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눌라의 난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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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트릴랑의 결심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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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제자와 답답한 스승 篇:

26화



노인의 봇짐 속에 있던 것은 수녀들이 착용하는 칙칙한 베일과 밧줄로 엮은 신발, 그리고 옛 로마 제국 병사들이 신던 긴 양말이었다. 신발과 양말이야 그렇다 쳐도 베일은 남자가 챙길 물건이 아니었기에, 산트릴랑은 참지 못하고 노인에게 물었다.


"형제님은 이것들을 어디서 가져 오신 겁니까?"


"이건 내 딸의 것이오. 그애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나물 캐고 장작 패는 잡일을 했는데, 수도자가 마땅히 할 일을 막을 수야 없지만 도저히 고생하는 꼴을 못 보겠어서 챙겨 준 것들이지요. 그런데 그 녀석이 정식으로 수녀가 되자마자 사흘 만에 죽어버렸지 뭡니까? 해서, 딸년 묻힌 곳에서 실컷 울다 유품이나 챙기고 가는 길이올시다."


산트릴랑은 노인의 사연을 듣고, 한순간 그의 행동을 함부로 기이하게 여긴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그런 산트릴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수녀님, 수녀님이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이해합니다. 이런 베일은 여자의 머리를 가리는 데 쓰는 것이니, 나같은 늙은 사내가 갖고 다닐 게 못 되지요. 그러니 봉헌금 내는 셈 치고, 이것들을 수녀님께 드리고자 합니다. 집에 가져가 봤자 아내나 다른 딸들도 함부로 걸치지 못할 테고요."


"감사합니다, 형제님. 형제님께 주님의 축복이 길이 머무르기를 빕니다."


산트릴랑은 헌물을 감사히 받아 들고 다시 길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노인이 또 그에게 말을 걸었다.


"헌데, 떠났다는 제자는 어느 방향으로 갔지요? 이쪽으로 갔다면 나도 만났을 텐데..."


수녀는 가고 없는 제자 얘기를 그 노인이 왜 하는지 잠깐 의아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버리고 대답했다.


"아마 남서쪽이었을 겁니다. 아침에 해 뜬 방향을 비스듬히 빗겨 갔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요술을 부릴 줄 알아서 구름을 옷처럼 걸치고 날아갔으니, 형제님께서도 보지 못 하셨을 겁니다. 못 믿으시겠지만, 이는 다 사실입니다."


"남서쪽이라... 내 집이 있는 방향이구려. 그자는 분명 내 집에 들를 테니, 잘 말해서 수녀님을 다시 모시도록 해 보겠소."


노인의 말에 수녀는 언짢은 표정을 띠며 말했다.


"그자는 본성이 추악하고 사나워서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처음 만났을 땐 호위가 없으니 불안해서 부득이 제자로 맞아들였지만, 도저히 그리스도를 따를 영혼이 아니라서 떠나는 것을 잡지 않았습니다. 형제님께서도 그가 정말로 댁에 있다면 적당히 구슬려서 쫓아내시지요."


그러자 노인이 껄껄 웃고는 수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수녀님, 이제 보니 그 제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수녀님께서도 그리스도와 같게 되긴 글렀습니다그려.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죄인과 먹고 즐겼으며, 세리를 제자로 들였다는 대목이 있지 않소? 또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시며, 죽기 직전에야 회개하는 악인도 낙원으로 데려가신다고도 하지요. 수녀님께서도 주님께 순명하며 그분을 본받고자 하신다면, 그자를 멀리하지 마시고, 도리어 성령을 빌어 그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시오."


그제야 산트릴랑은 그가 범상한 늙은이가 아님을 알아채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뒤 자세를 고쳐 노인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들어올리고 손을 모은 뒤 말했다.


"스승님! 이제 보니 스승님은 현인이시군요! 어리석은 계집 마리 드 로셀리에가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현인이시여, 가르쳐 주십시오. 그자를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에 노인이 어느새 빛나는 자태로 변한 뒤, 몸을 숙여 산트릴랑과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너에게 준 베일을 그에게 씌워라. 그리고 그가 죄를 지으면 이 언구를 작게 읊어라."


