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자마자 관뚜껑을 박차고 일어나 두꺼운 암막 커튼을 제껴 창 밖을 살폈다.


때이른 기상이었기에 창 밖에서 커튼 틈새로 새어들어오는 붉은 석양빛에 눈이 따끔거렸다.


나는 부리케나게 옷을 챙겨입고 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혹시나 밖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해봤다.


천만 다행히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혹여나 무슨 소리라도 날까봐 조심조심, 그렇지만 너무 느리지는 않도록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겨 성역 저택의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마치 코앞으로 다가온 여명의 시간을 거부하려는 듯이 암막 커튼으로 뒤덮힌 복도에는 한 점 빛도 들지 않았고, 그나마 켜져있던 조명도 해골 하인들의 손길이 닿은대로 하나씩 꺼져갔다.


나는 해골 하인들의 


어쩌다 내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집에서다른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움직여야 하나 해서 한숨이 나왔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여기서 누군가를 마주치는 것은 분명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특히 그 상대가――기척도 없이 무언가가 내 목덜미를 쿡 하고 찔렀다.



"히기야아아아아아아아악!?"


"주인니~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딜 가시나요?"




……――그러니까 그 상대가 내 권속만큼은 아니어야 했다.


그러기만을 바랬건만…….


잔뜩 굳은 채 쭈뼛쭈뼛 하며 천천히 등 뒤를 돌아보자, 당연하다는 듯이 내 앞에 다가와 서 있던 내 권속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 목덜미에 손가락을 갖다댄 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지 긴박한 상황까지는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천년을 살아오며 수 많은 위기를 겪어왔던 이 내가 잔뜩 긴장한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건만.


그런데도 어째서 이 햇병아리 권속은 그런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기척을 지우고 다가와 뒤를 잡을 수 있었던걸까.


아니 그보다도, 어째서 별다른 말도 없었건만 내가 외출하려는 것을 눈치챘단 말인가.


이 아이는 천지 만물의 이치에 통달한 귀신이거나, 내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는 엄마라도 된다는 말인가?


나는 권속의 반가움으로 가득한 두 눈을 마주하자마자 괜시리 찔려서, 그 아이의 건방진 행동을 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찔린 목덜미만을 무의미하게 매만지면서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아, 으응, 그게 말이다……."


"오늘도 외출하시는건가요? 그런건가요?"


"아니……그, 그게……. 오늘은……."


"저는 안데려가시나요?"


"아……아으아아……."



내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천진난만함을 가장하고 있던 그 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이런 흐름이 좋지 않다는걸 알면서도 나는 권속에게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서 우물쭈물했고, 그 아이의 표정에는 차마 보고있기 힘들정도로 슬픔의 감정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최근의 주인님께선 왠지 저를 피하고 계시지 않나요? 요즘 저희 통 대화를 나누지 못한거 같은데……."


"앗!? 응……앗!?"


"역시 그렇죠? 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거 아닌거죠?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한게 있을까요? 최근 제가 주인님 눈 밖에 날정도로 무례하게 굴었던걸까요?"


"아, 아니이……. 그건,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걱정된다면서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고 따라다니셨잖아요.


그래서 어딜 갈때도 데려가셨잖아요? 늘 함께였잖아요?"


"……."


"저기, 저기이~ 너무 그렇게 심술 부리지 마시고……. 뭐라도,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한게 있다면 따끔한 말이라도 한 마디 해 주세요……."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었다.


굳이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내 쪽에 있을 것이다.


내가 권속으로부터 숨긴 두 통의 편지, 그것들은 둘 다 이 아이의 동생으로부터 온 편지다.


그 편지들을 숨기고 나서 나는 매일 새벽, 제대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자는 동안에라도, 눈치가 빠른 그 아이는 편지의 존재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리고 곧,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혈육의 편지를, 고작 개인적인 감정으로 빼돌려 숨긴 무정한 주인인 나를 경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에 꿈속의 몽환의 안개를 헤메는 와중에도, 공허가 주는 부드러운 안식 속에서도 마음 편히 영혼을 뉘이기 힘들었다.


