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방의 주인이 잠시 떠난 틈을 타서 프릴과 리본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용한 화려한 분홍색 커튼을 조심스럽게 들춰보았습니다.


실망스럽게도 커튼 뒤로 얼핏 보였던 창틀은, 반대편 벽에 있던 문과 마찬가지로 그저 장식일 뿐이었습니다.


이로써 이 방에는 창문은 커녕 제대로 된 문조차 없으며,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방법은 천장에 있는 다락문에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가 필요할 때마다 내려주는 사다리 뿐이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딱히 이 방이 쾌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부담스러워서 진정이 되지 않는 쪽이라 생각합니다.


매끄럽고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는 무늬들이 수놓아진 귀여운 분홍 카페트가 깔려있는데다, 


마음대로 눕기에는 황송할 정도로 호화롭고 푹신한 공주님 침대에 누워 왼쪽을 바라보면, 


그 곳에는 혼자쓰기엔 황송할 정도로 커다란 벽걸이 TV가 걸려있고, 


TV의 바로 아래에는 셋톱박스, 컴퓨터, 게임기등의 온갖 전자기기들이 그 사치스러운 화면이 지닌 가치가 낭비되지 않도록 보좌하고 있습니다.


반대편 벽으로 눈을 돌려보면 고급스러운 목재로 만들어진 커다란 나무 옷장이 있는데, 


그 안에는 갖가지 화려한 드레스가, 그 옆의 화장대에는 온갖 고급 브랜드의 화장품들과 치장도구가 있는 구성으로, 


이 방에서 유일하게 오점이라 부를만 한(가짜 창문과 문을 제외하고) 군데군데 낡고 녹슬어서 으스스한 변기가 딸린 샤워부스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성역에 있던 제 방은 물론이고, 주인님의 방과 비교해도 지나칠 정도로 호화롭습니다.


그렇지만 이 방의 모든 물품들은, 수감자가 자신이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시키기 위한 장치라는 사실을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만이 문제일 뿐입니다.



"곤란하네요……."



마침내 저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줄 리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대로 침대에 털썩 하고 몸을 뉘였습니다.



방심.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뼈아픈 실책이었습니다.


저와 동행했던 작은 주인님께선 비록 싸움은 잘 못하신다곤 해도, 밤의 여제들의 전령이며, 그 분들의 혈족이며, 동생입니다.


그러니 저는 이 만남이 '태양의 심장'이 얽힌 다소 위험한 일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상대가 감히 밤의 여제들의 전령이자 동생인 그 분 앞에서, 그 분들의 소유물인 제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오판하고 말았습니다.


……제 명예를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 제 오판에는 그래도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몇다리 건너서 들은 이야기지만, 제 납치사건 이후 제 주인님께서 밤의 심부름꾼의 가문에 찾아가셔서 꽤나 요란하게 날뛰셨다고 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밤의 사회 전체에 주인님의 제일 아픈 손가락, 즉 주인님을 구워삶기 위한 최적의 인질감으로 알려지게 된 모양이지만, 그 만큼 저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리스크가 될 지 충분한 본보기가 되었다고 판단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대가 함정은 파놓을지언정, 이처럼 막무가내로 납치를 시도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밤의 사회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강자가 뒷배로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은, 만약 그게 아니라면…….



"하아아아아~ 도대체 이게 무슨 엉망진창인 꼴이냐."


"꺅!?"



난데없이 제 발치에서 귀동냥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놀라서 뒤집어 질 뻔 했습니다.


저는 놀라움 반, 두려움 반으로, 두 다리를 머리 위까지 들어올린 다소 보기 흉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침대 밑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고개를 천천히 침대 모서리 너머로 가져가자, 그 곳에 적발의 잘린 머리 같은것이 얼핏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섬뜩한 광경에 숨이 멎을 것 같이 놀라있던 찰나, 그 잘린 머리가 갑자기 위로 솟아오르는 바람에 전 대경실색하면서 완전히 뒤집어졌고, 한심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뭐냐. 이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냐?"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의 작은 소녀'가 발치의 그림자에서 솟아나오더니, 제 앞에 서서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 사람은 제 주인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던 그 때의 '스토커 선배님'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습니다.



"아휴~ 발치에 잘린 머리가 생겨났는데, 그게 갑자기 위로 솟아오르면 누구든지 놀란다구요……."


"그게 그런 식으로 보일 줄이야……. 생각도 못했다. 미안."



스토커 선배님은 멋쩍은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사과하셨습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방 안을 잠시 두리번 거리며 둘러보시더니, 돌연 얼굴을 찌푸리셨습니다.



"그나저나 이 방, 코디가 왜이래? 완전 악취미인데? 으……. 기분나빠…….