그러자 산트릴랑의 머릿속에 처음 듣는 언어로 된 구절이 떠올랐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둑다 하카 무가예 수나 자레 타쿱반수, 수나 자레 바쿠나. (Duk da haka mugaye suna zare takubbansu, suna zare bakuna)

완난 시네 누나 마카민 다야 카셰 무툼 다 쿠마 마이다 키반사 주와 키반 우타. (Wannan shi ne nuna makamin da ya kashe mutum da kuma mai da kibansa zuwa kiban wuta)

가시, 마이 치키 다 무군타 타나다 치키 다 발라 이, 타 하이삐 까랴. (Ga shi, mai ciki da mugunta tana da ciki da bala'i, ta haifi ƙarya)

바얀 순 토나 타르코 마이 주르삐, 사이수 빠다 치킨 라민 다 수카 이. (Bayan sun tona tarko mai zurfi, sai su fada cikin ramin da suka yi)

발라 인 다 쿠카 시랴 야 코모 아 칸쿠, 하르긷신 다 쿠카 이 야 빧도 아칸쿠. (Bala'in da kuka shirya ya komo a kanku, Hargitsin da kuka yi ya faɗo a kan ku)"


이는 본래 베르토눌라의 고향에서 널리 쓰이는 언어시편 7장 13절부터 17절까지 읊은 것이다. 산트릴랑은 그 언어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음에도, 그 뜻을 인지할 수 있었고, 왜 하필 그 언어로 읊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녀가 경외를 금치 못하고 노인을 다시 우러러보려 하였지만, 이미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수녀는 곧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본 것을 깨닫고 엎드려 감사 기도를 올렸다.



한편 베르토눌라는 옛 스승 곁을 떠날 땐 고향인 야만인의 낙원으로 갈 생각을 했지만, 불쾌감을 떨치기 위해 지중해 한가운데에서 멈춰 며칠을 쉬고 있었다. 탁 트인 바다를 보니, 한때 하늘 위에서 지옥 끝까지 쏘다니던 옛일이 생각났다. 문득 올림푸스 신들을 다시 만나 과거에 빚었던 갈등을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베르토눌라는, 우선 자기가 처음 만났던 신인 포세이돈을 오랜만에 만나 뵙기로 정해 진로를 바꿔 바다 밑으로 향했다.


베르토눌라가 바닷속 궁전에 도착하니, 곧 오케아니데스들이 나와 그를 환대하며 포데이돈의 어전으로 모셨다. 포세이돈도 좋은 술을 대접하고 오케아니데스에게 춤과 노래를 시키며 베르토눌라의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둘은 과거에 서로에게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고 세상이 변한 모습에 대해 논하기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포세이돈이 포도주로 목을 한 번 축이고는 베르토눌라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베르토눌라여, 오백 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생각인가? 다시 디믈란기아로 돌아갈 텐가?"


질문을 들은 베르토눌라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뒤 답했다.


"처음엔 나도 그럴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과 담소를 나누면서 생각해 보니, 내 백성들은 모두 저승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들의 자손은 지혜를 빼앗겨 짐승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되어 버린 게 기억났습니다. 내가 그들의 왕이 되어봤자 그들은 날 섬기는 법도 모르겠지요. 물론 그들이 그 꼴이 된 건 결국 나 때문이지만, 아무리 자책을 한들 그들이 지혜를 되찾고 나도 갈 곳이 생기는 일은 다시 없을 테지요."


베르토눌라가 울적해서 고개를 숙이자, 포세이돈이 그의 눈치를 보더니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질문했다.


"음, 그러고보니 그 오백 년 동안 아무리 애를 써도 부서지지 않았다는 바위산 감옥에서는 어떻게 나온 건가? 열쇠라도 있었나?"


그러자 베르토눌라가 다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내가 풀려나기 하루 전에 나자렛 예수의 어머니가 '망뜨에서 온 수도하는 여인이 너를 꺼내 줄 테니, 그를 스승으로 삼으라' 했는데, 정말 다음날에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내가 갇혔던 바위산 윗부분에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그 망뜨 여자가 그걸 읽으니 바위가 깨지더군요."


"아니, 아까 갈 곳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스승으로 삼을 사람이 생겼다면, 가르침을 다 얻을 때까지는 그의 주변이 곧 그대 있을 곳이 아닌가?"


