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내가 이야기꾼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당신이 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진실성을 외면한 채 그것이 저기 어딘가 강 너머에서 전해지는


오래된 전설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모르겠습니다. 어쨋거나, 나는 이야기꾼이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머나먼 옛날, 신들이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던 시대의 전설일수도,


수백년 전 로이스 왕이 사냥꾼의 강에서 초원민족을 격퇴시켰던 시대의 역사일수도,


불과 몇개월 전 마리온의 여행상인이 경험했던 환상적인 이야기일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며칠 전의 내가 겪었던 일일수도 있습니다, 친구여.


당시 나는 고원 왕국의 땅을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 곳으로부터 사흘 밤을 지새우며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요.


당시 고원 왕국과 평원 왕국의 경계에서 열리는 시장을 구경하기 위해서


이미 이틀 밤을 지새우며 걸었던 나는


주변에 마땅히 묵을 곳이 없어 그냥 길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불을 피워놓고 노숙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불을 피우고 말린 생선을 굽고 있을 때,


저 멀리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더군요.


두려워진 나는 모닥불에 땔감을 더 넣기 위해서 주변의 잔가지를 한아름 모았고,


그 잔가지를 모닥불에 쏟아넣으려는 찰나


그 어떠한 지척도 없이 나타난 손 하나가 나를 멈춰세웠습니다.


'허억' 하고, 거의 자빠질뻔한 몸을 간신히 가눈 채 난 뒤를 돌아보았고


그 곳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가 있었습니다.


감히 단검의 폼멜에 손을 가져다댈 새도 없었습니다.


내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는 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습니다. "괜찮아."


"늑대는 오지 않을테니... 다만, 불빛이 너무 눈부시구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가 나를 죽이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고,


나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내 그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내 맞은편에 앉았고요.


"목적지는 어디지?" 그가 물었습니다.


"국경 시장." 내가 대답했고요. "장화의 굽을 갈아야 하거든요." 부연 설명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으음' 하고, 그는 허리를 곧게 폈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푹 내리쓰고 있던 후드를 올리며 얼굴을 보였습니다.


무척이나 창백하지만, 잘생긴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루콘이야."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너랑 같은 여행자고."


"저는 딜론입니다... 여행자는 아니고, 이야기꾼이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피식' 하고 웃었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그건 비웃음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기사가 되고 싶은 아이'를 바라보는 '기사'의 웃음일까요?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웃었습니다. "이야기꾼이라."


"무슨 이야기를 알고 있지?" 참으로 부드러운 말투였습니다.


"많지요." 나는 머뭇거렸습니다. "이 근방에선 로이스 왕의 대사냥 이야기가 인기가 좋습니다만."


"으음." 그는 나지막히 중얼거렸습니다. "'대사냥' 이라고."


"네에, 그리고...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있죠."


그 말을 들은 루콘은 흥미가 생긴 듯 했습니다. "너만 알고 있는건가?"


"아니요." 나는 뭔가 섬뜩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냥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죠. 남부인들의 이야기요."


남부인.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부인들을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어릴 적 옆 마을이 놈들에게 불탔으니까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아름다운 이야기였거든요.


"남부인이라." 그가 말했습니다. 


"네에, 백 년 전 구 제국의 땅에 쳐들어왔던 자들이요." 내가 대답했죠.


그런데 그 답이 잘못된 대답이었을까요? 그는 갑자기 눈을 희번뜩거리며 내게 말했습니다. "말해 봐."


"네?" 나는 놀라서 되물었죠. 


그러자 그는 자세와 표정을 고치더니, 이전의 따스한 말투로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말해 봐. 궁금하군."


요청이 있다면 이야기해주는 것이 이야기꾼의 숙명, 당신이 그랬듯이, 루콘 역시 경청할 준비가 된 자세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했죠.


백 년 전, 남부의 초원에서 한 아이가 태어날 적에


별똥별이 그 아이가 태어나던 천막 위로 떨어졌는데,


같은 시간에 한 남자가 전투에서 패배해서 말을 달리고 있었죠.


전투에서 패배하면 명예롭게 죽어야 하는 것이 남부인의 관습이었지만, 그는 살고 싶어서 도망쳤고요.


그렇게 해서 도망친 곳이 별똥별이 떨어진 천막.


도망친 남자는 별똥별 아래서 태어난 아기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지요.


별똥별을 타고 온 용사를 보필하여 세상의 끝을 밟고 돌아오면


전투에서 도망친 불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요.


그렇기에 그는 그 아기를 열심히 돌보았답니다.


당연히 남부인의 관습대로 아기가 걸음마를 채 떼기도 전에 말을 태우고,


활을 쏘는 방법을 가르치고, 창술을 가르쳤지요.


