 나에게 덧씌우며 나를 갈망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할 수가 없다. 나는 따로 사랑하는 이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내치지도 못한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옆에 두었던 검은 중절모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억지로 차갑게 식힌 눈으로 호련을 바라보았다.


 호련. 당신은 딸의 행복을 빌고 있겠지요. 딸이 사랑하는 이와 이어지는 것을 바라고 있겠지요. 어머니로서 자식의 행복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러니 제가 맞선을 본다는 소식을 듣고 그 맞선이 파투나게 하기 위해 제가 기방을 드나든다는 헛소문을 퍼트렸겠지요. 자식의 행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호련 씨.”


 이 말. 이 짧은 말. 세 음절로 이루어진 짧은 말. 이 말을 입에 올릴 때. 나의 심장은 족쇄를 벗어나기 위해 힘차게 뛰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 말을 입에 올리면 나는 한 층 더 이름의 주인과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시 한 번 되새기듯이 그 세 글자를 말하여 그 울림을 즐기고,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내 안의 불꽃이 나를 불사르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세 글자를 당신의 귀에 속삭이며 나의 목소리가, 나의 존재가 당신에게 닿게 하고 싶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나의 손과 당신의 손을 깍지를 끼고, 당신 위에 내 몸을 포개며 말로 애무하듯이 찐득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당신의 귀에 속삭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안을 나로 가득 채우고 싶습니다. 호련 씨. 이호련. 호련. 사랑합니다.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제 마음을 받아 줄까요? 아니면 딸의 행복을 우선시 할까요? 제 마음을 받아준다면 저를 사랑하는 예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호의 행복을 우선시 한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저는 또 어떻게 될까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사랑하는 당신이 있기에 예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고, 당신과의 인연이 끊어 질 거 같기에 예호를 내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예호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닿을 듯 말 듯. 이 거리를 말입니다.


 “심증과 정황상 증거만 있을 뿐이기에 책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명심해주십시오. 그 헛소문으로 인해 제가 무척 불쾌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의 말에 호련은 항변을 하거나 생사람 잡지 말라고 불쾌해하지 않았다. 단지 소리 없이 웃었을 뿐이다. 나는 호련을 노려보다가 가게를 나섰다.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 불쾌해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소문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퍼져나가거나 잠잠해지거나 하니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기방을 드나들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런 핑계를 대서라도 이곳에 오고 싶었다. 예호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호련의 모습을 보기 위해.


 밤길을 한참을 걸어서야 나는 차갑게 어두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곧장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들지 못했다. 심신은 지쳐있었으나 억지로 누군가가 붙들고 있는 듯이 도무지 잠이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잠이 들지 않은 나는 끊임없이 호련을 생각했다. 나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나는 밤새 호련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