포세이돈이 놀라서 물으니 베르토눌라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니오, 그자에게는 영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글쎄, 며칠 전에 산적들이 앞길을 가로막고는 돈 아니면 몸을 달라길래 무찔렀었는데, 이 어리석은 여자가 도적놈들 무기 앞에 겁먹고 벌벌 떨기만 할 땐 언제고, 다 죽여 놓으니까 나를 악인이라며 매도하지 뭡니까? 옳은 일을 하시는 바다의 신이시여,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인 자들은 악한 여덟 사상을 근원으로 삼은 죄악의 영주를 자처하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을 무기로 위협해 재물을 빼앗고 여인을 보면 겁탈했습니다. 이런 악독하고 한심한 자들을 죽이고, 그들에게 겁 먹은 사람을 구한 게 죄악입니까? 옛날 테세우스폴리페몬 같은 악당을 여럿 죽이고 영웅이라 불렸는데, 나는 왜 악인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도저히 그 자를 이해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고 가던 길에, 올림푸스 신들께 옛날 일 사과나 할 생각이 들어 여기 온 겁니다."


바다의 신은 시무룩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여인을 보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고는, 시종을 시켜 귓속말로 명령을 내렸다. 그 시종은 즉시 난파선의 보물을 모아 두는 보물고로 가 커다란 청동 흉상을 가져왔다.


"그게 무엇입니까?"


베르토눌라가 묻자 바다의 신이 말했다.


"콘스탄티누스라는 자의 흉상이네. 자네가 벌 받는 동안에 살다 간 인물이니 모를 수도 있겠군."


포세이돈은 흉상을 살짝 문지르고 다시 설명했다.


"로마 제국이 지금처럼 서방 영토를 게르마니아인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황제가 넷씩이나 즉위하던 시절이 두 번이나 있었지. 그 중 두 번째 시절에, 이 콘스탄티누스가 한 군대의 장수가 되어서는 피에 굶주려 적의 시체를 도시 한복판에 쌓아 기념비를 만들고, 거슬리는 자들은 자기 장인이라도 서슴없이 죽였다네. 하지만 어느 날 전쟁을 하다 적의 저항을 누르지 못해 곤경에 처했을 때, 하늘에서 표징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승리한 뒤, 옛일을 반성하고 개심해서는 제국 안의 모든 종교에 대해 자유로운 포교를 허용하며 민심을 얻고, 끝내 분열한 로마를 다시 합쳐 하나뿐인 황제가 되었어. 그자는 세상 모든 문명인 중 으뜸이 된 것에 자만하지 않고 백성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며 통합한 세계를 존속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공의회를 열어 천주를 숭배하는 예절을 통합하기도 했지. 이렇게 많은 공적을 세운 덕에, 그는 훗날 낙원에 다다르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직접 청할 자격까지 얻었네."


가만히 듣던 베르토눌라가 '하느님' 소리를 듣고 황급히 밀어나 소리쳤다.


"하느님? 천지의 창조주? 아니, 로마 제국 황제와 당신들마저도 날 가둔 자에게 무릎을 꿇었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올림푸스 신들도 누르지 못한 자네를 손 한 번 뻗어 얌전하게 만들었으니, 우리가 그 앞에 예를 갖추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할 말이 없어진 베르토눌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에 포세이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 콘스탄티누스가 우리 올림푸스 신들을 섬기는 이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 모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야, 겨우 통일한 세계의 황제에 이어 주 하느님을 닮은 자가 되었는데, 자네는 진실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단 한 사람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못하겠는가? 비록 이미 옳다고 생각되는 뜻을 품었다 해도, 그것은 그대 하나만이 보기에 옳고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릇된 것일 수 있으니, 결정을 하기 전에 다양한 주장을 수용하고 정리하며 그 결정의 인과와 유관한 모든 이들이 인정할 만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이룰 수 있던 일도 그르칠 수 있다네. 그러니 문둠비케라타스여, 다시 한 번 떠올려 보게. 그가 정말 그대 생각하기에 잘못된 말만 했던가?"


베르토눌라는 그 말을 듣자, 산트릴랑이 자신에게 '네 힘이면 겁줘서 쫓아내기만 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한참이나 끙끙대며 몸을 떨더니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다의 신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그 여자의 곁으로 가겠습니다! 술은 맛있게 먹고 갑니다. 나중에 나도 한턱 내겠습니다!"


"그래, 나도 배웅은 안 할 테니 어서 돌아가게!"


베르토눌라는 눈 깜짝할 새 바다를 뚫고 수면으로 올라오고는 산트릴랑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