쓸쓸한 듯한 표정을 짓고있던 권속은 고개를 떨군 채 침묵했다.


말뿐이라도 대충 달래주기라도 할까 해서 다가가려는 순간, 그 아이가 슬픈 감정을 떨쳐내고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바람에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방금 전까지 우울해 하고 있던게 거짓말인 것처럼,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권속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저, 그러면 주인님. 오늘 외출에 동행시켜주실 수 없다면, 저 나름대로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올 수 있을까요?"


"어……. 그게 말이다……."



그 부탁 또한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 실수긴 하지만 몇번이고 의도치 않게 그러한 신호를 보내왔던 탓에, 그 아이는 명실상부한 나의 약점으로 밤의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저 아이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나 정도는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고.


나를 어떻게든 주무를 수만 있다면, 우리 가문을 어떤 식으로든 흔들 수 있을거라고.


그래서 아무리 내 잘못이 있다고 한들, 요즘처럼 유물 건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이 아이를 내버려두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단지 용기가 없어서, 이 아이가 내 비밀을 간파할까봐 피해다니고 있는 것이지, 이 아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오히려 사랑하기에, 소중하기에, 그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피해다니는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주인님께선 조금도 제 상대를 해주지 않으셨잖아요.


여러가지로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저 이대로면 집에 틀어박히기만 할 뿐이라구요?


전에 걱정하셨던 것처럼 제가 우울해질지도 모르는데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으그그극……."



노골적으로 스스로가 내게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는 듯한 뻔뻔스러운 태도.


그렇지만 분명 내가 그 아이를 소중하다는 이유만으로 겁박하고 있던것도 사실이기에 나는 아무 대답도 돌려줄 수가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는 능글맞은 체 하면서 괜찮은 척을 하고 있지만, 저 아이도 분명 자기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마음이 굳센 아이라고는 해도, 아까 얼핏 보였던 우울한 표정을 통해, 속으로는 얼마나 곪아가고 있었던건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가는 게 있다면 분명 오는 것이 있어야 했다.


정말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표면상으로는 내가 그 아이의 소유권을 쥐고있고, 그 아이의 자유를 겁박하고 있으니만큼, 나는 그 아이의 세상이고, 전부이다.


그런 내가 그 아이를 돌보지 않고 피해다녔으니, 그 만큼 그 아이에겐 자신만의 시간이 주어져야 했다.



"……셋째랑 같이 간다면 뭐……. 혼자는 안 돼. 만약 바쁘다고 하면 얌전히 포기하고 집에 있도록 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 아이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이것도 내 입장에선 많이 양보해준 것이다.


그렇지만 권속의 입장에선 분명 내가 주인이라는 입장을 통해 괴롭히고 있다고 느낄수도 있는 부분이지 않은가.


분명 이 아이는 내 하수인이며, 내 소유물이고, 우리 가문의 재산이고, 나에겐 이 아이를 마음껏 다룰 권리가 있지만, 


권리가 있다는것과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느끼냐는 별개의 일이다.


비겁하게도, 나는 이렇게나 그 아이에게 지독하게 굴어놓고도, 여전히 그 아이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 말을 듣고 난 권속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감사해요!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할께요!"


"또 뭘 하려고……."


"헤헤헤, 그건 비.밀."


"너 말이다……."


"아아~ 주인님께선 저 같은 미천한 권속의 사생활 같은건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시는군요~"


"으그그그극~!"



역시 이 아이는 내가 자기 기분을 의식하고 있단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조금의 주저도 없이 적극 이용해먹으려 들며, 그걸 내가 눈치채더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애초부터 내가 이 아이에게 바랬던건 친구처럼 편하고 자유롭게, 연인처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것이기에 내 의도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었으나,


이런 상황에 처할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이 아이, 다루기 쉬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니?"



"저희 이러다 할머니 되어버려요오오오?"



