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월 t일
«성스러운 지구를 위하여! 슈퍼 민주주의를 우주 끝까지!»
성스러운 지구의 주민으로서 우주 특임대원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더욱 더 평등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 평등의 축복을 받아 1개월 만에 나는 잠입 임무에 투입되는 인정까지 받았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임무만이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행성의 원주민들은 고작해야 우리의 중세~근세 문명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간
우리 동지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에 비해선 그저 차갑게 식은 르카프를 한입에 들이마시는 것마냥 쉬운 임무인 것이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라는 금언은 언제나 유효하다.
내가 수집한 정보가 혹시나 있을 더욱 평등한 동지의 손실을 막아 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일기를 남기는 건 기밀 유출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금지되는 사항이다.
그러나, 이런 미개한 원주민들에게는 복잡한 언어체계를 이해할 지능조차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만에 하나 해독해내더라도, 이미 슈퍼 민주주의가 그들에게도 전파된 뒤겠지.
f월 q일
«성스러운 지구를 위하여! 슈퍼 민주주의를 우주 끝까지!»
드디어 이 행성의 원주민들과 조우했다.
그들은 우리와 비슷하면서 다르다.
우리의 역사속 신화에 나올법한 천사나 악마를 닮은 개체가 있는가 한편, 긴 귀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개체도 존재하다.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우리 특임대원의 평균 신장인 6피트보다 1~2피트 정도 더 신장이 크다는 것.
그리고 외견상으로 인간들에게는 아름답게 보일 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 정도.
그러나 그들의 풍습은 인사부터가 미개하다,
서로가 서로의 살을 맞대는 방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방식으로 이뤄졌기에,
그러나, 우리 우주 특임대는 민주주의의 전파자이자, 외교관 역할도 맡기 마련이므로, 우호적인 자세가 중요하다.
바이러스나 화학물질의 오염의 위험이 있음에도, 나는 그들과 맨 몸으로 접촉해야만 했다.
다행히, 그들은 이 반응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불쾌하게도, 그들은 나의 머리부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비위생적인 접촉이 머리카락과 얼굴부분에 집중되었다.
치솟는 욕지기와 메스꺼움을 겨우겨우 참은채, 나는 그 손길을 견뎌내었다.
겨우겨우 그들에게서 벗어난 뒤에, 우리 조국인 성스러운 지구에서는, 이를 악수와 포옹으로 불렀다는 것을 데이터베이스에 접촉한 뒤로 알게 되었다.
역겹기 짝이 없게도, 우리에게선 사라진 지 200년이나 된 그야말로 구닥다리의 말초적인 짐승적 교류일 뿐이다.
하루 빨리 이들을 계몽시키고 싶을 뿐이다.
그들의 신체에 접촉한 탓인지, 이 기록을 남기는 현재까지도 만져진 부위가 화끈거리고, 가슴박동의 이상 현상이나, 생식 반응의 활성화와 같은 순환계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의 신체에 함부로 접촉한 대가다. 외계 생명체의 분비물에 대한 알러지성 반응 혹은 면역 반응이겠지.
이들을 정복한 뒤에는, 이 현상을 일으키는 물질에 대해서도 조사를 요청해야겠다.
u월 t일
«성스러운 지구를 위하여! 슈퍼 민주주의를 우주 끝까지!»
어제 말했듯이, 이들은 외적인 면으로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부분은 추후 수정하겠다.
아무튼 우리 종족의 호의를 사기 좋은 외관을 지니고 있다.
내가 발견한 바로는 원주민들은 모두 우리 종족의 여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나와 같은, 수컷의 모습을 한 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앞으로 원주민들 지칭할 때는 그녀들이란 표현을 쓸 생각이다.
아무튼 그녀들에게서 극찬할 만한 한 가지 점을 찾는다면, 그녀들에게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의 외견은, 마치 전리품인양 우리 인간이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선물과 같다.
나는 성스러운 지구의 그 어떤 여인도 그녀들의 아름다움에 미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다행히도 그녀들은 나약하고, 순진하다.
그렇기에 우주의 무서움을 우리로부터 학습하고 계몽할 필요가 있다.
그녀들의 기술은 나약하고, 문명은 보잘 것 없으나 그 외견덕분에 그녀들은 우리에게 나름의 쓸 데가 있다.
성스러운 지구는 남성 개체의 편중이 많다고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슈퍼 민주주의의 통제 하에서도 불미스러운 범죄는 종종 일어나곤 한다고 들었다.
이들이 만일 넘쳐나는 욕구의 발산을 도울 수만 있다면
성스러운 지구의 사회는 더더욱 안정화될 것이고, 민주주의 전파의 속도는 빨라지겠지.
이미 성스러운 지구 측에는 교신을 해놓았다.
며칠 이내로 그들은 강대한 함대를 이끌고 이 행성에 민주주의를 전파할 것이다.
어리석고 야만스러운 이들이여.
그대들에게 우리의 대의에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겠다.
원래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 이 우주의 법칙.
그러나 우리는 그대들을 학살하지 않고, 함께 하겠다.