마치 노예우리를 애착권속의 방으로 어설프게 리모델링하다 만 것 같은 꼴이야. 


우웩~"


"조금은 동감이에요."



근데 잘 생각해보니 방금 스토커 선배님의 말씀에는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습니다.



"근데 애착권속 이라뇨? 그런 것도 있나요?"


"뭐, 밤의……아니 흡혈귀들은 하도 오래살다보니 다들 조금씩 뒤틀려있잖냐."


"……그럼 혹시 제 주인님께서도 이전에 다른 애착권속을 두신 적이 있었나요?"



스토커 선배님은 잠시 눈을 꿈뻑거리면서 제 얼굴을 들여다보시다,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제 허벅지를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뭐? 왓, 핫핫핫하! 아냐, 아냐. 그 고지식한 사람이 설마……푸푸풉……. 


아~ 눈물 나올 뻔 했어…….


하아~, 아무튼 그 고지식한 사람이 그런 걸 둘 리 없잖아?"


"……."


"혹시 질투라도 한거냐? 푸흐흡……. 이 놈 완전 걸작이네. 


순 불여우인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순정파였구나?"


"……."



제가 스토커 선배님을 잠시 노려보자, 그 사람은 아직도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면서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아~ 미안 미안. 근데 진짜 걱정 안해도 돼. 


어쩐지 넌 자꾸 권속이랍시고 스스로를 소유물이나 장난감 같은걸로 낮춰부르는 모양인데, 


그 진지하다 못해 고지식한 사람이, 자기가 아끼는 상대를, 아무리 그게 권속이라 해도 물건이나 애완동물로 취급할 리 없잖아?"


"그럼 다행이지만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스토커 선배님은 잠시 심호흡을 하시더니,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내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쉽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내가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지."


"네?"


"응, 아냐. 그냥 혼잣말. 잊어버려."



스토커 선배는 거기까지 말하시고는 제 옆에 털썩 앉으시더니, 턱을 괴면서 대뜸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습니다.



"에휴……. 근데 매사에 진지한건 좋은데, 가끔 지나치시다보니 탈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승님께선 어째서 바보짓은 짓만 연달아 벌이셨던 걸까……."


"바보짓이요?"


"그래, 바보짓. 일이 결국 이 사단이 난 것 자체가 한심한 촌극이지, 뭐.


편지를 숨긴 것부터 시작해서, 널 집에 방치해두고 큰 여제님이랑 쫄래쫄래 놀러다니던 것이나, 


그 탈색한 병아리 같은 허연 꼬맹이한테 한심하게 휘둘리던 것이나……―"



이 사람, 전에 본인 입으로 스토킹을 한다고 실토하긴 했지만, 이 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스토커일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진저리가 나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저는 어느새 스스로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습니다.



"……저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신건 언제부터?"


"그야 당연히 처음부터지."


"그 처음부터가 언제인데요?"


"내 개인적인 조사를 시작했을때 얘기야? 아니면 이번 외출로 집을 나섰을때 얘기야?"


"……."



제가 순간적으로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몰라도, 스토커 선배님은 불만족스럽다는듯이 실눈을 뜨고 저를 노려보기 시작하셨습니다.



"야야, 나도 내가 스토커라는 자각은 있지만, 그래도 도와주려는 사람한테 그 표정은 좀 너무한거 아냐?"


"……그럼 왜 그땐 구해주시지 않으셨나요?"


"근처에 있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던 내가 거기서 모습을 드러냈다가, 나중에 스승님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거기다 놈들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설령 도와주려 했다고 한들 정말 구해줄 수 있긴 했을까?


내 존재가 들통나면 내가 하고있던 개인적인 조사가 완전 엉망이 될거란건 덤이지."


"……."



스토커 선배가 제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서 얼굴을 들이미셨습니다.



"넌 그동안 나름대로 스스로를 주판알 좀 굴릴 줄 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이 모든 일을 시발점부터 조사하고 있던 내 입장에서 네 행동은, 그야말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다니깐?"



저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 거리면서 저에게 곁눈질을 보내는 스토커 선배를 잠시 노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하아……. 완전히 놈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던 모양이네요.


그럼 이 일의 배후로 누가 있는지도 알아내셨나요?"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계시던 스토커 선배는, 제 질문을 받자마자 갑자기 움츠러드시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습니다.



"이 녀석, 아픈 데만 골라서 찌르는 재주가 있구나.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놈이라 어떤 거래를 했는지 정도만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어.


이 성역의 주인인 남작 놈이랑 말이야."


"남작 님, 인가요……."



스토커 선배님은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드는지, 제 말을 듣고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신채로 눈총을 주면서 저에게 삿대질을 하셨습니다.