내가 나의 권속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차, 어느새 외출 채비를 마치고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언니 일행이 나를 불렀다.


내가 무심코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내 권속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쪽을 지긋이 응시했다.



"뭐, 뭐, 뭐, 뭐, 뭔데에…….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흐응~ 오늘은 큰주인님이랑 같이 데이트시군요~? 그런거에요~?"



일단, 대화가 더 불리해지기 전에 역으로 적반하장으로 이쪽에서 역정을 내보기로 했다.



"왜, 뭐! 진짜 뭔데! 내가, 이 집의 주인이자, 네 주인 내가,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사람이랑, 내 혈육이랑 같이 볼 일 좀 보겠다는데, 그게 가문에 중요한 일 일수도 있는데, 뭐!


감히 언니한테 질투라도 하려는거야? 네, 네, 네……까짓 게!"



뒤늦게 말을 조금 심하게 한게 아닌가 싶어서 아차싶었으나, 철판과 같은 미소를 짓고있는 내 권속의 표정을 보아 마음에 상처를 받기는 커녕 완전히 기싸움을 시작하려는 듯 했다.


아.


얘 같은 타입은 기싸움 시작하면 엄청 피곤해질텐데…….



"호호호, 설마요~ 감히 저 같은 미천한 권속 따위가 하늘같은 주인님의 뜻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주인님의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할, 혈육, 분 께 질투를 품을 리가 없잖아요?"


"아니, 아니,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호호호. 왜 그러시나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그보다 큰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외출 안하시나요?"


"으그그그그그그그그극……!"


"주인님의 언니라구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혈육이라구요? 계속 기다리시게 만들면 기분 상하실지도 몰라요?"



나름 현관까지는 안들리게 신경써서 조용하게 말했건만, 언니 쪽에도 들려버린 것 같다.


망할 흡혈귀 초능력 귀 같으니라고…….


천만 다행히도, 언니는 내 권속의 다소 불경한 태도가 그다지 신경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 아이도 말하잖니? 계속 기다리게 하면 이 언니, 할머니……되어버린다?"


"그래요오오오. 괜히 늦게 출발했다가아 주인님께서 봐두신 그 매끈한――"



우리가 무엇을 하러 가는지, 그 목적은 편지 건 만큼이나 중요한 안건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이 아이한테 들켜서는 안될, 필사적으로 숨길만한 건이긴 했다.


그래서 바로 현관으로 튀어나가서 언니의 권속의 입을 막아버렸다.



"어어아아…….(어머나아…….)"


"그럼, 갈까?"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언니는 방금 전까지 있던 일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내 손을 잡아 끌면서 집에서 나가고자 했다.


내 권속과는 조금 정리해야 할 말이 남아있긴 했지만, 반쯤 강제로 끌려가는 모양새기도 했고, 


괜히 계속 대화해봐야 불리한 쪽으로 몰릴거 같았기에 못이기는척 그대로 끌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내 권속도 뭔가 더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본인 용건은 이미 끝난데다,


집안 큰 어른인 언니 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뭐했는지, 입을 다물어버리고는 웃으면서(그렇지만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집을 나서는 우리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지켜봐주세요. 반드시, 반드시 저를 돌아보시게 만들테니까요."



나가는 길에 그 아이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를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던걸 보아 역시 화가 많이 난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솔직하지 못한 내가 미안해…….



.

.

.

.

.


"후우……."


"왜 그러니?"



진열되어있던 해골을 고르다가 문득, 그 아이의 두상을 닮은 해골을 발견하는 바람에 그만, 오후 일찍 집에 나올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분명 발단은 내가 먼저 잘못한 일이고, 그럼에도 그 아이는 내게 몇번이나 기회를 줬지만, 나는 끝끝내 스스로의 체면을 챙기느라, 또 내 치부를 숨기느라, 그 아이의 소중한 것을 뺏아가버렸다는 사실을, 그 아이에게도 소중할 혈육의 존재를 숨기느라 그 아이를 화나게 만들고 말았다.