우리의 가축으로서 말이지.
아무튼 이번 일이 인류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판단되므로, 인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해야 하는 나로서도 조그만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 행성에서 처음 조우한 그녀, 그녀를 꼭 내 전리품으로 차지할 것이다.
그녀의 미개한 몸과 정신에 인류의 우월함과 위대함을 각인시키고 말 것이다.
o월 r일.
맙소사,
교신이 제발 잘 전달되었길 바란다.
절대로 여기 와서는 안 된다고.
이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야.
젠장, 왜 이런 생명체들이 여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거지?
지구의, 아니 은하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비참하게 지고 말거야.
제발 오지 마. 오면 안돼.
o월 ㅂ일
결국 성스러운 지구의 원정 함대가 왔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그것을 예상한 내 지성이 저주스러울 뿐이다.
우리의 강대한 함대라 할지라도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
성냥불로 강철을 녹이려는 시도보다도 못한,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마지막의 순간에 우리의 용감한 대원이 행성 정화 폭탄을 떨어뜨린 모양이지만.
대행성 무기도 그저, 이들에겐 장난이었을 뿐.
그런 것에 말려 죽는 것은 이들만큼 강인하지 못한 나정도의 생물이다.
그나마도 이들의 가호로 나는 이 저주받을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내가 죽는 것을, 아니 아파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은 내게 호의적이다.
그리고 그 호의는 인류 전체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사로잡은 인간의 수를 헤아리면서, 희희낙락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녀들의 손바닥 안의 일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나?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을 굳이 확인시켜주는 듯이, 연회 - 우리식으로 생각하자면 승전 연회겠지만, 글쎄. 과연 그녀들이 이걸 승전으로 여기기는 할 까? -에 참가한 나에게 한마디씩 속삭이고 가는 것이다.
“고마워♡”
“인간뀽들의 고향을 이제서야 알아 버렸네”
“덕분에, 더 빠르게 인간씨들을 축복해 줄 수 있겠습니다.”
“인간들에게 사랑을 알려주러 갈 거야.”
모든 것을 가진 그녀들에게 없던 것은, 오직 인간과 인간의 고향의 위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에.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t월 e일
«성스러운 지구를 위하여! 슈퍼 민주주의를 우주 끝까지!»
이제는 울려퍼질 일 없는, 의미없는 문장을 기록지에나마 적어본다.
인류는 패배했다.
성스러운 지구가 함락당하고, 강대한 알파 센타우리 섹터가 그들의 발에 짓밟혔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우리는, 적어도 이유없이 민주주의를 전파하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통제 민주주의의 전파 이면에는 언제나 자원, 기술, 가축확보 등의 부차적인 이유들이 붙어왔다.
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이들의 목적과 이유는 오직 인간. 살아있는 인간의 확보.
인간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우주 끝까지 그 흔적을 찾아 날아갈 이들이다.
함대에 타고 있던 특임대원, 군인, 승조원들은 몇 명을 남기고 모조리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예상컨대, 더 정보를 얻어낼 가치가 없다면서 그녀들에게 ‘분배’된 것이다.
내 말의 속뜻을 잘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 이제 우리 인류는 그녀들의 전리품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더 이상 뽑아낼 정보도, 역할도 없는 나도 분배할 계획인 모양이다.
어제, 내가 처음 만난 미개한 원주민이라 생각했던, 악마의 형상을 한 그녀가 날 찾아왔다.
“그동안 수고해줬어.”
“당신의 처분에 대해서 말인데. 당신을 탐내는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당신처럼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인간도 드물거든?”
“그렇지만, 내가 당신을 요구했어.”
“당신의 허접한 육체와 정신에, 우리의 사랑을 가득 새겨주고 싶으니깐♡.”
“그러니까, 우리 함께 행복해지자...?”
이 일기는 이것으로 마친다.
동지들의 최후를 보건데 그녀에게 보내진 후에, 나 역시 이 일기를 마저 이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들에게 사랑받으며 사는 노예, 아니 어쩌면 그것 이하의, 애완동물과 같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삶 속에서, 일기란 무의미한 것일테니.
아아, 어쩌면 이 일기를 남기는 것은 이제 와서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의 언어는 곧 의미없는 옹알이가 될테고, 우리를 정복한 이들은 우리를 죽음에게도 넘기지 않고 영원히, 영원히 감금할테니.
그러나, 혹시나 기적처럼 이들이 사라진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누군가 우리와 같은 오만을 품고 있는 이가 있다면.
경고하겠다.
번성하던 우리가 무너진 것은 한순간의 오만 때문이었고, 온 우주로 뻗어나갈 것이라 자부하던 우리의 문명은 강대한 힘 앞에서는 흩어질 하나의 신기루였을 뿐이니.
우주는 넓고, 그 안에 숨겨진 암흑은 우리의 하찮은 시선으로는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것이다.
건방지고 폭력적인 허접 인류는 음마 스레의 상위종들한테 참교육 당했다네요
몬무스 채널 종합정보 [2023.10.20.]