"그 따위 놈한테 님 같은거 붙이지 마. 나도 권속일 적에 존대 안했을 정도로 그릇이 작은 놈이니깐."


"아무리 그래도……."


"내가 보기엔 네가 그 놈보다 몇배는 더 거물이야.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



스토커 선배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삿대질 하던 손으로 제 볼을 쿡쿡 찌르셨습니다. 


그러다 갑작이 생각났다는 듯이 손바닥을 치시더니 말하셨습니다.



"아, 그래도 배후에 있는 놈의 이름은 알아냈다."


"그래요?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사실 이름이라고 하긴 좀 그런데, 이 놈, 스스로를 '어둠의 주인'이라고 자칭하더라고."


"어둠의 주인……인가요."


"그래. 좀 유치한 호칭이지? 


그래도 워낙 애매한 이름이다보니 이름만으로는 어떻게 행적을 추적하기도 어렵더라고. 


나름 잔머리 굴린 결과물인 것 같으니까 얕보지는 않는게 좋아."



거기까지 말하고 나신 스토커 선배님은, 대뜸 발 밑으로 손을 뻗으시더니 자신의 그림자에서 뭔가 검은 물건을 꺼내서 제게 내미셨습니다.



"자, 일단 이거 받아.


당장 남작놈이 뭔가 위해를 가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깐……."


"이게 뭔가요? 단검?"



그 말대로 스토커 선배님께서 제게 내민 검은 물체는 양날인 칼처럼 생긴 날카로운 물건이었습니다.


다만 너무나도 검은 나머지 이 물건의 길고 날카로운 윤곽 외에는 잘 알아보기 힘들어서 한 눈에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네가 가지고 다니던 그건 여기 오면서 빼앗겼잖아. 그거 대신."


"그건……그랬죠."


"나 참. 대체 어디서 사냥꾼들이나 쓸법한 그런 흉흉한 물건을 구한거야?


아무리 스승님이 너를 아끼신다 하셔도 그 꼬장꼬장한 사람이 그런 끔찍한 물건을 사줬을 리가 없을텐데…….


몰래 챙겨서 갖다주려 했더니만, 은제라 그림자 안에 안들어가잖아."



저는 받은 칼을 천장에 비춰봤습니다.


그 물건은 빛을 제대로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검고 어두운 나머지 손으로 감촉을 느끼는 것 외에는 생김새를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이건……금속인가요?"


"흑요석이야. 의식 할때나 쓰는 장난감이지만, 그래도 네게는 아무것도 없는것보단 낫겠지."


"그렇군요. 일단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흠, 흠."



스토커 선배님은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방 안을 둘러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흑요석 단검을 은제 칼의 칼집에 어거지로 밀어넣고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버렸습니다.


선배님은 그런 제 모습을 보시고는 벙 찌신듯 하더니 잠시 말 없이 노려보셨습니다.



"왜요?"


"위기를 기회로, 라는 말 모르냐? 


지금 네가 붙잡힌 신세라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놈들에 대해 조사할 좋은 기회 아냐?"


"그런가요?"


"뭐? 그런데요, 라고오? 지금이 그렇게 태평할 때야? 뭘 멋대로 자빠져 눕고있어?"



저는 노발대발해서 으르렁거리는 스토커 선배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여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여기서 할 수 있는 조사는 이미 다 했는걸요? 그림자 속에서 전부 보신 것 아니었나요?"


"했어도 계속 하는거지, 네가 그렇게 꼼꼼해? 이 방에 있는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전부 조사했다고 확신할 수 있어?"


"일단 지금 조사하려 하시는 그 문이 장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있는데요."



스토커 선배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저를 째려보시더니 방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기셨습니다.


그리고 눈 앞에 벽지가 문틀 안으로 계속 이어져있는 절망적인 광경을 목도하셨습니다.



"뭐……우왓!? 실화냐? 


우와아……. 그냥 벽에다가 왜 이런걸 달아둔거야? 기분나쁘게 스리…….


창문도 그래? 혹시 뭐 장치같은것도 없어? ……진짜로?"


"말했잖아요. 전부 조사했다고. 다 보고계신거 아니었나요?"


"보기야 했지. 근데 그림자 안에선 밖의 실재가 왜곡되어서 보이거든. 


그래서 그 '어둠의 주인'이란 놈이 어떻게 생겨먹은지도 알아낼 수 없었고…….


아무튼 그럼 이 방의 유일한 통로는 저거 위에 있는 다락문 뿐인거네?"


"그런 셈이에요."



스토커 선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뒷머리를 벅벅 긁으셨습니다.



"하아아…….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래도 언제 좋은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너무 늘어져 있지는 마."


"염두해둘게요."