거기다 솔직해지기엔 이제와선 많이 늦어버렸다.


혈육의 존재를 숨기려는것도 모자라, 본인에게 온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버리다니…….


그 아이와 나의 상하관계가 아무리 확고하다고 해도, 이런 무례는 무례를 넘어서 모독이고 패악질에 불과한 것이다.


거기다 그 아이의 동생이 두 눈을 뜨고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언제까지고 비밀이랍시고 숨길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아이는 총명하니 언젠간, 분명 언젠간 그 때가 언제가 되었든간에 반드시 들통날 것이다.


그럼 그 때가 되어서는, 나는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그 아이가 자신의 혈육과 만나고, 대체품에 불과할 나와의 관계를 청산하게――



"얘,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니? 모처럼 네가 그리도 좋아하는 이쁘고 깔끔한 뼈들이 잔뜩 모여 있잖니."


"아, 언니……."



언니가 견디기 힘든 죄악감에 나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죄의 늪에서 끝없는 심연으로 가라앉아가던 내 주의를 돌려 끌어올렸다.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전의 해묵은 감정은 진작 해소하기도 했고, 언니가 나에 대해 더 잘 알게되면 다른 오해도 금방 풀리지 않을까 싶어서 내 문제를 솔직하게 상담해보기로 했다.



"……제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걸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모처럼 자매끼리 놀러나왔잖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즐겨도 되지 않을까?"


"그게 그럴수도 없는게……. 제가 요즘 사정이 있어서 제 권속을 피해다녔거든요.


그래서 그 얘가 제 행동을 차가워졌다고 느끼고, 상처입었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 말을 주의깊게 듣고있던 언니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다가, 내 양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면서 미소지었다.



"넌 이 집안의 주인이잖니. 


권속같은 것의 마음따위는 신경쓸 필요 없다고까지는 안하겠지만, 그렇다고 집안의 주인인 네가 네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인 권속에게 휘둘리면 어떡하니?"


"그치만 저는……."


"그리고 나는 그 아이를 너만큼 오래 보지 않았지만, 그 얘라면 그렇게 제멋대로인 주인님 쪽을 더 좋아할껄?"


"핫!? 그, 그런가……?"


"듣고보니 저도 그 얘라면 그럴거 같다고 생각하네요오오오. 호호호호호."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있던 언니의 권속이 대뜸 대화에 끼어들면서 거들었다.


그러고보니 원래 권속이라면 허락도 없이 주인님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어선 안되지만, 


이 녀석, 자기 스스로 권속을 자처하는 주제에 자기가 권속 급은 아니라는 점을 적극 이용해서 은근히 끼어들곤 한다.


그래도 이 화제는 저 녀석이랑은 잘 안맞는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말 없이 언니의 권속을 흘겨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언니의 권속은,



"어머머, 실례했답니다아아."



라면서 능구렁이 담 넘듯이 한 걸음 물러났다.


건방진 것이.


언니는 자신의 권속을 비호하려는 듯이, 내 몸을 끌어당겨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네가 그 애한테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그리도 신경쓰인다면 나중에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하면 되잖니?"


"역시 언니는 모범적이시네요. 마치 학교 선생님 같아요."


"어, 어머머…… 뭘 그런 말씀을 다~♡"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어요."



그 내 권속의 동생으로부터 온 편지는, 분명 고작 두 장짜리, 저울계로도 무게가 재지지 않을 종이 쪼가리일 뿐이었지만, 적어도 내 마음에 있는 그것들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존재와 함께 천만근짜리 무게가 되어서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고, 내가 사랑하는 그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마저 짓눌러 없애버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나는 여유가 없었다.



"제가 그 아이한테 저지른 죄는……, 이 입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언니 앞에서도, 죽어도 말 할수 없을 정도에요. 그 정도로 깊은 죄에요."


"어머, 평상시에 보기보다 잘 못해줬나 보구나?"