하지만 초원의 법칙은 잔인한 법, 그 아기의 부족은 이웃 부족의 습격을 받아서 모두 전멸하였고


오직 그 남자와 아기만이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답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고원 왕국의 한 수도원.


간신히 창조주의 은총을 받은 그는 수도원에서 방 한 켠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곳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갔죠... 그리고


16년이 지나 아기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머릿결은 새하얀 백발이었고, 바람이 불면 은줄로 묶은 그의 말총머리는 별똥별마냥 궤적을 그렸다지요.


그가 성년이 되던 해, 남부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말하길, 부족이 재건되었으며, 족장의 아들인 청년은 후계자로써 지위를 이을 수 있다고 했죠.


청년은 남자에게 자신의 가신이 되어 초원에서도 보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머뭇거렸지요.


이미 그 곳에서 우리 겨레의 여자와 결혼을 하였고, 그녀의 뱃속엔 아이가 들어 있었으니...


며칠 밤을 지새운 뒤 남자는 결심했습니다.


아내에게는 반드시 돌아와서 귀족 부인의 지위를 약속하고


뱃속의 아이는 자신의 후계자로 자라도록 하겠다고요.


사랑하는 부인과 이별한 남자는 청년을 따라 초원으로 돌아갔고


청년은 그 곳에서 족장이 되었고, 이내 옛 부족의 복수를 하고, 부족들을 통합하여 왕이 되었답니다.


왕이 할 일은 명확했습니다.


세계의 끝까지 말을 달리는 것이었죠.


그는 초원의 전사들을 소집하였습니다.


십만의 전사들이 저마다 말을 타고 모였고 구 제국의 국경에 당도하였죠.


내로라 하는 요새들도 남부인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차례차례 함락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 위대한 툴란 대왕의 재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남자 역시 왕을 따라 진군하면서 인간으로써는 감히 얻을 수 없는 영예를 거머쥐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아내가 죽고 말아요.


자신의 부하들은 야만적인 초원의 전사였고,


그 자신 역시 초원의 장군이었기에,


그 누구도 자신들이 섬기는 장군의 아내가 수도원 한 켠에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꾀죄죄한 촌부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지요.


그렇기에 그는 비탄에 빠집니다.


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만했던 탓일까,


왕은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에 왕은 자신이 총애하는 가신인 남자에게 한 가지 유언을 전했다는데


그 유언은 아무도 모른다더군요.


어쨋거나, 남자는 유언을 간직한 채 수도원으로 돌아갔고


더이상 전쟁을 하지 않은 채 남겨진 자식과 함께 살아갔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말해주었습니다.


루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죠. "재밌군."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의 칭찬에 기세등등해진 내가 말했죠. "아는 사람도 얼마 없지요."


루콘은 웃었죠. "그럼 나도 얼마 없는 사람 중 하나군."


그는 놀란 저의 표정을 삼십초 정도 감상하고,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아는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루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루콘이 말하는 이야기에서 남자는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겁한 기습에 당해서 아버지와 주군을 잃고 도망친 것이었죠. 남부인과 우리 겨레의 연합이었다고 하더군요.


또한 왕의 부족을 몰살시킨 것도 비겁하게 기습했던 자와 동일 인물이었고요.


그 뒤의 이야기는 비슷합니다만, 남자는 왕에게 창술을 가르키진 않고, 궁술을 가르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참 우스웠죠, 왜냐면 남자는 훌륭한 궁수였지만 훌륭한 전사는 아니었더래나.


그리고 중요한 점, 그는 구 제국을 공격한 전사들의 수는 만 오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초원에서 십만명을 모을 수는 없다고요. 그게 중요한거라고 했고.


왕의 외모를 묘사할 때, 백발의 묘사는 훌륭했지만


핏빛과 함께 애수와 꿈, 그리고 야망이 뒤섞인 아름다운 눈동자에 대한 묘사가 없어서 불편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참나, 사실 왕은 흡혈귀였고


유언이란 다름 아니라 죽기 직전에 남자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하여 같은 흡혈귀로 만든거래나.


또, 애초에 아내 같은건 있지도 않았고 남자는 그냥 왕을 사랑했더래요.


지금 들으면 분명 어이가 없죠. 막장도 심한 막장입니다만...


그 깊은 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감미로웠던 탓일까요?


어째서인지 제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루콘의 눈가에서 달빛이 반사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루콘의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나는 하늘을 보았지요.


별똥별이 떨어졌습니다.


"어디선가 용사가 탄생하나보군." 루콘이 말했습니다.


"그래요." 저는 맞장구쳤죠. "또 아름다운 이야기가 탄생하는거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언제 잠들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일어났을 때 루콘은 없었고


마지막 남은 잉걸불이 타닥거리며 재 속에 남아 있었지요.


어쩌면, 이번 시장 구경이 끝나면


별똥별이 떨어진 방향으로 가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