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이젠 용사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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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대로 당신에게 찾아와서 미안해.

 

패밀리어는 당신의 명령에 복종할 거야.

 

그리고 만일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종이에 적힌 내 이름을 읽어줘.

 

언제든지 당신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게

 

수 년이든수십 년이든 내게는 찰나에 불과하니까.

 

리코리스 라디아타 -

 

 

 

다녀왔어후우...오늘 좀 힘드네.”

 

 

서쪽 하늘녘으로 해가 많이 기울어질 무렵한스는 길드에 들어오면서 한 숨 돌리며 말했다

 

 

어서와한스.” 

 

그리고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던 에들레이드는 눈에 띄게 반색하면서 한스를 맞았다

 

 

오늘 저녁은 맥주나 한 잔 할래?”

 

사양할게오늘은 의뢰 수행으로 너무 피곤하니까.” 

 

 

 

그 모든 것이 몇주 전과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한스는 더 이상 에들레이드에게 거리를 두지 않았고에들레이드 또한 한스에게 벽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에들레이드도, 늘상 침울하기만 했던 한스가 이토록 사근사근한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장난스럽게 그에게 묻자 한스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잖아.' 


그럼에도, 그의 소식을 묻는 여러 추종자들에 의하면 크게 달라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이는 오직 그녀에게만 보이는 한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에들레이드는 한스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었다한스가 늘상 기다리는 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물어보면분명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똑같겠지 뭐매번 같은 내용뿐이라니까전번보다 차도가 있다나아지는 것 같다몇 년 째 그런 얘기들 뿐.’

 

 

그러면서도편지가 여러 사유로 늦게 도착하기라도 하면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보이기에에들레이드는 제 날짜보다 이르게 도착한 이 편지를 그에게 보여줄 생각에 설렜다.

 

그렇지만 먼 곳에서 요양하는 그녀의 여동생에 대한 소식이 담긴 편지를 에들레이드는 우선 뒤에 감추고쉬고 있는 한스에게 시시콜콜한 안부를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 있었어?”

 

아니젊은 여성 마물이 손님이라서... 의뢰보다 도망가는게 더 힘들었거든.”

 

 

에들레이드는 짐짓 그런 얘기들에 걱정하면서도그의 마물 혐오를 잘 알았기에 안심했다

 

에들레이드는 무엇보다 그가 더 이상 마물이 얽힌 의뢰들을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하는 데에 기뻐했다.

 

물론 아직은 그가 완전히 마물에 대한 공포랄지 증오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 역시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 역시도 인간 지인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한편그날 이후로 더 이상 저택의 리치는 한스나 에들레이드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아픈 한스를 발견하고 빠르게 치해준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일지라도 그렇게 노골적인 접근은 그를 불안하게 할 뿐이다둘 다한테는 좋지 못한 일이다

 

다만 한스에게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지만그녀가 부리는 패밀리어가 아직 한스의 주거지 그런 폐허에서 아직도 노숙하고 있다니에들레이드로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서 간단한 일들을 돕고 있다고 한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음험한 리치가 그 패밀리어에 무슨 음흉한 짓이라도 해둔 것은 아닌지 그녀로서는 걱정되기 짝이 없었다

 

 

한스생각해봤어?”

 

그거...”

 

 

그래서 에들레이드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길드원의 특권을 이용해서 이용 금액에 편의를 봐 줄테니길드 숙소를 이용하라고.

 

길드 숙소의 숙박비가 여타 여관보다는 비싸긴 하지만반값이라면 이만한 가격의 여관도 없었다.

 

무엇보다수면중에 마물에게 요바이를 당할 수 있는 무보안의아니 그런 행위를 적극 권장하는 여관보다는 에들레이드 자신이 있는 한 절대로 걱정 없는 길드 숙소가 아닌가.

 

그러나 한스는 아직도 망설이는 듯했다어지간히도 빚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직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어조만간 결정해서 알려줄게.”

 

좋아그렇지만 한스친구 좋은게 뭐야걱정말고 의지하라니까?”

 

 

에들레이드의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스는 엷게 미소지으며중얼거렸다.

 

 

친구... 그래친구지.” 

 

 

그리고 한스는 카운터에 다가와에들레이드의 뒤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그 편지는 언제쯤 주려고?”

 

 

에들레이드는 당황하면서 한스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들어올 때부터.”

 

“...거짓말.”

 

그래맞아사실 들어오기 전부터.”

 

어떻게...?”

 

돌아오는 길에 길드방향에서 걸어오는 우체부를 만났으니까.”

 

당신 거 아닌데

 

그래그런데 언제부터 알았다는 건 뭐야?”

 

 

역시 그녀는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었다그녀 스스로도 그것을 알았다그렇기에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길수록 그녀의 걱정도 늘어났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당장의 순간의 행복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을 외면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못 속이겠네묵직한 바위같은 사람인줄 알았는데능구렁이도 이런 능구렁이가 없다니까.”

 

내가 능구렁이라기보단.”

 

 

그러면서 한스는 어느새 그녀의 뒤로 돌아가 그녀가 감춰둔 편지를 낚아챘다.

 

 

에들레이드 너가 빈틈이 많은 거지.”

 

 

그의 품이 에들레이드의 바로 뒤에 있었다반 발자국 물러서지도 못하고 닿을 만한 가까운 거리에.

 

그건 내쉬는 그의 숨결도 느껴질만한 거리감이었다그녀는 굳어버렸다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가슴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안돼...!! 이렇게 흥분해버리면...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버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마음은 크게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는 다시 있던 위치로 돌아왔다.