"으그극!?"



별안간 언니가 정곡을 깊숙하게 찌르는 바람에, 그대로 다리에 힘이 빠져서 휘청거리고 말았다.


내 표정이 어두워진것을 눈치챈 언니가, 어버버 하면서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어쩔 모르다가 황급하게 내 몸을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얘, 너무 우울해하지 말렴. 네가 그 애를 평소 얼마나 아끼는지는 잘 알겠어.


그렇지만 네가 평소 해준것이 있는데, 정말 그 얘가 네가 미안해 하는 것처럼 네 잘못이 크다고 생각할까?"


"그런 편의적인 생각으로 제 죄를 가볍게 만들어도 되는걸까요?"


"편의적인 생각인지는 직접 물어보기 전엔 모르는거지."



언니의 그 말에, 그 한 마디가 만들 파문이 얼마나 클지 생각해보자 다급해진 나는, 언니의 몸을 밀어내려고 버둥거리면서 외쳤다.



"어, 언니! 그 애 한테――"


"아, 알았어. 알았어. 참 내. 무슨 말을 못하겠네. 


난 걔한텐 아무 말도 안할거야. 이 언니가 그렇게 입 싼 여자로 보이니?"


"……죄송해요."


"그렇다고 죄송할 것 까지야.


후후, 아무튼 이렇게 지금처럼 그 애랑 마주하는걸 피해다니면서, 지금처럼 즐거워야할 시간 마저 우울해 하면 삶이 얼마나 비참하니?


그러니까, 내가 당장 하라고는 안하지만, 사실대로 전부 이실직고 하라고는 안했지만, 그래도 네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는 해명을 하고 사과를 하면 되지 않겠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인가요."


"그래. 세상 어느 사람이 비밀도 하나 없이 깨끗하게 살아갈 수 있겠니? 


우리같이 천년 넘게 살아온 흡…의 귀족이라면 그 긴 시간동안 거짓말 단 한 번도 치지 않고 살아갈 순 없잖니.


그 얘도 납득해주지 않겠니?


혹시 모르지? 그 얘 또한 네 앞에는 말하지 않은, 숨기고 있는 죄나 비밀이 있을지……."


"그럴리……!"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요오오오."



다시 한 번, 언니의 권속 녀석이 운을 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무슨 소리를 하나 하면서 놈을 노려보았다.



"모처럼 둘째 주인님의 언니 되시는 분이 발품까지 팔아가시면서 여기저기서 질 좋은 뼈들을 모아왔는데에, 


즐기기는 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으신다며어언, 둘째 주인님이 당신의 제일 아끼시는――"



그 순간, 언니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언니의 권속은 그 눈초리를 받고는 움찔 하고 떨더니, 험험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실례했네요오오. 


그러니까아 둘째 주인님이, 자신의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혈육 만큼이나 아끼시는 그 아이를 아끼시듯이이,


그 만큼이나 둘째 주인님을 사랑하고 아끼시는 제 주인님께서 얼마나 상심하실지이이, 


그 정도는 가늠해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을 하려 했답니다아아아?"



그러고는 얼머부리려는 듯, 덩치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손가락으로 귀여운 척을 하더니 다시 아까처럼 뒤로 물러났다.


언니의 품 속에서 얼굴을 올려다보자, 잠시 토라진 듯이 자신의 권속을 바라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난처하다는 듯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전 그런 줄도 몰랐어요."


"얘, 얘가 참. 쓸데 없는 말을 하기는……!"



언니는 자신의 권속에게 주먹을 들어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볼을 부풀렸다.


녀석은 언니의 손길을 슬쩍 피하는 것 같은 시늉을 하면서 언니의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며 호호호 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튼, 그래. 네가 정 마음에 걸리면 같이 사과하러 가자.


설마 아무리 네 잘못이 그리 크더라도, 이 언니가, 집안의 주인 둘이 한낱 권속 앞에 고개 숙이러 가준다는데, 그렇게까지 눈치 없이 굴 애는 아니지 않겠니?