스토커 선배님은 그래도 여전히 탐탁치 않다는 듯이 찌푸린 표정으로 제 옆에 따라 누우셨습니다.



"아, 이거 엄청 푹신하네."


"그러게요. 지금 위기인데도 이런 사치스런 침대, 계속 누워있으면 글러먹게 될 것 같아요."


"……얌마. 그럼 당장 일어나는게 어때?"



스토커 선배님은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서 저를 바라보시며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배님은요?"


"나는……그래, 나는 너무 오랫만의 침대라 잠깐 정도는 누려도 될 것 같거든."


"그러시군요."


"그래."



그렇게 저와 스토커 선배님은 잠시 사치스러운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잠을 자기는 하지만, 인간일때와는 다르게 따로 수면욕구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에 몸을 뉘일만한 관 비스무리한 것도 없어서, 멀쩡한 정신으로 그저 누워만 있을 뿐이었기에 어쩐지 누워있는데도 지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스토커 선배님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보니 말인데, 어……. 이거 정말 물어봐도 되나?"


"뭔가요?"


"그래서 네 동생 말인데, 진짜 있었어?"


"그건……."



그때 천장이 덜컹거린다 싶더니 끼익 하고 다락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스토커 선배님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시더니 제 다리 사이에서 몸을 낮추셨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대충은 알 것 같긴 하지만, 모양새가 그러니만큼 조금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이크, 누가 오는가보다. 난 당분간은 네 그림자 밑에 숨어있을테니까, 무슨 일 생기더라도 너무 움츠러들지 말고 해야할 일을 해."



그러시고는 선배님은 말을 마치자마자 제 발치의 그림자 아래로 녹아내리듯 사라지셨습니다.


곧바로 선배님이 사라지는것과 거의 동시에 천장의 다락문이 열렸습니다.





"언니야, 지금 내려갈거니까 방 가운데 서있으면 안돼?"



열린 다락문 틈으로 이 방의 주인이 이쪽을 향해 머리만 빼꼼 내밀어 보고 있었습니다.


조명때문에 그늘이 져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걱정하는듯한 표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곧, 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줄사다리가 내려왔고, 긴 머리의 하얀 소녀가 그것을 타고 방 안으로 내려왔습니다.


줄사다리에서 완전히 내려온 소녀는 잠시 숨을 들이키고는, 천장의 다락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내~려~왔~어~요~"



그러자 이 방의 유일한 출입수단인 사다리가 쇠사슬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락문으로 말려 올라갔습니다.


사다리가 완전히 말려 올라가고 나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제 다락문이 닫혔고, 이 방은 다시 밀폐된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제보니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환기구 정도는 있는 것 같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소녀가 침대에 누워있던 제 품으로 달려와 뛰어들어 안겼습니다.



"우왓!?"



소녀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이리저리 부벼대면서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언니, 언니, 언니, 언니, 언니, 언니야! 보고싶었어.


나, 언니 지켜주려고 힘냈어. 


잘했지? 그치?"


"으, 응……."



저는 저를 열성적으로 따르고 있는 이 소녀에게 어쩐지 떨떠름하게 대답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이 소녀는 머리 색이라던가, 체형이라던가, 기억하고 있던것과 여러가지로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이 소녀는 분명히 제 여동생, 그러니까 제가 인간이었을 때의 여동생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뭐하고 놀까? 아, 그렇지. 목마르지 않아? 먼저 피부터 마실래?"



그렇게 말하고 난 소녀는 제 대답을 기다리도 않고 냉장고에서 혈액팩을 꺼내 내용물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심호흡을 하고 제게 다가와 목을 내밀었습니다.



"자."


"……자, 라니?"


"언니도 흡혈귀잖아? 여기, 이런 식으로 아앙~ 해야지."



소녀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조금씩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하더라도, 이렇게 겁먹은 상대의 피를 빨라고 한다면 누구나가 조금 정도는 주저할 것입니다.


애초에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 소녀의 목덜미를 무는것도 부담스럽기도 하고, 주종관계도 아닌데 동족의 피를 빨아마시는것도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본인 나이도 어려보이는데다, 흡혈귀가 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이런 망측한 행동을 가르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소녀는 조금 실망한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앙~ ……안할꺼야?"


"으, 으응. 지금은 괜찮아."


"그래? 목이 마르지 않은거지? 알았어…….


그래도 목이 마르면 언제든 꼭 말해줘야해? 꼭이야?"


"……응."



소녀는 제 가슴께에 다시 한 번 얼굴을 묻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제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는지, 모소리가 너무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

.

.


"이제 다시는 언니 곁을 떠나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날 떠나가지 말아줘. 

나와 같이 죽어줘. 

영원히 함께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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