 

편지의 수신처를 확인하고한스는 에들레이드를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동생한테서 온 편지네.”

 

응응!! 아마 그럴걸?”

 

에들레이드.”

 

.. 왜 한스?”

 

동생이 만일 제 정신을 차린다면너하고도 많이 친해질 거야.”

 

어째서?”

 

동생하고 비슷한 부분이 많거든그래서 더 좋아할 거야성격은 하나도 안 닮았지만.”

 

 

에들레이드는 약간 의구심을 품고 그에게 물었다.

 

 

네 동생 얼굴이 나랑 닮은 점이 많다고?”

 

아니내 동생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어.”

 

그게 무슨 동문서답이야... ...”

 

 

한스는 약간 씁쓸하게 웃으면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여자 지인한테는 너무 실례되는 말이니까굳이 말은 안했는데미안해.”

 

 

분명 그랬다그렇지만에들레이드로서는 뜬금없을지라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기에그런 결례에 대응할 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렇구나... 이 모습은그의 어머니의 모습이었구나.’

 

 


그의 어린시절의 악몽이 어찌나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한스에 대한 동정심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어서도그에게 이상적인 여성이란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그는 내 본 모습도 사랑해줄수 있을까..?

 

그가 만약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난다면어쩌면.

 

그렇다면그가 어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서서히 옆에서 그를 도와야만 하겠지.

 

그녀는 얼굴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을 느껴서 서둘러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니아니괜찮아그럴 수도 있지.... ... 한스?”

 

 

한스는 에들레이드가 당황하던 사이 어느새 편지를 뜯어 그 내용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방금 그녀가 스스로에게 느낀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한스의 표정을 살피며 한번 더 한스를 불렀다.

 

 

... 한스무슨 일 있는 거야?”

 

 

...

 

 

언제든지 당신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게

 

수 년이든수십 년이든 내게는 찰나에 불과하니까.


라고 자신있게 말을 남겼건만, 리코리스는 요 몇주간 느낀 것과 같은 극심한 무력감과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약재는 꾸준히 배송되었고 각종 새로운 서적들은 멈춤없이 그녀의 끝없는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그런 자료들을 수집하고 모아서 주석을 달고 그녀의 이름을 붙여 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쓰는 대부분의 비용은 충당되었다거기에 그녀의 약술서가 벌어오는 비용을 더하면아무리 리코리스가 헤프게 돈을 써도 그녀의 저택 창고에는 한 무더기의 금화 자루가 다달이 추가되었다.

 

그러나그녀는 처음으로 그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 것만 같았다

 

그녀 주변에 쌓인 난잡한 서류들은 그녀가 분석을 위해 그렇게 쌓아둔 것이 아니다그저 조금 읽다가 지쳐서 던져버린 것들의 모음일 뿐.

 

어떤 것도 중요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에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하고 그녀는 성마른 휘두름으로 서류를 쓸어내릴 뿐이었다

 

그의 이름한스라고 했던가

 

접객원이 알려주지는 않았지만의뢰서에서 그의 이름을 빠르게 보았고기억했다

 

책상에 엎드려 팔을 얼굴에 괴고는 그녀는 한숨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아... 그가 만일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리코리스

 

그가 어디에 있든 그에게 소환될텐데.”

 

리코리스 라디아타.’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리코리스 라디아타!’

 

 

리코리스는 화들짝 놀라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방 안은 고요했다약을 담은 가마솥은 조용히 끓고 있었고자동으로 필사되는 책장이 하나씩 소리를 내면서 넘어갈 뿐이었다.

 

헛것을 들었나 했던 그녀는오감을 버리고 육감에 집중했다.

 

잘못 들은 소리가 아니었다.

 

저 멀리서한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익숙한 목소리부름.

 

리코리스는 절대 그것을 놓칠 수 없었다.

 

드디어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그녀가 남긴 서명을 그대로 읽어서 그녀를 소환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것도 그 부름은 그녀가 알고 있는 그 곳이 아니다.

 

훨씬 더 멀리 떨어진마을과 마을을 지나쳐 이곳과는 다른 나라일지도 모르는 곳.

 

그 종이가 다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그녀를 부른 것은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것은 확실했다.

 

무수한 의구심이 들었지만그녀는 소환에 응하기로 결심했다

 

소환에 응하면서본인의 모습을 다시 떠올린 리코리스는 걱정했다.

 

아무런 단장도 하지 못했는데.

 

잠깐이나마그를 기다리게 하기 싫어서그대로 응해버리다니

 

그만큼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환된 곳은바로 어떤 마을의 외곽 어귀였다그리고 리코리스를 소환한 장본인한스가 그녀가 내어준 소환장을 들고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왔어...”

 

으응... 오랜만이네.”

 


그토록 기다리던 그에게 할 말이 고작 오랜만이야’ 뿐이라니리코리스는 자신의 지성이 이토록 부족한 데에 스스로 자괴감을 느꼈다.

 

그렇지만그런 문제는 정말로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가 부름을 받은 이유는 심각했다.

 

 

부탁이야리코리스 라디아타.”

 

 

그녀가 그의 부름을 따라 간 곳에서그는 울고 있었다.

 

온갖 일을 다 겪어서무뎌진 바위같았던 남자가마치 서러운 일을 마주한 어린 아이마냥 눈물 흘리고 있었다.

 

 

동생을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