돌아가서 그렇게 하기로 하면, 지금, 크흠, 그래, 이 언니가 준비해준, 모처럼 열린 양품의 해골이 가득한 시장을 즐겨줄 수 있을까?"


"……제가 정말로 그래도 될까요?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잠깐이지만 나는 보았다.


언니의 눈가가 짜증으로 삐질 하고 튀는 것을.


아마 '아휴, 이 애는 정말 여러모로 성가신 애구나.'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건지는 몰라도 언니가 자신의 권속에서 묘한 눈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곳으로 눈을 돌리자, 언니의 권속이 과장된 몸짓으로 능청스럽게 전시된 상품 중 '예약'이라는 표시가 되어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어머머머, 대체 이것이 뭘까요오오오? 차암 예쁘고 깨끗하게 손질된 두골인데에에……. 차아아암 묘하게도 생겼네요오오오? 봐요오, 그쵸오오오오?"


"……!"



오늘의 집을 나오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데이트를 즐길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언니의 권속이 꺼내든 두개골은 그 모든 미련처럼 남은 마지막 고민을 날아가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 이것은……! 이 뾰족한 두상, 틀림없이 유목민 도래기에 유목민 전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바로 그 형태가 아니더냐!


이 시기의 이런 두골은 이제 전부 단종되어서 수집가들 사이에서만 구해야 하는걸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 귀한 물건이 시장에!?"



내 전혀 호들갑이 아닌, 그 두개골의 격에 걸맞은 반응에, 언니는 못참겠다는 듯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후훗, 어때? 내 수완이?"


"대, 대단해요! 이런 거 모으는 수집가들은 어지간해선 자기 물건을 내놓는 법이 없는데…….


거기다 이 외적인 마모가 없는 형태를 보니, 이건 틀림없이 하인으로 쓰지 않고 순수 소장만 했던 세트에요!"


"그, 그러니? 그게 그렇게 굉장한거였구나……?"



언니는 내 묘한 열기를 이해해주는게 틀림 없음에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는지 땀을 삐질거리면서 나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은 이 자리를 준비한 언니보다도, 지금 이 시장에 어떤 다른 귀한 해골이 올라왔을까 싶어서 잔뜩 기대가 몰려왔다.



"둘째 주인니임, 혹시이 이건 알아보시겠나요오오오?"


"그, 그것은……!?"



아까처럼 상태가 좋은 해골, 그렇지만 이번엔 두개만 남은 것이 아니라 전체 몸 세트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생전의 몸이 있던 때처럼, 전시를 위한 간단한 가공을 거친 상태로 거치대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 뿐이라면 그저 전체 몸이 거의 온전한 상태가 좋은 세트일 뿐이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봐서는 그저 비틀림이 있어서 가치가 떨어지는 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비틀리고, 뒤틀린 팔과 어깨의 모양새를 봤을땐……!



"잠깐. 아무것도 말 하지 말거라. 이 아름답게 변형된 형태, 필시 무거운 활을 당겨야 했던 궁병의 몸일테렷다?"


"후후후, 정다압, 이에요오오오. 


어디어디……. 


자, 여기 설명서에 따르면 이 궁병의 유해는 ○○○전쟁이 있던 그 곳의 늪을 파엎다 발견된 물건이라고 하네요오오?"


"뭐랏!? ○○○전쟁의 유해라고오!? 그건 거의 국가 주도의 역사 연구용으로나 나가서, 시장에선 거의 볼 수 없는 종류지 않더냐!"


"그 뿐만이 아니라구요오오오? 여기 이 미라느으은――"


"알았다! 이건 □□의 청동기 시절 유해다. 그렇지?"


"……잘 아시네요오오? 거기다 감정자는 '청동기 추정'이라고 적어놓았는데, 확답을 하시는걸 보니이 뭔가 짚이는 데가 있으신 거겠죠오오오?"


"흠핫핫핫. 뭘 숨기랴? 내가 바로 그 시절에 태어났으니, 옆 나라 복식 정도는 알아보지 않겠느냐?"


"……그건 생각도 못했군요오오오. 강적이네요오오오오."


"후후, 그 뿐만이 아니다. 거기 네 뒤에, 아니 거기 말고 그 옆에, 왼쪽에 있는 뼈 말이다.


그래, 거기 풍화가 많이 되어서 상태가 별로인 거.


그 놈은 같은 매장지에서 나온거겠지?"


"그런 것도 맞추실 수 있는건가요오오오!?"


"저 놈이 두르고 있는 너덜너덜한 장신구 말이다. 아버님의 손님들중에 그런 장신구를 한 상인들이 자주 있었지.


어깨가 내려가 있는 걸 보니, 필시 이 놈은 상단의 신임받는 호위거나, 아니면 계승권에서 밀려나서 무술이라도 팔아야 했던 상인 집안의 늦둥이 자식이었겠지."


"대략 장신구나 그런 걸로오 그저 부유한 집안의 유해일 뿐이라고만 생각했어요오오.


여기 보시면 발 뼈가 작게 변형되어 있죠오오? 그래서어 저는 그저 귀한 집 영애라고마안……."


"!? 발 뼈는 생각도 못했구나. 만약 그렇다면 이 유해는 무술을 배운게 아니라――"


"어쩌며언 몸의 균형을 보건대에 무술'도' 배웠을지도오――"


"그렇다면 이건――"


"그 말씀이 맞으시다며언 아마도――"


"저기 얘들아……?"



한참 언니의 권속과 시장의 유골을 두고 하던 토론이 열기를 띄려던 차, 어쩐지 기가 잔뜩 죽어서 주늑들어있던 언니가 힘겹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 나도 끼워주지 않을래……? 내가……준비했잖니……. 자, 이거 말인데――"



그러면서 근처에 있던 두개골 하나를 조금도 조심성 없는 태도로 붙잡아 들어올리려 했기에, 나와 언니의 권속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를뻔 했다.


언니는 우리의 반응에 깜짝 놀라서 손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다가, 전시물이 상대적으로 적은 구석으로 가서 양 어깨를 움츠리고는 몸을 떨었다.


혹시라도 우리의 따돌리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난 언니가 난동이라도 부린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에 미쳤으나, 언니는 그 이상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미, 미안……. 다 끝나면 불러주련……? 혹시나 나를 잊어버리지는……말고……."



이라며 잔뜩 주늑든 채 구석에 몸을 기대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

.

.

.

.



내가 장 보기를 마친 것은 그날 하루를 홀짝 넘기고 다음 날의 해가 산 언저리로 넘어갈 때 였다.


그 정도로 이 암시장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도 자극적인 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도 이번에는 지나치게 즐겼다는 자각은 있었다.


평상시에 섬뜩한 본성때문에 거리를 두고있다곤 하지만, 언니의 권속과는 해골 고르는 취향이 비슷했기에, 


또 그 녀석의 해골 보는 법은 내가 가르쳤기에 적어도 이 건에 한해서 만큼은 이야기가 잘 통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 탓에 언니는 조금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우리가 그만큼 즐거워 해줬으니 그것만으로 자리를 마련한 보람이 있었다면서 별달리 문제삼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좋아하던 것들인지라 한동안 내 권속과의 시간을 중시하느라 억눌려 있던게 이번 일로 전부 줄줄 새어버리고 만 듯 했다.


그리고, 언니 일행은 볼 일이 있다 해서 보내고 나 혼자 성역으로 돌아왔다.


현관 앞에 서고 나서야 언니가 같이 권속에게 사과를 해주겠다던 약속이 떠올랐지만, 


이미 볼 일이 있어서 떠난 사람을 다시 불러오는 것도 그랬고,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권속과 마주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다지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다만 놀러가나서 하루 동안이나 성역을 비워뒀으니, 그것만으로도 생활에서만큼은 똑부러지게 모범적인 그 아이가 잔소리를 해댈거라는 생각에 진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 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만큼이나 양심의 가책,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채 신나게 즐겨댔으니 지금은 분명 책임을 질 때였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막상 집에 돌아와보니, 내 권속은 나를 기다리고 있기는 커녕, 아무리 기다려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응접실에서 초췌한 표정의 동생이 슬쩍 몸을 내밀어서 현관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늘 새침한 표정을 고수하던 동생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눈물 범벅이 되어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달려와서 내 몸을 붙들고 무너져내렸다.



"왜, 왜 그러느냐?"



"미안, 미안해……. 전부 내 탓이야. 정말……미안해."


"갑자기 미안하다고 해도 말이다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데려가 버렸어……."


"……누구를?"



'데려가 버렸다'니.


동생의 입에서 나왔던 말 중에 그 말 만큼이나 불길한 음색을 띈 한 마디는 이제껏 없었을 것이다.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계속 우물거리면서 울먹이는 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뇌리를 관통하는 불길한 예감에 머리가 점점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럴 리 만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해 같은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그 가능성을 전제하고 대화를 이어나가 보았다.



"잠, 잠깐, 잠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도대체 누가, 누가 그……그 아이를 데려갔다는 말이더냐?


무슨 연유로? 어떻게?"


"그게……그러니까, 그러니까아……약속 장소에……으흑……놈들이…….


전부 우우욱……. 내 잘못……이야."



동생은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횡설수설 하고 있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내 권속이 동생과의 외출 중에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리고 나는 이 결과로 이어질만한 징조를 어째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권속은 어째서 하필 그 날 외출을 하겠다고 했을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달리고 있었다.


목적지는 집무실, 나는 마호가니 문이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문을 박차고 내달아 내 책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내 책상에 달린 자물쇠가 달려있는 비밀 서류함을 열었다.


초조함으로 떨리는 손 때문에 열쇠가 몇번이고 빗나가서, 그럴때마다 더욱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가까스로 서랍을 열어젖히자 비밀 서류들은 무엇 하나 건드려진적 없다는 듯이, 마치 내가 마지막으로 열었을 때 그대로, 그때 있었던 그 순서대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근거 없는 불안임에도, 그것들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라면 이렇게 놓아둘 것이다' 하고 정리해둔 느낌이 들어서 되려 불안감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은 이 서류, 고작 이 따위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비밀 서류들을 책상 위에 꺼내놓고, 혹여나 날아가지 않도록 문진으로 눌러두었다.


그리고 비밀 서랍의 비어있는 바닥을 공연히 노려보다가, 


각오를 다지고 천천히 서랍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매끄럽게 가공된 서랍 바닥의 원목 모서리를 더듬어서, 손가락으로 만져보지 않으면 모를 미세한 홈에 손톱을 걸었다.


그리고 들어올려서 그것을 꺼냈다.


미칠듯이 쿵쾅이기 시작한 심장의 온기없는 고동을 느끼며, 내 마음의 마지막 비밀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비밀 서랍 아래에 숨겨져있던 비밀 공간을 살폈다.


두 통의 귀여운 무늬로 장식된 편지봉투는 마지막에 숨겼을 때 처럼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 모습을 보고도 조금의 안도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애써 불안감을 종식시키기 위해, 내 예감이 부디 틀렸기를 바라면서 떨리는 손으로 편지 중 하나를 집어올렸다.


내가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던 귀여운 편지 봉투는 봉인이 뜯어져 있어서, 내가 집어올리자 그 내용물이 그대로 바닥에 흘러 떨어졌다.






그 아이, 그러니까 내 권속, 내가 세상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이 편지를, 내가 그 아이를 아끼는 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아꼈을지도 모르는 그 아이 자신의 혈육이 보낸 편지를, 


내가 기를 쓰고 존재 자체를 그 아이로부터 숨기려 했던 그 편지를, 기어코 찾아서 열어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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